797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장안성을 점령하고 돈황을 비롯한 전 서역을 점령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불국토 건설에 힘을 쏟았던 영걸이며 전륜성왕인 치송데쩬이 이승에서의 위업을 모두 이루고 세상을 떠나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그를 선조들의 고향 총게의 길지 ‘추레주나’에 모시고, 석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이 석비에 대해서는 총게 편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대 토번의 39대 왕좌는 세 왕자 중 첫째인 무니쩬뽀[牟尼贊布]로 넘어갔다. 대개의 경우 토번의 왕위는 부왕이 사망한 후 넘어갔던 것에 반해서, 이번의 왕좌 승계는 좀 색다른 것이었다. 부왕인 치송이 죽기도 전에 양위를 한 것이다. 할 일을 다 끝낸 말년의 치송이 불교 수행에 전념하고자 했던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돌발 사고가 있었기에 양위를 해 버린 것이다. 사고란, 치송의 다음 대를 이을 태자로 점찍고 있었던 둘째 왕자 모루가 실수하여 재상이자 막강한 척신인 나남의 아들을 죽였기에, 할 수 없이 척신 나남 가문을 달래려 첫째 아들에게 양위를 하고 모루 왕자를 귀양보내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 불운의 모루 왕자는 귀양에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암살당하게 되지만….
그런데 새로 보위에 오른 신왕은 부왕의 영향을 받아 불교적 이상세계를 조급히 구현하려 했다. 즉위하자마자 일부 외척신과 귀족들의 지나친 부의 편중을 바로잡는 일련의 정책과, 불교 교단을 위해 의무적 보시(布施) 제도를 시행하는 등 개혁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 통제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일찍 서두른 탓에, 부왕이 서거한 지 1년 7개월 만에 뵌뽀교의 사제들과 재산의 헌납을 두려워한 귀족들의 사주로 친생 모후의 측근에게 독살되고 만다. 이렇듯 후계자 없이 임금이 사망하자 중신들은 쌈애사에서 수행중인 치송의 세째 아들 무디[牟底] 왕자를 추대하여 쩬뽀의 자리에 올리고 치데송쩬[赤德松贊]으로 존호를 지어 바쳤다. 그리고 그를 추대한 쌈애사의 주지를 ‘보쩬뽀[鉢闡布]’17)란 호칭을 붙여, 재상 위의 원로대신으로 추대하여 정사에 관여하게 만들었다. 불교 승려가 정치에 정식으로 참여하여 행정수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피를 부르는 칼이 최고의 가치척도였던 중세기에는 무릇 정치란 칼을 휘두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진 것이었는데, ‘불살생의 계율’을 지켜야만 하는 현직 승려가 정치의 일번지에 앉은 것이다. 과연 그런 이상적인 세상이 실현 가능했을까?
쌈애 사원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티베트 불교 사상 최초의 대사원이고, 최초의 비구와 비구니 총림(叢林)이고, 최초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 사원을 건립한 임금이 치송이라는 것은 되풀이된 이야기지만 그 현장에 왔으니 못 다한 뒤풀이는 마저 해야 할 것 같다.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이 쩬뽀의 모습에 대해서….
치송은 754년에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20살에야 실권을 잡고 친정을 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당의 수도 장안까지 함락시키고 당에게서 조공을 받고 나아가 전 서역을 평정하여 나라를 당당한 제국으로 성장시켰지만 그의 가슴은 허전했다. 어찌보면 왕조의 역사는 천손의 강림이라는 찬란한 새벽과는 다르게 모반의 피로 얼룩진 배반의 역사 투성이였다. 왕족끼리 왕좌를 서로 빼앗고 뺏기는 찬탈행위는 그들 신화의 내용처럼 ‘신성한 천손(天孫)의 핏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치송은 어려서부터 그런 왕실의 비사(秘史)를 책으로부터 배워 왔고, 부친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직접 지켜본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킬 참된 덕목을 찾아내 왕족과 신하, 그리고 국민들을 순화시켜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정화시키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는 인도에서 전래된 신흥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갖다가 마침내 나라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데도, 또 자신의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도 불교가 좋다는 결론을 내린다. 더구나 만년에는 사랑하는 어린 페마사이 공주의 죽음을 겪으면서 더욱 깊이 불교적 이상세계에 심취하게 된다.
당시 불교는 33대 송짼 할아버지 대에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다고는 하지만, 토착 종교인 뵌뽀교와의 갈등으로 그 세력이 미미해서 일부에서만 비공식적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던 때였다. 그럴 때 그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기로 함으로써 거국적인 불교 진흥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뵌뽀의 반대 의견을 무마하거나 뵌뽀 자체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제로 뵌뽀의 기록에 따르면, 치송은 당시 저명한 뵌뽀학자인 제르위장춥제 등을 죽여서 뵌뽀의 뿌리를 잘랐다고 할 정도로 불교 포교에 열중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토착 종교인 뵌뽀가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는지, 본거지인 샹슝 지방에 전해오는 기록들에서는 치송을 원망하는 ‘저주술(詛呪術)’이 담겨 있는 기도문도 발견된다.
치송데쩬 임금은 어리석은 자라네.
그의 신하들은 괴물 같은 건달들이라네.
우리들의 불빛은 시들어 가고 이제는 불교 승려들의 세상이라네.
왕자는 황금으로 신념을 삼고 우리 뵌뽀의 제자들을 에워싸네.
왕이 거지가 되게 하시고 신하는 양치기가 되게 하소서!
이 설역고원이 조각나게 하시고 승려들이 그 법을 잃게 하소서!
여승들이 아이를 기르게 하시고 승려들이 싸우는 깡패가 되게 하소서!
그들의 대사원이 전쟁터가 되게 하시고 암자가 불이 나게 하소서!
아! 내 송장이 효과적이 되게 하시고
내 기록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게 발견되게 하소서!
그러나 “똥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달리지 못할소냐?”식으로, 하여간 치송젠뽀는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그 구심점이 될 사원을 세울 원력을 세워서 자리를 물색하던 중에, 인도의 두 스승 산타라크시타와 빠드마삼바바의 추천으로 지금의 이 자리를 택하게 된다. 원래 타크마르의 헤포리 언덕은 그의 부왕인 치데쥭쩬의 겨울 왕궁5)이 있던 자리여서, 그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에다 사원을 짓게 된 것이다.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설계도는 고대 인도의 파라 왕조 시대, 마갈타국의 오단타푸리(Odantapuri) 사원을 모델로 그려졌다. 서역의 호탄 출신의 대목장(大木匠)을 비롯한 전 중앙아시아의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12년간의 공사 끝에 779년, 마침내 이 웅장한 3층짜리 대사원이 준공되고 그 기념으로 불상의 개안법회(開眼)가 개최되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위시하여 우측으로는 관음․미륵․지장․길상․존승분노존 등이, 좌측으로는 보현․금강․문수․보장․무구․부동분노존 등이 안치된 앞에서, 인도의 두 스승과 5명의 왕비와 3명의 왕자 그리고 정무 9대신․각급관원․귀족장자․지방장관․수령 등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경내에서는 불교무용인 ‘참’ 공연도 이어서 뒤풀이 3마당의 연극도 공연되었다.
이 자리에서 치송 왕은 ‘숭불조칙(崇佛詔勅)’을 내려 조정대신들에게 서명하게 하였고, 그것을 비석으로 만들어 조칙과 함께 영구히 보존토록 하였다. 1천 2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흥불맹서비(興佛盟誓碑)’는 법당 옆에 서서 그날의 광경을 말해 주고 있다.
라싸와 타크마르의 사원에 3보(三寶)의 법기(法器)를 구비하여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영원토록 그치지 않기를,
또한 용구의 보급도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노라.
앞으로 대대손손 모든 왕들은 이와 같이 서약하여야 하며
그리고 이 서약이 지켜지도록
출세간과 세간의 모든 신들께서 굽어살펴 주시기를….4)
이어서 벌어진 수계식(受戒式)에는 12명의 인도 고승이 초대되어 금강계단에서 ‘비구계(比丘戒)’를 설하고, 쌍시[桑西]와 바셀낭[巴賽囊] 등을 포함한 귀족자제 7명을 정식으로 승려로 만든다. 그리고 양반 자제를 선발하여 범어를 배우게 함으로써 번역승을 양성하는 등 일련의 불교 진흥책을 발표했다. 말하자면 티베트에 최초의 종단이 생긴 것이며 불교가 정식으로 국교가 된 것이다.
치송데쩬을 도와 설역고원을 불국토로 만든 두 명의 인도인 스승이 있었다. 바로 인도 불교의 중심지인 나란다 대학의 학승인 고승 산타라크시타(Santarakshita, 寂護)와 구루린뽀체 또는 우르간빠드마 등으로 불려지는 빠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華生)다. 먼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는 산타였는데, 그는 국왕에게 불교의 요체를 설했지만 주위의 반대가 심하여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의 초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우디아나 왕자출신의 빠드마와 함께였다. 유명한 밀교 주술사였던 그가 어떻게 주위 사람들과 토착 귀신들을 굴복시키고 쌈애의 건설을 진행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정사의 기록은 아니지만 지금도 설역에 수많은 설화가 생생히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그가 뵌뽀교 사제와 벌인 싸움은 거의 ‘마법의 시합’같이 보일 정도로 현란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어찌 보면 그는 뵈 민족에게는 불교의 본존인 석가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고 더 사랑받는 살아 있는 전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불교사적으로도 그는 티베트 불교 종파 중에서 고파(古派)에 속하는 ‘붉은 모자파’, 즉 ‘닝마파’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빠드마는 우리에게는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매장경전(埋藏經典)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 대하여는 이미 여러 번 소개된 바 있어 생략하지만, 그가 시절 인연이 되었음을 깨닫고 히말라야를 넘어 설역고원으로 올라와 처음 치송쩬뽀를 대면하는 광경은 거창하다. 『티베트 사자의 서』와 쌍이 되는, 역시 에반츠 웬츠가 편집한 『티베트 해탈의 서』에서 전하는 그들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왕의 초청을 받아들인 빠드마는, 서기 746년 11월 15일에 설역을 향해 출발하여 네팔에서 많은 악마들에게 항복을 받고 물의 기적을 일으키며 마침내 라싸 근교의 중카르까지 마중 나온 치송쩬뽀와 만났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고 음악과 가면춤을 동반한 환영행렬이 라싸까지 이어졌으며, 그곳에는 큰 축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빠드마와 왕이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는 왕에게 절을 하지 않고 다만 한 게송(偈頌)을 읊었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속에서 복덕(福德)과 지혜(智慧)를 쌓은,
나는 연꽃 속에서 태어난 붓다라네.
무한히 심오한 교법(敎法)을 터득하고 삼장(三藏)을 배워 통달한,
나는 연꽃 속에서 태어난 성스러운 ‘다르마(法)’라네.6)
그 건망지고도 무례한 모습에 신하들이 칼을 빼어들며 흥분하자 빠드마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 끝에서 불꽃이 일어 왕의 옷을 태웠고 천둥과 지진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왕과 대신들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빠드마 앞에 엎드렸다. 이렇게 철저하게 빠드마는 기선을 제압하며 설역으로 입성했다. 역사는 연꽃 속에서 태어나 시절인연을 따라 대설산을 넘어온 이 걸출한 딴트라 도사의 행장을 이렇게 기록했다.
티베트력(歷)으로 8월 초하루에 빠드마는 쌈애를 방문했다. 왕은 쌈애의 궁전까지 그를 호위하여 황금의자에 앉게 하고 의례적인 공물을 바쳤으며, 이에 빠드마는 자신이 티베트에서 하게 될 일을 예언했다. 그는 용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호수에 보물을 던지고 전국의 신과 여신과 악령들을 조금씩 제압해 나갔으며 많은 기적을 행했다.
8월 8일에 쌈애 건립의 대역사가 시작되었으며 빠드마는 부지를 정화하고 가르침을 펴 악령들을 달랬다.7)
이런 배경으로, 설역에 최초로 솟아오른 대 수도원 쌈애를 무대로 하여 치송쩬뽀는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 호탄, 서역에도 사람을 보내 고승을 초빙하여 불경번역에 힘썼다고 하는데, 그 결과 쌈애는 전 중앙아시아의 불교의 메카가 되어 불교학의 토론장이 되기도 한다.
10여 년이 지난 뒤에 티베트 불교 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가 이곳을 무대로 벌어지는데, 이른바 794년의 그 유명한 ‘쌈애 사원의 논쟁’이다.
쩬뽀의 후원으로 이렇게 인도 불교가 뿌리를 내릴 당시에는, 이미 당으로부터도 오래전에 문성, 금성공주를 따라 중국 불교도 수입되어 현조(玄照)를 비롯한 몇몇 승려들이 왕래를 하면서 왕후를 비롯한 왕실에 그 추종 신자를 두고 있었다. 그러니 이 선종(禪宗)계 중국불교 신자들의 눈에 비친 인도 후기불교, 즉 밀교(密敎)는 해괴한 종교로 보였고 반대로 돈오(頓悟)를 강조하는 중국 선불교의 급진적인 수행방법과 파격적인 이론은 보살행을 강조하는 인도 불교의 눈에는 본토에도 없는 이단적인 것이었다. 이에 조야에서 서로 반대 이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치송은 중국계 선승(禪僧) 마하연(摩訶衍)과 인도 불교와 논리싸움을 벌여 우열을 가리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 마하연은 781년에 이루어진 돈황의 점령 뒤에 라싸에 들어온 승려이다. 서역불교의 요람이었던 돈황을 점령한 토번 장군 쌍치싱얼은 법명이 마르뽀로써 불교에 귀의한 덕장이었음으로 당시 돈황에 머무르고 있던 승려들을 특별히 우대하고 불교 성지 돈황석굴을 잘 보존했다고 한다. 그는 후에 본국으로 개선하여 재상에 올라 당과 평화회담을 추진하여 ‘장경맹약’을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주화파의 대표주자였다. 당시 돈황에는 만(曼)화상이라는 승려가 30년간 머무르고 있다가 청해로 떠나면서 쌍치싱얼에게 제자 낭카닝뽀를 소개하고 떠났는데, 그가 바로 토번 최초의 번역 경전 목록인 『덴카르마 목록』의 편집자였다. 또한 오법성(吳法成)이라는 학승도 출현하여 왕명에 의하여 수다사(修多寺), 개원사(開元寺), 영강사(永康寺) 등지에서 토번 문자로 경전을 번역하고 830년에 위 목록에 등재했다.
그러나 서역과 토번을 무대로 많은 중국불교의 승려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승려는 역시 마하연이었다. 그는 토번에 입국하자 왕성한 포교를 하여, 왕후 장춥제를 불교 신자로 만들고는 791년에 출가를 시켰을 정도로 중국 불교 세력을 구축해 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사진 4.25 ‘3대 법왕도’: 가운데가 송쩬감뽀, 좌우로 치송데쩬, 치데송쩬
사진 4.26 토굴 속의 빠드마삼바바의 소상
사진 4.27 침북 계곡에서 내려다본 헤뽀리 평원과 쌈애 사원
사진 4.28 쌈애의 스투파
『바쉐』나 『부똥 불교사』에 의하면 이에 인도 불교 측에서는 산타라크시타의 제자이며 중관계(中觀界) 불교의 학승인 나란다 대학 출신의 카마라실라(Kamalasila, 蓮花戒)가 출전하고 중국 불교 측에서는 마하연이 대표선수가 되어 왕과 신하 그리고 양쪽의 신도들 앞에서 며칠 동안 격렬한 대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인도 불교의 승리였다고 한다. 이에 결과에 승복하고 마하연은 인도의 전통대로 상대방의 머리에 ‘꽃다발[華鬘]’을 얹어 주고는 그해 다시 돈황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광경과 오고 간 문답의 내용은 상세히 기록되어 지금도 티베트 불교의 주요 텍스트로 쓰이고 있지만, 그 장황하고 난해한 내용을 여기서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마하연을 도와 중국 불교를 대변했던 티베트 승려 쌍시에 대해서는 추가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라 승려 무상(無相)과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쌈애에서 수계를 받은 ‘7비구’의 하나인 쌍시는 이른바 ‘청수동맹’으로 인한 양국 문화교류 차원에서 장안으로 가 중국불교의 교의를 배운다. 그리고 나서 오대산에 들어가 수행하고 돌아와 왕비 창춥제를 교화시켜 출가하게 하였으며, 후에 빠르얀으로 개명한 뒤 중국계 불교종파의 ‘링룩[宗正]’이 된 인물이다. 그의 위치는 역시 ‘7비구’ 중의 하나인 인도 통의 바셀낭, 즉 에세왕뽀와 함께 당시 티베트불교 초기 두 문화권을 대변하는 양대 기둥이었다. 그는 귀국할 때 사천을 지나다 정중사(淨衆寺)에서 달마의 법을 이은 사천종(四川宗)의 종정이었던 고승을 만나 선종의 밀지를 받았는데, 그가 바로 티베트불교사에 나와 있는 김화상(金和尙)8)이라고 불리우는 무상(無相, 684~762)과 그의 제자 무주(無住)였다. 설역에서 만난 해동의 고승 김화상에 대하여는 제법 연관된 자료가 많지만 현재 우리의 주제 밖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생략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의 갈 길을 가도록 하자.
참, 이 최초의 비구 바셀낭이 지은 『바쉐』가 일명 『쌈애사 사적기』인데, 비록 쌈애의 창건 당시 상황에 국한되어 있다 하더라도, 토번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서로 현존하는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확실한 저작 배경도 갖고 있는 믿을 수 있는 역사서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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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크로드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다정/김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