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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 유년시절과 가명을 쓰는 이유.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이라고 합니다. 본명과 가명을 쓴다면 모두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탈북민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있기에, 그들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해야 할 것 같아 가명을 씁니다. 차라리 이름을 개명하는 편이 낫지 않냐 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만, 긴 투병 속에서 출혈 중에 저를 출산하신 어머님이 늦둥이 딸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도와서 막내딸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라 어머니 생각하면 개명이 쉽지 않아 못하고 있습니다. 본명을 유지하며 외부적인 활동 명으로 가명을 쓰게 되는 점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의 고향은 북한입니다. 함경북도 **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이 긴 투병생활을 오래하셔서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저의 집은 9남매입니다^^ 딸 여섯 명과 아들 셋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도 늦둥이다보니 언니 오빠들은 사회진출하거나 학교 다니다보니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은 한적한 동네를 다니며 모래를 머리에 수십 번씩 올리고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다른 집에서 밥 얻어먹으며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유년시절이 박복한 것은 아닙니다. 무한한 형제 사랑과 끈끈한 형제애 속에서 자랐으니까요. 사회성도 같이 길러진 것 같습니다. 어려서 노래를 잘 불러 학교를 대표하는 성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유년시절은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북한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행복했습니다.
■ 오빠의 갑작스런 죽음
제가 15살 때 일입니다. 저에겐 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오빠 두 분과 저보다 다섯 살 많은 오빠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북한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귀히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들 둘을 잃은 저희 부모님으로서는 막내아들인 저의 오빠가 집안에 기둥이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오빠가 군에 나갔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오빠 나이 20살이 되는 해겠네요. 북한은 ‘핵심계층’과 ‘기본군중’과 ‘복잡군중’으로 나뉘는데 제가 지금 느끼기에는 아마도 우리 집은 ‘복잡군중’이었나 봅니다. 북한에 출신성분이 좋지 못하던 저희 집으로서는 아들을 군대 내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신성분이 안 좋은 가정에서 군대에 가지도 못하고 노동당 당증도 어깨에 메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매장입니다. 그래서 오빠는 군사동원부(군입대원서 쓰는 곳?)에 수시로 다녀 자기 힘으로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남들도 위험하다고 기피하는 건설 부대였습니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을 얼마나 잘하고 성실했는지 외화벌이 부대로 넘어선 것 이었지요.
집에서는 몰랐습니다. 집에 휴가를 나오면 부모님 얼굴도 볼 수 있고 동창들도 만날 수 있는데, 부대복귀 할 때 챙겨 가야하는 뇌물로 부모님들께 민폐를 끼친다고 휴가도 나오지 않던 오빠였습니다. 서해에 외화벌이 부대로 나간 오빠 부대는 군인간부들의 사택과 군인들이 생활하는 군부대 군영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섬에 나무 베러 갔다가 배가 좌초되면서 30명 중 15명의 군인들이 무리 사망하는 그 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신을 건지지 못해 빈 무덤 15개나 세워진 오빠 부대에 다녀오던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미련도 희망도 없는 북한에 심지어 오빠가 사망한 그해는 김일성이 서거한 해이자, 1994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해이기도 합니다.
■ 탈북하게 된 동기
17살에 고등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기능공학교(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마치지 못하고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쉼에 있어 가장 기초체력을 만드는 이 끼니는 하루 세 때는 아니더라도 하루 한 끼라도 먹어야 하는데 먹지 못하다보니 사람들의 면역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질병들이 전 지역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처음엔 장티푸스(설사병), 그리고 파라티푸스(열병)가 퍼지기 시작하고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도둑질해먹다 맞아죽고, 얼어 죽고 말도 못하는 온갖 죽음이 북한 전 지역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뭐! 우리 집이라고 안 왔겠습니까? 당당하게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둘째언니, 그리고 저, 아빠, 엄마 순서로 막 치고 들어오는 거지요. 당시 먹을거리가 없다보니 산에서 고사리, 삽 주 뿌리 등 약초를 캐서 다듬고 쪄서 말리우면 외화벌이 상점에 가서 중국에서 나온 말 사료 밀가루(검고 깔깔한 겨가 섞인)를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북한 주민들이 다 장마당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풀과 나물을 캐서 한 끼 벌어 한 끼 먹고 겨우 버텨내는 실정에 집안에 환자가 났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마지막 희망인 아들을 땅에 묻고 가슴에 한이 서렸던 어머니는 또다시 자기 손으로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자식과 남편을 땅에 묻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을 탈출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혼자 은밀히 움직였습니다. 먼저는 몸이 회복되어야 두만강을 건너겠으니, 언니들 시집보내려고 준비하셨던 그릇가지들과 옷감들을 모두 옥수수 감자와 바꿨습니다. 외상도 하고 그렇게 탈북 할 계획을 세우신 것이죠. 브로커를 찾고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시간을 맞춘 후 두만강을 건너서 다시 돌아오는 계획까지 철저히 세웠습니다. 낱알이 없이 맨 감자만 간(소금이나 된장)이 없이 매끼 3일정도 먹으면 몸에 정전기가입니다.
그래도 감사하게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서 이명소리만 들리고 사람 말소리는 들리지 않던 귀에서 세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에 가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 살기위해 건넌 두만강
3개월 동안 부지런히 몸을 보양하고 이제 두만강 건너기 이틀 전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희 집엔 9살7살 조카들이 와있었습니다. 북한은 생활이 어려워 ‘행방’이라는 장사를 나갑니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타 도시군 가릴 것 없이 문물교환이 가능한 곳엔 어디든 다니는데, 그때 나가는 그 장사길이 정해진 날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나기에 행방이라는 이름이 붙어졌습니다. 저희 큰언니 아이들이 외가 집에 맡겨져 살고 있었지만 탈북하는 이 사실을 알릴 방도도 없지만 설령 알릴 방도가 있다고 하여도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는 북한에서 쉽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어요.
당연히 손자손녀를 이끌고 탈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두만강을 건너기로 약속한 이틀 전에 갑자기 저희 큰언니가 온 것이었어요. 부모님은 언니를 앉혀놓고 조용히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함께 탈북 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집안 사정을 보니 누어 아직 회복중인 두 동생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대시는 아빠를 보고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매 한가지니 그래도 용기를 내서 중국에 가 약 써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머니 떠나십시오.” 그러나 박 씨 집안에 대를 어찌 끊겠는가? 또 온 가족이 다 도망가면 보위부, 안전부, 여맹, 인민반 할 것 없이 뒤 쫓을 테니 내가 그들이 의심하지 못하게 인질로 남아 있을게요. 꼭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언니와 두 조카를 남겨둔 채 1997년 7월에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 한국정착이야기
1997년 7월에 탈북하여 2003년도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나라가 못살고 책임져 주지 못해서 그렇게 북한을 나온 북한주민들은 제3국에서 팔려가고 매 맞고 칼로 위협당해도, 심지어 어느 날 싸늘한 시체로 내던짐 당해도 하소연 할 길 없이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이 모든 위협을 당할지라도 북한에 끌려 나가 취조 받고 감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북한이 저렇게 된 것은 나라가 못살고 힘이 없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돈을 많이 벌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 두고 나온 나의 조카들과 언니와 나의 친지들과 나의 동무들과 굶어 거의 죽어갈 때 콩비지 한 덩이 내밀던 내 이웃을 두고 혼자 탈출하여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가서 그들과 나눠먹고 나눠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원에서 나와 20일 만에 월마트에 알바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 정착하려고 몸부림칠수록 문화의 장벽과 외래어와 영어와 약70년 정도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모든 시스템은 그야말로 저를 마비시켰습니다. 의사전달이 안되더군요.
예를 들면 '또 보자'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데, 그것을 인사말이 아닌 사실과 실제적인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시간될 때 만나 밥 먹자!’ '차마시자', 주소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놀러오라! 이런 등등의 인사들을 하는데, 순진한 탈북민들은 이 말에 많은 혼선을 갖습니다. 돈의 단위도 너무 다르고 카드, 바코드, 배달 등등의 많은 것들이 저를 혼란하게 했습니다.
문물교환으로 시장에서 양식을 준비하던 북한을 생각해볼 때 과연 우리는 타임캡슬을 타고 어느 다른 별에 온 듯 했습니다. 이 외에도 자충우돌 저의 한국정착기는 끝도 없지만 생략하겠습니다.
■ 신학하게 된 동기
아름답고 여유 있고 본인만 부지런히 살면 희망이 있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행복한 대한민국에서 앞만 보면서 열심히 살았는데 왠지 제 마음엔 늘 외롭고 공허했습니다.
어려서 음악을 했던 사람이니 노래방이나 클럽 같은 유흥을 즐기면서 살아도 될 법한데 이상하게 그곳은 저와 맞지 않았고 탈북민들과 마주앉아 담소를 나눠도 타인의 헌 담이나 건설적이지 못한 이야기들이 저를 더 외롭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탈북민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저에게 ‘북한에 수많은 엘리트들과 힘센 사람들과 권력가들을 비롯한 약 300만 아사자가 발생했는데, 너는 왜 살아서 여기 있다고 생각하니?’
이 질문을 처음 들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동안 성공해야 한다는, 그래서 돈 많이 벌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이 이 질문을 흘려보냈던 것이었습니다. 인천공항에 입국하였을 때를 기억합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불빛이 저를 현혹한 것이 아니라, 이젠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북한에 실려 갈 것만 같은 불안한 생각으로 한 숨도 못 잤으니까요. 그때 저는 ‘난 이제 살았다. 이제 잡혀갈 위험도 없네. 근데 어떻게 나같이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내가 한국에 왔을까? 감사하다!’
■ 두만강에서의 나의 첫 기도
갑자기 친정에 오면서 인질로 자청한 언니가 식량만큼이나 귀한 소금 한줌씩 넣어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 방법을 써보니까 확실하더라. 두만강에 들어서기 전에 소금을 뿌리면서 하늘님. 우리 가는 길에 빛과 소금이 되어주세요.’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점쟁이도 모르고 귀신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던 나로서는 언니의 이런 행동과 말들이 믿겨지지 않을뿐더러 우습게 여겨졌습니다. 언니가 살면서 먹어야지 이 귀한 소금을 왜 쓸데없는 곳에 허비하라고 하냐고 했지만 언니는 기어코 주머니에 넣어주며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진 저녁에 나와 산에서 쪽잠을 청한 우리 가족은 새벽 4시가 되어 두만강 접선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약속한적 없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부모님과 딸 셋은 소금을 두만강에 뿌리고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 생각해봐도 간절함의 끝판이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 저는 하나님이 누군지 몰라요. 근데 사람들이 당신이 있대요. 정말 있다면 우리 대가족이 두만강 건너야하는데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두만강에 들어섰는데 물이 가슴을 넘어 높게 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그럼 그렇지! 내 생에 무슨 좋은 일이 있겠다고... 그냥 집에서 죽게 놔두지, 왜 우리 부모님은 나를 이렇게 차디찬 두만강 물에서 죽게 한단 말인가?’ 서글픈 마음에 눈물까지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안하고 정말 세발자국 앞으로 가니 갑자기 두만강 물이 무릎 아래로 쑥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살았다.’ 약속한 듯이 우리는 손을 잡고 중국 쪽을 향해 물길을 가르며 뛰었습니다.
그날따라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1m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살기위해선 민가를 찾아나서야 했습니다. 다섯 명 모두 앞이 안보였기 때문에 손에 손을 잡고 마을 어귀에 들어섰는데 그때 한 남자분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한결 같이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살려주시오. 우리는 북한에서 왔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첫 마디가 놀라웠습니다.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오. 그래서 당신들을 도와주겠소.’
그때는 교회를 알지도 못했는데 신기하게 이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내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습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중국에 사는 먼 외가 친척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에서 한 달을 보양하고 온 세상에 평화를 얻은 마냥 행복했는데, 식구가 너무 많아 중국당국의 신고와 벌금과 북송이 기다렸기에 다섯째 언니가 시집가는 조건으로 부모님을 모셔가기로 했습니다. 둘째언니는 숙식이 가능한 닭곰탕 음식집에 취직하고 저는 역시 숙식이 제공되는 양고기 식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가족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은 땅이 넓은 만큼 사기꾼도 많습니다.
다섯째 언니가 팔려갔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집은 빚이 너무 많아 부모님들은 한지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길에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분을 잡고 ‘내 북한에서 왔소. 여기 광장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나를 좀 데려가 주오’ 그 아주머니는 ‘왜 그러시는데요?’
어머니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 아주머니는 부모님을 이끌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돌보며 작은 옆방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목회자가 부족한 중국에서는 집사들이 목회자의 역할을 많이 감당하는데 그 아주머니가 바로 교회 책임 집사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참 많은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감사하고 새벽예배부터 저녁 철야기도까지 기도제단을 쌓으며 북한의 자식들과 중국에 흩어진 자녀들과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들께 직접 말씀해 주시기도 하시고 꿈으로 현몽하시기도 하시고 소원도 성취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고 날마다 칼로 위협당하는 다섯째 언니로 하여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고 몰래 도망하여 연길로 나왔지만 그 남자는 얼마나 끈질긴지 연길까지 따라 나와 중국공안에 신고하여 부모님과 다섯째, 둘째언니는 모두 북한에 북송되게 됩니다. 모진 취조와 모욕과 매를 맞은 부모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꼭 1년 만에 다시 탈북하였는데 온 몸에 멍든 자국으로 덥혀있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간 부모님이 다시 북송되면 북한에 묻겠다는 불안감에 브로커를 찾아 2002년에 떠나게 되었고 2003년에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 내 삶의 전부이신 하나님
한국에서의 삶도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정착하면서 바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처음엔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서울교회>((고)이종윤목사님이 시무하셨음)에서 말씀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죄인이며 나의 교만함과 나의 천박함, 나의 모든 죄가 인지되기 시작했고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살아야한다는 세상 상식과는 다른 아가페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약 12년 동안 교회에 출석하다가 목사님 은퇴하시고 2017년에 지금의 **한나라 은혜교회에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엔 매일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저는 하나님이 제 마음속에 쿵하고 자리 잡았고 풀리지 않았던 많은 질문들이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소명 받은 자였다는 것과 나의 사명은 무엇인지 이 모든 질문들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크고 놀라운 소식을 단 한 줄에 담으려니 부족한 것 같긴 합니다.
■ 나의 사명(결론)
돌이켜 보면 저 혼 자 잘 먹고 잘 살라고 보내신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북한의 실정을 잘 알고 북한선교의 필요성을 잘 아는 한 사람으로서, 먼저 온 미래요- 반드시 오고야 말 복음통일을 위해 남과 북의 징검다리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먼저는 말씀을 지우고 믿는 자들을 탄압하고 죽이는 저 북한 땅에 일어난 모든 악행들이, 성경말씀에 낱낱이 있는 것처럼 말씀을 지운 민족에겐 희망도 생명도 없음으로 말씀 앞에 서며 기도와 간구로 나가야 함을 생각합니다.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 주저 없이 뛰어들 수 있는 종으로 준비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새소망 교회>는
대체로 자유보다는 살고자 탈북한 생계형 탈북민들이 하나님 안에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육신의 양식이 없으면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던, 실제로 눈에 보였던 그 현실들에서 사고에서 탈피하여 북한의 수많은 아사자 발생은 먹을 것이 없어 생긴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배척하고 지우고 했던 우리 조상들과 우리들의 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지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 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이사야 43:1-4)”
우리를 건지실 분은 하나님뿐이시오. 그분 안에서 더 이상 사단이 준 육신의 양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영의 양식으로 말미암아 새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가고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서 함께 우는 자들이 되려는 하나의 그리스도공동체를 형성해 갈 것입니다.
지속적인 기도와 동력으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추가설명 :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
저는 김씨일가 우상숭배, 아주 일찍이 첫 걸음을 떼고 첫 말을 뗄 때부터 소위 시작된다는 우상화 작업에 영향을 받았지만 인이 박힐 정도로는 안 받은 것 같습니다. 왜냐?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곳이 아닌, 학생들의 고사리 손을 빌려 일 년 농사하는 곳이 북한! / 길거리에 나 뒹구는 종이, 유리, 고철, 파동 등 온갖 쓰레기를 주어서 ‘좋은 일하기 운동’ 이라는 명분하에 공짜 노동력으로 환경미화원으로 부려먹는 북한^^! / 그 외 월동준비, 내라는 것들도 참 많습니다...
공부하고 싶어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위에 것들을 못하면 공부시키지 않고 벌세우거나 내쫓거나, 가두거나 합니다. 북한은 두뇌조직인 ‘핵심계층_ 소위 백두산줄기, 빨찌산 줄기’과 기본계층인 평양시민만 있으면 나라가 형성되었고 유지 가능하다고 믿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잘 몰랐고 나와서 그동안 억눌렸던 시간들에 억울하기도 했지만 신앙인으로 거듭나고 나서 돌아보니 너무 감사합니다. 핵심계층 아니니 내 마음에 김씨일가를 향한 충성심이 뼈 골수에까지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보고 느끼고 그렇다고 인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 탈북민들을 많이 만나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이유는 왜일까?
⓵ 남과북을 이 시대에 열국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아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민족과 인간우상을 제비뽑고 하나님을 잊고사는, 말씀을 찢고 태우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가두고 죽이는 북한의 실체를 보여주시면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지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보여주시고 바른 것을 붙잡길 원하시는 것이다.
⓶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이 시대 대한민국 교회에 위로와 결단의 메시지로 탈북민들 보내주셨다. 잘하여 왔고 앞으로도 잘 해 나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이 바라는 열매로 드러나지 않지만 북한을 향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열정과 사랑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고 한국전쟁 이래 우리 조상 대대로 간구했던 복음통일의 기도를 탈북민들을 통해 미리 온 복음통일로 작은 규모이지만 이뤄주셨고 또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설계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⓷ 인본주의 사상이 모든 것을 덮고 자기중심적인 이 시대 경종으로 보내주셨다.
길은 하나라는 것! 등등입니다~
■ 한국과 미국과 세상에 하나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선포하는 ‘한미세기운(한국, 미극, 세계 교회를 위한 기도운동)’ 만남을 통해 하나님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일들을 사모하며 걷겠습니다. 귀한 만남에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분단된 한반도를 위해 기도하실 때 한국에 세워져가는 탈북민 교회들과 탈북민 목회자들, 신학생들을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긴 저의 자기소개서를 끝까지 읽어주시고 동력자로 헌신해 주셔서
우리 주님 안에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나은혜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김요셉 전도사님의 초대로 '한미세기운 톡방'에 초대된 김** 전도사입니다.
귀한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걸음 한걸음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걸을 수 없는 귀한 날들 속에서 기도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남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저는 97년도에 탈북하여 2003년도에 대한민국에 입국하였습니다.
한국에 정착하여 한국에 잘 정착해서 통일된 그날을 준비하고자 대학 입시를 준비하게되었습니다.
그때 북한에서 탈북한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 저의 남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날마다 먹고 눕고 일어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사명자로 대언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살고자 부르짖었던 서원기도도 생각나게 하시고
교회 개척을 위해 다른 탈북민들과 비교해도 조금 더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남편에게 2018년 ******이라는 직업을 주시고,
같은 해 주의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저를 잘 졸업하게 하시고
2023년 2월 **구 **동에 <**새소망교회>를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돌아보니 교회개척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고
그분께서 붙들고 가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북한을 위해 울었던 그 많은 눈물과 시간들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고
복음통일의 마중물로 몇 안되는 탈북민들을 보내시고 그 중에서도
또한 구별하셔서 유약한 저희를 주의 종으로 세우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니 마음은 뜨거운데
성경을 잘 모르다보니 애로점들이 있습니다.
이 난제들을 이 훈련을 통해 또한 보게하시고 말하게하시고 증거케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잘 배우겠습니다.
**새소망교회 김** 전도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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