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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 / 고서화 스크랩 동아시아 唐詩意圖비교 연구 –16-19세기 왕유, 두보 시의도를 중심으로-
이보 추천 0 조회 273 19.02.07 12: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동아시아 唐詩意圖비교 연구

–16-19세기 왕유, 두보 시의도를 중심으로-


조인희
중앙대학교



Ⅰ. 서론
Ⅱ. 한·중 ·일 당시의도의 제작과 유형
   1. 시의도의 발생과 전개
   2. 화제에 따른 시의도의 유형과 표현
Ⅲ. 3국 시의도의 특징과 영향
   1. 詩에 대한 尊崇이 이룬 情景交融
   2. 성리학 이념상의 구현
   3. 詩畵공존 형식의 자국화
Ⅳ. 결론


* 이 논문은 2013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3S1A5B5A01031762)



<논문요약>


본 논의는 16-19세기 동아시아 3국에서 동일한 화제로 그렸던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 비교를 통해 양상과 특징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작품에 내재된 공통 인식과 표현의 독창성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중국 한자 문화의 영향권에 있던 조선 후기와 에도시대는 시화일률이란 문예적 지향, 왕유와 두보 작품의 문학적 탁월성과 시가 지닌 회화성, 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에 긍정적 인식을 같이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왕유의망천집의 일련의 시들과 「종남별업」, 「종남산」두보의 「南隣」, 「秋興八首」, 「飮中八仙歌」, 「登高」, 「春夜喜雨」등의 詩句가 공통의 시의도 화제가 되었다.


화제가 된 시의 내용은 은일자의 삶을 읊은 것, 산수자연의 경치나 사계절의 정서를 표현한 것, 중국 유명인의 故事를 표현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화제는 산수 인물화의 형태로 화면에 표현되었다.

명청대 화가들은 화면 가득 경물을 배치하는 치밀한 필법으로 시 내용의 배경이 되는 산수 표현에 보다 적극적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화가들의 보다 간략한 필선으로 시의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시의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개자원화전』 등 화보의 화면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중국의 시의도와는 다른 화면을 보이고 있다. 또한 화제의 詩意표현에 인물을 자세, 동작 등을 강조하며 산수표현보다 중시한 경향을 보인다.

에도시대 시의도의 경우 일부 漢學派를 중심으로 그려졌고 중국화보에 소개된 준법을 사용해 경물을 유기적으
로 화면에 배치하고 있다. 명청대에는 조선후기나 에도시대에 비해 시의도가 화첩형태로 전하는 특징이 있다.


이상의 논의 결과 명청시대의 화가들은 시의도를 통해 宋代부터 이어진 詩畵一律의 예술적 지향을 이루려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조선 치국의 이념이 된 성리학적 理想像과 自然觀을 바탕으로 시의도를 통한 詩畵一律이란 문예적 성취를 추구했다.

반면 에도시대 화가들에게 왕유 시의도와 두보시의도는 중국문화에 대한 선호의 대상으로 인지되며 시도되었다. 문인계급의 부재라는 사회적 특성은 당시의도의 제작을 적극화하는데 쉽지 않았고 시를 그린다는 형식적인 면을 자국화해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 화면에 옮기는 하이가(俳畵)의 발달로 이어진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동아시아 3국에서 공통된 화제로 그린 왕유, 두보시의도 비교는 시의도가 발생국에서 발달되는 과정은 물론 주변의 동일 문화권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수용하는 지역의 사회 이념과 미적 취향을 담으며 변화하고 자국화되며 더 나아가 독자적 회화 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제어: 동아시아 문화, 한자문화권, 詩畵一律, 詩意圖, 王維, 杜甫, 明淸時代, 中國畵譜



Ⅰ. 서론


한자문화권인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詩書畵三絶, 詩畵一律論등의 예술적 지향을 공감한다. 특히 회화 영역에서는 形似보다는 寫意를 중시하는 인식으로 사실성을 중시하는 서양과는 다른 美感으로 문인화를 발전시켰다. 회화가 시대적 美感과 물질적 조건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문화 산물임을 감안 할 때 한자 문화권의 한중일 3국은 공통된 회화권을 형성하며 이면의 독창성을 발현한다는 의미를갖는다.1)

이러한 특징은 문학과 회화의 긴밀한 친연성이 중시되는 3국의 詩意圖에서 찾을 수 있다. 시의도는 시인의 詩情을 화가의 畵意로 이루어낸 회화로 寫意를 중시하는 독특한 회화 영역이다.2) 특히 시의도의 화제가 된 唐詩는 자연과 계절에 대한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언어 구사 등으로 많은 문인들에 회자되었고, 특히 唐詩의 繪畫性은 한중일의 많은 화가들의 붓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화폭에 옮겨졌다. 이러한 문화적 공감대에서 동아시아 3국의 唐詩意圖비교를 통해 작품에 내재된 공통 인식과 차별화된 표현의 독창성을 밝히는 것이 본 논의의 주된 목적이다.


따라서 이글은 중국 唐代의 王維(699-759)와 杜甫(712-770)의 시를 그린 3국의 시의도 비교를 논의의 영역으로 한다. 중국에서의 시의도 발생과 전개, 조선과 일본으로의 확산 과정 중 가장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왕유는 『全唐詩』에 382수의 시가 실린, 자연시 혹은 산수시의 대가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또한 <輞川圖>등의 그림을 그려 중국의 역대 회화사를 기록한 『唐朝名畫錄』, 『歷代名畫記』 등에 이름을 올린 화가이다.3) 宋代蘇軾(1039-1101)이 왕유의 회화를 보고 지은 「書摩詰藍田烟雨圖」시를 통해 왕유의 작품은 詩畫一致를 이루었다고 평가했고 이후 明代董其昌(1555-1636)은 그의 저술『畵旨』를 통해 왕유를 문인화의 鼻祖로 삼았다. 두보는 盛衰와 戰亂등 거친 현실을 살며 悔才不遇했으나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감각으로 1400여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다. 특히 詩句, 行間에 담긴 현실과 忠節하고 憂國憂民의 마음을 통해 중국문단에서는 詩史, 詩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왕유와 두보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조선과 일본에서도 수용되어 인식이 공유되었다.


그동안 국내외 학계의 왕유와 두보에 대한 연구는 문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4) 이러한 논의들은 문학, 미술사학을 망라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을 뿐 동아시아 3국에서의 인식과 표현이라는 거시적인 틀에서의 비교연구는 미흡한 상황이다. 따라서 본 논의는 한자문화권의 중심인 한중일 3국에서 공통적으로 그려진 왕유와 두보 시의도를 비교 분석해 문학과 미술이 이루는 접점에서의 한중일 회화의 공통성과 고유성을 밝히고자 한다.


이글은 논의의 집중을 위해 16-19세기, 즉 明淸代, 朝鮮後期, 일본의 江戶시대를 연구 기간으로 하고 두보와 왕유의 시 중 동일한 시구를 화면에 옮긴 3국의 시의도를 범주로 한다.5) 먼저 각국에서의 시의도 발생과 전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고, 공통으로 화제가 된 시구와 이를 표현한 시의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유형화한다. 이어 대상 시의도 화면의 표현 특성, 화면유형 (단폭, 화첩 형태)을 비교해 동일한 회화 형식 이면에 배태된 각국 회화의 독창적 발현을 찾고자 한다. 이같은 논의는 곧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중심에 있는 한중일의 공통된 회화 미감과 더불어 각국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회화권역에 대한 논의는 이동주, 『韓國繪畵小史』, 범우사,1996. pp.13-18.
2) 시의도에 대한 정의와 범주 등에 관해선 조인희, 「조선후기 詩意圖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pp.18-20.
3) 唐代張彦遠(815-879)은 그의 저서 『歷代名畫記』권10 에 “(왕유가) 淸源寺벽위에 그린 <輞川圖>의 필력이 웅장하다(淸源寺壁上畵輞川筆力雄壯)”라고 적고 있다. 『歷代名畫記』, 中華書局, 1985.p.307.

4) 紺野達也, 「王維『輞川集』と「輞川圖」の唐宋期ににおける評價の變遷」, 『日本中國學會報』 61집,日本中國學會,2009;이병주, 『詩聖杜甫』,대현각, 1982; 이영주 외, 『두보의 삶과 문학』,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전영란, 『杜甫, 忍苦의 詩史』,태학사, 2000 ;蔡鎭楚, 「中國詩話與杜甫崇拜」, 『중국학보』31권,한국중국학회,1991,pp.127-132;王曉蓉, 「明末淸初的杜甫詩意圖硏究」, 上海大學校美術學碩士學位論文, 2010.
5) 지금까지 필자가 파악한 당시를 화제로 하는 시의도는 중국의 경우 100여점, 조선 후기는 140여수의 시를 화제로 한 400여 작품이 파악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극히 소략하여 30여점이다. 이중 시기적 유사성을 고려해 볼 때 중국 명청대의 경우 35점, 조선 후기의 경우 30여점의 왕유시의도와 두보 시의도가 현존한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다소 소략하여 10여점의 시의도가 파악되고 있다. 비교 논의는 왕유와 두보의 시구 중 3국에서 공통적으로 화제로 하여 그린 시의도를 중심으로 한다.



Ⅱ. 한·중 ·일 당시의도의 제작과 유형


1. 3국에서의 왕유, 두보 시의도 제작과 전개


시의도의 연원은 중국 東漢桓帝(147-167) 때 『詩經』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6) 이후 중국에서의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에 대한 언급은 宋代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郭熙(생몰년 미상, 11세기 활동), 郭思(생몰년 미상, 12세기 활동) 父子가 엮은 『林泉高致』에는 “여가가 생기면 晉,唐의 고금 시를 읽고 그중 사람의 내면을 잘 드러낸 것을 눈앞의 경치로 그렸다”는 내용과 함께 16편의 시를 열거해 놓았다.7) 이중 왕유의 「終南別業」중 한 구절인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그때를 바라본다(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라는 구절과 두보의 「客至」의 “집의 남쪽 북쪽 온통 봄물결인데/보이는건 날마다 떼 지어 날아드는 갈가마귀 떼(舍南舍北皆春水 但見群鷗日日來)”구절, 「野望」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더불어 맑고/외딴 성은 안개에 숨어 깊다(遠水兼天淨 孤城隱霧深)”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왕유, 두보 시에 대한 회화 표현의 적극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게 중국에 현존하는 왕유 시의도 중 가장 이른 예는 남송대 理宗이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라 화제를 쓰고 馬麟(1216-1256활동)이 그린 선면 <坐看雲起圖>(도1)를 들 수 있다.


또한 杜詩를 화제로 한 시의도는 이미 북송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요녕성박물관에 소장된 唐寅(1470-1523)의 <臨李公麟飮中八仙圖>는 李公麟(1049-1106)이 두보의 시 <飮中八仙歌>를 화제로 시의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8)
현존하는 시의도로는 남송대 趙葵(1186-1266)가 그린 <杜甫詩意圖>(도2)가 가장 이른 예이다.9) 이후 明代에 이르면 沈周(1427-1509), 文徵明(1470-1559)등의 吳派화가들에 의해 그들의 문인적 소양을 표현할 수 있는 유명 詩文을 화제로 하는 회화가 그려졌다. 명대에 이르면 “문장은 진한 시는 성당(文心秦漢詩心盛唐)”을 주창하며 복고주의 문학론이 일어 李白, 杜甫, 王維등의 唐詩가 새롭게 조명하는 문학계의 분위기가 官界에 진출하지 않거나 出仕를 포기한 文人들에 의해 당시의도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10)

특히 杜詩의 문학성은 宋代에 문학의 典範으로 자리잡았고 이어 ‘사대부의 표상’으로 세워진 두보의 위상은 끊임없이 후대로 이어져 명청대 문인화가들의 화폭을 풍성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11)

명청대의 화가인 謝時臣(1487-?), 周臣(1460-1535), 唐寅, 文嘉(1501-1583), 盛茂燁(1575경- 1640), 陸治(1496-1576), 文伯仁(1502-1575), 董其昌, 宋懋晉(?-1620), 項聖謨(1597-1658), 張路(1464-1538),尤求(16세기 활동, 생몰년미상), 李士達(1550-1620), 杜菫(15-16세기), 張翀(16세기 활동, 생몰년 미상), 陳洪綬(1599-1652), 王翬(1632-1717), 錢杜(1764-1845),王時敏(1592-1680), 石濤(1642-1707)등 다수의 화가들이 왕유와 두보 시의도를 남기고 있다.


6) 서은숙, 「蘇軾題畵詩硏究- 회화론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4.pp.95-96.
7) 곽희·곽사, 「임천고치」, 『文淵閣四庫全書812 子部(118)』, 臺灣商務印書館, 1983.pp.45-46.
8) 王曉蓉, 앞의 논문, pp.3-4.
9) 이 작품에는 화제시가 적혀 있지 않지만 淸代乾隆帝(재위 1736-1795)가 화면 위의 쓴 ‘宋趙葵杜甫詩意圖卷’이란 제목으로 인해 「여러 귀공자를 모시고 장팔구에서 기녀들과 더불어 더위를 식히다가 저녁이 되어 비를 만나 지은 시 2수 (陪諸貴公子丈八溝攜妓納涼晩際遇雨二首)」중 “대 숲은 깊어 손님을 머물게 하는 곳 연꽃 깨끗하고 더위를 식히는때 (竹深留客處  荷淨納涼時)”라는 두 구절을 화제로 한 시의도로 논의되고 있다. 민길홍,「朝鮮後期唐詩意圖의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p.9. 참조.

10) 유순영, 「李白의 미이지 유형과 이백 문학의 회화」, 『미술사학연구』 274, 한국미술사학회,2012). p.131.
11) 중국에서의 두보와 두시에 대한 위상은 고진아, 『두보와 두시에 대한 사랑의 역사』,양지, 2003. pp.302-310. 참조.


도 1 理宗글씨, 馬麟그림 <좌간운기도>, 견본수묵, 25.1 ×25.0cm, 1256년,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美The Cleveland Museum of Art


馬麟그림 <좌간운기도>坐看雲起圖


도 2 조규, <두보시의도>, 견본수묵, 24.7×212.2cm, 상해박물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와 회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왕유 시를 그린 시의도 관련된 기록과 작품은 조선 중기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 시인이자 문신인 李明漢(1595-1645)은 “왕유의 망천장이 산거하기에 가장 경치가 좋은 곳임을 당송대 시인들의 시를 통해 알고 있다. 나는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하여...화가 李澄에게 수묵 <망천도>를 그리게 했고, 이징은 중국의 망천도를 보았던 기억으로 4폭의 <망천도>를 그렸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12)

이를 통해 볼 때 왕유의 『輞川集』이나 혹은 중국에서 전래된 망천도를 통해 익힌 ‘망천’은 조선인들에게 중국의 실경, 이상향 등으로 인식되며 회화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13) 또한 중국의 朱之蕃이 조선에 전래하여 국내 화가들에 의해 여러 편으로 임모된 《천고최성첩》중 왕유의 「桃源行」를 화제로 한 작품이 있어 왕유 시를 그린 그림은 이미 조선 중기에는 세간에 알려진 것으로 본다.14)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유의 은거 생활에 지어진 『망천집』중 일련의 시와 「終南山」, 「終南別業」, 「積雨輞川莊作」, 「田園樂」등의 시와 陶淵明(365-427)의 「桃花源記」를 재해석한 「桃源行」을 화제로 한 시의도가 그려져 조선 문인들의 隱居의 지향, 이상향에 대한 동경 등을 대변하게 된다.


두보의 시를 그린 내용은 조선 초의 문헌기록에 보인다. 조선초기 문신 朴彭年(1417-1456)의 『朴先生遺稿』 중 「三絶詩序」에 따르면 安平大君(李瑢, 1418-1453)은 安堅(15세기 활동, 생몰년 미상)에게 두보의 시를 화제로 <李司馬山水圖>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15) 조선 중기 許筠(1569-1618)의 기록 중 화원 李澄에게 임모하게 한《천고최성첩》의 수록 작품 중, 두보의 시 「악양루」를 그린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16)

金尙憲(1570-1652)의 『淸陰集』 중 「題尹洗馬敬之飮中八仙圖」가 실려 있어 두보의 「음중팔선가」또한 시의도로 그려져 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두보의 시 중 25편 가량이 화제가 되어 조선후기 시의도 화제로서 가장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17)

화제가 된 두보의 시는 「南隣」, 「秋興八首」, 「飮中八仙歌」, 「春夜喜雨」, 「小寒食舟中作」, 「草堂卽事」등 다양하다. 이상의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는 尹斗緖(1668-1715), 姜世晃(1713-1791), 李麟祥(1710-1760), 鄭敾(1676-1759),崔北(1712-1786?), 沈師正(1707-1769), 李昉運(1761-1815이후), 金弘道(1745-1806이후), 李寅文(1745-1824이후) 등 문인 사대부, 화원 등 화가 신분을 망라하고 다양한 계층에서 다수 그려져 조선인들의 화제에 대한 선호를 알 수 있다.


12) 이명한, 『白洲集』 권16, 「稧屛後跋」참조.
13) 이와 관련된 논문은 한정희, 「동아시아 산수화에 보이는 이상향」,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 국립중앙박물관, 2014. pp.208-222 ; 김창경, 「왕유의 회화와 시가-<망천도>와 <망천집>을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 제21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pp.299-313; 조인희, 「王維詩意圖를 통해 본 朝鮮文人들의 理想」, 『동악미술사학』 제17호, 동악미술사학회, 2016. 참조.
14) 《천고최성첩》에 관한 논의는 유미나, 「中國詩文을 주제로 한 朝鮮後期書畵合璧帖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

15)안휘준, 「安堅과 그의 畵風- 夢遊桃源圖를 중심으로」, 『한국회화사연구』, 시공사,2000.pp.352-353.
16) 이같은 내용은 유미나, 앞의 논문, pp.42-114.
17) 조선후기에 이르면 다양한 중국의 시를 화제로 하는 시의도가 활발히 그려진다. 화제가 된 시는 대략 140여 편으로 이중 唐詩가 90여 편으로 그 비중이 가장 높다. 특히 왕유 시의도와 두보 시의도가 그중 다수를 차지한다. 이같은 통계는 조인희, 앞의 학위논문, pp.313-320. 참조



文人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에서 唐詩를 화제로 한 회화 기록과 작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寫意를 중시하며 詩情을 화면에 펼치는 시의도를 문인화로 인지하고 논의하는 중국과 조선의 기준으로 일본의 시의도, 문인화를 동일시하기에는 적지 않은 기준의 간극이 존재한다는 한계도 있다.18)

일본에서 문학과 회화가 결합한 이른 예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9-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귀족들의 주거 공간에 쓰이던 내실 미닫이문(障子)그림과 병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당시 화가들은 미닫이문 그림과 병풍에 중국의 시를 화제로 그리거나 古典의 내용을 그리고 관련 문구를 적었다. 중국의 어떤 시가 화제로 쓰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시기적으로 볼 때 唐代를 하한선으로 유명 시인의 詩文이 그려졌을 것이라 추론할 뿐이다. 그림에 화제로 쓰이던 중국의 詩또한 일본 고유의 詩인 와카(和歌)로 대체 되었다. 10세기 초의 유명한 궁정 시인 키노 츠라유키(紀貫之, ?-0945) 시집에는 전체 수록 작품의 2/3에 해당하는 539수가 미닫이 문이나 병풍에 그림으로 표현되도록 지어진 것이라 한다.19) 따라서 중국 시가 화제가 된 회화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수세기를 지나 에도시대(江戶時代, 1600-1868)의 화단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에도시대 중기부터는 漢學의 융성에 따라 시, 서화 등에서 중국적 취미를 즐기던 漢學派인사가 증가했다. 이때 기엔난카이(祇園南海, 1676-1751), 이케노다이가(池大雅,1723-1776), 요사부손(與謝蕪村,1716-1788) 등은 중국의 사대부들이 애용했던 주제와 형식들을 받아들여 일본화단에 난가(南畵)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詩書畵를 동일시하는 三絶論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예적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에도시대 중기에 이르면 일본 시인들은 唐詩에 대한 저술을 펴내며20) 唐詩의 회화성에 매료된다.

또한 남종문인화의 교과서 역할을 하는 중국 화보집 『개자원화전』이 1748년 일본에서 출판되어 남화 화풍의 정착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문예적 분위기에서 「竹里館」, 「終南別業」, 「飮中八仙歌」등 왕유와 두보의 시를 화제로 하는 작품은 官南(16세기 후반 활동), 카이호유쇼(海北友松, 1533-1615), 이케노다이가 등에 의해 그려진다.


18) 한중일 문인화의 개념에 관한 논의는 한정희, 「문인화의 개념과 한국의 문인화」, 『미술사논단』제4권, 한국미술연구소, 1996; 신나경, 「일본의 문인화개념과 요사부손(與謝蕪村)의 예술개념」, 『동양예술』제14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09. pp.230-235.

19) 아키야마테루카즈 지음 이성미 옮김, 『일본회화사』, 예경, 2004. p.83.
20) 박윤희, 「이케노타이가 (池大雅, 1723-1776) 의 문인화에 대한 이해와 실제」, 『미술사학연구』 255호, 한국미술사학회, 2007. p.203.



2. 화제에 따른 시의도의 유형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조선시대 시의도는 唐詩를 화제로 한 것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중 두보와 왕유의 시를 화제로 한 것이 다수이다. 이를 기준으로 이 장에서는 한중일 3국에서 왕유, 두보의 시 중 동일한 시를 그린 당시의도의 구체적인 작품을 알아보고, 화면 표현과 특성 등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현재 조사된 왕유의 시중 3국 시의도의 공통된 화제는『망천집』의 일련의 시들과 「종남별업」, 「종남산」, 「春日與裵迪過新昌裏訪呂逸人不遇」, 「桃源行」 등이다.21) 본 논의에서는『망천집』의 일련의 시들과 「종남별업」을 화제로 한 시의도를 중심으로 논의하겠다. 먼저 한중일에 알려진 왕유의 문학, 특히 왕유의 시의도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망천집』에 실린 일련의 시들이 화면에 표현되는 것이다.

왕유는 종남산의 망천 자락에 宋之問(660-712)의 藍田別墅를 얻어 살며 친구 裵迪과 함께 배를 타고 망천 주변을 돌며 20곳을 완상하고 시를 지어 『망천집』을 엮었다. 또한 왕유는 망천 주변의 경관을 그린 <망천도>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왕유의 <망천도>는 현재 전하지 않으나 이를 임모해 그린 것으로 알려진 북송대 郭忠恕(약 910-977) 의 <임왕유망천도>(도 3)를 통해 그 실제를 추정할 수 있다.

전칭작을 포함한다면 이어 李公麟(1049-1106)등 후대 작가들은 곽충서의 임모본을 기본으로 <망천도권>을 임모한 것으로 보인다.22) 明代의 仇英(1494?-1552)은 <망천십경도>를 그렸고, 1617년 郭世元(1573-1620)은 곽충서의 임모본을 모사해 석각한 <망천도권>(도 4)을 남기고 있다.

이중 곽세원의 작품과 명대 仇英(16세기 활동)이 10경만을 추려서 그린 것은 조선 후기 화가인 이방운이 그린 《망천십경도》(도 5)의 화면 표현의 연원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23)

이방운의 《망천십경도》는 기존에 왕유가 그렸다는 <망천도> 임모본을 모본으로 하여『망천집』에 실린 시를 그리는데 화면으로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도식화된 ‘망천’주변의 장소, 산수 표현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이방운의 인식은 왕유의 시 「積雨輞川莊作」을 그린 시의도 <夏景山水圖>(도 6)에서도 확인된다.
이방운은 화면 상단에 화제를 적고 여름의 망천장 주변 풍광과 안빈낙도하는 은일자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24) 화면 표현에 이방운은 망천의 <南坨>와 <죽리관>의 정형화된 도상을 차용해 각각 화면 상단과 하단에 그리고 주변 산수, 강물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시의도를 완성해 놓았다.

중국 명청대의 <망천도>류가『망천집』의 시 내용과는 별개로 임모본을 다시 임모하며 실경 산수도로 그려졌다면, 이방운은 왕유의 『망천집』에 실린 일련의 시들을 화제로 <망천십경도>를 그렸고 이때 화면 표현은
왕유가 그렸다는 <망천도> 모본을 차용해 시의를 표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점은 「積雨輞川莊作」중 “아득한 논에 백로가 날고/ 그늘 짙은 여름 숲에는 꾀꼬리가 지저귄다”부분을 화제로 습윤한 여름 산수를 그린 심사정의 <산수도>(도 7)와 비교하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21) ‘桃源’이란 이상향을 읊은 왕유의 「도원행」은 陶潛의 「桃花源記」를 재해석한 것으로 두 작품은 문학적으로 내용상 거의 동일하게 취급된다. 특히 도원을 이상향으로 그린 일련의 <도원도>는 특히 명대 이후 강남지역에서 널리 그려졌다.(한정희,앞의 논문,p.212.)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明代宋旭이 1570년에 그린 <도화원도권>등이 있고, 조선의 경우 명대에 전해진 《천고최성첩》의 임모본에 왕유의 「도원행」과 陶潛의 「桃花源記」을 화제로 한 작품들이 처음 보이고 鄭敾의 <樵客初傳>, <月明松下> 金喜謙의 <武陵桃源圖>등이 전한다. 그러나 「도원행」과 「桃花源記」에 대한 인식이 중첩되어 그림 또한 구별이 모호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왕유의 시만을 주로 한다는 점에서 도잠의 작품과 친연성이 짙은 「도원행」은 논외로 했다.
22) 高原宏伸, 『中国畵論の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pp.37-74.
23) 조인희, 앞의 논문, pp.141-143.
24) 화제로 적은 「積雨輞川莊作」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장맛비 빈 숲에 연기 피어오르더니/ 명아주짜고 기장 밥 지어 동쪽 밭으로 내어간다/

아득한 논에 백로가 날고/ 그늘 짙은 여름 숲에는 꾀고리가 지저귄다/

산속에 좌정하여 아침 무궁화를 관조하고/ 소나무밑 맑은 집에서 아욱을 먹고 산다

(積雨空林烟火遲 蒸藜炊黍餉東菑

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囀黃鸚

山中習靜觀朝槿 松下淸齋折露葵)”


도 3 곽충서, 宋代郭忠恕 <임왕유망천도> (부분), 견본채색, 33.4×487.7cm, 美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明代仇英绘《辋川十景图》局部


도 4 곽세원, <망천도권> (부분), 석각, 美프린스톤대박물관


이방운, 《망천십경도》중 남타


이방운, 《망천십경도》중 죽리관

도 5 이방운, 《망천십경도》중 <남타>(상)와 <죽리관>(하), 지본담채, 각 27.3×30.5cm,홍익대박물관



도 6 이방운, <하경산수도>,지본담채, 107.3×54.5cm,고려대박물관


도 7. 沈師正, <山水圖>, 견본담채,20.6×14.8cm,국립중앙박물관



반면 『망천집』에 실린 시 「죽리관」만은 이를 화제로 하는 한중일 3국의 시의도 표현에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항성모의 《王維詩意圖冊》중 <죽리관>(도 8),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도 9), 이케노다이가 <죽리관도> (도 10)는 왕유의 시 「죽리관」의 全文, 혹은 일부 시구를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항성모의 작품은 왕유의 시만을 그린 화첩의 마지막 면에 실린 것으로 “그윽한 대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 타고 휘파람 분다(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라는 구절을 화제로 적고 있다. 항성모는 인물 표현을 하지 않고 대나무 울타리와 주변의 나무를 통해 詩意를 표현하고 있다. 이같이 인물이 배제된 화면 표현은 화첩에 실린 다른 작품과도 유사한 특징으로 항성모는 화제로 한 시구의 표현에 인물의 행위보다는 산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시정을 그려내고 있다.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는 선면에 그려진 것으로 화면 우측에 시의 전문을 화제로 썼다. 김홍도는 항성모가 화제로 취한 「죽리관」의 1,2구 외에도 “깊은 숲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데 밝은 달만이 와서 비친다(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라는 3,4구의 시의까지도 표현하려했다. 화면 좌측을 중심으로 대숲에 앉아 탄금하는 인물을 표현한 것 외에도 前面의 바위와 나무표현으로 탄금하는 인물을 에워싼 깊은 숲을 암시하며 화면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일군의 대나무 숲 사이에 숨기듯 그려낸 보름달은 발묵으로 어둠을 표현한 화면에 詩情을 강조하는 경물이다.

이케노다이가의 <죽리관도> 역시 「죽리관」의 전문을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간일한 필체로 그려진 이케노다이가의 시의도는 화면 상단에 성근 대나무를 넓게 그려 대나무 숲을 표현하고 대나무 숲 앞에서 탄금하는 인물을 표현하였다.25) 탄금하는 인물의 악기가 넓은 바위 위에 얹혀진 것, 주변에 괴석을 묘사한 것이 이채롭다. 이케노다이가의 <죽리관도> 前面에는 차를 달이는 시동이 표현되었는데 이같은 표현은 김홍도의 <죽리탄금도>중 대숲 뒤에 묘사된 시동의 표현과 연관된다. 중국의 <망천도권>이나 이방운의 <망천십경도>에서의 죽리관이 대나무 숲에 있는 건물이 강조된 반면 김홍도와 이케노다이가의 <죽리관>은 詩의 내용에 부합하듯 대숲에서 탄금하는 인물에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화면의 변화는 중국에서 출간되어 전해 진 『당시화보』에 실린 <죽리관>(도 11)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25) 鄭麗芸, 「文人の詩畵表現-王維「竹里館」詩意圖をめぐって-」, 『鹿島美術硏究』 第17號 別冊, 鹿島美術財團, 2000. pp.59-72.


도 8 항성모, 《왕유시의도책》중 <죽리관>,1629년, 지본수묵, 28×29.7cm, 北京故宮博物院


도9. 金弘道, <竹里彈琴圖>, 김홍도, <죽리탄금도>, 지본수묵, 22.4×54.6cm,고려대박물관


도 10 이케노다이가 <죽리관도>, 지본담채, 116.1×29.2cm, 日出光美術館


도 11 『당시화보』중 왕유의 <죽리관>



시의도가 제작되었다. 반면 명대의 전공을 비롯하여 조선후기의 정선, 김홍도, 이인문
“가다가 물길이 다한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그때를 바라본다(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구절은 북송대부터 그림으로 표현하기 좋은 시구로 주목을 받아왔고 꾸준히 그려졌다. 가장 이른 시대의 작품으로는 앞서 언급한 마린의 <坐看雲起圖>(도1)이고 이후로 元代盛懋<좌간운기도>(도 12), 明代錢貢<좌간운기도>등이 전한다. 조선후기의 윤두서의 <좌간운기시>(도 13), 정선의 <좌간운기>(도 14), 김홍도의 <고사관수도>(도 15), <산거한담>, <임수간운도>, 이인문의 <송하담소도>와 에도시대의 이케노다이가의 <왕유시의도쌍폭> 중 한 폭(도16)도 왕유의 「종남별업」을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둥근 선면에 그려진 마린의 시의도는 馬夏派양식의 변각구도에 산위에 올라 앉아 자연을 관조하는 인물의 뒷모습을 그려 隱者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27) 이같이 구름을 바라보는 단독 인물의 표현은 성무의 <좌간운기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성무는 마린이 여백으로 표현한 구름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제시했을 뿐 물길이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인물의 묘사는 동일하다.

화첩의 형태로 제작된 조선후기의 윤두서의 <좌간운기시> 역시 화제로 택한 구절 중 “흥이 나면 자주 홀로 오가며”라는 시구의 시의표현과 무관하지 않은 듯 앉아 있는 단일 인물의 화면으로 시의도가 제작되었다. 반면 명대의 전공을 비롯하여 조선후기의 정선, 김홍도, 이인문 에도시대의 이케노다이가의 인물 표현은 2인 이상으로 변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물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 구름 이는 그때를 바라보는 인물이 다수로 표현된 것이다.
이같은 화면의 변화 요인을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화가들이 왕유의 「종남별업」전문을 인식하고 “어쩌다가 산에 사는 늙은이를 만나면 이야기를 즐기다가
돌아갈 줄 모른다”는 마지막 구절을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1679년 발간된 『개자원화전』의 <인물옥우보>에 실린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시구를 표현하며 예시한 도상이 두 명의 인물이 담소하는 모습(도 17)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같은 점은 『개자원화전』을 통해 중국의 남종문인화풍을 익힌 조선후기와 에도시대 화단의 상황과도 맥을 잇고 있다.특히 인물 표현등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이케노다이가의 작품이다. 그의 <왕유 시의도> 견본에 수묵과 채색을 통해 화면 전체를 풍부하게 구성하고 있다. 28)

원만한 산세에 채색, 먹의 농담으로 산수와 바위 등의 원근감과 입체감을 나타냈고 『개자원화전』 중에 수록된 荊浩(910-950경),關仝(907-960)의 雜樹畵法과 胡椒點으로 전경의 나무를 표현했다. 화면 중앙에 시동을 거느린 인물과 약초를 캐는 인물과의 대화 장면은 「종남별업」의 마지막 2구인 “어쩌다 산에 사는 늙은이를 만나면 이야기를 즐기다가 돌아갈 줄 모른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번째 시구인 “늙어서는 종남산 기슭에 집을 짓는다”를 표현한 듯 화면 중앙 산자락에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다. 다른 화가들의 시의도와는 달리 시인의 거주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도 明代항성모의 《왕유시의도책》중 11번째 작품과 조선후기 허련의 <산수인물도>는 왕유의 시 「종남산」의 8구 중 각각 2구 씩을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29) 조선후기 화원인 李命基(생몰년 미상)의 <초당독서도>와 明代陳稞의 <王維詩意圖>는 「春日與裵迪過新昌裏訪呂逸人不遇」중 “문닫고 독서로 오랜 시간을 보내니 소나무가 모두 늙어 용비늘이 되었다 (閉戶著書多歲月  種松皆作老龍鱗)”를 화제로 그렸다.


27) 박은화, 「明代後期의 詩意圖에 나타난 詩畵의 相關關係」, 『미술사학연구』201,한국미술사학회, 1994. p.80.

28) 이케노다이가는 화면 좌측 상단에 「종남별업」의 전문과 ‘霞樵’ 서명을 초서체로 적었다. 朝日新聞社, 「池大雅筆王維詩意圖雙幅」, 『國華』1207호, pp.22-23.

29) 왕유의 시 「종남산」중 허련의 <산수인물도>에는

“흰구름 돌아보니 뭉쳐있고/ 푸른 안개는 들어가보니 없어졌다(白雲回望合  靑靄入看無)”, 항성모의 작품에는 "인가에 투숙하고 싶어/ 물 건너 나무꾼에게 물어본다(欲投人處宿  隔水問樵夫)"가 각각 화제로 적혀 있다.


도 12 성무, <좌간운기도>, 盛懋 坐看雲起圖 견본채색,27×28cm, 北京故宮博物院


도 13 윤두서,《관월첩》중 <좌간운기시>, 견본수묵, 19.1×14.9cm(그림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도 14. 鄭敾, <坐看雲起>, 지본담채, 19.8×32.3cm, 개인소장


도 15.김홍도, <고사관수도>, 金弘道, <高士觀水圖>, 지본담채, 29.5×37.9cm, 개인소장


도 16 이케노 다이가,《왕유시의도쌍폭》중 1폭 크기미상, 개인소장


도 17 『개자원화전』중 <인물옥우보>의 왕유 시 표현



두보의 시를 화제로 한 한중일의 시의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제가 된 시는 「南隣」, 「秋興八首」, 「飮中八仙歌」, 「登高」, 「陪諸貴公子丈八溝攜妓納凉晩際遇雨」, 「春夜喜雨」, 「嚴公仲夏枉駕草堂兼攜酒饌)」등이다.

이 글에서는 두보의 「南隣」, 「秋興八首」, 「飮中八仙歌」을 화제로 한 한중일 3국의 시의도를 주로 논의하겠다.


明代의 周臣의 <柴門送客圖>(도 18), 文嘉의 『詩意圖冊』중 <제2폭>, 程嘉燧(1565-1643)의 <柴門送客圖>,왕시민 《두보시의도책》중 <제2폭>(도 19), 조선후기 성재후의 <月下送別圖>(도 20), 작가미상의 <柴門新月圖>(도 21)는 두보의 시 「南隣」중 “흰 모래밭과 푸른 대숲 어우러진 강가 마을에서 날이 저물면 손님 전송하는 사립문에 비치는 달빛이 새롭다 (白沙翠竹江村暮  相對柴門月色新)”는 구절을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주신은 이별하는 인물과 주변의 소나무 등을 화면의 중심에 상세히 묘사하며 詩意를 표현하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수목과 인물 비중이 거의 동일하다. 반면 왕시민은 산수표현에 치중하며 멀리서 관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이별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시간에 畵意를 집중했다. 화면 좌측 상단에 쓰인 화제를 통해 前景에 간략하게 묘사된 인물의 자세가 전별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화면 상단에 담채로 표현한 해진 저녁하늘, 노란 달을 그려 시구에 읊어진 시간을 표현했다.
조선후기 성재후의 <월하송별도>는 화제로 쓰인 시구 표현에 충실한 간략한 획과 담채 표현에 주목된다. 집 주변의 대나무와 수목 표현, 인물의 송별 장면, 저녁시간의 主山과 달의 표현, 집 앞의 모래밭 등도 간략한 획과 담채의 면 구성을 찾을 수 있다.
중국작품에 비해 선보다 면을 통한 화면 구성이 이루어져 있다. 이같은 표현은 일본 藤田미술관 소장의 작자 미상의 <시문신월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주변 배경과 주 인물에 대한 세심한 묘사보다는 흰 모래밭, 대 숲 어우러진 강가, 손님 전송, 사립문, 달빛 등 주요 경물을 간략히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많은 문사들의 題詩등을 종축의 화면에 담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상의 작품들은 달이 뜬 저녁 사립문 앞에서 이별하는 인물을 묘사하며 두보의 시를 표현하고 있다. 주신을 제외하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은 인물보다 배경 표현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陸治의 《唐人詩意圖冊》중 <제3폭>(도 22), 董其昌의 <추흥팔경도>, 왕시민의《두보시의도》중 <제9폭>(도 23)은 766년 두보가 기주에서 지은 시 「秋興八首」중 제 2수의 “보라, 바위 위 등나무에 걸렸던 달이/ 이미 물섬 앞 갈대꽃을 비추고 있지 않은가 (請看石上藤蘿月  己映洲前蘆荻花)”구절을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조선후기 김유성의 <나월로화>(도 24) 역시 제2수의 시구를 화제로 한 시의도이다. 이 시를 화제로 한 시의도는 《천고최성첩》(선문대소장본)(도 25)에도 실려 있어 이미 조선 중기부터 잘 알려진 것으로 추정 된다. 육치의 작품은 화면 좌측에 등나무가 늘어진 바위를 주로 그리고 물의 갈대와 배를 타고 주변을 완상하는 인물을 표현하고 있다.
왕시민은 黃公望의 준법으로 화면 우측에 바위 산을 표현했고 자유롭게 태점을 찍으며 居然의 준법을 사용하고 있다. 화면 좌측에는 갈대 숲과 배를 타고 달을 감상하는 인물들을 그려 적극적으로 詩句를 표현하고 있다.이같이 명청대의 시의도가 舟遊하며 달과 주변을 완상하는 인물을 표현한 것은 시의 작자인 두보가 배를 타고 다니며 말년을 보낸 사실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인과 왕시민은 두보와 두시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시인인 두보를 그려 詩意를 극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김유성의 <나월로화>는 산 등성이에 올라간 인물들이 손을 뻗어 달을 가르키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김유성 작품은 당해원방고금화보의 두보시의도(도 26)를 차용했다.
이같이 손을 뻗어 달을 가르키고 있는 인물의 동작은 《천고최성첩》중 「秋興八首」를 그린 화면에도 등장한다. 《천고최성첩》에는 시의 全文이 화제로 적혀있으나 제2수의 시구 중 “보라”는 간청의 구절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도 18 주신, <시문송객도>,周臣 柴門送客圖 지본설색, 121×57cm,남경박물관


도19 왕시민, 《두보시의도》중제2폭, 王时敏(杜甫诗意图册02) 지본채색,39×25.5cm,北京故宮博物院


도 20 성재후, <월하송별도>, 지본담채, 28.5×20.5cm, 선문대박물관


大阪藤田美術館 柴門新月圖


柴门新月图

도 21 작자미상, <시문신월도>,지본수묵, 129.4×43.3cm,大阪藤田美術館


陸治《唐人詩意圖》之一,蘇州博物館藏 .  請看石上藤蘿月,已映洲前蘆荻花

陸治 唐人詩意圖冊 杜甫詩意圖

도 22 육치, 《당인시의산수책》중 <두보시의도>,지본담채, 27.6×26.3cm, 소주박물관


王时敏 杜甫诗意图册 《杜甫诗意图》册第九开

도23왕시민, 《두보시의도》중제9폭,지본채색, 39×25.5cm,北京故宮博物院


나월로화 [蘿月蘆花] 김유성(金有聲).

도 24 김유성, <나월로화>,지본담채, 21.8×18.5cm,간송미술관


千古最盛帖천고최성첩  추흥팔수(秋興八首)

도 25 작자미상,《천고최성첩》중 <추흥팔수>, 저본담채,27×30.7cm(그림부분), 선문대박물관


도 26 『당해원방고금화보』중 <두보시의도>도 唐解元倣古今畵譜 杜甫诗意图



明代唐寅이 1517년 그린 요녕성박물관 소장의 <臨李公麟飮中八仙圖>를 비롯해 張路(도 27), 尤求, 李士達(1550-1620), 杜菫(15-16세기), 張翀(16세기 활동,생몰년 미상), 陳洪綬(도 28) 등이 그린 횡권 형태의 <음중팔선도>와 조선후기 김홍도의 <하지장기마도>(도29), 이한철의 <취태백도>(도 30), 일본 카이호유쇼(海北友松, 1533-1615), 官南(생몰년 미상,16세기 후반 활동)의 <음중팔선>(도31)은 「飮中八仙歌」를 화제로 했다.

 「음중팔선가」는 酒仙으로 지칭되는 賀知章, 李白, 張旭등 술과 관련된 일화로 유명한 8인의 인물을 읊은 시이다. 명청대의 화가들은 대부분 횡권의 형태로 두보의 시를 그렸다. 화제가 되는 시의 전문을 그림 분분과 별도로 전후에 배치(당인,장로)하거나 화면 중간 중간에 인물과 연관된 시구를 적는 형식(우구, 진홍수)을 취했다. 배경을 생략하거나 장로의 작품처럼 절파화풍의 산수를 간략하게 표현하며 인물의 특징과 일화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인의 경우 백묘로 인물을 표현해 이공린 작품의 원형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이같은 화면 형태와는 달리 조선후기의 김홍도, 이한철의 작품은 8선 중 한 사람을 한 화면에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김홍도는 배경을 생략하고 간략한 필선으로 하지장 관련 시구인 “하지장은 말 탄 것이 배 탄 것처럼 기우뚱거리다가 눈이 아찔하여 우물에 빠지면 그대로 물속에서 자고 있다(知章騎馬似乘船  眼花落井水底眠)”를 화제로 그렸다.
반면 이한철은 “이백은 술 한말에 시 백편을 짓고 장안의 주막에서 자고 있다. 천자가 오라고 불러도 배를 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은 술 속의 신이라고 한다(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中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라는 구절을 화면에 적고 주막에서 대취한 이백의 상황을 설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화원인
김홍도와 이한철이 술에 취한 인물들을 그린 시의도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음중팔선’에 대한 정치,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正祖는 재위14년(1790) 3월 3일에 규장각의 검서관들인 李德懋(1741-1798), 柳得恭(1748-1807), 朴齊家(1750-1805)등에게 <음중팔선도>를 보고 序를 지으라고 했고, 지어낸 序를 보고 등위를 매겼다. 이때 지어진 글에 따르면 당시 규장각 검서관들은 8명의 인물을 酒仙, 훌륭한 公卿, 유명한 士大夫로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을 찾아 임금 곁에 두고 그 학덕과 능력을 바로 쓰게 해야한다는 논지를 펼치고있다.30)

이 같은 논지는 곧 조선후기 지배 계급이 가졌던 ‘음중팔선’에 대한 인식과 화원들에 의해 <음중팔선도>가 그려졌던 배경 또한 알 수 있다. 일본의 카이호 유쇼, 官南의 <음중팔선도>는 6폭의 병풍형식으로 한 화면에 인물을 유기적으로 배치했다. 두 작품 모두 화면에 화제를 적지 않았고 표현된 인물 또한 8명을 이루지 못한다. 官南의 경우 詩句에서 언급한 각 인물의 특정 행동을 표현하려 했음을 알 수 있으나 카이호 유쇼의 작품에서는 각 인물들의 특징을 찾기 힘들다.


30) 강경희, 「詩의 변주, 詩意圖와 序跋- 『飮中八仙歌』, 『飮中八仙圖』, 『飮中八仙圖序』-」, 『동양고전연구』 제37호, 동양고전학회, 2009. pp.189-216. 조인희, 앞의 학위논문, pp.166-168.


장로(張路) <음중팔선서화 수권(飮中八仙書畵 手卷)>

도 27 장로(그림), <음중팔선서화수권>,견본설색, 25.5×329cm(그림부분), 개인소장


진홍수(陳洪綬)의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 권(卷)

도 28 진홍수, <음중팔선도권>, 지본수묵, 31×335.5cm,개인소장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하지장도(賀知章圖)> 또는 <지장기마도(知章騎馬圖)>. 단원은 제시(題詩)로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 첫 두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도 29 김홍도, <지장기마도>, 지본담채, 25.8×35.9cm, 국립중앙박물관


도 30 이한철 李漢喆, <취태백도> [醉太白圖], 지본담채,지름 80cm, 서울대박물관


官南  飮中八仙

도 31 官南, <음중팔선>, 지본수묵, 153.0×224.0cm, 일본 正宗寺



이밖에도 明代文徵明(1470-1559)의 <五月江深>, 唐寅의 <江深草閣圖>, 盛茂燁의 <江深草閣圖>, 淸代王時敏의 《두보시의도책》중 <제8폭>, 조선후기 崔北의 선면 <누각산수도> 는 두보가 지은 시 「嚴公仲夏枉駕草堂兼攜酒饌」중 “평생 외진 곳에 살아 사립문 먼데/ 오월의 강은 깊고 초가집은 쓸쓸하다(百年地辟柴門迥 五月江深草閣寒)”를 화제로 그린 것이다.

明代謝時臣의 《山水圖冊》중 <제7폭>,조선후기 沈師正의 <江上夜泊圖>는 「春夜喜雨」중 “들길도 구름과 더불어 검은데 강가배의 불빛만이 홀로 밝다(夜徑雲俱墨 江船火獨明)”를 화제로 했다.

사시신의 《산수도책》중 <제5폭>, <두보시의도>, 陳嘉言(1599-1678)의 <竹深荷靜圖>와 이방운의 <竹林家>는 「陪諸貴公子丈八溝攜妓納凉晩際遇雨」중 “대숲은 깊어 손님을 머물게 하는 곳 연꽃 깨끗하고 더위를 식히는 때(竹深留客處 荷淨納凉時)”를 화제로 해 여름날의 정취를 그린 시의도이다.31)

淸代왕시민의 《두보시의도책》중 <제6폭>, 조선후기 강세황의 《사시팔경도》중 <初冬>, 이방운의 《8폭산수도》중 <제7폭>은 「登高)」중 “끝없이 낙엽은 우수수지고 그침없는 장강은 도도히 흐른다(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를 화제로 그려졌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3국의 공통 화제가 되었던 왕유와 두보의 시는 은일자의 삶, 산수자연의 풍광, 사계절의 정서등을 표현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음중팔선가」아 같이 중국의 인물 故事를 바탕으로 지은 시가 시의도의 화제로 애용되기도 했다. 이같은 화제들은 산수인물화로 그려졌으며 지역에 따라 배경이 되는 산수 표현에 중심을 두거나, 인물의 동작이나 행동 표현을 강조하며 詩意를 표현하고자 했다. 특히 조선후기와 에도시대의 시의도 중 인물의 표현과 관련해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의 영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1) 두보의 시를 그린 사시신의 산수도책 중 제5폭의 그림, 이방운의 <죽림가>는 『唐解元倣古今畵譜』중 <두보시의도>의 화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련 내용은 조인희, 앞의 학위논문, p.191.



明代文徵明(1470-1559)의 <五月江深>


王时敏 《杜甫诗意图》册第 八开 百年地辟柴門迥 五月江深草閣寒


唐寅의 <江深草閣圖>


심사정(沈師正)(1707-1769)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



Ⅲ. 3국 시의도의 특징과 영향


이상에서 동아시아 3국에서 공통된 화제로 그려진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의 종류와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명청시대, 조선후기, 에도시대의 시의도 특징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자국의 화단에 미친 영향 등을 알아보겠다.


1. 詩에 대한 尊崇이 이룬 情景交融


왕유와 두보의 시를 화제로 그린 명청대 화가의 작품은 기존에 이루어져 있던 두 시인과 詩에 대한 尊崇과 회화 표현에 대한 공유된 인식의 일환으로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유가 그의 별장이 있던 종남산 자락 ‘망천’에서의 보낸 시간은 그의 詩作과 화가 활동에 중요한 動因이 되었다. 왕유의 시는 자연시, 산수시로 지칭되며 후대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왕유는 ‘詩畵一律’이란 예술적 성취의 典範을 이룬 문인화의 鼻祖로 추앙되었다. 두보와 두보의 시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에서 두보에 대한 평가는 이미 中唐代부터 시작되어 그의 시는 애국애민 사상이 강조되어 평가되었고 晩唐代문단에서는 杜詩의 형식예술이 중시되었다.32) 이러한 두시를 화제로 그린 시의도는 이미 북송대부터 그려졌다.


이처럼 명청대에 왕유와 두보의 시 중 선택된 화제가 산수 인물화의 형태로 그려진 것은 董其昌(1555-1636)의 화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동기창은 『畵旨』의 畵論을 통해 “자연을 마음으로 관조함으로써 마음과 대상이 하나로 합치되면 최후에 심령의 신(본질)이 산수에 의탁하여 표출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왕유와 두보의 시는 적절한 매개체가 되었고 시의도가 단순한 시구의 도해가 아닌 회화라는 특징과도 부합했다. 동기창의 화론은 당시 화가들이 情景交融의 경지를 보인 두 시인의 시를 그린 것과 맥이 닿는 이론임을 알 수 있다. 왕시민의 《두보시의도책》題跋에는 명청대 화가들의 이같은 인식의 단면이 잘 나타나 있다.

왕시민은 제발을 통해 두보시를 화제로 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33)

왕시민은 “두보의 시는 여러 가지 묘함을 널리 갖추고 있어 뜻의 구상과 문장 짓는 솜씨에 탁월한 짜임새가 있으며, 그 깊고 웅장함은 실로 고래를 끌고 봉황의 정수를 더듬는 힘이 있으니, 그리하여 마땅히 백대의 표준이요 고금의 으뜸이다. 내가 매번 그의 칠언시를 읽을 때마다 그 경물 묘사가 아름답고도 높고 서늘함이 내 눈에 또렷하여 황홀하기가 내 몸이 그 속을 노니는듯하고, 문득 흥에 부쳐 마음이 시원하더라”고 적고 있다. 이어 왕시민은 조카의 부탁으로 화첩을 제작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추운 날 창가에서 여가가 날 때 마침내 경치가 있는 좋은 聯句를 뽑아 먹점을 찍고 선염을 베풀어 그림을 완성했다”고 했다. 즉 情景이 交融하는 두보의 7언 율시 중의 일부 구절이 왕시민의 두보시의도의 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제발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마르고 얼어붙은 폐장으로 속되게 메꾸었을 뿐, 시인의 비동하는 뜻과 운치는 그 약간도 얻지 못했구나. 시는 글자마다 그림이 있는데, 그림은 붓질마다 시가 없다”라며 詩畵一律이란 당시 화가들의 예술적 지향을 밝히고 있다.


명청대의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육치의 《당인시의산수책》, 사시신의 《산수도책》, 항성모《왕유시의도책》, 왕시민의《두보시의도책》, 석도의 《두보시의도책》등 화첩형태가 다수 전해진다는 점이다.
화첩의 형태는 시인과 시에 대한 대중성, 선호는 물론 개인 소장을 통한 감상, 품평 등으로 시의도 형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예증한다.


32) 고진아, 앞의 책,pp.302-304.

33) 題跋의 全文은 다음과 같다. “少陵詩體弘衆妙  意匠經營高出萬層  其奧博沈雄  眞有掣鯨魚 探鳳髓之力  故宜標準百代  冠古絶今  余每讀七律  見其所寫物  瓌麗高寒  歷歷在眼  恍若身遊其間  輒思寄興盤礡  旭咸賢甥以巨冊屬畵  寒窓偶暇  遂拈景聯佳句  點染成圖  顧以肺腸枯凅俗賴塡塞  於作者意愜飛動之致  略未得其毫末  詩中字字有畵  而畵中筆筆無詩  慢借强題  鈍置浣花翁不少  慙愧慙愧  西廬老人王時敏”



2. 성리학 이념상의 구현


조선 후기에 그려진 왕유와 두보 시의도는 주로 은자의 삶, 四季山水의 抒情과 인간의 同和등이 그 주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시인과 시에 대한 위상, 선호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치국이념인 성리학의 문예적 구현과도 연관된다. 윤두서, 정선, 김홍도등이 그린 왕유 시의도의 주제는 곧 隱者의 삶이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입신양명하는 삶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 있거나 出仕를 기다릴 때 스스로를 단련하던 또 다른 理想像이었다. 왕유가 살았던 성당시대에 성행했던 은거, 은일의 풍조가 왕유의 삶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34) 蘇軾(1036-1101)이 의해 왕유의 망천 생활과 그 풍취, 정신 세계가 높혀진 것은 조선후기 문인사대부들의 왕유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두보는 조선에서 憂國憂民하는 忠節의 인물로 탁월하게 언어를 조탁하는 시인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은 忠節이 중시되는 조선사회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시는 시학의 典範으로 자리했다. 감각적이고 회화성 짙은 그의 詩語는 강세황, 심사정, 이방운 등이 사계 산수의 정취와 인간의 同和를 표현하는데 화제가 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3국 혹은 한중간에 공통으로 그려진 화제를 보면 山水의 풍광과 사계절의 정서가 표현된 시구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漢代의 충신인 朱雲의 故事를 읊은 두보의 시 「折檻行」은 <朱雲折檻>으로 그려져 世敎의 역할을 수행했다.35)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을 같은 週期로 보는 성리학적 인식과 충절의 삶을 중시하는 치국 이념 등이 조선후기 문인 사대부들의 문예적 지향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조선후기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의 화면 표현은 중국에서 전래된 중국 회화와 명청대에 간행되어 전래된 중국 화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회화가 모본이 된 경우는 이방운이 그린 왕유의 『􋺷망천집』􋺸 관련 작품에서 잘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출간된 『당시화보』, 『당해원방고금화보』, 『개자원화전』등은 중국의 남종화풍이 조선 화단에 정착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寫意를 중시하는 문인화의 이해와 시의도의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명청대 화가들이 시인에 대한 지식이나 시에 대한 화가적 이해를 바탕으로 詩意를 표현한 것과는 달리 조선후기 화가들은 이러한 화보의 차용과 응용으로 시의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개자원화전􋺸 <인물옥우보>중의 유명 詩句에 따른 인물 표현의 예는 조선 후기 화가들이 詩의 話者(詩人)를 화면상에 적극적으로 등장시키며 詩意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한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조선후기 시의도 형태의 경우 대부분 한 폭의 단일 작품으로 현존하고 있다.
명청대와 같이 단일 시인의 시구를 그려 엮은 화첩 형태는 이방운의 《백거이시의도첩》, 이인문의 《閒中淸賞帖》정선과 이광사의 《사공도시품첩》의 정도에서 찾을 수 있다.36)이러한 작품의 장첩 형태 등은 지역 간의 회화 창작과 수용과 관련해 문화적 인식 차이, 전승 과정의 문제등으로 논의 할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이다.


34) 전영실, 「王維詩에 나타난 詩人의 은일과 관직에의 모순된 감정 연구」, 『중국연구』제50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10. pp.193-213.
35) <주운절함>은 조선시대 화원이 중국의 유명 詩文을 화제로 그려 합벽한 『藝苑合珍』에 실린 시의도로 왕실의 교육과 감상을 위한 것이다. 현재 3권으로 일본 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다. 유미나, 앞의 논문, p.144. 참조.

36) 간송미술관 소장의 《閒中淸賞帖》은 李寅文이 그림을 그리고 洪儀泳(1750-1815), 兪漢芝(1760-1834)가 두보의 시 「戱爲韋偃雙松圖歌」, 「早起」, 「丹靑引贈曺將軍覇」, 「右僕射相國張公九齡」등을 화제로 적은 화첩으로 두보시의도첩과 관련된 보다 심화된 논의가 필요하다.



3. 詩畵공존 형식의 자국화


에도시대에 그려진 왕유와 두보의 시를 화제로 하는 시의도는 극히 소략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작품도 10여점을 넘지 못한다. 중국화보인 『개자원화전』이 1748년 일본에서 출판되며 일본에서의 남화 화풍을 정착시키는데 역할을 했지만 寫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시의도의 제작과 연계될만큼 에도 화단의 수용은 적극적이지 않았던듯하다. 소상팔경, 악양루등 중국의 詩文을 화제로 하는 그림은 이미 헤이안 시대부터 그려져 왔지만 귀족들의 주거공간의 장식화 역할에 그쳐 지배 계층에서의 대중화는 쉽게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詩畵의 공존이란 인식은 중국 시 대신 일본 고유시인 와카(和歌)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여 시를 화제로 그리는 회화라는 틀만을 유지하며 중국의 시의도와는 화제면에서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에도시대에 와서 漢學이 융성하고 당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漢學派를 중심으로 중국 시를 화제로 하는 시의도가 이케노다이가, 요사부손 등 일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현존하는 에도시대의 왕유 시의도는 이케노다이가의 작품 정도로 한정되어 그 특징을 일반화한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다. 다만 에도시대의 화단과 문단에 시를 화제로 그림을 그린다는 인식은 활발했던 것 같다.
이케노다이가는 요사부손과 함께 청대 李漁(1611-1685)의 시를 화제로 《十便十宜帖》을 제작했다. 이케노다이가가 10가지의 유익한 부분을 그리고 요사부손이 10가지의 즐거움에 대한 부분을 그렸는데 화제 선택이나 화면의 표현에서 명청대나 조선후기의 시의도와는 차별화된 양상을 보인다.


에도시대 화가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선호와 답습은 인식적인 면에서 시화일률론에 대한 동의, 중국 화보를 통해 익힌 준법 등의 화면 활용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사부손의 경우 일본의 짧은 정형시인 하이쿠(俳句)를 잘 지은 大家로 알려져 있고 이를 화제로 하는 그림, 즉 하이가(俳畵)를 그리는 화가로도 활약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시의도가 에도시대에 어떻게 자국화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로 들 수 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시를 화제로 하는 회화라는 기본 형식은 유지하며 내용의 변화를 이루어낸 양상은 문예 주체자의 사회 환경과 문화에 따라 새로운 회화세계를 이룬 경우로 설명될 수 있다.



Ⅳ. 결론


이상에서 16-19세기 동아시아 3국에서 동일한 화제로 그렸던 왕유시의도와 두보시의도의 양상과 특징을 알아보았다.


중국의 문학적 영향권에 있던 조선 후기와 에도시대는 왕유와 두보 작품의 문학적 탁월성과 시가 지닌 회화성, 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에 긍정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왕유의 『망천집』의 일련의 시들과 「종남별업」, 「종남산」, 「春日與裵迪過新昌裏訪呂逸人不遇」, 「桃源行」의 시구들이 3국 시의도의 공통된 화제로 그려졌다. 두보의 경우 「南隣」, 「秋興八首」, 「飮中八仙歌」, 「登高」, 「陪諸貴公子丈八溝攜妓納凉晩際遇雨」, 「春夜喜雨」, 「嚴公仲夏枉駕草堂兼攜酒饌)」등의 詩句가 공통의 시의도 화제가 되었다.


화제가 된 시의 내용은 은일자의 삶을 읊은 것, 산수자연의 경치나 사계절의 정서를 표현한 것, 중국 유명인의 故事를 표현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화제는 3국 모두 산수 인물화의 형태로 화면에 표현되었다.

명청대 화가들의 경우 <음중팔선도>류를 제외하면 다른 시의도는 섬세한 필치로 화면 가득 경물을 배치하는
치밀한 필법이 특징이다. 또한 詩意를 표현하기 위해 시 내용의 배경이 되는 산수 표현에 보다 적극적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화가들의 시의도는 시에서 언급된 경물의 특징을 간략한 필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시의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당시화보』, 『당해원방고금화보』, 『개자원화전』 등 화보의 화면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개자원화전』의 <인물옥우보>에 실린 인물 표현을 적극 수용하여 중국의 시의도와는 다른 화면을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화제의 詩意표현에 詩의 화자인 인물을 자세, 동작 등을 강조하며 산수표현보다 중시한 경향을 보인다. 에도시대 시의도의 경우 주목되는 것은 『개자원화전』에 소개된 준법을 소화하여 화면에 유기적으로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왕유와 두보의 시를 화제로 한 작품이 漢學派를 중심으로 그려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게 화제 시구에 언급한 경물 외에도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경물을 추가하며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다.


시의도의 장첩 형태를 살펴본 결과 명청시대의 경우 화첩형태가 다수 전해져 시인과 시에 대한 대중성, 선호는 물론 개인 소장을 통한 감상, 품평 등으로 시의도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조선후기는 단품으로 전하는 것이 주를 이루며 에도 시대의 경우 병풍형식의 예를 통해 장식품으로서의 회화 효용을 추론케 한다.


이상의 논의 결과 명청시대의 화가들은 시의도를 통해 宋代부터 이어진 詩畵一律의 예술적 지향을 이루려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조선 치국의 이념이 된 성리학적 理想像과 自然觀을 바탕으로 시의도를 통한 詩畵一律이란 문예적 성취를 추구했다. 반면 에도시대 화가들에게 왕유 시의도와 두보시의도는 중국문화에 대한 선호의 대상으로 인지되며 시도되었다. 문인계급의 부재라는 사회적 특성은 당시의도의 제작을 적극화하는데 쉽지 않았고 시를 그린다는 형식적인 면을 자국화해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 화면에 옮기는 하이가(俳畵)의 발달로 이어진 특성을 보인다. 동아시아 3국에서 공통된 화제로 그린 왕유, 두보시의도 비교를 통해 시의도가 발생국에서 발달되는 과정은 물론 주변의 동일 문화권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수용하는 지역의 사회 이념과 미적 취향을 담으며 변화하고 자국화되며 더 나아가 독자적 회화 영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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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n Tang’s Poem-based Paintings in the East Asian Countries


Cho, InHee


This article aims to find out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the poem- based paintings of China(Ming dynasty & Qing dynasty), Korea(Joseon dynasty), and Japan(Edo dynasty) in the 16-19 centuries through the comparative study of these countries' paintings based on the similar lyrics of Wang Wei(699-759) and Tu Fu(712-770). They seems to be sharing the literary aesthetics of paintings and the special respects on the excellent picturesqueness of their poems. Meanwhile the point is that each country had developed its idiosyncratic traits while they chose the same lyrics of Wang Wei and Tu Fu as the subjects of their paintings. Chinese painters tried to achieve the aesthetic goal of “the homogeneity of painting and poetry” continued from the Song Dynasty. Joseon’ painters had an orientation to stress the ideological nature of the confucian philosophy called Sung Confucianism. In the Edo Dynasty of Japan, the arts for the literati were less salient with the political and cultural dominance of the Samurai class, which was resulting in the premature in the poem-based painting genre. Rather the concern with literature was developed into the blooming of its ingenious poem style called “Haiku.” In conclusion, the three countries of the East Asia developed their unique style while sharing the oriental tradition of the poem-based paintings.


Keywords: East Asian Culture, Chinese Cultural Circle, painting and poetry are one, Poem-based Paintings, Wang Wei, Du Fu, Ming dynasty & Qing dynasty, Chinese picture book



투고일: 2017. 1. 22. / 심사개시일: 2017. 1. 26. / 심사완료일: 2017.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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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宋 趙葵《杜甫詩意圖》局部


趙葵

(1186年9月4日-1266年12月24日),字南仲,號信庵,又號庸齋,衡山(今屬湖南)人,南宋抗金儒將、宗室、畫家、詩人。京湖制置使趙方次子、趙范之弟。經歷孝宗、光宗、寧宗、理宗、度宗五朝,一生以儒臣治軍,為南宋偏安作出卓越貢獻。咸淳二年(1266年)逝世,追贈太傅,諡忠靖。趙葵工詩善畫,傳世作品有《杜甫詩意圖》。

https://kknews.cc/culture/68rvyvm.html


李昉運, 輞川別墅圖,


宋代郭忠恕(传)摹《辋川图》局部


元代王蒙临《辋川图》局部


坐看雲起圖 終南別業


李昉運,《輞川十景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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