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7
7월10일[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r-P7ozM9yM (김용원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치유면 치유, 소생이면 소생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예수님 공생활의 절정기가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회당장의 딸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완전 절명한 그녀를 소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치유사화, 소생사화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궁극적인 가르침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권능으로 소생된 회당장의 딸은 물론 생명과 젊음과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인지는 모르지만 남아있는 생애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3~40년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또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생이 무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소생보다는 영원한 주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근원적 결핍과 모남과 나약함으로 인해 틈만 나면 여기저기 상처 입고 영혼의 피를 흘리던 저였습니다. 피투성이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혈루증 여인처럼 솔직하고 용기 있게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는 제가 더 심각한 중증의 환자였습니다.
어떻게서든 혈루증 여인처럼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옷자락 술에 내 손길만 닿으면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간절한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육신은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허깨비처럼,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숨만 겨우 쉬고 있지,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왔습니다.
다시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손길에 온전히 의탁함을 통해, 그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를 온전히 차지하게 하시게 되도록 청해야겠습니다.
내 안에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더 커지시는, 그래서 잠시라도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를 완전히 비워봐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iHJ3CfOQHM
++++++++++++++++++
<세상 사람들이 바라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과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어 곡을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나 회당장의 희망은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기 딱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동행하며 세상이 비웃을 일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진정 그것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일일까요?
영화 ‘킨’(2018)은 고아로 한 가정에 입양되어 자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년 엘라이가 그 주인공입니다. 엘라이는 양아버지를 돕기 위해 방과 후에 고철을 찾아 파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고철을 발견합니다. 엘라이가 그 고철을 만지자 총으로 변합니다. 그 총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고 지구의 것이 아닙니다.
이때 6년간 감옥에 있다가 지미라는 아들이 출소합니다. 지미는 갱단에게 돈을 빌렸었는데 6년 동안 6억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갱단은 그 돈을 갚지 않으면 지미의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습니다. 엘라이는 지미와 도망치며 지미를 돕겠다고 합니다.
아이가 무슨 힘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에게는 총이 있습니다. 희망은 능력이 주어졌음을 믿을 때 생깁니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면 능력이 주어졌음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미가 총으로 형을 구하고 있는 동안 외계인들이 도착합니다. 외계인들은 엘라이가 지구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종족이기 때문에 총이 작동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엘라이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지구상에서 자신만이 총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희망은 믿음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옆에 두고 희망하지 않는다면 믿음도 증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도끼가 있다면 나무를 찍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나무를 베고 싶어진다면 그 사람이 보지 않아도 톱을 가졌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집에는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과 후의 차이는 매우 컸습니다. 전기로 불만 밝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밥도 지을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고 TV도 볼 수 있고 컴퓨터도 살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자 바랄 것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있다면 전기가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비웃을만한 것들을 바라게 됩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당시 말도 안 되는 아주 큰 병원을 시골에 짓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병원이 지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병원은 존재만으로 비오 성인이 하느님과 동행하고 있었음을 믿게 하는 표징이 됩니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하늘나라를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겠다고 꿈에서 베드로 성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선교회를 보며 많은 이들이 마데 데레사도 하느님과 동행했음을 믿게 됩니다.
가장 큰 선교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밖에 나가 주님을 믿으라고 전하고 다니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선교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만한 것을 바라고 그것을 이뤄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고 하혈병이 고쳐지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된 것처럼,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할 수 있는 일을 희망하는 것이 더 큰 선교의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6월 16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해외에 나와 있기에 최근 4년간 참석을 못하였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은 제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02년 사세성화의 날입니다. 당시 저는 경기지역에서 사목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사목체험’을 발표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경험도 일천하고, 사제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고사했습니다. 신부님은 강사료라는 당근과 선배의 권위라는 채찍으로 제게 다시 권하였습니다. 저는 당근에 마음도 끌리고, 선배의 권유도 무시할 수 없어서 발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문에서 읽었던 글로 발표를 시작하였습니다. ‘춘잠도사사방진(春蠶到死絲方盡) 납촉성회루시건(蠟燭成灰淚始乾), 미득선수실( 未得先愁失실) 당환기작비(當歡己作悲),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저의 말에 마음을 조금씩 열어갈 때 저는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니다. 사목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목이란 습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3년간 있었던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벌써 21년 전의 추억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듯이 저의 발표는 교구청에 있는 신부님들께도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목국장 신부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제갈공명도 아닌데 교구청에서 저를 찾아왔다니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국장 신부님은 교구 사목국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저는 겨울에는 30일 피정을 하고, 여름에는 성지순례를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국장신부님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저는 2002년 10월 1일부터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본당에서 강론만 하던 제게 교육담당 사제의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보통 2시간 강의를 준비해야 하고, 18개 지구에서 실시하는 교육의 강사를 섭외해야 했습니다. 한두 번은 모르지만 18번을 강의하려고 하는 강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의에도 경험이 생기면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성격이라 2년 전에 강의를 부탁하면 대부분 강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사목국에서 3년을 지내고 캐나다로 이냐시오 영성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우연히 찾아온 발표의 기회가 저의 사제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3년 사제성화의 날에 교구장님은 사제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직접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교구장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교구장님은 이 시대의 사제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이며 영성은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 전담 사제를 더욱 늘려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쇄신 기도 피정, 성체조배 피정, 이냐시오 피정, 향심기도 피정, 예수마음 기도 피정’ 중의 하나는 3년에 한 번씩 꼭 신청하라고 하였습니다. 피정을 통해서 다양한 교회의 영성을 체험한다면 사제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영향으로 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는데 교구에서는 사제성소를 늘려가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성소를 늘릴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제들이 영성으로 무장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제들이 헌신한다면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사제성소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신앙생활의 성장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유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의 사제들이 교구장님의 사목지침을 잘 따른다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치유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께 나타나 예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했던 것같이(2열왕 5,11),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18-19.23-25)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생명의 주님’이라는 말은, 인간의 목숨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만 하시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즉 멸망을(영원한 죽음과 소멸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해서 잃게 됩니다. <얻으려고 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은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이제 곧 소녀를 살리겠다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긴 잠’일 뿐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라자로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라자로의 경우에는, 그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머무르신 다음에(요한 11,6), 즉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 그에게 가셨습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딸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에게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왔고,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르 5,22-23; 루카 8,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 때문에 멈추게 되었고, 그 사이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마르 5,35; 루카 8,49)
표현만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데, 전후 상황을 보면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원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8,5-13), 굳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즉 말씀만으로 회당장의 딸을 바로 고쳐 주실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자로의 경우에는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게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해석됩니다. 회당장의 경우에는, 당신이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계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인데, 사실 이 이야기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사실상 죽은 것과 같은, 또는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루카 8,43)
그 여자의 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여자는 완전히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라도 하나의 희망이 남아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3,10). 분명히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직접 간청하지 않고 몰래 옷을 만진 것은, 그 병의 특성 때문에, 즉 수치심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 직접 간청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 미신이 되어버립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믿음이 기적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공관 복음에 늘 함께 등장합니다. 복음서마다 이야기의 길이는 다르지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안에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자리합니다.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는 형태입니다. 아마도 두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처럼 전해지고 그것이 그대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충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청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회당장이 자신의 딸에 대하여 ‘방금 죽었습니다.’고 말함으로써 치유 이야기가 아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는 손을 얹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원문에는 손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의미를 살려서 ‘한 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혈하는 부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낫습니다. 그는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병이 낫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두 이야기는 회당장과 부인의 굳은 믿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한 손으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그분의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야기가 보여 주듯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의 5,21-43에 보도된 복합기적사화를 옮겨 쓰면서 흥미거리 일화는 모두 삭제하고 그리스도론적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습니다. 즉, 총 23절을 단 9절로 줄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내용을 간단히 줄이는 데는 요약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수정하는 방법을 쓰는데, 물론 무턱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집 의도에 따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마르코복음과 비교해보면, 마태오는 마르코가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5,22)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냥 한 사람의 회당장으로, 회당장의 딸이 다 죽게되었다(5,23)는 부분을 "방금 죽었다"고 바꾸었고, 하혈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5,29)는 대목을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난 뒤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대뜸 여인의 병이 나았다고 바꾸는 등 여러 부분을 자신의 편집의도에 맞게 축소 수정시켰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사가는 기적사화의 주체인 예수님과 대상인물을 동시에 부각시키면서 기적을 유발시키는 "믿음"을 촉매제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기적의 주체인 예수님만 부각시키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기적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움직여 주는 동기를 대상인물과 관계없이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회당장의 경우에는, 아이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는 "간청"(기도)이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으며,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는 "생각"(믿음)이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코는 회당장의 간청과 여인의 생각 자체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나, 마태오는 간청과 생각 자체가 기적을 유발하는 중요한 동기는 되지만 기적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오는 결국 기도나 믿음 자체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더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의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 기도와 믿음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 하고 말씀을 내리시자 여인은 즉시 치유되었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24절) 하신 예수께서 소녀를 잡아 깨우시니 소녀는 다시 삶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행위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저 강렬한 기도와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와 믿음의 방향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회당장 야이로는 가파르나움의 회당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마르 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마르 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죽은 딸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두 여인을 되살리십니다. 하나는 회당장의 딸로 죽었다가 되살아나고, 또 하나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로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가 치유받게 됩니다.
두 기적 이야기 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조금 차이도 있습니다. 회당장의 딸은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되살아났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자신의 믿음 덕분에 살아납니다.
또한, 회당장의 경우는 예수님께 직접 믿음을 고백하며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만, 혈루증 여인은 소심한 듯 마음속으로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구원을 가져다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야곱은 에사우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치다가 꿈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처음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사악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야곱에게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곳을 베텔, 곧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성소, 곧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복음 3장 21절 / 묵시록 21장 22절 참조)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게 된 우리에게 오늘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할머니의 손>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누워 계실 때가 많았는데, 제가 방학 때 인사를 드리면 가만히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놓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건네면서 제가 방을 나설 때까지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제가 찾아뵐 때마다 변함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 있는데, 아흔이 지난 할머니의 손이 거칠어도 저는 그 손에서 늘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 누워 있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녀를 살린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힘없이 축 늘어진 연약한 손에 예수님의 생명의 손길이 닿자 소녀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 손으로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사랑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며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되어줍니다.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손은 자녀의 신경조직을 자극하여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발육을 촉진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이의 머리나 얼굴 등 몸을 쓰다듬는 신체적 접촉이 피부의 신경세포를 따라 대뇌에 전달되어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에 긍정적인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태초의 하느님의 손을 생각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손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카인은 아우 아벨을 그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이 땅에 폭력과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들어 자손을 축복하셨고, 모세의 손을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으며 사무엘의 손을 들어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종종 인간의 손은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손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사람들의 폭력적인 손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 손을 축복의 도구가 되게 하시며 우리 손이 주님의 손처럼 쓰일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만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손이 아닌, 주님의 손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나 협력이 필요하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굴하지 않는 믿음, 창피함도 이겨내는 믿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실 수 있지만 준비된 마음 안에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 그 바탕이 됩니다.
저는 기도를 청하는 분에게 가능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의 역사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안수를 받는 사람과 공명을 이룰 수 있으며 저의 간절한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를 청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안수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을 체험하게 합니다. 안수하는 사제와 받는 이의 마음이 통하게 될 때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던 학생, 혀암으로 시련에 봉착한 자매, 위암 수술을 마친 자매,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는 형제, 난소암으로 불안해하는 자매, 가슴 깊이 미움의 응어리를 가진 사람, 용서와 화해를 원하면서도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 상처를 덧내고 있는 분, 남모르는 아픔을 겪는 모든 분에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해 주시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 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 굳이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으로 경탄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삐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비웃을 것이며 구경거리로 삼고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믿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를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주고, 세례명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 주는 가운데 사랑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런 회사는 잘 운영될까요? 아니면 망할 것 같습니까?
CEO의 계획을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회사, 부하 직원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회사, 직원들은 CEO의 계획을 잘 숙지해서 그 계획을 더 발전시키는 회사.
아마 잘 운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면 어떨까요? 직원들이 CEO의 계획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CEO 본인도 직원을 무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이런 회사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쫄딱 망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하느님의 계획과 여러분의 계획을 비교하면 어떤 계획이 나을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계획이 훌륭하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느님의 계획을 잘 숙지해서 더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계획만을 내세우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청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청하고 또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물 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 이 상황(자기)을 보게 되면서 물속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많은 성인성녀께서는 이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떤가요?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회당장이 찾아와 예수님께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그 상황만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자고 있을 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소녀의 손을 잡아 살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장의 집을 갈 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치유의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 역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 계획이 아닌,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 내밀어요>
마태오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손 내밀어요>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슬픈 벗에게
기쁨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아픈 벗에게
돌봄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지친 벗에게
돋움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외딴 벗에게
이웃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멈춘 벗에게
나감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찾으라>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이다.”
“항상 깨어 있으시오.”(마태25,13)
왜관 수도원에서 내일 7월11일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는 김치삼 알렉산델 수사의 상본 성구입니다.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걱정하지 마라.”(이사41,10)
역시 내일 7월11일 왜관 수도원에서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는 고건상 멜키올 신부의 상본 성구입니다.
1973년 첫서원후 반세기 50년 동안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면서 수도원에서 정주해온 두 분 수도자의 삶이 참 위대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두분의 응답의 노력이 함께 이뤄온 놀라운 성취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제가 참 좋아하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 118,1)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2ㄱ)
하루하루 하느님만을 찾으며 50년 동안 평범한 일상에 충실해온 두분 수도자입니다. 위 수도자는 저보다 두 살 위이지만 저는 1986년 첫서원을 했으니 수도연륜으로는 13년 선배입니다. 당시 저는 교대재학중 입대하여 군복무중이었고 저는1974-1981년까지 8년동안 교편생활하다 1982년 입회했으니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참 다양하고 신비롭습니다.
참 중요하고 힘든 것이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옛 사막교부의 금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절박한, 절실한 갈망이, 열정이 있을 때, 때가 되면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어제의 각별했던 만남에 감사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열망이 있기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일입니다. 1998년부터 그러니까 25년동안 한결같이 제 시집과 강론을 정리하여 복사 제본해다 준 자매인데 대학 강의중 3월초 과로로 인한 뇌졸증으로 쓰러진후 재활병원에 입원중 만5개월만에 처음 수도원 오전 10시 주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 미사에 참석했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특별한 반가움에 외출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나눴고 다시 재활병원에 귀원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간절한 열망, 절박한 마음에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서 제 때에 찾아와 만나 주시는 주님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아, 문득 의술醫術이 인술仁術임을 보여준 치과의사 형제의 감동적 일화가 생각납니다. 연초록 풀잎에 맺힌 투명한 빗방울이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진과 함께 보내준 카톡메시지입니다.
“주일이지만 보호자분의 간절한 요청으로 아는 수녀님과 함께 뇌졸중으로 와상중인 35세 청년의 치아 검진을 위해 봉천동에 갑니다...빗속을 뚫고 가서 만난 봉천동 청년은 참 해맑았습니다. 헌신적인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져서 그 짧은 검진과 간단한 잇몸 처치의 시간이 제겐 더 큰 은총이었습니다...투명한 빗방울처럼 제 영혼이 맑아지는 밤이길 기도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만남에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간절한 열망이 있을 때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the sacred place)’가 됩니다. 오늘 형 에사우의 보복을 피해 도주중인 야곱의 심정은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간절히 하느님을 찾았을 것이며 꿈중에 주님을 만나 확약을 받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땅으로 데려 오겠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자 소스라치게 놀라 고백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베개를 가져다 기념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작명합니다. 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주님과 만남의 추억은 늘 평생 야곱의 뇌리에 생생했을 것입니다.
절박하게 하느님을 찾을 때, 바로 거기에 하느님은 찾아 오시고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창세기의 야곱처럼 양상을 달라도 주님을 찾는 갈망은 하늘에 닿았기에 마침내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당시 곤경중에 있던 분이 둘 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갈망과 열망의 사람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던 둘뿐이었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쫓아내신 뒤에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그 사이 예수님은 자기 옷자락에 손을 댄 여자의 간절한 열망의 믿음을 알아채린후 즉시 치유의 구원을 선언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주님과 만남의 일화인지요!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주님을 찾으십시오. 간절한 열망의 믿음이 있을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여기가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입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1,10).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믿음으로!>
오늘 복음(마태9,18-26)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하혈병)을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여인을 살려주십니다.
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한 회당장은 예수님께 이런 믿음을 드러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9,18) 그리고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는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이런 믿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9,21)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딸을 다시 살리시고, 하혈하는 여자를 구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큰 힘'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믿음, 곧 내 안에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창세28,10-22ㄱ)는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을 피해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는 중에 베텔이라는 곳에서 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모습입니다. '베텔'은 야곱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만난 곳'이고, '하느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면 그렇게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야이로 회장장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살아났습니다.
'나의 베텔은 어디인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곳, 내가 주님을 만나 다시 부활하게 하는 그 베텔은 어디인가?' '나의 믿음을 더해지게 하는 그 베텔은 어디인가?'
이 물음 안에 머물러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TchJgWRZZU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 9, 24)
어떤 눈빛으로
주위를
바라보는지를
되돌아봅니다.
한마디의
진심어린 대화가
더 중요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부딪히고
갈등하며
우리 자녀들은
성장합니다.
뒤돌아보면
모두가
부족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반성문이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집착을 펴면
서로를 좀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건강한 성장이
있습니다.
성장하려는
자녀를 부모가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너무 큰 기대에서
실망과 아픔이
누군가를
짓누르는 억압이
됩니다.
성장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여정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쓰러짐과
일어남
자고 깨어남을
반복하며 우리는
성장하여
나갈 것입니다.
믿음의 눈빛이
사랑을 깨우는
치유입니다.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