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며칠이던가? 8월 5일이다. 하지를 지난지 벌써 달포가 되어간다. 그래도 아직은 해가 길어서 장지천을 지나니 세상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헤드랜턴은 필요 없게 되었다.
걷기 시작한 이후 한 시간 정도 지났다. 발의 상태나 다른 몸의 상태는 문제가 없는데 슬슬 입 속이 마르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아직 본격적으로 걸은 것도 아닌데? 또한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 햇볕을 받아서 아직 공기가 데워진 것도 아니고 또한 빨리 걸은 것도 아닌데 벌써 입속에서 물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다니? 과연 오늘 물을 몇 병이나 마시게 되는 것인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미국 사막을 운전하다 보면 보이는 주유소에서 무조건 기름을 넣으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보이는 식수대에서 무조건 물을 마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내천에 들어섰다. 이제 날은 훤히 밝았고, 성내천에는 동네 주민인 듯한 아침 걷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부지런한 사람들. 날이 덥더라도 역시 걸을 사람들은 걷고 운동할 사람들은 운동하고 있었다. 성내천에 들어서면 음수대가 있다. 그곳에서 물을 주저 없이 맘껏 마셨다. 그 다음 음수대는 한참 뒤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길나섬의 첫 물을 마셨으며, 오늘의 휘황찬란한 물 행진의 서막을 알렸다.
일자산 위 길게 뻗은 탐방로에도 아침 운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물보다 더 큰 괴로움이 있었으니 바로 졸음이었다. 출발 전에 집에서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약을 먹었는데 – 약을 먹으려면 뭔가를 먹어야 하므로 – 약 중에 졸음 유발 성분이 있는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알약 중에 항히스타민 성분 약이 있었던 것 같다. 걷는데 자꾸 의식이 희미 해진다. 어느 순간에는 거의 반 졸고 있는 상태에서 걷고 있는 것이었다. 앗~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서 빰을 꼬집어 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조금 효과가 있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멍한 상태로 걷고 있는 것이었다. 해가 떠 있는데도 그랬다.
약 두 해 만에 서울 둘레길을 오니, 길이 조금 헤깔리는 곳도 있었다. 가뜩이나 멍 때리면서 걸으니, 온전히 걸을 리가 없었다. 고덕산과 가까운 강동 그린웨이 구간 어느 부분에서 순간 알바를 했는데, 어디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온 길을 다시 걷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걸은 구간이 거의 평지나 다름없고 또한 긴 거리도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올해 초 양평 지역의 한강기맥 두물머리와 유명산 구간을 걷는 도중 골무봉 근처에서 어느 순간 탐방로가 희미해졌는데, 더듬더듬 하며 다시 길을 찾아 한참 걸은 후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아침부터 올라온 바로 그 길이었다. 어째 풍경이 너무 익숙하더라… 물론 방향은 반대 방향. 그래서 결과적으로 거의 시작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고, 편도 거리가 거의 한 2~3킬로 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집에 가긴 그래서 같은 길을 세번째 올랐는데 이 때문에 초반에 페이스가 흔들림인지 예정했던 소구니산 유명산, 대부산, 편전산까지는 걷지 못하고 청계산과 옥산을 거쳐 농다치 고개에서 바로 아신역으로 하산해야만 했었다.
정신 좀 차리고 걷자 다짐해보지만 마음먹은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의식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했었다. 그래서 한 것은 다름 아닌 간식 먹기….^^ 점심으로 정해 놓은 시간보다 더 빨리 먹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것이 있을까? 가다가 잠을 자고 갈 수도 없고. 암튼 그렇게라도 하니 잠이 좀 달아나는 것 같았다.
만나는 음수대에서는 조금이라도 무조건 물을 마시며 도보를 이어갔다. 그런데 한강 공원에는 워낙 음수대가 많기 때문에 모든 음수대에서 물을 마실 필요는 없었다. 워낙 더운 날씨 때문에 음수대에서 물을 마실 때는 한참 동안 수도에 머물러 있던 물을 빼줘야 했다. 워낙 수도 안이 뜨뜨미지근했기 때문이다. 찬물인지 더운물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차가워서 물 다운 물을 마신 곳은 아차산 입구에서였다. 아차산과 용마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물 장전을 잘 해 둘 필요가 있는데, 마침 아차산 샘터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다행이었다.
햇볕이 본격적으로 내리쬐고 대가가 더워지니 에너지 소비가 더욱 심했다. 그래서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반복했고, 쉴 때는 부채질로 연신 몸을 식혔다. 좀 시원하다 싶은 곳에서는 쉬었다. 예를 들면 고덕산 아래 수자원 공사 근처의 올림픽대로 아래 하부의 토끼굴은 정말 시원했다. 그곳에서 한참 몸을 식혔다. 워낙 더운 날씨에 걷기까지 하니 몸이 너무 뜨거웠다. 뜨거워진 몸 때문에, 아마도 내가 앓고 있는 독감 바이러스도 타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즉 내가 죽든지 아니면 바이러스가 죽든지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둘다 장렬히 전하하든지…
하루 내내 물을 그렇게 많이 마셨지만 화장실에 갈 일이 없었다. 그 물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땀으로 배출되거나, 또는 세포마다 물을 한껏 품고 포화되어 있거나. 어쨌든 땀으로 목욕한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했을 것이다.
몸이 어느 정도 식으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어야 할 거리가 구만리이니 몸이 녹초가 되어서까지 걷지는 않기로 했다. 이렇게 걸으면 걷는 것도 괴롭지만, 그 다음에 후유증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만 걷고 끝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쉬며 걸었는데, 나중에 산길샘 통계를 보니 이렇게 많이 쉬었나 싶었다. 설악산 공룡능선에서도 이렇지 않았었다. 결롸적으로, 이렇게 더운 날에 긴 거리의 길나섬을 해본 적도 처음이고 이렇게 자주 쉬워 본적도 처음인 것 같고, 또한 이렇게 서울 둘레길에서 이렇게 자주 쉬어 본 적도 더더욱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신기록들이었다.
일자산과 고덕산을 오르는 과정을 산행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아차산을 용마산 산행을 하니 잠도 깨고 또한 발이 편안해진다. 역시 산~… 그리고 땡볕 구간은 잠시잠시 뿐이고. 그런데 이런 폭염에 산에 오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다들 대단하다.
그렇게 아차산과 용마산을 넘고 망우산을 지났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가 서서히 가까워 오고 있었다. 계속 1코스로 진입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했다. 컨디션을 별 문제없으니 일단 이어 걷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아차산과 용사산을 오르며 소비했던 물을 보충해야만 했다. 망우산 아래에 급수대가 있었나?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어메이징한 일이 일어났다. 망우산 입구에 중랑구에서 세워 놓은 못보던 냉동 컨테이너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산객을 위해 무료로 얼음물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각자 자유롭게 1병씩 물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이런 고마울데가. 노티스를 보니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한달 동안 진행되는 것 같았다. 산객이 많으면 동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패트병 보충 시간이 있는 것 같은데, 시간만 잘 맞추면 한 병 얻어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깔딱고개에서 망우산 자락을 따라 양원역을 향해 하산하는데 다시 멍~ 해진다. 길 난이도가 떨어지면 바로 나른해지고 있었다. 간식을 먹고 중식 후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약도 가져왔는데, 일부러 약을 먹지 않았다. 왜냐면 또 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식 후 약을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먹은 약 효과 때문인지 다시 멍해지고 있었다.
계속 이어 걷기 위한 물도 준비되었고, 발도 괜찮은데 바로 머리 속이 문제였다. 이런 졸림 상태에서 불암산과 수락산 자락을 걷는다는 것은 넌센스였다. 졸면서 걸으라고 서울 둘레길을 걷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결정을 했다. 1코스는 다음에 진행하기로. 그래서 2코스 종점인 – 역방향이므로 – 화랑대에서 멈추었다. 내게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중간 철수”였는데, 더위 때문에 그리고 졸음 때문에 선택한 옵션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기억날 것 같다.
이렇게 서울 둘레길 “다시 걷기” 첫 걸음을 마쳤다. 하얀 스탭프 북에 짙은 잉크로 찍혀진 코스별 인증 도장이 선명하고 영롱하다.
참고로, 전체적으로 물은 500ml 패트병 5~6병 정도는 마신 것 같다. 나중에는 입은 마르되 물은 다시 마시고 싶지 않은 생각까지 들었다. 맛있는 것도 너무 먹으면 먹기 싫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첫댓글 찜통 같은 무더운 날씨에 40km를 걸으셨군요.
요즘 같은 날씨에 9시간을 넘게 걷는다는 게 웬만한 정신력과 지구력이
아니면 힘들 텐 데 대단하십니다.
날이 워낙 더우니 새벽부터 물을 찾게 되지요.
오래전에 걸어본 서울 둘레길 지금은 기억도 가물 가물 하네요.
서울 둘레길 새로운 행사에 유종의 미를 거두시고 무사 완주를 응원 합니다.
폭염에 수고 하셨습니다.
에고. 선생님. 그래서 새벽부터 길나섬을 했는데, 그 새벽에도 생각보다 덥더라구요.
정말 지난 한 4~5일은 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태풍 덕(?)인지
어제 그제 양 이틀 동안 기온의 피크를 이루고 이제는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봐야 아직 영상 30도를 오르내리지만요.
그래도 그 정도 내려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위가 조금 더 내려가면 다시 산으로 가야겠지요?
다만 그 이전에는 서울 둘레길로 잠시 “간빙기”를 보내려고 합니다.
오래간만에 서울 둘레길을 걸으니, 또 새롭기도 하고.
가까운 곳이니 부담감도 없습니다.
다만 감기 때문에 첫 길나섬이 생각보다는 즐겁지 않았는데
이제 나았으니 조금 더 길에 대한 즐거움으로 채워 넣으려고 합니다.
선생님도 연꽃 구경 다녀오셨네요.
선생님이 다녀오시는 곳은 풍경과 서사로 가득한 곳 같은 느낌이 듭니다.
벌써 일 주일에 가운데 날이네요.
또 즐거운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울둘레길 3코스 고덕 일자산 코스 1개 코스도 만만치 않은데 2코스가지 걷었군요. 계획은 1코스 시점까지 였나봅니다. 요즘날씨 걸어보면 9시만 되면 사정없이 내려 쬐는 태양이 겁이 나더군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네 선생님 맞습니다. 창포원까지 가려고 했었는데, 날씨가 더워서 중도 탈출 했습니다. 이제는 좀 시원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태풍의 피해가 크지 않고 기온을 낮추는 고마운 태풍이 되었으면 싶네요. 즐거운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