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Ⅲ
-①라파엘 전파,②아르누보, ③사실주의,④인상주의,⑤점묘파,⑥신인상주의,⑦소박파, ⑧상진주의,⑨야수파,⑩입체파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Ⅲ - 목 차
21.라파엘 전파- yBA,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 그랜드 매너
22.삶을 위한 예술, 아르누보 - 식물서 모티브…곡선 사용해 물결양식이라 불려
23.사실주의 - 사진 찍듯…세상 모든 것 ‘진짜’로 그려내다
24.인상주의 - 무엇을 그리는가 보다 어떻게 그리는가, 그것이 더 중요해졌다
25.점묘파 - 색채의 혼합, 팔레트 대신 눈에서 완성되다
26.신인상주의 또는 후기 인상주의 - 기법·색채에 개성과 독창성을 더하다
27.소박파 - 어떤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아이처럼 순수하게 묘사 즐겨
28.상징주의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29.야수파 - 습관적인 고유색 버리고 과감한 색·붓놀림 구사
30.입체파(Cubism) - 대상을 조각조각 나누고 비틀고 다시 결합하다
21 라파엘 전파 - 로열 아카데미 재학생들, 영국 미술사 첫 장을 열다
: yBA,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 그랜드 매너,
영국에만 국한…장식미술 선도 -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자” 주창
자연 관찰·세부묘사 중시 - 훗날 아르누보 양식 전형돼
밀레이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 사실주의로 논란 일며 유명세 얻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라 기를란다타’. 필자 제공
밀레이의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서양 미술사를 살펴보면 오늘날 ‘yBA(Young British Artists)’의 명성에 비해 영국 미술의 비중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라게 된다. 사실 미술사에서 영국 화가들의 활약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에 있어서 영국은 수입국 입장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미술사에 언급된 영국 중심의 미술이 18세기 ‘라파엘 전파(前派)(Pre-Raphaelite Brotherhood)’임은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라파엘 전파는 영국에 국한된 미술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학에 바탕을 둔 윌리엄 모리스(1834~1896)가 주축이 된 미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이 프랑스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라파엘 전파는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전형이 됐다. 이후 1910년경까지 유럽 전역의 장식미술을 선도한 것이 영국 미술의 미술사에서의 위치다.
이전까지 영국에서의 그림 수요는 주로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들이 맡았다. 특히 찰스 1세(1600 ~1649)의 부름으로 영국으로 와 8년 동안 궁중화가로 활동한 반 다이크(1599 ~1641)와 현실 비판적인 풍자화가 호가스(1697~1764)의 영향으로 영국 미술도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이후 르네상스 거장의 양식, 즉 그랜드매너(Grand manner)를 이상으로 활달한 양식을 추구하면서 성격 묘사를 강조한 반 다이크 풍의 우아한 초상화를 그린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와 자연을 관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주관적 풍경화로 영국 풍경화의 기초를 세운 토머스 게인즈버러(1727∼1788)가 영국 미술의 기초를 마련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1768년 보수적이며 엘리트적인 미술문화를 지향하는 독립기관인 로열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또 여름전시를 통해 새로운 화가들을 발굴, 회원으로 영입하고 전원 장학금을 지급하는 미술학교가 운영되면서 영국 미술문화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 무리의 젊은 재학생들은 1848년 라파엘 전파를 구성했다. 이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위적이며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도덕적 심각성과 진실성을 표방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라파엘 전파는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 영감을 얻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화된 그림 이전으로 돌아가 자연의 관찰과 세부묘사를 중시하는 그림을 목표로 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혁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펼쳐진 라파엘 전파의 활동은 5년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영국 미술과 장식미술, 실내 디자인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라파엘 전파는 시인이기도 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1882)와 윌리엄 홀먼 헌트(1827 ~1910),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 등 3명으로 시작됐다. 로세티는 낭만주의 시와 미술을 결합,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이 첫 모임을 갖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각가 토머스 울너(1825~1892)와 화가 제임스 콜린슨(1825~
1881), 화가이자 비평가인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슨(1828~1907), 단테 가브리엘의 동생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1829~1919)가 합세했다.
회원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멘토 역할을 한 화가 윌리엄 다이스(1806~1864)와 포드 브라운(1821~
1893), 토머스 콜린스(1828~1873), 조각가 알렉산더 먼로(1825~1871) 등도 함께했다.
이들은 조슈아 레이놀즈 풍의 영국 아카데미즘을 부정하며 의도적으로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의 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회색조의 색채와 어색한 구성, 전통적이며 치밀한 사실주의를 통해 복고풍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성경과 중세 문학적 주제에 사적인 시적 상징주의를 결합시켰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태도는 1850년 밀레이가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표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는 “학문적 이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사실주의로 종교적 주제를 다뤘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오히려 라파엘 전파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권위 있는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1819~1900)이 언론과 강연, 라파엘 전파에 보낸 편지를 통해 밀레이를 지지하고 후원하면서 유명세는 더 커졌다. 하지만 이들은 1854년경 흩어졌다. 원인은 로세티와 번 존스, 윌리엄 모리스는 감각적이며 신비로운 낭만적 복고주의와 중세주의를 추구했고 밀레이와 헌트는 사실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라파엘 전파는 1850~1860년대 무어(1841 ~1893)나 미국에서 온 휘슬러(1834~1903) 그리고 후에 영국과 미국의 인상주의의 완성에 크게 기여한 사전트(1856~1925)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02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의 아미앵 조약이 체결된 뒤 유럽으로 건너가 다른 문화와 자연을 체험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등장으로 영국 미술은 급격히 변화했다. 영국문화가 결정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시절부터다.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면서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실현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취미는 영국 미술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공예미술의 보고라 일컫는 빅토리아 앨버트미술관도 ‘여왕의 선물’이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1. 라파엘 전파- yBA,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 그랜드 매너- 로열 아카데미 재학생들, 영국 미술사 첫 장을 열다 / 국방일보. 2019. 6. 19.
22 삶을 위한 예술, 아르누보 - 식물서 모티브… - 곡선 사용해 물결양식이라 불려
: 장식미술, 모조, 900년 양식, 기마르 양식, 유겐트스틸, 제세션, 아르테 호벤,
스틸레 리바티, 모던 스타일, 아르데코, -
英서 출발…예술, 삶의 일부라 생각 - 윤택한 삶의 가치 추구한 예술운동
공예·장식미술 등 생활과 밀접 - 유럽 대륙·미국·남미·일본에 영향
지나치게 장식적…대중화에 한계 - 전성기 10년 지나 아르데코로 대체
예술을 일컬어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하겠지만 특정한 미술사조를 두고 ‘새로운 예술’이란 명칭을 붙인 경우는 아르누보(Art Nouveau)가 유일하다. 1890년부터 1910년까지 유럽은 물론 미국과 남미 그리고 일본 등 동양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누보는 우리가 지금까지 다뤘던 회화나 조각, 건축과 달리 공예 또는 장식미술 등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미술이다.
새로운 미술사조의 출발지가 대개 프랑스였던 것과 달리 아르누보 운동의 진원지는 영국이다. 유럽 변방의 섬나라 영국이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부상하면서 영국 부르주아의 삶은 윤택해졌다. 하지만 삶의 많은 도구들이 대량생산체제 속에서 생산되면서 가구 등이 매우 조악하고 무미건조한 형태로 퇴보했다.
이런 가운데 아르누보 운동은 예술이란 높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정으로 윤택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공예품 대량 생산에 거부감 ‘미술공예운동’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는 처음으로 ‘장식미술’을 강의한 영국의 월리엄 모리스(1834~1896)가 있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한 그는 공예품이 기계로 대량 생산되면서 손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며 당시를 풍미하던 과장된 로코코 스타일의 복고풍 모조 양식을 거부했다. 그의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이런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미술공예운동이다.
이즈음 스코틀랜드 출신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1868~1928)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마거릿 맥도널드(1864~1933)와 처제가 될 프랜시스 맥도널드(1873~1921), 제임스 허버트 맥네어(1868~1955)와 함께 ‘4인 그룹’을 결성해 아르누보운동을 전개한다.
초기 아르누보풍의 전형으로 모리스의 ‘붉은 집’이 있다. 또 영국에서 활동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했던 미국화가 휘슬러(1834~1903)의 ‘호화로운 공작방’도 대표적인 영국 아르누보 양식이다.
이 운동은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데 판화가 셀윈 이미지(1849~1930), 삽화가 헤이 우드 섬너(1853~ 1940), 월터 크레인(1845~1915), 조각가이면서 금속공예가였던 앨프리드 길버트(1854~1934) 등이 아르누보를 대표한다.
아르누보는 미술의 범주를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그래픽 아트, 인테리어 디자인, 보석, 가구, 섬유, 조명과 가정용 도구 즉 살림살이 등 장식예술을 포함하는 모든 예술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이들에게 예술은 삶의 방식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부유해진 중산층은 아르누보풍 가구, 식기, 직물, 장신구,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중산층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누보풍은 1910년경 모더니즘이 건축과 장식미술 스타일을 대체할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 명품으로 불리는 여러 브랜드들도 이때 시작된 것이다.
도버해협 건너 벨기에로 전파
아르누보운동은 도버해협을 건너 벨기에로 전파되면서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벨기에는 1830년 혁명 이후 세워진 작은 나라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국가였다. 벨기에 아르누보의 중심에는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1863~1957)와 기능주의를 주창한 빅토르 오르타(1861~1947) 그리고 폴 앙카르(1859~1901) 등이 있다.
현재 브뤼셀의 익셀지구 루이스가에 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과 아틀리에, 타셀 저택, 솔베이 저택, 반 에드벨데 저택 등을 만날 수 있다.
식물 문양 파리 지하철역 입구 장식
아르누보라는 말은 독일의 미술품과 공예품 등을 판매하던 사무엘 빙(1838~1905)이 1895년 파리에 ‘메종 드 아르누보’를 열면서 일반화됐다. 갤러리 빙은 벨기에의 반 데 벨데(1863~1957)가 장식을 맡았고, 1900년 만국 박람회에 현대적인 가구, 태피스트리, 공예품 등을 출품해 엄청난 호응과 명성을 얻었다. 이후 아르누보는 빙이 제공한 새로운 스타일을 규정하는 용어가 됐다.
프랑스는 아르누보를 발전시켜 ‘900년 양식’이라고 칭하면서 최전성기를 이뤘고, 프랑스 아르누보를 이끈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1867~1942)의 이름을 따 ‘기마르 양식’이라고도 부른다. 기마르는 식물 문양의 파리 지하철역 입구 장식을 만들었다.
또 체코 출신으로 후에 일본과 한국 순정만화의 전형을 제공한 알폰스 무샤(1860~1939)와 보석장식가 르네 줄 랄리크(1860~1945)가 있다. 또 유리, 금속, 도자에 능했던 공예가 에밀 갈레(1846~1904), 유리공예가 다움(1825~1885), 가구의 루이스 마조렐(1859~1926), 목공예의 유진 발랭(1856~1922)과 자크 그루베(1870~1936) 등 유명 공예가들이 보불전쟁 후 회복된 낭시에 자리 잡고 낭시학파를 결성하면서 아르누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독일잡지 유겐트, 아르누보 스타일 전파
좀 늦게 독일에 상륙한 아르누보는 1902년 에센 지방에 개관한 앙리 반 데 벨데의 폴크방크 미술관에 자극받았다. 이후 뮌헨의 ‘유겐트(Jugend)’라는 잡지가 아르누보 스타일을 전파해 여기서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독일공작연맹의 선구가 된 페테르 베렌스(1868~1940)와 ‘유겐트’· ‘팬’을 디자인한 베른하르트 판콕(1872~1943), 상감기법과 유닛 가구를 선보인 파울 브루노(1874~1968), 타이포그래퍼 겸 디자이너로서 오늘날 아르누보 양식의 이론가로 알려진 오토 에크만(1865~1902) 등이 대표적이다.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 만나 동유럽으로
아르누보는 오스트리아 빈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만나 헝가리·체코로 번져나갔다. 빈의 아르누보는 ‘제세션(Secession)’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곳의 아르누보는 클림트(1862~1918)와 아르데코 양식의 모던 가구를 만든 요제프 호프만(1870~1956), 격자 무늬의 비너 베르크슈테테 스타일을 만든 콜로만 모저(1868~
1918), 요제프 올브리히(1867~1908) 등 19명의 젊은이들이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탈리아에서는 건축가 주세페 소마루가(1867~1917) 등이 활동한 ‘스틸레 리바티(Stile Liberty)’라는 이름으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에서는 성 파밀리아 성당으로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1852~
1926)가 중심을 이루는 ‘아르테 호벤(Arte Joven)’ 운동으로 진행됐다.
미국에서는 ‘모던 스타일’이란 이름으로,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1856~1924)과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1848~1933) 등이 중심이 됐다. 특히 티파니의 공예품들이 유행하면서 미국 아르누보는 ‘티파니 스타일’로 불리기도 했다. 각기 이름은 달랐지만 내용은 같은 예술운동이었다.
직선과 동심원 이용한 아르데코가 대체
‘청춘’, ‘근대’, ‘자유’, ‘새로움’이라는 뜻을 지닌 아르누보는 주로 식물에서 모티프를 따와 곡선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꽃의 양식’, ‘물결 양식’ 또는 ‘당초 양식’이라고도 한다. 또 새로운 것을 지향하지만 옛것에 기반해 ‘영혼의 자각 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르누보가 추구하는 수준 높은 제품은 대중화가 어려웠다. 또 아름다움만 추구하다 보니 과도하게 장식적이어서 실용성이 떨어져 10년간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직선과 동심원 등을 이용한 단순하면서 기하학적인 면이 강조된 아르데코(Artdeco)가 이를 대체한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2 삶을 위한 예술, 아르누보-장식미술, 모조, 900년 양식, 기마르 양식, 유겐트스틸, 제세션, 아르테 호벤, 스틸레 리바티, 모던 스타일, 아르데코- 식물서 모티브…곡선 사용해 물결양식이라 불려 / 국방일보. 2019. 6. 26.
23 사실주의 - 사진 찍듯…세상 모든 것 ‘진짜’로 그려내다
: 다게레오타이프, 칼로타입, 캐리커처, 바르비종파, 자연주의, -
식민지 정책·산업화·도시화 배경
1840년경 프랑스 사실주의 등장 - 카메라 영향 받아 있는 그대로 표현
7월혁명 후 언론 자유 확대로 활기 - 사회비판 풍자화 캐리커처 쏟아져
사회주의 영향 쿠르베 논란되기도 -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전시 거절 당해
밀레, 위험하지 않은 사실주의로 불려 - 유럽·미국 전역으로 리얼리즘 전파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 유화 159x259㎝, 독일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루이 14세의 아카데미는 유럽 미술의 기준이자 바탕인 동시에 젊은 작가들을 양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이른바 서사적인 역사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화가들을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놓기도 했다.
이성과 질서를 중시한 계몽주의는 신고전주의로 이어졌고, 이후 비현실적이며 격렬한 감정과 이국적인 주제를 다룬 낭만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점령과 경제 개발이 계속되면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혼돈과 새로운 질서가 교차했다.
식민지 정책, 산업화, 도시화가 이뤄졌던 1840년 프랑스에서는 자연을 단순하게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넘어 과학적·도덕적·정치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진짜’로 그려내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프랑스 소설가 샹플뢰리(Champfleury, 1821~1889)는 미술과 문학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등장한 이 새로운 경향의 예술 현상을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라고 명명했다.
이런 과학적 실증주의는 1830년대 등장한 카메라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의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1787~1851)는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라는 카메라를 가지고 자연의 이미지를 금속판에 새겼다.
영국의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 1800~ 1877)은 칼로타입(calotype)을 이용, 요오드로 코팅된 종이에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현대적 사진 공정을 실현했다.
사진은 사실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진은 ‘진실’이라는 사건을 구체화했다. 사진은 통치자에 의해 이상화된 예술의 전통을 깨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마네, 스튜디오에서의 점심식사, 1868, 유화, 118x153.9㎝, 뮌헨신회화관
사실주의는 1830년 프랑스의 7월혁명 이후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사회비판적인 저널리즘이 힘을 얻으면서 사건이나 사람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그림, 즉 캐리커처(Caricature)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31년에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는 1534년 왕을 탐욕스러운 거인으로 묘사했던 라블레(Francois Rabelais, 1494~1553)의 『가르강튀아(Gargantua)』를 다시 펴내면서 소설의 삽화를 맡아 석판화(lithography)로 캐리커처를 출판했다.
왕을 모독한 혐의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는 군인들이 노동자 일가족을 살해한 장면을 그대로 묘사한 석판화 ‘4월 15일의 트랭스노냉 거리’(1834)를 발표하는 등 풍자와 고발을 멈추지 않았다.
풍자화에 위협을 느낀 정권은 곧 정치풍자를 금지하는 법을 공포했다. 하지만 도미에는 수십 년 동안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면서 사회적인 이슈를 줄곧 다뤘다.
1848년 프랑스는 왕정을 끝내고 다시 제2공화국(1848~1851) 시대를 맞는다. 이 영향으로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제국, 네덜란드, 폴란드 등도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다.
1846년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Anarchist)라 칭했던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5)이 등장하고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가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1847)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을 출간하면서 사회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후 사실주의는 세상을 바로 보고 기록하는 시각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도미에, 가르강튀아,1831, 석판화, 파리국립도서관
프랑스의 정치권력, 부르주아 중심 사회, 역사화 중심의 아카데미를 공격하는 선봉에는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가 있었다. 그는 1850~1851년 살롱에 ‘오를랑의 매장’을 출품해 사실주의의 포문을 열었다. 또 ‘돌 깨는 사람’(1849~1850)을 통해 중산층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1857년 살롱에 출품한 ‘센 강변의 숙녀들’(1856) 등으로 시대를 흔들었다.
마네(Eduou Manet,1832~1883)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라는 도발적인 작품을 출품했다가 전시를 거절당하기도 했다. 이런 도발적인 그림들은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 작가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쿠르베는 1855년 살롱 출품작이 거부당하자 살롱과 인접한 공간을 임차해 자신의 작품 40여 점을 무료로 전시했다. 이 행동은 그후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스스로 전시를 하는 계기가 됐다.
쿠르베의 행동과 그림의 혁명적 태도는 논란이 됐다. 특히 ‘돌 깨는 사람’은 인물의 윤곽선과 입체감을 거부하는 평면성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서투르다”는 식의 공격을 받았다. 마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작가의 그림은 더 거칠고 더 평평하며 더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로 나갔다.
쿠르베의 경우 사회주의에 경도된 화가였다. 하지만 모든 사실주의 화가들이 정치적인 지향점을 지니지는 않았다. 이들은 하층계급의 삶과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런 화가 중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존재는 특별하다.
농민들의 삶을 가감 없이 숭고하게 그려낸 그는 특별히 사실주의가 아닌 자연주의(Naturalism)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사실주의를 ‘위험하지 않은 대중적 사실주의’라고도 한다.
바르비종파의 원조인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의 존재도 중요하다. 그는 로맨틱한 정신이 지배하는 힘찬 터치와 밀도 높은 색채로 당대 풍경화의 대가로 등극했다. 특히 루소는 밖에 나가 스케치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작업해 완성하면서 외광파의 원조가 돼 인상파의 탄생 동기를 제공했다.
바르비종파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사이를 이어주면서 인상주의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특히 풍경화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봤다. 여성화가 로사 보뇌르(Rosa Bonheur, 1822~1899)의 존재감 있는 역동적인 그림도 출중하다. 어릴 적 부모님의 허락으로 동물들을 해부할 수 있었던 보뇌르의 집중적인 관찰력은 사실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리얼리즘은 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미국에서 파리에 와 작품활동을 하던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1834~1903)는 1860년대에 쿠르베와 교류하면서 사실주의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해 도덕적으로나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미국에는 19세기 미국의 단면을 가장 솔직하고 냉정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에이킨스(Thomas Eakins,1844~1916)란 걸출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사진을 연구해 작품에 반영하면서 매우 세밀한 관찰을 통해 외과 의사처럼 꼼꼼하게 모든 것을 묘사했다.
독일의 화가 빌헬름 라이블(Wilhelm Leibl,1844~1900)도 파리에서 쿠르베를 만나 사실주의자가 됐고, 뮌헨으로 돌아간 후 플랑드르 지방의 대가들이 이룩한 자연주의를 19세기로 옮겨와 적용시킴으로써 사실주의의 격을 높였다.
러시아의 레핀(Ilya Yefimovich Repin,1844~1930)도 육체 노동자들의 힘든 노동과 고된 일상을 포착한 사실주의 회화를 완성했다. 그는 파리를 여행하면서 인상주의도 경험했지만 인상파가 사회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주의를 고수했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대부분 집단이 아닌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해체나 해산 등의 과정 없이 서로를 알고 지지하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작품의 내용과는 달리 느슨한 형태의 미술사조였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3 사실주의 - 다게레오타이프, 칼로타입, 캐리커처, 바르비종파, 자연주의 사진 찍듯…세상 모든 것 ‘진짜’로 그려내다 / 국방일보. 2019.7. 3.
24 인상주의 - 무엇을 그리는가 보다 어떻게 그리는가, 그것이 더 중요해졌다
: 임패스토,무명예술가협회,스트로크,스냅 샷,동시대비,보색대비,우키요에
모더니즘 시작 알린 인상파, ‘재현’ 굴레 벗고 자연과 현실 색채·형태로 재해석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프티 부르주아’ - 그림 주인공이자 소비자로 등장
화가들, 실내 벗어나 야외에서 작업 - 빛·주변 색에 의해 변하는 색채 포착
메리 커셋의 작품 ‘파란색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어린 소녀’. 필자 제공
모네의 작품 ‘인상-해돋이’.
마네의 작품 ‘장 밥티스트 포레의 초상’.
미술관에서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다. 그래서 원작은 하나도 없이 디지털 영상으로 제작된 의사(擬似) 인상주의 전시가 관객들을 현혹하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만인의 사랑을 받아온 인상주의는 지난 150년간 미술계를 지배했고 새로운 미술운동을 촉발하는 공이 역할과 근대의 열쇠 역할을 했다.
다양한 작가들이 각자의 양식·독창성과 함께 하나의 운동을 벌인 인상주의는 187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고전주의의 소재와 엄격한 규칙을 거부했다. 또 거대 서사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을 관찰하고 그 느낌과 인상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아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로 나가 풍경을 그리면서 빛의 순간적인 효과를 포착했다. 빛과 색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빛을 표현하고자 붓놀림도 빨라졌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작품이 한 아카데믹 살롱에서 거부당하자 이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전시를 열었다. 1874년 4월 5일부터 5월 15일까지 나다르 사진관에서 열린 ‘제1회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전이 그것이다.
사진작가 나다르(1820~1910)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3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 전시는 이후 1886년까지 12년 동안 8회에 걸쳐 열리며 인상주의의 존재와 미학을 알렸다.
제1회 전시에 출품된 모네(1840~1926)의 ‘인상-해돋이’(1872)를 본 비평가 루이 르로이(1812~1885)는 “인상,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인상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그곳에 인상이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제멋대로, 아주 쉽게 그린 그림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벽지의 무늬를 위한 예비 스케치가 차라리 이 작품보다 완성도가 높다”고 빈정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이들은 인상파라고 불렸다.
미술사에서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리는 인상파는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미술은 이제 ‘재현’이라는 굴레를 벗고 자연과 현실을 색채와 형태로 재해석한 조형미를 추구했다. 즉 ‘무엇을 그리는가’보다는 ‘어떻게 그리는가’가 중요했다. 물론 이런 방식은 당시 낯설고 기이해 저항감을 불러일으켰지만 20세기 추상화도 이런 기틀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상파는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산업화 과정에서 신분 질서의 붕괴, 계급의 혁파, 참정권의 확대, 미국의 독립 등 그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큰 변화에서 기인했다. 산업혁명은 여유 있는 프티 부르주아(Petit bourgeoisie)를 낳았고, 이들이 새로운 소비자가 돼 인상파의 작품을 구입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일찍 적응했다. 이들은 시대적 변화라는 파도에 조금 무모해 보일지라도 작은 배를 띄워 항해를 시작했다. 이런 거대한 시대적인 변화는 이들의 모험심을 일깨웠다.
먼저, 카메라가 발명되자 회화는 ‘시각적 기록 수단’이라는 유일성을 상실했다.
둘째로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연에 고유색이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 슈브럴(1786~1889)은 『색의 조화와 대비의 법칙』이라는 책을 내면서 새로운 색채이론을 펼쳤는데, 동시대비(Simultaneous Contrast)와 보색대비(Complementary contrast)를 통해 색채는 주변의 색에 의해 변화한다는 사실을 화가들에게 알려줬다.
셋째로 튜브 물감과 야외용 이젤의 발명은 실내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작업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넷째로 일본의 다색 판화인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입체감이나 공간감이 아닌 면과 색채만으로 충분히 대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입체감이라는 깊이보다는 표면, 즉 평면성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또 더는 신화나 종교적 내용이 아닌 현실에서 그림의 소재를 택하면서 하느님과 신 또는 영웅들의 무용담이 아닌 주변 보통 사람들이 그림의 주제가 됐다.
도시는 급격히 발전해 새로운 자연,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공간이 됐다. 인상주의 그림의 대부분은 교양 있는 중산층의 밝고 행복한 삶이 주제다. 풍경도 마찬가지다. 이제 역사의 주체이자 생산과 소비의 당사자인 신흥 부르주아, 즉 중산층의 새롭고 풍요로운 삶을 그리면서 전제주의 시절 억압받고 착취당했던 시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인 동시에 소비자가 됐다.
이들 사이에는 뛰어난 눈과 상인의 감각을 갖춘 폴 뒤랑 루엘(1831~1922), 앙브루아즈 볼라르(1866~
1939)와 같은 화상들과 제빵사 외젠 뮤러(1841~1906), 기업가 앙리 루아르트(1833~1912), 바리톤 가수 장 밥티스트 포레(1830~1914), 백화점 주인 어네스트 오셰데(1837~1891) 같은 컬렉터들이 있었다. 이런 원군 덕택에 인상주의는 더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들의 그림은 ‘두껍게 물감을 바르는 스트로크’(임패스토)와 독특한 색채, 일상적인 주제, 빛의 초점과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소재 등이 특징이다. 특히 일시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캔버스에서 서로 다른 톤의 색상이 상호 작용을 통해 눈을 통해 혼합되도록 순색을 사용했다. 어두웠던 배경은 밝게 처리했다.
특히 시시각각 빛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발견했다. 모네는 “내게 풍경은 매 순간 그 모습이 바뀌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의 주위에 있는 빛과 공기는 끊임없이 변한다. 내게 진정한 가치로 다가오는 것은 오직 그 주변 분위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모네의 영향으로 시간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그리는 연작이 등장해 인상파의 또 다른 특징이 됐다.
인상주의 작가들은 정물화·풍경은 물론 친구와 가족의 초상, 현대화되는 도시 등 새로운 소재에 몰두했다. 또 사진의 전통적인 스냅 샷처럼 비대칭적인 구도를 이용,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을 즐겼다.
인상주의 작가들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빛이 그 원인이며 그 결과는 색채라는 사실을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꾸준하게 보이는 것들의 순간순간을 화폭에 담았던 인상주의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초기 인상주의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화가로 활동한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 다른 이들보다 어려서 1870년대 중반에야 인상파에 합류한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 사실주의적인 시각으로 인물의 동작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했던 에드가 드가(1834~1917), 인상파 화가이기를 부정했던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 인상파의 미학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했던 클로드 모네, ‘인상파의 장로’ 카미유 피사로(1830~ 1903), 행복한 사람들을 그렸던 행복한 화가 르누아르(1841~1919), 시슬리(1839~
1899),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중후하고 야생적인 회화의 아르망 기요맹(1841~1927), 그리고 인상파에서 출발해서 독자적인 회화를 구축한 세잔(1839~1906)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인상주의가 근대적임을 입증하듯 여성 화가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자유롭고 경쾌한 필치로 가정의 안팎 풍경이나 정물화를 그린 베르트 모리조(1841~1895), 미국 태생으로 명쾌한 색조와 경쾌한 터치로 모자상을 즐겨 그린 미국 인상주의의 대모 메리 커셋(1844~1926)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이들이 인상주의라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에 의해 하나로 묶였다기보다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반응이 집단화됐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4 인상주의: 임패스토, 무명예술가협회, 스트로크, 스냅 샷, 동시대비, 보색대비, 우키요에 무엇을 그리는가 보다 어떻게 그리는가, 그것이 더 중요해졌다 / 국방일보. 2019.7. 10.
25 점묘파 - 색채의 혼합, 팔레트 대신 눈에서 완성되다
: 분할주의, 사회과학, 가현운동, 대비, 광휘성,
과학적 색채이론에 화가들 주목-순수한 빛 그리고자 삼원색 활용
무수히 많은 원색의 점 찍어 표현- 색조 대비 통한 새로운 기법 완성
피사로·쇠라·시냐크 등이 활약
쇠라의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인상주의 시대는 근대로 접어든 유럽의 변화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산업혁명과 시민계급의 대두 등 많은 사회적 변화와 함께 2차 산업혁명의 결과 강철 제련 기술과 전기가 일상화되면서 과학은 근대 사회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됐다.
과학은 도시 인구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생활 수준을 끌어올려 주는 기회를 만들었고 새로운 소비자들은 산업의 팽창과 통합을 유도했으며 기업은 능률을 추구했다. 이렇게 모든 분야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레닌의 혁명이론조차 사회과학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과학 분야에서는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박테리아, 퀴리 부인의 라듐, 뢴트겐의 X선 발견, 다윈의 진화론, 파블로프의 조건반사가 등장했다. 철학에서는 헤겔과 니체, 프로이트, 쇼펜하우어가 새로운 관점으로 인간과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모든 분야가 광의의 의미에서 과학으로 인식되던 시기다.
화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과학’
화가들에게도 과학은 매력적이었다. 어떤 화가들은 과학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생각도 가졌다. 특히 인상주의자들을 고무시켰던 슈브럴의 색채이론은 많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과학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줬다.
카메라는 화가들이 대상의 움직임과 몸짓을 연구하고 관찰해서 주위 환경이나 세부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사물과 대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도왔다. 특히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1830~1904)는 1877~1878년에 정지된 사진에서 동작을 포착하기 위해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한 뒤 사진을 촬영, 순차적인 움직임을 포착해 동작의 비밀을 밝혀냈다.
이렇게 순간순간의 움직임을 연달아 보여주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가현운동(Apparent Movement)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그간의 말이 달리는 장면은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며 많은 도움을 줬다. 또 중심에서 벗어난 흐려진 초점, 단축된 시점 등 화면의 심도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졌다. 사진은 또 역사나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을 담아 신화와 고전이라는 도그마로부터 화가들을 해방시켰다.
모네는 카메라의 느린 셔터 속도가 형태를 흐리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런 효과를 위해 자신의 그림 속 형태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칠했다. 피사로는 같은 효과를 위해 거리 풍경을 그릴 때 빠른 필치로 작은 터치를 반복해 형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런 기법을 두고 한 비평가는 “혀로 핥은 것 같다”고 했다.
폴 시냐크의 ‘아비뇽의 교황청’.
색채론 등장으로 분할주의 탄생
새롭게 등장한 색채론은 분할주의(Divisionnisme)를 낳았다. 두 개의 색이 가까이 있으면 서로의 영향으로 각각의 색이 다르게 보이는 대비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동시대비, 다른 두 색이 함께 있을 때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을 보색대비라 했다.
한편으로 팔레트에서 색을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균일한 크기의 원색 점을 화면에 직접 찍으면 이 색들이 사람의 눈과 망막을 통해 혼색이 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를 ‘분할주의’라고 했는데 이는 형태를 선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순도는 높이면서도 색조의 대비(contrast)를 통해 인상주의의 또 다른 새로운 기법을 완성했다. 이것이 ‘점묘파’다.
순수한 빛을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면을 원색의 미세한 점으로 나누고 그 점을 순수한 원색으로 칠했다. 특히 쇠라(Georges Seurat·1859~91)는 직관적인 인상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이론으로서 분할주의를 세우고 이를 체계화시켰다. 그의 대표작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4~1886)는 2년에 걸쳐 연구한 분할주의 이론의 형성과 완성의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작품을 두고 평론가 페네옹(Felix Feneon, 1861~1944)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색채를 본능적인 직관에 따라 분해한 데 반해, 점묘파 또는 점묘주의 화가들은 최대의 광휘성을 표현하기 위해 색조를 의식적으로 과학적으로 분할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는 점묘파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시냐크는 분할주의는 미학적 개념이며, 점묘주의는 기법적인 용어라는 점에서 분할주의를 주창했다.
피사로의 작품 ‘농가’.
삼원색의 순도·밝기 유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색채는 과학이었다. 태양 빛에 드러나는 자연은 삼원색이나 1차 혼합색으로 가득 찬 공기 같은 것이었다.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7가지 원색으로 분해되고 이들은 다시 빨강, 파랑, 노랑이라는 삼원색으로 환원되며 이 삼원색이야말로 모든 색의 원형이다. 그리고 이를 섞으면 섞을수록 밝기를 잃고 탁해져 종국에는 검정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점묘파들은 삼원색의 순도와 밝기를 유지하기 위해 중간색이 필요할 경우 색을 팔레트에서 개어 만들기보다 원색과 원색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들 그림의 대상은 모두 미세하게 작은 점으로 분할됐고, 분할된 점마다 원색이 번갈아가며 칠해졌다. 오늘날 디지털 사진처럼 픽셀로 나뉘고 픽셀마다 각각의 색이 칠해져 눈을 통해서 혼합되는 방식은 점묘파에서 빌려 온 것과 같다.
이런 기법은 영국의 컨스터블이나 프랑스의 들라크루아도 사용했지만 이를 주로 사용한 이는 모네나 피사로였다. 그리고 쇠라는 이를 체계화했고 시냐크는 『외젠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d‘Eugen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 1899)라는 저서를 통해 이를 널리 보급했다.
페티장의 ‘진 여인의 초상’.
반 고흐·마티스·피카소 등에게 영향
이들의 미학적 관심은 과학적인 것과 맥을 같이하거나 그것보다 더 우월했다. 결국 이들에게 모더니즘은 과학 정신이자 과학이었다.
과학적이며 새로운 회화적 방법론이었던 점묘파는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혁신적인 방법론으로 인상파의 장로라고 불리는 피사로는 물론 마네·쇠라·시냐크와 크로스(Henri Edmond Cross, 1856~1910), 페티장(Hippolyte Petitjean, 1854~1929) 등이 점묘파 화가로 활약했다.
이들은 반 고흐와 마티스(Henri Matisse, 1869~ 1954),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사진=필자 제공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5 점묘파 - 분할주의, 사회과학, 가현운동, 대비, 광휘성 -색채의 혼합, 팔레트 대신 눈에서 완성되다 / 국방일보. 2019.7. 17.
26 신인상주의 또는 후기 인상주의- 색채에 개성과 독창성을 더하다
; 종합주의, 클루아조니즘, 원시주의, 무정부주의, 분리주의,인상파 기법·
과학에 바탕 둔 인상파로 출발 - 자연의 객관적 기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 스타일 추구 - 세잔·고갱·고흐 등 대표적
당시 세상으로부터 비웃음 샀지만 - 훗날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추앙
20세기 초 모더니즘 기초 형성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린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후기 인상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서 홀로 그림을 그린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나,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나’. 1897-1898, 유화, 139x375cm, 보스턴미술관.
과학에 바탕을 둔 그림을 그렸던 인상파로 출발했지만 이내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나타났다. 인상주의가 색과 빛의 순간적인 효과에 기초한 자연의 객관적인 기록을 중시했지만,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만의 표현을 위해 이런 인상파의 강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인상주의의 밝고 맑은 색과 풍경이라는 주제 그리고 산란하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끊어치는 듯한 단속적인 붓 터치는 계승했다.
로트레크의 ‘물랑루즈’, 1893-1895, 유화, 시카고아트인스티튜드.
새로운 흐름에 이끌린 화가들
새로운 흐름에 이끌린 화가들은 폴 세잔(1839~1906), 폴 고갱(1848~1903), 반 고흐(1853~1890), 로트레크(1864~1901) 등이었으며 점묘파로 분류되는 쇠라와 시냐크 등도 후기 인상주의 범주에 들어간다. 대부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기초를 형성했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말은 영국의 미술 평론가 로저 프라이가 1877년 과학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인상주의와 구별하고자 명명했다. 그들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개인적인 감정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의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고 이해한 당대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비웃음을 사던 그들이 이제는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후기 인상주의는 이름을 얻고 12년이 지난 1889년 고갱과 에밀 슈페네케르(1851~1934)가 파리만국박람회장 근처 카페 볼피니에서 연 ‘인상파와 종합주의 화가들의 전시회’를 통해 2차원적 평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뿌리를 내렸다.
고흐의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밀밭’, 1889, 유화, 국립미술관 런던.
세잔, 사물의 구조 묘사에 집중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빛이 산란하는 순간을 포착하기보다는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처럼 견고하고 내구성 있는 미술을 위해 1878년 인상파들의 아지트 카페 게르부아를 나와 마치 돌처럼 변함없고 견고한 형태의 근원을 추적한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이 빛에 의존해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의 형태와 색채를 표현하면서 형태가 사라지고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대상을 가장 기본적인 일련의 평면으로 환원시켰다. 나무를 그리면서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원통으로, 이들을 덩어리로 묶어 하나의 면으로 그렸다. 그리고 각각의 평면은 색채의 변화로 채웠다.
인상파가 색을 중시하고 형태를 무시한 데 반해 세잔은 형태와 색을 동등하게 취급했으며 자연의 형상을 최대한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해 존재 자체의 근본 형태를 찾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화면은 색채로 뒤덮인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는 자연 형태의 기본 구조와 깊이 있는 공간, 그리고 화면의 표면 즉 질감을 통합하는 일에 몰두했다. 실제로 그는 주로 사물의 구조를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1884년 개최된 앙데팡당(Independants)에서 세잔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쇠라를 발견했다. 그는 화면의 구성과 과학적으로 색을 분석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함께 모여 운동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후기 인상주의, 신인상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활동했다. 세잔은 파리에 적응하지 못해 고향인 프랑스 남부의 액상 프로방스에 칩거해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을 남미에서 보낸 후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다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고갱은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서 홀로 그림을 그렸고, 남프랑스의 시골 마을 아를에서는 고흐가 고독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림을 그렸다. 고갱과 고흐는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개인적이며 영적인 표현을 지지했다.
세잔의 ‘빅토와르 산’, 1892-1895, 유화, 73x92cm, 반즈컬렉션.
타히티섬에서 홀로 그림 그린 고갱
고갱은 1886년 인상파와 함께 전시를 연 후 ‘자연주의의 가증스러운 오류’의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1868~1941)와 함께 더 단순한 진리와 순수한 미학을 추구하고자 도시를 벗어나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농촌 지역 브르타뉴의 퐁타방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영감을 찾았다.
그는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순수하고 평면적인 색상, 굵은 외곽선, 그리고 장식적인 것을 취했다. 또 고갱은 이국적이며 감각적인 색의 하모니를 이용해 타히티 사람들을 시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는 루이 앙크텐(1861~1932)과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의 평면적인 색채가 강한 청색이나 검은색의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과 결합해 자연의 외관과 주제에 대한 작가의 감정, 선, 색상 및 형태의 미적 고려를 종합하는 종합주의(Synthetism)를 완성한다.
1886년 파리에 도착한 반 고흐는 자연에서 받는 인상 깊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상파의 기법과 색채를 재빠르게 습득했다. 하지만 이내 인상주의의 짧고 밝으며 단속적인 붓놀림을 자기화해서 인상파의 광채를 넘어서는 과장되게 꿈틀대는 색, 생생한 선으로 감정을 격정적으로 화면에 쏟아낸다.
꿈틀대는 색과 선으로 감정 쏟아낸 고흐
인상주의자들과는 일정 거리를 뒀던 로트레크는 포스터와 장식적인 효과, 소외된 사람들을 그렸고, 르동(1840~1916)은 보다 자유스러운 상상의 세계를 평면적으로 그렸다. 또 회상적이며 신비로운 주제를 다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은 좀 더 선형적이며 상징주의에 가깝다.
이러한 후기 인상주의의 변화는 20세기 초 예술의 두 가지 큰 변화의 흐름을 견인했다. 하나는 이지적이며 관념적인 입체파(Cubism)이고 또 하나는 감정적이며 격정적인 야수파(Fauvism)다.
가위 혁명적인 미술운동인 후기 인상주의는 프랑스 예술계에 기반을 둔 무정부주의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페릭스는 젊은 화가들을 지원하며 전위적인 문화예술의 선봉에 섰던 ‘라 르뷔 블랑슈’의 미술 평론가가 되기 전에 이미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1894년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1837~1894) 암살 사건으로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회적 권위에 도전하는 지식인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비평가로서 후기 인상파를 지원해 힘이 됐다.
사실 후기 인상파는 자연환경과 인간의 자유를 조화롭게 연결하려 했고 과학에 대한 이해 또한 부르주아지보다 자유로운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와 닮았다.
자유로운 무정부주의자 견해와 닮아
이러한 후기 인상주의는 이후 마티스(1869~1954), 앙리 망갱(1874~1949), 장 메챙제(1863~1956), 들로네(1885~1941), 앙드레 드랭(1880~1954) 같은 다음 세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변화는 오스트리아의 분리주의와 독일 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미술은 후기 인상주의자들을 만나면서 자기만의 표현, 독창성, 개성이라는 단어들과 처음 만나게 됐다. 그리고 이제 미술은 외부보다 내부, 형태보다 내용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사진=필자 제공]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6 신인상주의 또는 후기 인상주의; 종합주의, 클루아조니즘, 원시주의, 무정부주의, 분리주의, 인상파 기법·색채에 개성과 독창성을 더하다 / 국방일보. 2019.7. 24.
27 소박파 - 어떤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아이처럼 순수하게 묘사 즐겨
: 나이브 아트, 아르 브뤼, 순수주의, 원시예술, 민속예술, 네오 프리미티비즘 -
세련된 기교나 명료한 이론 없이 - 소박한 태도와 기도하는 자세로 건강한 리얼리즘 구현
원근법 등 기본 관점이 아닌 - 자신만의 시점서 독창적 화풍 구사 - 유치한 순수성 현대미술 동력 돼
앙리 루소의 ‘꿈’.
인간은 참으로 인내심이 부족한 동물이다. 인상파, 점묘파, 신인상주의가 과학과 논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그림을 전복시키면서 중산층의 환호를 샀다. 하지만 이내 논리적인 그림에 지친 사람들은 새로운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발견된 것이 소박파(Naive Art) 화가들이다.
이들은 세련된 기교나 명료한 이론 없이 순수하게 묘사를 즐기며 그림을 충동적·본능적으로 그려 조금은 치졸하고 소박하지만 원근법 등 기본의 관점이 아닌 특별한 시점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화된 화풍을 지녔다. 소박파라는 이름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어떤 유파, 화파로부터 독립해 개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생적으로 획득된’ 의미의 라틴어와 상관이 있다.
세라핀의 ‘꽃다발’.
소박파, ‘자생적으로 획득된’이란 의미의 라틴어서 유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계급인 중산층이 등장하고 여가가 생기자 문화를 접할 수 없던 대중은 ‘구경거리’가 필요했다. 이른바 ‘오스망화(도시계획)’로 인해 대로가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산책을 즐겼다. 신문과 잡지가 앞다퉈 창간됐다.
파리 중심가의 ‘모르그(시체 안치소)’는 사람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켰고 밀납 인형으로 과거와 현실을 담은 ‘그레뱅 박물관’이 등장했다. 또 가상을 현실로 만드는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영화가 새롭게 사람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등장한다. 주식중개인이었던 고갱은 생업을 접고 그림에 뛰어들었다. ‘일요화가’인 우체부 루이 비뱅(1861~1936)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몽마르트르, 센 강변 건물의 돌 하나까지 매우 세밀하게 묘사했다.
지하철 공사장의 인부, 인쇄공 등으로 밤에 일하고, 낮에 그림을 그렸던 카미유 봉부아(1883~1970)는 사물의 고유색을 강조하며 과장된 양감을 즐겼다. 레슬링 선수로도 일했던 봉부아는 서커스 단원이나 서커스 장면을 주로 그렸지만 은밀하고 관능적인 그림도 그렸다. 이로 인해 저속하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오히려 이 점이 인기 요인이 되기도 했다.
평생 정원사로 일했던 앙드레 보샹(1873~1958)은 주로 상상 속 고대 그리스의 역사, 신화를 그렸다. 하지만 꽃과 농민의 삶 그리고 근대적인 풍경 등 다양한 화제를 섭렵했다. 그는 1921년 첫 전시회에 율리시스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전설의 동물 세이렌을 주제로 한 그림을 발표했다.
이때 쓸데없는 장식성이나 과장을 거부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표현을 강조한 기능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순수주의(Purism)’을 주창했던 르 코르뷔지에(1887~1965)와 오장팡(1886~1966)은 보샹을 자신들의 잡지 ‘에스프리 누보’에 소개하며 컬렉터가 됐다.
상리스에서 가정부·양치기로 일하며 밤에 그림을 그린 세라핀(1864~1942)은 평생 꽃을 소재로 신비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그렸다. 특히 그의 작업은 소박파의 예술적 특성과 정신 병력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의 중간지대에 있었다.
그래서 세라핀은 이런 류의 소박파 화가들을 칭하는 ‘아르 브뤼(Art Brut)’에 포함되기도 한다. 결국 그는 만년에 정신질환이 도져 요양원에서 생을 마쳤다.
카미유 봉부아의 ‘시장의 서커스’.
정규 미술교육 받지 않고 취미로 그림 그리는 화가들 등장
당시 거침없는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자기 세계를 오롯이 지켜온 소박파 화가 중에 앙리 루소(1844~1910)의 존재는 매우 크다. 가난한 배관공의 아들로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린 루소는 30대 중반에 이미 환상과 전설, 원시성이 서식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일궜다.
처음에는 어색한 인체 비례나 공상과 실재가 공존하는 비현실적인 내용 때문에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루소를 두고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자리(1873 ~1907)는 ‘인류의 그림 그리는 일반적인 규칙에서 벗어난 대가’라는 의미를 담아 “규칙에서 벗어나는 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해할 수 없으면 몽땅 바보짓, 미친 짓이라고 밀어두면 속 편하다”라고 말했다.
앙드레 보샹의 ‘클레오파트라의 바지선’.
앙리 루소, 환상·전설·원시성 어우러진 이미지 세계 구현
이들을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독일의 화상이자 미술사학자인 빌헬름 우더(1874~1947)다. 그는 일찍이 입체파를 발견한 ‘눈 밝은 사람’이었다. 젊고 새로운 화가들을 지원했던 그는 1928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소박파’ 화가들의 전시를 열었다.
앙리 루소, 앙드레 보샹, 카미유 봉부아, 세라핀, 루이 비뱅이 참가한 이 전시는 지금까지 무시했던 인간의 또 다른 내면, 본능적이며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산업혁명 이후 삶은 풍요로워졌지만 반대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삶은 사람들에게 “그냥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유혹했다. 특히 신대륙의 발견과 많은 새로운 지역의 탐사를 통해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지역과 문화, 문명, 사람들을 만나면서 꾸밈없는 순수한 기본이 절박함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18세기부터 싹튼 ‘원시성’과 ‘인간의 본능’에 대한 관심이 확산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가, 법학자인 지암바티스타 비코(1688~1744)는 “원시인이 문명화된 현대인보다 시와 예술적 영감의 근원에 더 가깝다”고 공격했다. 독일의 프레드리히 울프(1759~1824)는 호머와 성경을 민속 또는 구전문학의 전통으로 봤다.
이런 생각은 요한 헤르더(1744~1803)의 ‘예술을 규칙으로 환원하는 이성주의를 비판하고 예술을 인간의 감성적 조건으로 고찰’해 계몽주의의 일면성을 비판하는 기조로 이어졌다. 이렇게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소박파의 존재도 중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소박파는 원시미술(Primitive art),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 아르 브뤼(Art Brut), 또 러시아의 신원시주의(Neo Primitivism)와 같은 부류로 다뤄진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묶기에는 매우 미묘한 ‘같음’과 ‘다름’이 존재한다. 특히 소박파는 민속미술(Folk art)과 혼동하기 쉽다.
또 아웃사이더 아트는 이를 구성하는 작가들이 공통된 양식이나 이념적, 미학적 공통점을 가진 것이 아니다. 아르 브뤼의 경우 장 뒤뷔페(1901~1985)가 정신병력이 있는 이 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의 순수함에 매료돼 붙인 명칭으로 뒤뷔페를 비롯해 클레(1879~1940)가 포함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의 특징은 어떤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연과 현실의 시각적 대상을 경건할 만큼 소박한 태도와 기도하는 자세로 그려내며 건강한 리얼리즘을 구현한다는 점이다. 소박파의 건강하면서 유치한 순수성은 1900년대 입체파의 아프리카 조각, 1910년대 표현주의의 바탕이 된 남태평양의 야생성 짙은 원시예술처럼 현대미술의 동력이 되고 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7 소박파: 나이브 아트, 아르 브뤼, 순수주의, 원시예술, 민속예술, 네오 프리미티비즘 어떤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아이처럼 순수하게 묘사 즐겨 / 국방일보. 2019.7. 31.
28 상징주의 -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 견자, 뉘앙스, 나비파, 오컬트, 신비주의, 데카당스, 데포르마시옹,심미주의, 아르누보,
분리파 -
‘느껴진 실재’ 중시하고 재현 아닌 ‘암시적’으로 표현
꿈·신화·환상 등 주제…모로·클림트·뭉크 등 대표적
구스타브 모로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와 달리 작품의 실체를 중시했다.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과 함께 심리적 진리를 표현하고 새롭고 추상적인 수단을 통해 현실 세계 이면에 있는 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이들은 꿈과 환상 등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림으로 보여주려 했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화풍으로 결집된 사실주의 등의 화파와 달리 개인의 감정, 감성, 생각과 주관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전개했다.
따라서 화풍은 제각각이며 개인의 이데올로기, 특히 ‘보이는 실재’가 아니라 ‘느껴진 실재’를 중시해 ‘눈’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일상’이 아닌 악몽이나 유토피아 등 화가의 내면의 ‘비전’을 ‘재현’하기보다는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주제는 종교적 신비주의나 예언자 즉 ‘견자(Voyant)’에 대한 선망, 에로틱·퇴폐적·변태적·방탕한·병적인 것, 꿈의 세계, 우울, 악과 죽음 등을 다뤘다. 상징주의는 도상학 이전의 개인적인 경험과 진술에 의존한 모호한 뉘앙스의 차이를 드러내며 이를 즐겼다.
‘관념에 감각적 형태’를 입히다
‘상징주의’라는 용어는 1886년 시인 귀스타브 칸(1859~1936)과 모레아스(1856~1910)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이들은 에밀 졸라(1840~1902)의 자연주의를 버리고 시인 말라르메(1842~1898), 폴 베를렌(1844~1896), 랭보(1854~1891) 등과 함께 ‘관념에 감각적 형태’를 입히고자 했다. 이들은 고갱과 휘슬러(1834~1903), 르동(1840~1916), 뭉크(1863~1944) 등과 친구처럼 지내며 상징주의의 살을 찌워갔다.
모로(1826~1898), 샤반(1824~1898), 르동 등은 1870년대에 이미 상징주의를 시작했다. 여기에 카리에르(1849~1906), 뵈클린(1827~1901)과 영국 라파엘전파의 에드워드 번 존스(1833~1898) 등이 가세했다. 이들은 자신의 작품에 영적인 가치를 담기 위해 성경 속 신비한 인물과 신화 속 환상적인 인물, 괴물 등을 소재로 상상과 꿈의 세계를 그려냈다.
산업화와 물질 만능의 사회는 세상을 도덕적·사회적·종교적·지적으로 혼란하게 만들었고, 영적인 쇠퇴를 가져왔다고 믿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보들레르(1821~1867)의 낭만주의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우화적인 꿈을 그렸다. 또 미술에서 자연주의를 넘어서는 수단으로 발레와 카바레같이 새롭게 등장한 오락·향락적인 문화도 탐닉했다.
클림트의 ‘키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미술관 소장
알베르 오리에의 상징주의 선언
상징주의 이론을 세운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1865~1892)는 고흐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봤던 인물이다. 오리에는 1886년 발표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이상주의적인 관념(Ideiste)을 그리며, 상징을 통해 아이디어를 표현하며, 합성적이며, 주관적이며, 결과적으로 장식적인 내부 세계를 시각과 기호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영성은 상징주의의 중요한 테마였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초자연적 현상인 ‘신비(Occult)’를 중시하는 신비주의와 반유물론적 입장을 취했다. 또 ‘데카당스(Decadence)’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갱·에밀 베르나르 등 종합주의 화풍
고갱은 프랑스 서북부 퐁타벤에 칩거하면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에밀 베르나르(1868~1941), 샤를 라발(1862~1894), 폴 세뤼지에(1864 ~1927), 피에르 보나르(1867~1947), 모리스 드니(1870~ 1943) 등과 만나 상징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 생테티즘(Synthetisme), 즉 종합주의라는 화풍이 그것이다.
이들은 관념적인 상징주의, 장식적인 추상화와 문양에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전체적으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그 윤곽을 검고 굵은 선으로 구분하며 입체감이 없는 단순한 평면에 밝고 강렬한 원색으로 칠하는 구성적·장식적이며 평면적인 화면을 구사했다. 이런 면 분할과 색채 때문에 이들은 ‘분할주의(cloisonnisme)’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형태를 변형·왜곡
상징주의는 형과 색의 통합을 목표로 대상을 종합적·상징적으로 파악하고자 인간의 감정을 직접 표현해 대상을 단순화하고 형태를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을 즐겨 사용했다. 또 색 면의 구성, 색을 통한 감정의 표현, 굵은 윤곽선, 평면성이 강조되는 장식적 효과에 현실과 현실, 현실과 타 예술 작품을 결합하거나 차용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했다.
특히 쇼펜하우어(1788~1860)의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이때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의지, 즉 충동과 격정, 감정 등은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 감정’이며, 따라서 음악은 ‘보편적 언어’”라고 하는 음악 형이상학을 차용해 시각예술에 접목하려 했다.
따라서 곡 중의 주요 인물이나 사물, 특정한 감정 등을 상징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v)처럼 반복적인 요소를 사용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특히 음악의 영적인 힘을 믿고 예술의 전면적 통일을 구상한 바그너(1813~1883)의 음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르동의 ‘사이클롭스’. 네덜란드 크뢸러뮐러미술관 소장
아르누보 운동도 상징주의의 일부
아르누보 운동도 따지고 보면 상징주의의 일부라 할 수 있다. 특히 유기적인 선의 반복과 퇴폐적인 주제가 겹친다. 또 17세기 초 유럽에서 등장했던 장미십자회의 신비주의(Rosicrucianism), 즉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질서가 있다는 영적·문화적 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도 유물론을 거부하고 가톨릭과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부활을 시도하며 신비로운 종교적 계시를 미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장미십자회에 속했던 아르망(1860~1931)과 마르슬랭 데부탱(1823~1902) 같은 이도 상징주의의 일원으로 본다.
뭉크의 ‘뱀파이어’. 뭉크미술관 소장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상징주의
이렇게 상징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벨기에서는 크노프(1858~1921)와 독자적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우매함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앙소르(1860~1949)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은 영국 오브리 비어즐리(1872~1898)의 에로틱하며 퇴폐적인 화면도 상징주의에 포함되나 아르누보에 더 가깝다.
상상력에 이미지를 합성해 자신만의 ‘분위기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낸 스위스의 아놀드 뵈클린(1827~1901)이나 날카로운 윤곽선과 선명한 색채로 환상적이면서도 모델화된 인물을 상징적이면서도 실존적 알레고리로 치환한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도 있다.
하지만 1897년 분리파(Wien Secession)를 결성하고 작품에서 성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사람들을 매혹한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와 인간 내면과 존재로서의 고독과 불안, 공포의 감정을 화폭에 담은 노르웨이의 뭉크(1863~1944)는 ‘상징주의의 마지막 열매’로 상징주의를 완성한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8 상징주의- 견자, 뉘앙스, 나비파, 오컬트, 신비주의, 데카당스, 데포르마시옹, 심미주의, 아르누보, 분리파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 국방일보. 2019. 8. 7.
29.야수파 - -습관적인 고유색 버리고 과감한 색·붓놀림 구사
: 보헤미안, 내러티브, 앙데팡당, 감정주의
반자연주의 바탕 강렬한 색 선호 - 요철 가진 표면에 통일된 느낌
대표 화가 마티스·드랭·블라맹크 - 공동 아틀리에 사용하면서 자유롭게 생각과 기법 교환
3년간 세 차례 전시, 상업적 성공 - 내면의 감각 표현 위해 형태·색 왜곡
표현주의·추상미술 탄생에 큰 영향
마티스의 ‘모자를 쓰고 있는 여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
앙드레 드랭의 ‘런던 샤링크로스 다리’.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19세기 말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했다. 대체할 철학 없이 반란으로 전통을 전복시킨 대가는 컸다. 새로운 질서와 철학이 필요했다.
이때 다윈(1809~1882)의 진화론,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학, 키르케고르(1813~1855)·하이데거(1889~1976)·니체(1844~1900)의 지적 탐구와 철학은 파리의 자유스러운 영혼인 보헤미안(Bohemian)과 예술가들에게 ‘새로움’을 재촉했다.
산업화 이후 그림은 전통적인 재현적 회화, 즉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만들기 위한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에서 점차 ‘따뜻함과 차가움’의 조화로 변화했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된 후 불과 50년 만에 대중화된 사진기를 코닥에서 제작·판매하면서 화가들의 임무와 역할이었던 사실적인 묘사는 무용지물이 됐다.
순간의 포착, 대상의 미시적·거시적 포착이 사진기를 통해 이뤄지면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게 됐고 ‘통상적으로 보이던 것’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증기와 전기, 석유 같은 새로운 에너지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도시와 국가 간의 거리는 단축됐다.
그간의 진리가 유일한 ‘참’이 아니라 여러 개의 ‘참’ 중 ‘하나’라는 사실이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것들이 관점과 생각에 따라 하나가 아니라 각각 다른 여러 개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연스럽게 그림은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어떤 외부적인 요소나 자연, 대상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자연,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블라맹크의 ‘샤투의 센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현대 예술에 대한 이런 변화된 생각을 반영한 것이 야수파(fauvism)다. 야수파는 그림에서 설명적이며 표현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색을 분리해 그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그림으로 만들고자 했다. 색은 자연의 세계에서 사실일 필요 없이 직접 분위기를 투사하고 예술 작품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도구였다.
따라서 반자연주의를 바탕에 둔 야수파는 강렬한 색과 표현을 선호했다. 이들의 예술적 관심은 화면의 균형이었다. 단순화된 형태와 형태를 채운 색은 요철을 가진 표면의 질감을 형성하며 시각적으로 강하면서도 통일된 느낌을 줬다.
야수파는 개인의 표현을 중시해 개개인의 직접적인 경험과 자연에 대한 감정적 반응, 이론이나 주제보다 직관을 우선했다. 세잔, 고갱, 반 고흐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제와 표현, 선과 색채 등의 실험을 통해 야수파의 출범을 독려했다.
화가의 심리적인 내면에 바탕을 둔 상징주의는 또 다른 영향을 미쳤다. 또 새롭게 원시미술과 토속미술, 문화인류학을 통해 새로운 소재와 아이디어가 됐다.
야수파는 느슨한 연대를 통해 1900년경 시작돼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실제로 이들이 활동한 것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3년 동안 세 차례 전시를 연 것이 전부다. 이렇게 인상주의 이후 야수파를 거치면서 미술운동은 매우 짧은 주기로 변화한다. 세상이 산업혁명 이후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야수파를 주도했던 이들로는 상징주의 화가 모로의 제자인 마르케(1875~1947), 망갱(1874~1949), ‘야수파의 심장’ 마티스(1869~1954), 카무앙(1879~1965), 푸이(1876~1960)와 블라맹크(1876~1958
), ‘야수파의 눈’ 드랭(1880~1954) 등이 있다. 또 센 강 어귀의 북쪽 영국해협과 면한 르 아브르 출신의
프리츠(1879~1949), 뒤피(1877~ 1953), 브라크(1892~1963), 조르주 루오(1871~1958), 반 동겐(1877~1968) 등도 함께했다.
스승 모로로부터 개인적 표현이야말로 위대한 화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마티스는 개성과 자유, 독창성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점묘파(Pointillism)의 기법과 색체계에 경도돼 조화로운 색의 장식적인 조합을 시도했다. 그는 튜브에서 나오는 물감의 원색을 그대로 사용했다. 1890년대에는 야외에 나가 작업을 시작해 1898년 코르시카와 남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강한 자연 채광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드랭·블라맹크와 만나 파리의 교외에 공동으로 아틀리에를 얻고 대담한 색과 분방한 붓놀림을 서로 습득했다. 이들은 1905년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열린 살롱 도톤에 출품했다. 이들의 그림은 형태를 가리는 생생한 색채와 거칠 것 없는 붓 터치로 눈길을 잡았다. 당시 전시를 본 미술비평가 루이 복셀(1870~
1943)이 “도나텔로가 야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고 비아냥거린 것이 그대로 ‘야수파’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비평가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야수파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고 1907년 개최된 앙데팡당전에 넓고 큰 야수파의 방을 얻어낼 정도로 성공했다. 짧은 전성기였지만 이들은 함께 여행하고 아틀리에를 공유했으며 자유롭게 생각과 기법을 교환하며 성장했다.
루오의 ‘그리스도와 사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야수파는 그 어느 것보다 개인적인 표현 수단으로 색채를 중시했다. 색상과 색상의 조합은 작품의 본질적인 주제, 형식 및 리듬을 구성한다. 그들은 습관적인 고유색을 버리고 원래의 물리적 형태보다는 작가의 지각을 통해 전적으로 독립된 창조물로서 작품을 제작했다.
또 원근법이나 명암법 같은 솜씨보다 색의 배치와 조화를 더 중시했다. 주제는 주변에서 구해 풍경이나 인물을 포함했지만, 색을 가능한 모든 내러티브나 상징주의보다 우위에 뒀다. 특히 그들은 대상의 관찰자로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주체는 자신이고 자신만의 표현, 독창성, 개성을 가장 우선했다. 또 관객들에게 내적이며 창조적인 경험을 하도록 인도하는 수단으로 활발한 붓놀림과 비자연주의적인 색채를 선택했다.
이렇게 내면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와 색을 왜곡하는 야수파는 표현주의 특히 독일의 키르히너(1880~1938), 로틀루프(1884~1976) 등의 표현주의와 향후 등장할 추상미술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과 ‘회화적 사실’이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머리보다 가슴에 의존했던 화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야수파는 과도기였다. 1907년 세잔의 회고전 이후 많은 화가는 입체파의 길을 따르며 야수파의 뜨거운 감정주의를 버리고 차가운 입체파(Cubism)에 가세한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9.야수파 -보헤미안, 내러티브, 앙데팡당, 감정주의 -습관적인 고유색 버리고 과감한 색·붓놀림 구사 / 국방일보. 2019.8. 21.
30 입체파(Cubism) - 대상을 조각조각 나누고 비틀고 다시 결합하다
- 세탁선,모델링,단축법,파피에 콜레,오브제,콜라주,섹시옹 도르(황금분할),튜비즘,
사물 왜곡하고 인물 면으로 재구성 - 윤택해야 할 근대적 삶이 주는 정신적 공허와 혼란 상징
형태 분할 심해지면서 - 본래 모습 알아볼 수 없게 추상화 - 20세기 이후 미술에 지대한 영향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브라크의 ‘기타를 든 남자’.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성했지만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입체파는 주로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피카소(1881~1973)와 브라크(1882~1963) 같은 화가들이 몰려 살았던 ‘세탁선(Bateua-Lavoir)’이란 건물에서 시작됐다.
원래 피아노 공장이었던 월세 15프랑짜리 이 목조건물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작은 방들이 배치된 탓에 세탁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가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 후앙 그리(1887~1927)도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이 누추한 곳이 입체파의 산실이다.
입체파 시대 연 피카소
이들은 자연 모방이나 원근법, 모델링, 단축법 등 회화의 전통적인 방법보다는 캔버스의 2차원적 측면을 중시했다. 대상을 입체적으로 단순화하는 세잔의 방법론은 대상을 분석적으로 접근해 다양한 각도에서 본 대상의 각기 다른 측면을 작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나누고 이를 다시 결합해 동시적으로 재현하려 했다.
여기에 전통적 이베리아 미술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피카소가 파리의 팔레 뒤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학 박물관에서 처음 접한 아프리카 조각은 1907년 그로 하여금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하도록 했다.
피카소는 대상을 급격하게 왜곡시키고, 면으로 나눠 표현해 입체파 시대를 열었다. 브라크도 이 시기 ‘에스타크의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집과 나무, 산을 마치 상자처럼 면으로 나누고 명암 처리했다.
이들이 처음부터 입체파 풍의 작품을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세잔의 느낌을 논리적으로 완성하고자 했다. 여기에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된 아프리카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 이들은 사물을 왜곡하고, 인물을 면으로 나눠 이를 재구성했다.
이는 산업과 과학의 발달로 윤택해져야 할 근대적 삶이 주는 정신적 공허와 혼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통적인 형태의 개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즉 아름다움이라는 구체적이지도, 실재하지도 않는 명목적 가치에 매몰된 미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시대나 종교가 아닌 개인의 미학적 정의와 취향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자율성을 실천하고자 했다.
1908년 브라크가 입체파의 후원자였던 독일인 화상 칸바일러(1884~1979)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비평가 보셀(1870~1943)은 이전에 마티스가 브라크의 그림을 보며 ‘작은 입방체(P etit cubes)’라고 한 말을 떠올려, 약간 빈정대는 투로 사용했는데 그것이 입체파라는 명칭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근대적 삶의 정신적 공허와 혼란 상징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과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 이론’, 생철학과 직관주의를 통해 사물의 근원을 ‘순수지속’으로 규정한 베르그송(1859~1941)의 ‘창조적 진화’ 등 전에 없던 과학과 철학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한 정신분석 등의 변화가 미술에서도 새로운 발상과 전향적인 태도를 요구했다.
초기 입체파는 대략 1910년까지만 해도 대상이 그림 속에서 여러 개의 작은 면으로 ‘해부’되거나 ‘분석’됐다. 이 시기를 초기 입체파 또는 세자니즘(Cezannisme, 1908~1910)이라 한다. 그 후 이렇게 나뉜 면들은 아직도 원래의 형태나 모습을 잃지 않은 상태다. 이를 분석적 입체파(Analytic Cubism, 1910~12)라 한다.
이때 피카소와 브라크는 형태의 분석에 집중하고자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회색이나 갈색 등 단일한 색채로 화면을 통일했다. 주로 다룬 주제는 문자나 악기, 병, 안경, 신문, 카드 등으로 인물이나 풍경은 드물었다.
형태의 분할이 심해지면서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되자 다시 이들은 대상성의 강화 즉 화면에 현실감과 일상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신문지, 악보, 상표 등 종이류를 찢어 붙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e)나 화면에 직접 모래, 철사, 밧줄, 상자 등의 오브제를 붙이는 새로운 기법인 콜라주(Collage)와 이들을 연결시키는 선묘가 추가되는 기법을 구사한다. 이 시기를 종합적 입체파(Synthetic Cubism,1912~
1914)라 한다.
하지만 영국의 더글러스 쿠퍼 (1911~1984)는 자신의 저서 『입체파 시대』에서 입체파를 새롭게 구분했다. 쿠퍼는 우선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세탁선 시기를 초기 입체파(Early Cubism,1906~1908), 신인상파의 사실적인 색채에 반하는 기하학적인 실험을 시도한 하이 입체파(High Cubism,1909~1914) 시기로 나눴다.
구성원들은 브라크, 피카소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둔 작가들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파리 근교 퓌토에 모였고, 1911년 이들은 입체주의에 속하는 퓌토그룹을 조직했다.
이들은 스스로 황금분할이란 의미의 ‘섹시옹 도르(Section d‘Or)’라 칭했다. 이 명칭은 자크 비용이 자신들의 기하학적 화풍에 합리성을 부여하고자 16세기 다빈치가 삽화를 그린 ‘섹시옹 도르’라는 글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흩어지고 말았지만 이후 추상미술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색채의 음악적 구축을 통해 추상미술의 길을 제시한 쿠프카(1871~1957)와 산업사회의 기계적 역동성을 원통형의 입체로 표현하는 실린더리즘(Cylinderism) 또는 튜비즘(Tubism)을 선보인 레제(1881~ 1955), 순도 높은 색채와 다이내믹한 운동감이 넘치는 화면을 완성한 들로네(1885~1941)와 다다이즘을 지나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선사한 뒤샹(1887~1968) 등이 있다
추상미술 탄생에 큰 기여
이외에도 입체파의 새로운 기법과 미학에 동조한 많은 살롱 큐비스트 화가들이 있다. 후앙 그리, 포코니에르(1881~ 1946), 장 메챙제(1883~1956), 글레이즈(1881~1953), 레이몽 비용(1876~1918), 자크 비용(1875~1963)과 로제 드 라 프레네(1885~1925) 등이 있다.
여기에 입체파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아폴리네르(1880~1918)가 있다. 이 밖에도 조각을 통해 입체파의 시각을 구현한 조각가 아키펭코(1887~1964), 짜키(1888~1971), 자드킨(1890 ~1967)과 립시츠(1891~ 1973), 로렌스(1885~1954)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쿠퍼는 후기 입체파(Late Cubism, 1914~1921)를 제시하며 입체파의 마지막 단계인 급진적인 전위운동을 언급했다. 그는 칸바일러 화랑을 통해 입체파를 전개했던 피카소와 브라크, 후앙 그리, 레제와 구별하려는 의도로 이런 분류법을 사용해 1971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입체파 전시를 기획하며 후기 입체파 시기를 크리스털 입체파(Cubisme cristal, 1915~1016)라고 규정했다.
애초에 모리스 레이날(1884~1954)이 명명한 크리스털 큐비즘은 넓고 큰 기하학적인 평면을 겹쳐놓아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환원시킨 평면을 강조한 형태의 입체파다. 추상적인 것에 뿌리를 둔 기하학적 기초적인 구조는 사실상 예술 작품의 요소를 모두 지배한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30 입체파(Cubism) -세탁선, 모델링, 단축법, 파피에 콜레, 오브제, 콜라주, 섹시옹 도르(황금분할), 튜비즘
대상을 조각조각 나누고 비틀고 다시 결합하다 / 국방일보. 2019.8. 28.
[출처]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Ⅲ -①라파엘 전파,②아르누보, ③사실주의,④인상주의,⑤점묘파,⑥신인상주의,⑦소박파, ⑧상진주의,⑨야수파,⑩입체파|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