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군동 삼층석탑
가을이 깊어가는 만큼 내 가슴은 떠나지 못한 아쉬움에 타들어간다.
완연한 추색의 산하를 눈에 담지 못한다면, 농익어 가는 만추의 서정을 품은
서경을 놓친다면, 다가올 겨울 날 폐사지에 내려앉은 스산한 한가로움을 느낄
수 없기에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한다.
추령고개를 넘어 감포를 목적지로 서라벌 보문호수를 지나다 말고 방향을 털어
멀리 황금물결 춤추는 들녘에서 자기를 찾지 않고 스쳐 지나는 나를 노려보는
천군동 쌍탑에게 인사나 하려고 달구지를 서라벌초교 앞에 새우니 코에 익은 가을
들판의 베어 논 볏집 내음이 향수를 자극해온다.
풍요로움이 근심으로 다가오는 현실의 부조화, 삶의 어긋짐도 가을걷이의 순간만은
잊어버리고 바쁜 손놀림으로 분주한 촌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천년을 넘은 세월을
수없이 명멸해간 사연들을 가을에 젖어 되새김질 하며 쌍탑은 말없이 서있다.
제 이름마저 역사에 묻어버리고 천군동 쌍탑으로 불리 우는 탑은 감은사 탑 이후에
조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겠으나 하기단의 우주, 탱주가 없고 1층 몸돌이 유난히
흰 빛을 띠고 있는 까닭에 호기심(?)을 유발한 탓인지 몸돌 괴임은 원형을 잃고
콘크리트에 몸을 의지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서라벌의 영화가 이어질 쯤에는 뭇 선남선녀의 탑돌이 발걸음으로 번잡했을 텐데
이제는 건너편 보문단지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는 소음에 지쳐 서있을 힘조차 없을 것
같지만 드물게 찾아오는 길손에게는 신라탑의 건실함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말없이 계시기만 해도 권위가 우러나오고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시던 어린시절 고향
동리의 어르신들처럼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음지운 모습으로도 다가오고, 갈바람에
흰 수염을 날리며 막걸리 한 주발에 얼굴 가득 만족한 웃음을 짓던 어르신, 아니
우리 할배의 모습으로도 보여 진다.
천년 세월을 살아 있는 쌍탑에 흔적만 간직한 채 사라진 풍탁 소리 그리며 또다시
폐사지를 찾아 추령고개를 향해 달구지에 채찍을 가한다.
기림사
그렇게 여러 번 들렸음에도 기림사 들어가는 길이 영 익숙지 않다.
들도, 산도 낯설어 추억을 더듬으며 가는 도중에 두 분의 보살님을 차에 모셨더니
매표소에서 차창을 여시고는 칠불사(?) 간다고 하니 무임승차다.
이렇게 넓은 주차장이 언제 조성되었지?
크게 번잡하지 않는 사하촌을 지나 티내지 않으며 한가롭게 가을빛을 쬐고 있는
연봉이 아름다운 율암대사의 석종형 부도의 즐거움도 잠시
새롭게 불사한 일주문이
왠지 어색했지만 모처럼 만에 산내음, 물내음, 흙내음과 어깨동무하고 바람소리 벗 삼아
오감을 마음껏 열어 재치고 느긋하게 산길을 걷는다.
댓닢의 화음과 낙엽의 군무가 한가로움을 훔쳐가는 천왕문에 이러서야 눈에 익은
절집으로 기림사는 내게 그렇게 다가오며 범종루 앞 감로수에 입을 적시고 뜰을
들어서면 진남루가 길을 막고 탐사객의 맘을 가다듬게 한다.
루(樓)라면 필시 2층 전각, 즉 누하진입이 가능하여야 할텐데 단층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여타의 남해안 지역의 가람처럼 임란, 정유재란 시 승병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하나 혹 남쪽의 강한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풍수 비보는 아닐까?
하지만 안내문에는 이곳의 형국이 영구수음, 즉 신령한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상
이라하며 그래서인지 그 유명한 5개의 샘은 비보책으로 조성된 듯 하다.
진남루를 돌아 기림사의 중심 영역인 대적광전에 이르면 기와불사만 아니었다면 고색
창연한 본전인 대적광전이 온화한 미소와는 거리가 있는 소조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협시불로 모신 채 참배객에게 길을 열어주며 여타의 전각과
달리 내부도 소박하기 그지없고 어칸을 비롯 꽃창살문도 기둥이 낮아 거부감이 사라지며
대적광전 옆의 약사전 전각도 눈여겨 볼만한 특색 있는 건물로 측면에는 출입문이 없고
후면에 출입문이 있어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얕은 안목도 내 몫이거늘......
응진전 앞의 이끼가 옥개석에 핀 아담한 3층탑은 1층 몸돌의 괴임석이 3단이라 퍽
이채로우며 고개를 돌렸지만 뭔가 허전한 감을 지울 수 없더니만 목탑 자리에 있던
500년 수령의 보리수가 사라진 탓임을 금새 알아채고는 황급히 다가섰지만 태풍 매미의
여파로 쓰러져 잘라버렸다는 보리수의 밑둥만 바라본다.
보리수가 있을 때는 나무에만 눈이 가고 목탑의 주추 흔적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주추가 한눈에 들어온다. 간사한 놈!!!
석축과 돌담이 유년의 외갓집 고샅을 떠올리게 하는 계단을 올라서면 팔상도가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을 모신 관음전과 삼천불전의 영역이지만 역시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재건립중인 박물관 공사로 인해 흔치않은 건칠보살상을 친견할 기회를 놓친 아쉬움에
명부전과, 삼성각도 들리지 않고 물 한 모금 입에 담고 되돌아 나와 고종 15년에
(박물관 공사는 2004년 4월까지 예정되어 있어 혹 건칠보살상을 뵙고 싶은 분들은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처음 기림사내에 경주유림들이 지은 매월당 김시습 사당
으로 향했지만 역시 닫혀진 문은 나를 거부한다.
아쉬워 말자!
절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다시오면 될 것이니...
함월산 골굴암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와 골굴암으로 향한다.
흔히들 중국의 돈황석굴에 비하지만 그건 사대의 발로일 뿐 그냥 우리의 흔치
않는 석굴사원으로 바라보자.
근래에 전통무예인 선무도로 널리 알려진 골굴암은 석회암 바위덩어리에 가람을
배치한 것으로 여기며 접근해보면 누구든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도 산중턱 마애불에 산화와 자연재해로부터 석불을 보호하기위해 차양막을
설치되어 있지만 입구의 안내문에 의하면 “조선시대 산수화가 겸재의 경주 석굴도
에는 목조전실이 있었다“라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훼손이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을 지나면 얕은 동굴 안에 지장전이 보이며 관음굴 입구 산신각 앞에는
참으로 기분 좋은 글귀를 만난다.
산신각 뒤쪽의 전혀 남근석 같지 않는 바위와, 약간은 여근석을 닮은 바위를
설명하기를 “자손 귀한 집안의 부녀자들이 남근석에 참배하고 여근석을 소제한
후 그 위에 앉아 밤새워 기도하면 이틑날 부녀자의 여궁에 정수가 가득 고여
...“,
뭐 특별히 기분 좋은 글귀가 없다고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스님이 직접 쓴 안내문 마지막에 그 흔한 -주지-라는
말 대신에 산에 있는 중 즉 “山僧”이라는 말 어때요?
골굴암에서 가장 깊고 역사책에서도 법당굴로 명기한 자연 석굴 관음전을 지나면
본존불인 아미타 마애불이 오른쪽에 연화문의 두광, 긴 귀와 가슴부위의 습의, 백호
를 잃어버렸지만 소발, 두툼한 입술, 화염문 거신광을 갖춘 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바위의 재질로 보아 훼손이 우려되는 것은 함안의 방어산 마애약사여래불과 다를 바
없지만 통풍이 가능한 전각이 있어 다소 안심이 되며, 멸실되고 없는 오른쪽 수인이
항마촉지로 여겨지나 골굴암 측에서는 아미타불로 명기해 놓았다.
여타 책에서는 마애불로만 설명해지만 우리나라의 자연석굴의 시원이며 최초의
항마촉지 수인의 석불인 군위의 제2석굴암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의 수인이나
협시불로 인해 아미타불로 불려지니 크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마애불을 내려오면 얕은 석굴마다 전각 푯말을 세우고 보살과 부처를 모셔 두고
있어 바위 전체를 사찰로 생각한 나의 생각도 영 엉터리는 아닌 듯 하다.
머물고 싶지만 관광버스로 도착한 한무리의 참배객의 소란스러움이 싫어 긴 시간
머무르고 싶던 마음이 사라져 기림사로 길을 재촉한다.
덕동호를 감싸고도는 굽이 길을 지나며 예전의 도로를 거쳐 추령재를 넘어가야지
몇 번이나 다짐을 했음에도 우매한 이놈은 방향을 놓치고 터널을 지난다.
수없이 다녀온 길이라 익숙할 법도한데 괜히 설레며 불국사, 석굴암 이정표를 보고
장항리 마을을 지나 장항리사지로 향한다.
장항리사지
경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경주 답사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겠지만
널리 알려진 문화재가 아니고선 좀처럼 이정표를 발견할 수 없는 현실이 장항사
절터도 예외는 아니다.
문화유산의 보고라지만 변변한 이정표도 갖추지 않은 문화정책이 한심하기 그지
없고, 그반대로 한 두 점의 문화유산이 있는 지차체의 눈물겹도록 고마운 노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베개 닢에 넣기 위해 들국화를 채취하는 중년의 노부부가 아니라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골 개울 건너편에 추색 짙은 나무 사이로 상륜부를 드러낸 오층석탑이
큰소리로 ‘어여 오게나’하는 듯한 착각이 들어 황급히 개울을 건너려다 말고 잠시
명부전의 업경대 앞에 발가벗고 서있는 내 삶의 흔적이 노출되는 것처럼 명경지수
의 개울물에 비친 내 모습을 기죽어 바라본다.
이름마저 알 수없어 동리의 이름을 딴 장항사지는 토함산 동쪽자락 좁은 터에
자리 잡고 있지만 남겨진 오층 쌍탑, 석불이 사라진 연화 대좌만으로도 내가슴은
작은 떨림으로 다가온다.
본디는 중앙에 금당을 두고 좌우에 오층탑이 있었겠지만(이러한 예도 거의 없고
좁은 절터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기단에 농짓거리 할 것 같은 사자와 신상이
새겨진 불대좌에는 석불입상이 사라지고 없으며(석불의 가슴위의 부분은 경주박물관
에 있다) 동탑도 기단 없이 1층 몸돌, 5개의 옥개석만 얹져 놓았다.(이 또한 개울가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부재들을 수습한 결과다)
하지만 거의 온전한 서탑의 1층 몸돌 사면에 귀면 손잡이가 달린 문비와 양쪽에
돋을새김 된 아금강과 흄금강의 생동감 있는 인왕상을 바라보면 반가움에 눈을
떼지 못하고 1500년을 간직한 석탑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오는 듯한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좁은 부지에 어느 스님이 주석하시며 한소식 접했을까?
서라벌에서 문무왕 산골처로 가기위해서는 기림사 뒤 함월산 길이 있었기에 신라왕의
제의를 위한 주 통로는 아니었을 것인데...라는 씰데 없는 상념에 잠겨 있는 차에
개울건너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 돌렸더니 낯선 이방인 그것도 참하게 보이는
처자가 택시에서 내려 서탑의 상륜부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
택시기사가 설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맘보다 여기를 찾아온 저 여자는 누구일까?
라는 의문의 꼬리에 이어 건너오라, 개울을 건너오라라고 수없이 텔레파시를 보냈건만
그녀는 외면하고 자리를 뜬다.
건너온들, 나의 느낌을 전할 방법도 없건만, 한적한 장항사지에서 꿈꾸듯 만난 그녀가
장항사지 오층석탑 만큼이나 다시 보고 접은 것은 가을이 내게 가져다주는 유치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는 아닐까?
감은사지
기림사를 벗어나 가을이 농익어 가는 들길을 달려 감은사지로 향한다.
찾는 사람 없던 한적한 폐사지였던 감은사지는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 후
거의 답사의 메카로 여겨질 만큼 많은 사람이 사시사철 찾고 있으며 답사,여행기도
넘쳐나고 있는 현실이다.
몽고의 침입 시 호국불교의 상징이던 황룡사지의 목탑을 불태운 놈들은 대종마저
몽고로 반출하기위해 이곳을 통해 바다로 옮기는 중 물속에 빠트린 슬픈 역사를
간직한 대종천을 앞에 두고 용당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감은사지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를 기려 창건한 사찰로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감은사지에서 뭘 보았고, 느꼈나요?
우루루 몰려가서 친절하게 게시된 루트를 따라 한 바퀴 돌면은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아! 감은사여”라고 감흥이 오던가요?
어느 누구도 감응사지 앞 용담에 내려가서 선착장(?)도 확인하지 않고 금당터의
수구만 보고 고개를 끄떡이며 신라 최초의 일금당쌍탑 배치, 3층석탑의 시원이라는
설명만 되내이며 돌아오지 않았나요?
저도 님들과 오십보백보 입니다.
횡설수설이 주특기인 저의 근거 없는 이바구를 해볼까요.
왜 하필이면 최초로 쌍탑을 건립했을까요? 혹 삼국통일을 이룬 후 전대왕조와 다른
문화적 상징의 기념물을 조성하고자 했던 선민을 빙자한 왕권 강화의 목적은 아닐까요?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대형 석조불상을 곳곳에 그런 목적으로 조성했고, 전두환 정권이
백성들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 프로야구를 창단, 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디제이의 햇볕
정책도 그러한 범주이듯이...
또한, 삼국유사 내용을 패러디 해볼까요?
만백성들이여!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는 가고 이제 새세상이 도래되었도다.
우리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던 왜구들도 이제는 문무왕의 넋과 만파식적이 우리를
지켜주니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며 왕조에 충성을 다하라!
물론 나에게는 미술사학자들의 눈으로 보는 미감이 있을 리 없기에 3층쌍탑의 시원이
주는 건실함, 절묘한 상승감과 안정감의 조화 등의 깊은 이해는 없지만 최초의 시도로
인한 육중함, 기술의 부족에 따른 많은 석탑부재의 사용이라고 보면 어불성설일까?
이런저런 잡스런 사고의 유희를 즐기며 풍수적 시각으로 보려고 해도 제기럴 반풍수는
커녕 언감생심 쿼트풍수도 안되기에 쌍탑이 어금니라는 것만 기억해 낼 뿐이다.
물론 도선 이후 도입된 풍수지리라 편년의 오류가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내가 좋아하는
경산대 최창조 교수에 의하면 그 이전에도 우리 고유의 자생풍수가 있었으며 감은사지도
그러한 풍수적 접근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기에 간략히 옮길테니 기회가 되신다면
답사시 새로운 맛을 느껴 보기 바란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국력을 가지고도 왜구를 걱정하고 사후에 용이 되어 그들을
막겠다고 이곳에 몸을 묻은 까닭도 왜구들의 침입 경로이기에 그래서 여기에 집중적
으로 신라식 풍수 우리민족 고유의 원형적 사고에 입각한 대비를 마련한 것이 바로
감은사 터로 보는 것이다.
문무왕릉이 있는 대종천 하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보인다.
그 입을 통하여 왜구들이 들락거린다. 만약 그 용이 입을 다물어버린다면 왜구들을 씹어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때 대종천 양안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감은사 3층 석탑 2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식 풍수의 원형이랄 수 있는 신라인의 풍수 비보책인 것이다.
이렇게 풍수적 해석을 가해 놓고 보면 왜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겠다고 했는지, 왜 용자
돌림의 지명이 많은지, 감은사는 왜 바다와 통하는 특수구조를 했는지, 그리고 2기의 3층
탑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지가 확연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의 풍수란 바로 이런
것이다.“
2003.10.18
첫댓글 누들스의 멜을 받고 갱상도 문둥이들 참조하라고...
선과형님 좋은자료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또다른...
사랑합니다.(2)..옵 얼굴 잊어 버리겠어요...
앗~~ 우리영감님 오셨네. 보고싶어용~~ ㅋㅋㅋ
행니마... 밥사조오~~ 행니마... 밥사조오! 라디오에 이와 비슷한 말이 나와서 ... ㅋㅋㅋ... 사진도 찍고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잘봤습니다.근데...감은사탑을 80년대에 첨 만났었는데요..그리고 몇번이나 보아왔는데요..볼때마다 예전모습같지 않음이 마음 아프던데요.ㅜ.ㅜ
옵으로 불러준 미소,백설공주 많이 사랑해!, 선림원 우리영감? ㅋㅋ, 형님이라 칭한 드림, 유현 복받을겨!, 정다운! 사무실도 가까이 있으면서 쇠주 언제 할까?, 누들스는 내년에도 욕 보거래이!!, 이집트님,트리스탄님! 달구벌 사시죠? 언제 함 모딥시다.
우와..대구 사셔요?? "저 산길 끝에는~~" 에서 글 보고 마니마니 뵙고싶었는데..^^ 11월에 기림사를 다녀왔는데.거기가 보리수가 있던 흔적이었군요,,넘 궁금했었는데..고맙습니다.
그라고 보이 사무실은 같은 수성구 집은 또 같은 달서구..ㅋㅋㅋ
선과옵~ 밥사줘!! 선과옵~밥사줘!! ^^...기림사 보리수가 있었을때가 그립다 그 열매로 염주도 만들어 팔곤 했는데.. 태풍이놈들...우리 보리수 돌리도....~~~
ㅎㅎㅎㅎ 감은사지 지금 공사중이던데....요^^
지난 여름. 조금은 섭섭한 느낌의 기림사, 햇살 뜨겁던 골굴암, 그리고 호연지기의 감은사탑, 그 느낌을 다시 접할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