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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443년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되었다. 28자를 만들었는데 4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24자가 쓰이고 있다.
창제 동기는 〈훈민정음〉 서문에 나타난 자주, 애민 실용이다. 자음을 어금닛소리·혓소리·입술소리·잇소리·목소리의 5가지로 나누고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그 세기에 따라 획을 더했다. 모음은 천지인의 세 가지(·, ㅡ, ㅣ)를 기본으로 이를 조합하여 모음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훈민정음〉에는 이외 글자들의 운용 원리도 담겨있다.
한글은 정음, 언문, 반절 등으로 불렸으나 19세기 말에 국문이라 불리게 되었고 1910년대부터 한글이라 했다.
어느 한 시기에 창제되어 일시에 반포·사용되고,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28자가 창제되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에 훈민정음
한글의 제정을 위해 15세기 조선의 언어학자들은 우리말의 닿소리
어금닛소리의 /k/는 혓바닥의 뒤쪽을 여린입천장에 올려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이 경우의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ㄱ' 자를 만들었다. 혓소리의 /n/는 혀끝을 윗잇몸에 붙여 내는 소리이므로 그 혀의 모양을 직선으로 그려 'ㄴ'자를 만들었다. 입술소리의 /m/는 입술을 닫고 내므로 입술의 모양을 그려 'ㅁ'자를 만들었다. 잇소리의 /s/는 혀끝을 갈아서 나오는 공기의 흐름이 윗니 끝을 스쳐서 나는 소리이므로 이의 줄을 본떠서 'ㅅ'자를 만들었다.
목소리의 하나로 본 /(소리없음)/은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그려서 'ㅇ'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글자들은 그 소리나는 힘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각각 획을 하나씩 더해서 만들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ŋ;/, △/z/, ㄹ/l/인데, ''이 ㄱ의 제자원리를 따르지 않고 ㅇ을 따른 것은 //에 목소리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 ㄹ'은 각각 'ㅅ, ㄴ'을 따르되, 내는 힘에 따라 획을 더하는 원리는 따르지 않았다. 그러고 'ㅂ, ㅍ'은 ㅁ에 획을 하나씩 더하는 원칙에 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ㅁ자의 안에 획을 더하면 '曰, 目'과 같이 한자와 같아지고, 글자의 밖에 획을 더하면 ', '처럼 되어 한 글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닿소리를 낼 때는 소리(내는) 기관 가운데 능동적으로 잘 움직이는 혀나 아랫입술이 그와 맞보고 있는 자리에 가 붙거나, 아니면 아주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에 소리기관의 움직임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닿소리글자는 소리기관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 그러나 홀소리
홀소리를 그 소리의 인상에 따라 혀를 오그리고 깊은 인상을 주는 소리인 /^, o, a/, 혀를 조금 오그리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인상을 주는 소리인 /ï, u, ə/, 혀를 펴고 얕은 인상을 주는 소리인 /i/(중성)으로 나누었다. 이 3가지 소리 가운데 양에서는 /^/, 음에서는 /ï/, 중성에서는 /i/를 대표로 뽑고, 이 세 소리를 적는 글자를 각각 하늘·땅·사람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는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로, /i/는 땅의 평평한 모양을 본떠서 'ㅡ'로, /i/는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떠 'ㅣ'로 적었다. 혀의 모습이나 소리의 인상에 따라 '·, ㅡ, ㅣ'를 조합하되, 양성과 음성의 대립을 고려하여 양성은 위·오른쪽에, 음성은 아래·왼쪽에 점을 더했으며, 이 소리 앞에 'ㅣ'가 앞서서 나오는 때는 각각 점을 하나씩 더하도록 했다.
한글의 이름은 경우에 따라 다르게 불려져왔다.
① 훈민정음 : 한글이 만들어졌을 때의 공식적인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② 정음 : '훈민정음'을 줄여 '정음'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③ 언문 : 한문에 대해서 우리 토박이 말을 적는 글자란 뜻으로 쓰였다.
④ 언서 : 언문을 '언서'라고 하기도 했으니, 이것은 한자를 '진서'라고 한 것에 대립한 말이다.
⑤ 반절 : 중국 음운학의 반절법에서 한 글자의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소리를 성모와 운모(중성+종성)로 양분하는 방법을 쓰므로, 한글이 그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⑥ 암클 :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란 뜻으로 낮추어 부른 이름이다.
⑦ 국문 : 19세기말에 민족주의 정신의 대두와 더불어 쓰이던 말이다.
⑧ 한글 : 1907년부터 주시경은 '하기국어강습소'를 운영하기 시작해서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창립했다. 1911년에는 '국어'란 말을 쓰지 못하게 되자 학회의 이름을 '배달말글 몯음'이라고 했다가 1913년에는 다시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7년에 기관지인 〈한글〉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니, 한국의 글자에 대해 권위를 붙여준 이름으로, '정음'이란 이름과 그 정신이 서로 통한다.
지금 쓰이고 있는 한글의 기본글자의 수는 24자이며, 이것으로써 적을 수 없는 소리는 2개 이상의 기본글자를 어울러서 쓰는데, 그 이름과 소리는 다음과 같다.
표음문자로서 한글은 여러 특성을 갖고 있다. ① 우선 한글은 한국어의 음소를 적는 데 가장 합리적인 체제를 갖고 있다. 한글은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② 알타이어계 언어의 공통 특질인 모음조화를 잘 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③ 보편적인 음성기호로 사용해도 충분할 만큼 조직적이며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표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④ 음절구성의 원리가 간단하여 배우기가 쉬우며,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자리에 따라 문자와 소리가 다른 경우가 거의 없다.
이렇게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한글은 음성학적인 변별요소를 가장 함축적으로 문자의 형태에 반영하고 있고, 문자의 구성요소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구나 어느 한 시기에 창제되어 일시에 반포·사용되고,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한국사람은 제 말을 중국글자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 방법은 매우 어색하고 복잡해서 〈훈민정음〉 끝에 붙인 정인지의 글처럼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통달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말을 바르게, 반듯이, 옳게 적을 수 있는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로는 한국사람은 제 말을 자유로이 적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문에 억눌렸던 한국의 민족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할 밑거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도 한국에는 문학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한문으로 되었거나, 한자를 빌어 한국말을 적어서 그때의 소리로 돌이키기 어려운 작품들이므로, '참된 한국문학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용비어천가〉(1445)·〈석보상절〉(1447)·〈월인천강지곡〉(1449)과 같은 작품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으니, 이것들은 참된 한국문학활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석보상절〉의 맞춤법은 원칙적으로 여덟 받침(ㄱ, ㄴ, ㄷ, ㄹ, ㅁ, ㅂ, ㅅ, )을 쓴 '소리대로 적기'이다.
완성되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맞춤법은 〈월인천강지곡〉에서 그 싹이 텄던 것이다.
15세기 후반에는 문학작품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한문책을 옮기는 일에 더 큰 힘을 기울였다.
1460년대에는 많은 불교 경전이 번역되어 나오고, 15세기말에는 민중교화를 위한 수신서가 옮겨졌다. 또 1481년에는 중국의 시인 두보의 작품이 한글로 옮겨졌다. 16세기에는 유교의 경서와 수신서, 농업·양잠에 관한 한문책들이 한글로 옮겨졌다.
1493년에 찬정된 〈악학궤범〉
한자의 소리는 뜻글자인 한자로써 풀이해야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한글은 간단하게 그 소리를 적어낼 수 있다. 〈동국정운 東國正韻〉(1447)은 조선 한자음을 한글로 적은 것이고, 〈홍무정운 역훈 洪武正韻譯訓〉(1455)은 중국 소리를 한글로 적은 것이다. 1527년 최세진은 〈훈몽자회 訓蒙字會〉를 지어 한자의 뜻과 새김을 한글로 적었고, 〈사성통해 四聲通解〉(1517)에서는 당시의 중국소리의 체계를 세웠다.
그 이전에도 가사
17세기 이후에는 한글소설이 발달하여 소설이 한글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춘향전〉·〈심청전〉 따위는 당시에 나온 한글소설의 걸작들이다. 이밖에도 〈계축일기〉·〈한중록〉·〈의유당일기〉 등 한글수필·일기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한글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어문생활에 등장한 것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즉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이 공포되어 기존의 한문 대신 국문을 공문으로 했는데, 제14조에는 이런 조치가 지나치게 혁신적이고, 이상적임을 인식했던지 국문을 본으로 하고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고 규정했다. 물론 이 조치는 우려했던 대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국한문이 주종이 되는 타협이 이루어졌지만 이전까지 공문서에 쓰이지 못했던 한글이 한자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일시에 한글의 지위를 격상시켰고 국민들에게 한글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의 소학교 국어교과서 〈소학독본〉이 국한문으로 표기되었고 갑오개혁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던 〈관보〉는 이듬해에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1895년 유길준은 〈서유견문 西遊見聞〉을 역시 국한문으로 펴냈고, 다음해 4월 7일에 독립협회에서 창간한 〈독립신문〉은 순한글에 한글 띄어쓰기를 시행했다.
한편 당시의 문자생활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근대의 사상에 눈뜬 일부 식자들은 국어의 근대화를 위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주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우선 국어 규범을 통일하기 위해 1905년 7월에 지석영(池錫永)의 6개항으로 된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 新訂國文〉이 공식으로 공포되었으나 사회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아 시행되지 못하자, 이를 심의하기 위해 1907년 7월에는 최초의 국어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
1909년 이 연구소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흐지부지되고 한글은 일제강점기의 수난기로 들어갔다.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이어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조사에 나서, 1911년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며(1920 출판), 1912년에는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했다. 한편 주시경에 의해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재건되어 뒤에 '조선어학회'(1931)·'한글학회'(1949)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5년 8·15해방으로 한글은 다시 소생했지만 국어 교원의 부족, 일본어의 범람, 국어 규범의 부재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이에 조선어학회에서는 1946년 '맞춤법통일안'과 〈표준말 모음〉을, 문교부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을 내놓았으나 이렇다할 성과를 보지 못하고 6·25전쟁이 터졌다. 1954년에는 대통령의 유시에 따라 한글간소화와 국문 전용을 정책으로 결정했으나 이의 시행이 강력한 반대에 밀려 국한문 혼용이 지속되었다(→한글파동
1970년 시행된 교과서의 한글전용은 2년 만인 1972년 원상 복귀되어 기초한자 1,800자가 중·고등학교에서 다시 학습되었다.
1980년대는 1959년 개정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외국인 위주의 표음주의로 전환해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개정했고(1983), 1958년의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을 현실음에 접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외래어 표기법'으로 개정했으며(1985) 이로써 어문생활에서 나타나는 괴리를 좁히게 되었다.
1933년 공표 이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쳤으나 사문화되거나 재사정이 필요하게 된 '한글맞춤법
한글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문명과 도구의 발달에 따른 한글의 기계화에는 많은 장애가 노정되어 있다. 타자기와 컴퓨터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한글의 입력에 음소별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모아쓰기 형태인 한글은 인쇄매체에 사용되는 글꼴의 수가 많아야 하므로 한글 글꼴을 개발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한글이 소리글자이면서도 모아쓰기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이점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한글의 기계화가 요청된 것은 타자기의 자판에서였다. 초창기 도입된 타자기의 자판에는 자음 1벌과 모음 1벌로 구성된 2벌식, 초성자음 1벌과 모음 1벌, 받침자음 1벌로 된 3벌식, 초성자음 1벌과 모음 2벌, 받침자음 1벌로 된 4벌식, 초성자음 2벌, 모음 2벌, 받침자음 1벌로 된 5벌식 등이 사용되었다. 1969년 정부에 의해 4벌식이 타자기의 표준판으로, 2벌식이 텔레타이프의 표준판으로 각각 확정되었다.
그뒤 1982년에는 컴퓨터의 표준글자판으로 2벌식을 고시했고, 1985년에는 타자기의 표준자판을 2벌식 입력에 4벌식 출력 방법으로 바꾸었다. 2벌식의 입력방식은 초성과 종성의 구별이 없는 풀어쓰기 방식을 택함으로써 자음 19자, 모음 10자만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한글 전산화에서 현실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한글 전산부호의 문제이다. 한글을 컴퓨터에 인식·저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자와 같이 그에 해당되는 부호를 만들어 대응시키는 방식이 사용된다. 이에는 단위음소를 구분하여 대응시키고 순서대로 조합하여 출력하는 조합형, 조합된 음절 단위로 대응시키는 완성형의 2가지 방식이 이용되고 있다.
이중 조합형은 음소문자로서의 한글의 무한한 창조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방식이지만, 로마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국제방식과 잘 맞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완성형은 완성된 글자를 부호화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글자의 수가 2,000여 자에 불과하게 된다. 정보사회의 도래에 발맞추기 위한 한글의 전산화에 따르는 바로 이런 문제점을 한글 연구의 선구자였던 주시경은 일찍이 예견하고 풀어쓰기로 전환할 것을 주창했었다.
풀어쓰기는 음소문자로서 한글의 특성을 살리면서 정보화시대에 적응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독성에서 모아쓰기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과학적인 글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글은 기계화에서의 한계, 한자 사용, 규범의 불완전성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는 한글에 대한 공허한 찬사나 대안 없는 개혁의 주장이 아닌, 구체적·실천적인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한글의 과학화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와 다양한 한글 글꼴의 개발 등은 그러한 여러 과제 중의 하나이다.→ 고대국어, 국어, 중세국어, 한글날, 한글맞춤법, 한글전용, 한글파동, 한글풀어쓰기,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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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한으로 연합하여 내 너를 보니라
사시와 징조와 날자와 연한을 다룬 일에 독생자의 영광으로 흐른 은혜와 진리니라
아멘(Na. N)
요1:1. 요1:14
창1:14
아멘(창1:14-18)
요1:1-18
아멘(Ar. Ne)
아간의 상함을 다룬 일에 요나의 고집이다.
요나의 고집!
요한. 요나. 요엘. 요실금. 요게벳으로 흐른 일에 노엘이다.
노엘!
욜. 행
아멘(행2:17-21)
욘
욜
아멘(요)
요게벳도 연합하니라
아멘!
민26:59
하갈로 화답하신다.
하갈!
창16장이 스쳤다.
엘로힘을 구속한 일에 엘 로이다.
엘 로이!
엘 올람
엘 샤다이
엘 엘로헤이 이스라엘
엘 로이
엘로힘
엘니뇨
아멘(엘리뇨:엘니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