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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2년 겨울쯤
내 유학 목표가 프로농구 코치였기에
운동은 생활에 일부였죠.
몸이 말라서 주로 유산소운동보다는 무산소운동을 중점적으로 했는데
어느 날 친구와 가볍게 운동을 하기위해 체육관에 갔죠.
스트레이칭을 한 후 평상시 하던 대로
늘 하던 벤치프레스에 누어
가벼운 무게부터 시작을 시작하려는데
바벨 봉을 쥐고 들어 올리는 순간
왜 이리도 무거운 지
봉을 원위치시키고 무게를 확인했죠.
무게는 항상 시작하는 50kg
이상한 아니 묘한 느낌이 들었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시도
그런데 일은 다시 터졌죠.
50kg의 바벨은 네 가슴에 떨어지고
순간 가슴에 뻐근한 통증
그러나 그 통증보다 더 큰 충격
내 최고중량 120kg반도 안 되는 무게도 들기는커녕
내 가슴에 내동댕이치듯 놓침.
그러나 심각히 생각하진 않았죠.
당시엔
생활이 빠듯할 정도로 바빠서 피로해서 그럴 수 있겠거니 했죠.
아침 8시부터 오후4시까지 수업
바로 근교에 있는 프로보시 고교팀 코치로
2시간 정도 가르치고
저녁은 햄버거 하나
식후 바로 도서관서 수업과제하고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알바
내가 약 1년 정도 있던 유타주에 있는 BYU 대학팀 코치가
내 생활 스케줄에 놀랄 정도였죠.
그래서 내 피로함에 몸이 따라오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죠.
더군다나 일상생활엔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니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병인 줄은..
꿈에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어느 날
늘 한국에서의 농구 소식을 매일 인터넷으로 확인하며
정보를 얻던 중 우연히
인터넷에 연대 최감독님이 현대모비스의 새 감독으로 된 것과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그 팀의 최연소코치로 됐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죠.
믿기지 않은 소식에 바로 떨리는 손은 벌써 수화길 들고
최감님과 통활 하고 있고
그 소식이 진짜임을 확인한 후
난 기쁨의 눈물을 흘렸죠.
이 부분은 여담이지만
제가 프로팀 코치를 목표로
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간단 말에 대놓고 비웃은 사람도 있었고
내 앞에선 격려하는 사람도 뒤에 선
‘네 가서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사람 등
대다수 사람들은 인정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농구계에선
내 존재도 모르며
내가 유학가든 말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죠.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전 사회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농구의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는 선수가 아닌 코치로 복귀하리라 생각
각오를 다짐하며 남몰래 늘 준비하며 지냈죠.
내 체력관리와
농구교실에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알바로 등촌동 한국사회체육센터에서
강사도 하고
새벽반 저녁반 영어학원을 다니며 준비했던 사실을 주위에선 모른 건 당연
아마 제 가족도 모르고 있는지 싶어요.
하여튼 내 목표달성은 계획(유학기간 총 5년)보다 2년 반 앞 당겨졌고
전 약 한 달 정도 더 머무르기로 했죠.
살던 집 계약건과
최감독님 오더로 용병찾기
전 유학당시 많은 사람과 다양한 인종과 접하면서 친구로 만들면서
그들이 맞춰 준 연결이 우연히도 농구선수나 코치와 인연되어
에이존시도하는 경험도 있었죠.
미국유명 대감독 연락처와
마이클조던을 스카웃했던 사람도 만나서 명암도 받고
그 외도 많은 선수도 확보하고
매년 열리는 시카고드레프에도 참석해서
내 선수도 출전시키기도 했죠.
이 모든 걸 다 저 혼자 2년 4개월 동안 해낸 자욱이죠.
<제가 왜 이런 글을 자세히 밝히는 이유는
병을 진단 아니 확정 받고 난 후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표현하고 그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잘 나타내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 한 달 사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일이 생겼죠.
어느 날 저녁 무렵
난 여느 때와 같이 학교도서실로 갔어요.
그날은 학생이 없는 한 스터디룸으로 자릴 잡고
인터넷검색을 했어요.
당시 내 숨통을 조이던 이름 모를 병을 알아보기 위해
설마하는 심정으로 한참을 찾을 필요도 없이 내 증상과 너무나 흡사한 병을 발견하게 되었고
‘근육병’내가 내린 병명이었죠.
확실한건 아니었지만 증세가 너무 흡사했거든요.
어느새 내 두 볼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
전 그 동안 노력해온 많은 일들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하나하나 떠오르며 날 괴롭히더군요.
더욱 괴롭게 만들었던 사랑하는 부모님과 누나들
부모님과 누나들은
유일하게 절 믿고 응원해 주셨거든요.
전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죠.
어디서 그 많은 눈물이 나왔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도서관 닫는 벨소리에 눈물을 멈쳤죠.
이후 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고‘금의환향’을 했죠.
단 내가 진단내린‘근육병’이 아니길 빌면서
난 아무에게도 귀국날짜를 알려주지 않고
전처에게만 알렸죠.
만약 내가 내린 그 병이 맞는다면
부모님 두 분에게 그토록 기다리신 기간 동안
분명 희망 기쁨 환희 보람만을 기다리실 내 부모님께
오늘과 내일사이 희비가 교차되는 맛을 보게 할 순 없어
나 역시 가족이 기쁜 맘으로 날 마주하는 꿈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죠.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거늘..
그리고 조용히 한국에 도착한 후 이틀 뒤
내 그토록 절실한 바램은 산산이 조각나고 내 병명의 결과는
근육병보다 더 무서운‘사형선고’가
두 어깨에 천근만근으로 내리눌렀다.
‘루게릭’희귀난치병
듣도 보도 못한 병
또 한 번 충격이 내 머리를 강타했죠.
난 이제 첫걸음을 시작하려 했을 뿐인데
왜 내게 이런 일이..
그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단
길어야 2년 안에 호흡장애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단 말을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연필지우개로 볼펜글씨를 지울 수 없듯이
지워지지 않았죠.
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 동안 기다려온 내길도 험난했던 시간들
운동선수로 10년이란 시간을 어두운 후보로 지내면서
같은 선수들조차도 내 존재도 모르는 무명선수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내 팀은 대학 최강 연세대 실업최강 기아자동차
그러나 이런 막강 팀의 선수였긴 하나
누구나 하나 날 알아보는 팬 없고
그나마 동정어린 팬만 몇이 고작
난 그 몇 안 되는 팬에게 보답할 길과
더우나 추우나 아들 성공한 날 기다리는 부모님
언젠가 울 부모님께선 이런 말씀을 넌지시 한 적이 있으시죠.
‘동네사람들이 김훈, 조동현, 조상현(쌍둥이)와 황성인
이상/초중고대학까지 후배들 이야길 하시며
‘승일인 언제 TV에서 볼 수 있지’하며 은근히 시기하며 비교하는 모욕감을 주더라는 것이죠.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는 선후배들과 스승인 감독코치님들에게도 있었죠.
체력이 남들보다 부족한 전 개인운동을 홀로 참 많이 했죠.
혼자하는 운동이라 외로울 땐 가끔 워커맨끼고 운동을 하는데
어느 날 학교 내산이 있는데
새벽에 혼자 체력운동으로 그 산을 뛰어올라 가던 중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을 지나가는 그 안엔 감독님이 계셨는데
날 쳐다보시는 눈빛이 이상했죠.
혹 시워커맨 때문에 그런가 했죠.
제 직감이 맞았어요.
웃기죠 운동하며 음악듣는 게 죄?가 되는 것이
하지만 난 쉽게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내 평생의 목표이자 꿈인 프로농구 코치
그래서 난 휴가도 반납하고 바로 팀에 합류했고
최감독님이 빠진 프로농구 2부 리그에바로 투입하여 우승을 따냈죠.
이 경기가 내 처음이자 마지막경기가 될 줄..
난 내가 미국유학생활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2부 리그에서 최대한 발휘했지만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믿는 내가 갖은 테넌트는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왼쪽어깨와 팔이 약해져갔고
한 3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난 결심을 했죠.
매일 선수들과 몸을 부딪치며 코치직을 수행하여야하는데 볼 잡기에도 힘겨운 난
이 고민을 알려야겠다하여
2002년 7월의 어느 날(진단받은 지 3개월 즈음 된)난 최감독님께 사실을 알렸죠.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는 시간은 얼마길지 않았죠.
감독님도 생사가 달린 코치 겸 제자 그것 당신이 직접 스카웃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구단단장에게 알리게 되고
난 감독님께 알린지 일주일도 안 되어
코치직을 내놓고 사표 처리됐죠.
대한민국 한해 프로농구 코치가 되려는 유명선수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그것도 무명선수였던 내가 그 많은 시간 노력 시련을 극복한 결실이 겨우
농구 비시즌 3개월 동안이라니
난 현대 본사를 등지고 나오면서
수 만 가지 생각을 했다.
후회는 없지만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내가 뭣을 잘못해서 이런 비극이 생기는 걸까
열심히 앞만 보며 산 것이 잘못된 것인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만큼에 결과와 행복이 함께할 거라는 믿음
왜 한꺼번에 나만 희생양이 되어야만하나
내 목표가 너무 커서 온 불행일까
난 내 선수시절 배경만 거창했지 실속하나 없이
빈 껍데기선수시절을 보내야했죠.
대전중고교를 거처
모든 이에 꿈인 연세대
그리고 실업팀 중 최강팀 인기 자동차농구단에
(당시 프로팀 출범하기 전이였죠.)
하지만 남보다 뒤늦게 시작하여 체력도 기술도 모든 면에서
내팀 선경쟁자에게 밀려 한 시즌도 제대로 소화 못했죠.
운동선수 시절 10년 내내
그야말로 개 같은 날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죠.
난 내 대학도 요나실업동료까지 인정할 정도로 연습벌레였고
당시 코치였던 유재학(現모비스감독)형도
날 보며“쇠덩이만 보면 흥분하냐”는 말을 할 정도로 웨이트 불리기(헬스)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죠.
그렇게 난 내 어둠의 후보생활을 벗어나
아버지께 인정받는 아들로
농구계에서 인정받는 선수
최감독님께 제자로서의 대한 감사와 선수로서의 대한 인정
그리고 후보였지만 항상 응원해 주던 소수의 팬들에게 보답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농구 선수시절을 마감해서
그것들이 맘에 한이 되어
은퇴 후에도 늘 편하지 못해
술로 방황의 시간도 잠깐 보낸 적도 있었고
누구보다 회사 일에 열성을 다하며 미친 듯 일에 몰두하며 살았으나
가슴한 구석엔 늘 농구코치의 꿈을 키우며 살았죠.
농구선수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4년 만에 도전하여 성공하여 돌아왔지만 결과에
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한편으로 어찌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쉽고 서운했지만
현실의 나를 발견하고
계획을 세웠죠.
이 말도 안 되는 희귀병을 알리자.
이대로 삶을 포기하기란 절대 있을 수 없다 해서
난 몸이 하루하루 변해 감을 느끼면서 까지도
홍보하였죠.
몸이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가족모두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왜 제가 힘든 길 아무도 하지 않고 아니 시도조차하지 않은
길고도 험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었죠.
제가 잠시 동안이지만 모비스코치로 제직하고 있을 때
내일에 열중하면서도
내 몸과 맘을 짓누르는 병과의 소리없는 전쟁을 하면서
많이 힘들어했죠.
그 무섭다는 인간의 적인 수많은‘암’도
초기에 발견으로 치료하면 살 가능성이 매우 높고
최악의 경우에도 단 몇 %의 가능성과
암 극복한 환우들이 있는데
내가 앓고 있는 이병은 도대체
치료약은 커녕
발병원인도 알지 못하며
또한 황당한 것은 아직 의사들조차 이 병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잘 알고 있지 못해
몇 환우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소식이죠.
예를 들어 디스크라는 진단을 수술하면 좋아진다는 말에
수술하고도 차이가 없어
나중에 알고보니 오진이고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사기성의 의료행위로
그나마 없는 재산 깡그리 거덜내고
그로인해
가족은 하나하나 귤껍질 벗겨지듯 흩어지고
남은 건 쓸모 없는 비겟덩이와
썩어들어가는 몸과 마음 뿐
기껏해야 정부에서 보조비로 나오는 간병비 10만원(당시 2002년)
그것도 지원해준다며 생색내는 보건복지부 질병과 담당자
이런 환우들에게 무관심과 횡포에
기댈 곳이라고는 제 자신
이런 희귀병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개만도 못한 취급에 몸서리치며
불과 몇 년 전에 열린 월드컵때 자랑스럽게 외쳐대던 '대한민국'이
정부에 정말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할 시기에
날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건강하게 직장 다닐 땐 국민의 의무를 운운하며 그 비싼 세금을 걷어갈 땐 언제며
이젠 거지나부깽이 취급하는 이 나라
내가 살아온 이 대한민국이 나 속이는 것을 생각하며
이 고통 속에 사는 환우들을 생각하며
루게릭 홍보에 뛰어들었죠.
제 인생의 스승은 두분
아버지와 최감독님
아버지는 제게 직접적으로 삶은 이런거다라고 교육적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셨죠.
내가 기억이란 걸 인지하게 된 어린 나이때 훨씬 전부터
가게를 하셨는데
근 40년간 단한번도 쉬는 날이 없으셨죠.
때론 남들의 다른 가정환경에 의아해본 적은 19년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진
내 그런(대화도 없고 가족과 여행이란 꿈도 못꾸는 그런 삶 19년 동안 두어번 정도 여행간 기억 남)
생활에 불만은 전혀 없었고
늘 아버지의 생활모습에 연약한 제 모습을 반성하며 나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아버지의 근면 성실 정직 절약의 모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베이기 시작했죠.
그런 청소년기를 거쳐 19세 말기부터 24세 초기까지 인생의 황금기시절 만 4년 동안
세상과 사회의 이치를 배웠죠.
제겐 농구는 단순한 운동 종목 중 하나가 아닌 내 모든 걸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죠.
'12명' 제 대학 동기들
전국 각 고교팀에서 뽑힌 최고 선수들
졸업할 당시 단 5명만이 팀에 남았고 그 중에 3명 정도
아니 현재까지 선수로 코트장에 남은 친구는 단 한명.
그렇게 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혹독한 훈련으로 가르쳐주신 감독님
실수도 용서도 그 무엇도 용남되지 않는 사회의 축소판.
그렇게 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혹독한 훈련으로 가르쳐주신 감독님.
실수도 용서도 그 무엇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의 축소판.
아마도 내가 무모한 도전 '유학'을 감행하게 된 것도
대학때 몸으로 정신으로 익힌
무서운 도전력에서 나온 것 같아요.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감독님의 혹독한 독특했던 가르침.
이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이 두분이 제가 이렇게 살아있게 만드신 제게 소중한 분들이죠.
마지막 한분
병을 홍보하면서 알게 된 협회 부회장 김진자님.
이분은 남편이 병을 앓고 있어도 10년 이상을 병수발에
우리가 지금 혜택받고 있는 간병비나 호흡기 대여료 70만원도
이분의 노력으로 받게되었죠.
지금은 고인이 된 안정근 홍보이사님도 많은 일을 하셨구요.
부인이 이병으로 계시는데 병수발하시면서
정작 자신이 암으로 얼마전..
많아요.
감춰진 곳에서 묵묵히 일하시는 분들..
현재 이렇게 누워서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회원들에게 말했듯이
이 루게릭 홍보를 '마지막 직업'이란 말은 그날 기분에 말한 것이 아니라는 거
전전에도 그러해왔듯이
항상 아이디어 구상으로 늘 기회를 기다리며
기다렸어요.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기 전엔
잘 움직이지 않는 몸과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혀는 날 방해하는 적이었지만
두렵거나 이상해져 가는 제 모습을 피하진 않았죠.
그것은 나약해졌단 증거니까요.
제가 힘들게 느낀 건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충격적인 사고 소식에 너무나 빨리 적응하고
또 빨리 잊는다는 거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초창기에 전 가족조차 반대에 아무의 도움도 지지도
받지 못하며 혼자 발로 뛰며 일을 했죠.
먼저 팩스를 샀죠.
각 구단에 아래와 같은 협조문을 보냈죠.
KBL과 각 구단, 그리고 코칭스텝과 선수들에게 보여지고 있는 이 협조문은
모 방송국(곧 앞으로 출연계획임)과 이런 매개체로 국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바려며
우리 카페에도 올립니다.
협 조 문
루게릭 환자 요양소 기금마련 기획
2002년 KBL 최단기간 현대 모비스 코치 역임 박 승 일
한국 프로농구 선수 및 관계자 여러분께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우리나라는 국민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증진을 위해
성심껏 활동하시는 프로농구 선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대 사회에서 건강하고 가치있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스포츠 문화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렵고 힘들게 투병하는 여러 질병의 환자들이 많이 있으며,
그중 특히 원인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쌍하게 병을 앓다가 죽어가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환자들이 있습니다.
본인 박승일은 올해 5월달에 서울대학병원에서 루게릭(근위축성 측삭경화증)으로 판명이 났고,
그로 인해 KBL 등록한 코치 중 최단기간 코치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생긴 병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과 좌절은 이루 말하기 어려우나, 이렇게 무의미하게 남은 생을 맞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다라는 판단 아래, 우리나라 인구수에 비례하여 극수수인 이병을 가진 환자와, 또 다시 언제 나타
날지 모르는 또 다른 환자에게 내가 받은 똑 같은 비극적인 현실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보자. 그리고 숨
어서 지내는 우리 불치병을 가진 환자들에게도 이제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을 하려 합니
다. 정부의 작은 지원과 소홀한 대책에 허덕이는 루게릭 환자들에게 좀 더 나은 시설에 좀 더 나은 시선
을 보내고자 선수 모두, 나가서는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렇게 특별한 직
업을 가진 선수들의 도움을 먼저 받고자 합니다. 선수 한명, 한면의 작은 정성이 앞으로 누가 될지 모르
는 불행한 또 다른 사람과 또는 현재의 이병을 가진 모든 불치병 환자를 돕는 길이라 생각하시고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작년 5월에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ALS환자들의 모임인 "한국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ALS) 협회가 창립되었습니다. 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에는 환자들이 ALS 질병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
기가 힘들었으며, 사회적으로 정당한 처우를 받고자 의견을 주장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렇듯 힘들게
투병하는 ALS 환자들이 사회에서 올바르게 인식되도록 돕고 효과적인 치료를 받도록 이끄는 일은 현대
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은 중추신경계의 운동신경이 파과됨으로써 사지위약, 근위축, 연하장애, 구
음장애, 호흡마비 등이 급성으로 진행되며, 일단 이 질병이 발병된 후에는 약 3~4년만에 죽음을 맞게
되는 무시무시한 질병입니다. 1930년대 미국에서 명성을 날렸던 야구선수인 루 게릭(LOU GEHRIG)이
이병으로 사망한 후 루게릭에 대한 사랑과 감동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 질병을 루 게릭병
(LOU GEHRIG'S DISEASE)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세계의 많은 야구인들은 루게릭 환자들
의 치료를 돕기 위해 자신이 실제 모금에 참여하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사회적 지원을 유도하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다이아몬드 빅스팀의 투수 커드실링이 루게릭 환자들을 위한 모금행
사를 실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주위에 있는 루게릭 환자들을 돕기 위한 기획 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환자, 의사, 보호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농구인, 그리
고 국민들의 동참이 필요합니다. 비단 제가 이병에 걸려 이런 기획을 하게된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누
구에게 예고없이 찾아갈 수 있는 이러한 불행의 아픔을 똑같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 그것입니다. 또
에이즈의 백신이 연구개발됨으로 전 세계 약 5천여종의 난치병에 있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이
렇게 꺼져가는 제 삶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습니다. 힘없고 불쌍한 우리나라 ALS 환자들의 모임힌 "한
국 ALS 협회"는 여러 농구선수들의 참여로 크나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많은 농구선수들께서
이들을 도울?!?수 있는 기획에 참여하셔서 우리 ALS환자들에게 자기도 살아날 수 있다는 실 같은 희망
과 용기를 심어주십시오.
금년에도 여러 농구선수들께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시고 목표하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2-09-02
기획인 박 승 일
벌써 3년 전이네요.
그리고 각 단장들과 직접 통화도 하고
도움을 청하며 구단으로 찾아가서 팀 코칭 스텝을 만나기도 했지만
내가 코치 자격으로 만날 때완 달리
마치 물건 팔러 다니는 잡상인 취급하는 팀도 적지 않았죠.
유학시절 시카고 드레프트에 갔을 때만 해도
아무 소속이 아녔던 내가 대했던 말과 행동도
이렇게 냉담하지 않았고
코치자격으로 있을 때 두려운 신인으로 주목받으며
부러움 반 시기 반으로 날 그런 존재로 여겼던 사람들
당시 난 치밀어 오는 모욕감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참 힘들었죠.
참 내게 잘해주던 현재 모팀 코치 역시 내게 모르는 사람 취급을..
그래도 내 뜻을 이해해준 선밴 현재 모비스 코칭 스텝 두분과
최감독님, 현재 연대 감독 등 다수
전인원에 비해 극소수..
코치 모임이 있었는데
강남의 모식당에서 현재 각 구단의 코치들이 모였다.
여러번의 모임이 전에 있었다고 했으나
어제 저녁 전코치들이 모인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제일 많은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나의 '루게릭 기금 마련'에 대한 것이있다.
코치님들은 이제 코치가 아닌 날 불러주셨고,
그들 스스로가 날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 루게릭병을 가진 환자들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이라고 했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그들의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
전 모비스 코치 김유택 선배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선 코치 스스로 움직임을 갖자...는
SK 코치 박건영 선배님, 삼성의 안준호 선배님, 그리고 전 KCC 코치 박종천 선배님의 주축으로 이렇게
시작되었던 이 나의 기획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 많은 일이 남아있지만 이렇게 모든 분들의 성화와 관
심이 앞의 밝은 농구 발전과도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에 이름이 거론되질 않았지만, 윗분 이외의 모든 코치님들도 너무나 많은 격려에 어제밤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내 카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띄워보았다.
이랬던 내 맘은 그해 시즌이 끝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고
몇코치만 개인적으로 집에 다녀가시며 코치들 성의라며
당시 첫연봉인 내 월급에도 못미치는 표시가 끝
그렇게 믿었던 한가닥의 희망이 무너지고 이어진 배신감
각팀의 선수들은 내게 도움을 주었죠.
전팀 중 2개팀과 개인적 후배들이 도움이 됐죠.
지금도 잘 나가는 대학 M모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빵원
이러는 사이 서장훈은 이런 말을 하며 1백만원을 기부했죠.
"난 참 형이 이해가 안돼. 이런 상황에 형 몸은 돌보지 않고"
제가 이렇게 홍보하는 소식이 전해지는 동안
각3사 방송국의 굵직한 프로에서 섭외전화와
신문사 잡지사 지방방송국 등..
코치로 왔을 적
날 알고 싶다며 내게 접근할 때완 달리
내가 코치직을 벗는 날 단 한명의 직원조차 배웅하지 않은 모비스
나와 적어도 3개월 같은 배를 탔다면
배웅할 적에 '그동안 수고했다'는 인사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난 그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이 배신감으로 바뀌고
마침 중앙일보의 어느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내가 3개월동안 쉬지 않은 노력의 댓가가 겨우 내 비밀을 털어놓은지 1주일만에
사표를 쓰게 만들고 기타 등을 털어놓게 만들고
그 억울한 실화 기사를 본 모비스 측은
마지막 달 월급 3백과
어설픈 감사패를 건내는 걸로 끝냈다.
이런 사실은 MBC임성훈과 함께로 시작하여
같은 방송국 시사프로 2580을 하면서
사회호응을 타며
KBS 피플 세상 속으로
SBS 스타 도네이션
메디 TV
KBS 우리가 사는 세상
MBC 생방송 화제집중
등 많은 방송을 타는 성과를 거두고
사람들에게 이병을 알리는데 도움이 됐죠.ㅎ
그러나 그 당시엔 이휘재를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
그 방송프로가 1년 전거란 걸 모르고 있었죠.
그러던 중에도 전 홍보활동 중이었고
이날(휘재를 만난 날)도 울산에 모비스팀
(신문방송으로 홍보활동을 하자 도움을 많이 주었죠)이
경기가 있어 비행기로 이동하던 기내 안에서
휘재와 가수 일행이 내 자리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아있음을 보고
난 무슨 생각할 거리도 없이
염치를 불구하고 옆에 동승한 가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짜고짜 내 소개를 하고 본론에 들어갔죠.
휘잰 차분히 공인답게 내 이야길 듣더니
날 이미 방송을 통해 알고 있으며
그 방송은 재방이란 것도 알려주면서
내 의사를 알았으니 담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SBS에서 '휘재가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고 연락했다는
전화가 왔고
난 그의 덕으로 홍보에 큰 도움을 봤죠.
다른 하나는
은퇴 후에도 직장에 근 4년 토탈 만 6년(선수로 2년) 동안
강제로 국민연금에 돈이 9배 정도 들어갔는데
장애연금이라도 투병생활에 보탬이 될까 해서
알아봤더니
진단 후 2년이 지난 후에도 병이 지속되어야만이
연금을 지불한다는 황당한 말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용인지부 차장과 어렵게 통화하면서
이런 말도 안되는 법이 어딨냐며
루게릭병의 증상 중 가장 중요한 부분 하나를 말했다.
대부분 환우는 진단받기(국내에 이 병을 확실히 진단 내릴
의사도 몇되지 않음)도 어렵고
행여 진단 받더라도 과반수가 넘는 환우는
2년 안에 호흡장애로 사망한다.
그런데 규정에 2년 후라면
돈 한푼 받지 못한단 소린데
당신 자식 같으면 그 썩어빠진 규정에 응할 것 같냐하는 말에
한마디 대꾸도 못하던 그가 건의를 해보겠단 대답에
며칠을 기다렸지만 대답은 NO였죠.
그래서 평소에 관심있게 보던 이 방송프로에
고발하게 되었고
진단 후 2년에서 1년으로 시정 변경되었죠.
누구나 할 수 있었겠지만
좋은 기회와 시기를 잘 이용한 결과죠.
이번에
나와 대학교 1학년때 하와이에서 만난 개인적 친분이 있던
주) 엔에스코리아 유병석 지사장님의 저녁식사 초대로
김미남과 유사장님댁에
간 적이 있었죠.
이미 제 소식을 알고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편하게 대해주신 기억이 나네요.
저녁식사 후 가볍게 디저트를 하며 전 또 제 일에 충실...
(당시 내 옆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든 루게릭병을 먼저 들어나 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이 병 설명을 들려주곤 했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그 회사에 혹시 기부금 문화에 대해..
어쩌구저쩌구하니
내 이야길 신중히 듣고
전부터 어떻게 도움을 줄까 하고 고심했는데 잘 됐다며
2002년 그해부터 6곳 중 최고액을 지속적으로 기부하고 계시죠.
현재 기부하고 있는 곳은
KTF
주) 엔에스코리아
주) 삼성화재(친구가 주도해서 그 부서만)
그리고 제가 홍보하던 당시 협회 이름으로 개설한 (루게릭요양소 기금)통장과
또 다른 환우 역시 다음 카페를 열어 나와 비슷한 역할 통장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고 있죠.
KTF 에선 우연히 제가 출연한 방송을 보고 관계자 한분이 중앙일보 마라톤대회에
1인 1미터에 얼마해서 얼마씩 전 출연자에 한해 모금액을 매년 기부하고 있죠.
어느 2002년 병 진단을 받은 해
당시 이혼하기전 전처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가 박찬호라 하면서
힘내라는 말을 전해달라 했다더군요.
난 믿기지 않아 확인 전활했는데 사실이었죠.
조심스레 약속을 했죠.
언제 한번 만나자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집으로 박선수가 방문하지 전까지
몇 번의 통화도 하고
박선수가 자신의 홈피에 제 글도 올리며 관심을 보여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죠.
그런데 한가지 오보가 있었죠.
박선수가 날 (금전적으로) 도와준다는 기사가 여러번 나오면서
내 가까운 친구나 친인척까지도 오해를 한 것이죠.
참 황당하더군요.
그 일로 전 심한 좌절과 허탈함을 느끼게 되었죠.
내 순수한 동기가 속보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죠.
그가 약속한 건 1승에 1백만원씩 적립했다가 시즌을 마치면
기부금으로 내겠다는 건데
아마도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그에게
지속적 또는 단발적으로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라고
기억하고 있을 거란거죠.
만역 기사화한다면 이것도 해주세요.
저도 그책을 읽었죠.
오래전 시사 프로그램2580 김진호 PD가
'전혀 슬프지 않고 읽을만하다'고 권하길래
그즈음엔 제 몸 진행상황은 누가 봐도 비장애자와 다름없고
저 역시 책을 읽어감에 따라 다른 독자들처럼 놀라기도 하고
모리의 낙천적인 부분에 감동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단순히 다른 독자의 감정이 아니라
모리가 겪은 길을 곧 나도 가야한다는 내 현실에
전 책장 한장을 넘기기가 무척 힘들었죠.
다음 페이지에 어떤 악몽 같은 사살이 전개될런지
전 그 책을 괴로와하며 한달이 넘게 읽어야만 했죠.
중간중간 읽는 것을 그만 둘까도 했지만
어차피 내가 격어야 할 미래의 내 모습
어차피 알아둬야 할 내 병에 대한 정보들
피하려해봤자
피해가지 못하는 현실
단순히 감동만 전하는 책이 나한테는 해당사항 없다는 거
이런 것들이 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했고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한달이 넘게 내 곁에 머물러 내 친구가 되었죠.
'촛불'과 루게릭..
어쩜 맞는 소리 같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요.
촛불은 자신을 희생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어 도움을 주지만
루게릭병에 걸린 환자는 결코 누구를 도울 수 없고
오히려 타인 즉 가족을 피말려 같이 죽음까지 불러들이는
'물귀신'이라고 표현할까요.
내 표현은 대한민국의 산 현실이 이런 표현을 만들었고
수십년 전 모리의 사회에서
그 모리가 고통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나라의 좋은 복지생활로
그의 가족은 경제적 생활에 전혀 문제를 못 느끼며
하루 세번 로테이션 되는 전문간병인들의 도움으로
모리는 병에 대한 고통을 가족과 시간을 같이 하다 조용히 떠났지만
우리네 현실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누가 그러더군요.
승일씨는 최고급 호텔생활을 하는 거라고
좋은 줄 알라고
죽이고 싶도록 밉더라구요.
저도 알아요.
이렇게 부모님이 건강히 내 곁에 계시고
비싼 맘씨 좋은 간병인도 두고
전셋집이지만 좋은 이웃에 좋은 주변 환경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내가 처한 환경을 알고나 한다면 결코 내가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다란 걸 알 수 있죠.
날 간병하시는 엄마와 간병인
하루에도 똑같은 실수가 여러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달라지는 건 노환으로 인한 건망증과
정말 촛불 같은 엄마의 생명과 체력
울 엄마 연세가 70을 바라봅니다.
그런 엄마를 바라만 보는 제 심정
내 나이 35세
보통 이 정도 나이면 손자 손녀와 노후생활을 즐기실 때
울 엄마는 2미터가 넘는 1급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절 돌보십니다.
TV에서 좋은 부부나 가족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구칩니다.
모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 중 하나죠.
비록 장애를 얻었지만 가족에겐 피해를 주지 않았잖아요.
적어도 나처럼
전 이런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복지왕국 미국이나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나처럼
전 이런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복지왕국 미국이나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정신적으로 이런 고통은 느끼지 않고
죄스런 맘은 덜할텐데..라는
앞으로 얼마나 힘들어하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모리처럼 아무 것도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병에만 집중하다가 갔으면..
저처럼 두번씩이나
돈에 울고 사람에 속는 일은 없어지지 않겠죠.
농구와 인생..
어느 운동도 같다고 봐요.
어렸을 때부터 책보다 운동과 같이 했던 전
운동을 잘해야만 경기에 투입될 수 있고
그 다음 친구나 그 외의 것들은 자연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을
아무 것도 모른 나이엔 그냥 부모님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만
알고보면 어린 내가 아는 세상엔 많은 삶의 이치 약육강식이 숨어있다는 것
똑 같은 운동량을 같이 했음에도
누군 경기에서 빛을 내고 화려한 인생을 살며
누구는 같은 고생을 해도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인생
그러나 알고보면 노력에 차이가 있고 그 나름대로 차이가 있는 것
복잡하지도 그렇다고 간단치 않은 것
그러나 두가지에 공통점이 있어요.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언젠가 찾아온다.
전 비록 유명 농구선수로 끝을 맺을 순 없었지만
7년을 준비해온 끝에
선수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코치로 승화시켰단 거죠.
비록 운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그렇지..
저 역시 호킹박사님과 같은 생각이지만
어제 글에서처럼
경제적으로 아무 고통을 받지 않고
오로지 이 병에만 신경쓸 수만 있다면
그런 여유가 있다면 저도 모리처럼 감동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죽음은 나 같은 사람이나 보통 사람이나
비슷하게 언제 어디서든 찾아온다고 봐요.
저도 얼마전까지 내가 더 위험하다 생각했는데
전 위험요소가 정전 이외엔 특별한 게 없다고 봐요.
몸관리만 잘하면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생기는 수많은 기상이변으로 죽어가는 걸 보면
적어도 난 다행이지 않나
다소 엉뚱한 답변이라 생각이 들지만
이것이 제 생각이네요.
전 언제나 그랬듯 늘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았고
내일 뜻하지 않은 죽음이 온다해도 별 아쉬움이 없네요.
그러나 부모님에겐 죄스럽겠네요.
지금 이 불효는 꼭 갚아야할 빚이거든요.
정말 하루 24시간 1년 열두달을
매일 변함이 없는 방안..
방안이라기보다 감방도 이런 감방도 없어요.
초특급시설이 되어있지만
어느 물건 하나 제 것 같은 거 없지요.
단 한번도 만져본 물건이 없는 말만 내 것들
항상 바뀜 없는 제자리에서 눈에 벗어남 없이
굳건히 자릴 고수하고 있는
지긋지긋한 방 배경
전 하루 종일 많은 시간을 생각만 하고 살아요.
말할 수 없으니 생각만 하는 건 정말 당연하지만
말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잃고난 지금에야 깨닳았지만
만약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말의 소중함도
내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고마움도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신기함도
팔과 손 그리고 다리가 있어 활동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런 것들을 당연시 하였겠죠.
하지만 이런 맘을 갖게 만든 동기가
이런 몹쓸 병이 꼭 나쁜 것만 주지는 않구나
내가 잘 나가고 승승장구했더라면
모르고 지나갈뻔 한 내 소중함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이런 경험을 하지 않고 느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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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내 최연소 코치가 된 기쁨.. 그리고 근육병, 그중에서도 루게릭병이란 선고를 받고 그 충격과 좌절..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승일님 자리에서 최선, 그 이상의 것을 해오시는 과정.. 담담히 써내려가셨지만 이글을 쓰는 일도 얼마나 힘드셨을지. 참 마음이 아프면서도 존경합니다.
참 긴글이지요. 이글 속에 담겨진 과정과 그마음을 찬찬히 읽어주시길.. 다녀가시는 분들께 바래봅니다.
너무너무 힘든 과정 중에서도 굳굳하게 자기의 목표를 향해 가시는 승일씨의 의지....존경합니다.이렇게 말로 표현하는게 오히려 실례가 될 정도로...뜨꺼운 뭐가 올라오는군요,부디 쾌차하시길 바래봅니다.힘 내세요.!!!!
긴 글에서 승일씨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이 장황하게 펼쳐집니다. 마음 착잡하면서 여러가지로 안스럽기만 합니다. 그 땐 몸으로 열심히 하였지만 이젠 정신의 세계가 풍부해지는 승일씨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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