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공석이 된 사도 한 명을 선발하는 과정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필기시험이나 심층 면접, 자기소개서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생뚱맞게도 제비뽑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제비뽑기’, 요즘 들어 잘 사용하지 않기에 약간 생소한 단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추첨’입니다. 미리 정해 놓은 글자나 기호를 종이에 적어 놓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하여 승부, 차례 또는 경품 탈 사람 등을 가리는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스릴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사도를 뽑는 중요한 일을 두고 제비뽑기란 방법을 택한 것이 꽤 의아해보입니다. 사도의 발탁이란 이 중대한 일을 위해 저 같았으면 먼저 후보자들에 대한 엄밀한 사전 조사를 할 것입니다. 철저한 후보 검증작업을 거칠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조용히 물밑 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제비뽑기를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추천을 통한 인선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투표를 통한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를 뽑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중요한 인물을 뽑는데 제비뽑기는 너무나 안 어울리는 방법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더군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후 사도들의 생각은 이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물’이 한층 빠졌습니다. 사도란 직책이 세속의 직책과는 철저하게 다른 봉사직이요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요, 철저하게도 하느님의 사람, 참 신앙인이 수행해야할 역할이 사도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 베드로의 배반 사건, 총무였던 유다의 배신과 죽음 앞에 사도들은 기가 완전히 한 풀 꺾였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함을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주 겸손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예수님 중심적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힘과 능력, 판단력을 과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사도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층 겸손해지고, 한층 주님께 대한 신뢰심이 커진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변화가 유다 자리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는 사도단 결원의 보충이라는 이 중대한 결정을 저희가 내리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뽑지 않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뽑아주십시오.”
그런 기도 끝에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실시한 것입니다. 사도단 결원 보충을 위한 사도들의 제비뽑기,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매사에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의도대로가 아니라 주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하느님은 뽑으실 때도 목숨을 거신다
역사상, 그리고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성직자의 부조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른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내는 게 옳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데리고 다니실 때 세상 사람들이 가리옷 유다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마도 당신 사도로 존중해 주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에 대한 가치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 얘기는 잘 안 하지만, 저는 대통령 탄핵에 관한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뽑아 놓았으면 임기 동안에는 그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성직자를 뽑아주시든, 우리가 정치인을 뽑던, 하느님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던 그 선택에 관한 무게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그렇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뽑는 분이 아니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한 그는 아내가 남겨 놓고 간 하나뿐인 열 살을 갓 넘은 그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만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그의 여생을 유명한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그 슬픔을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떻게 재산을 처분할 것인가를 유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에는 그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드려 수집한 미술 소장품들을 경매에 부치라는 지시가 그 유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지방의 한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볼품없는 그림이 부쳐졌습니다. 그 그림은 인기가 없어 아무도 응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때 피츠제럴드의 유언을 집행하는 변호사가 경매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내 모든 소장품을 갖도록 해 주시오. 이 그림을 선택하는 사람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뽑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 마티아 사도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뽑기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뽑으실 때는 전 재산을 거십니다. 목숨을 거십니다. 사제들은 당신의 목숨인 성체성사를 주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뽑은 이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가리옷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면 어때야 할까요? 미국의 생물학자 레인(Glen Rein)은 어떤 식의 기도가 암세포의 성장을 가장 억제하는지 실험해보았습니다.
우선 다섯 개의 세균배양 접시(petri dish)에 각기 똑같은 수의 암세포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심리치료사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기도해보도록 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 주세요.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어떤 기도가 효과가 있었을까요?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 주세요.
암세포들의 성장속도가 39% 떨어졌다.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암세포들의 성장속도가 21% 떨어졌다.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2번처럼 성장속도가 21% 떨어졌다.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아무 효과가 없었다.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저도 봉사자들을 뽑아놓고는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만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뽑는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창조했으면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다고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것이 뽑아 준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세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창조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구제 불능이라도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마치 자녀를 낳는 것과 같게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뽑으실 때 목숨을 거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뇌세포가 줄어들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과학에 의하면 이 통설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경세포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기억을 조절하는 부위인 해마(새로운 기억을 잠시 저장할 뿐)의 신경세포만 그렇다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신경세포 증식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꾸준한 학습으로 뇌를 자극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우위를 가질수록 신경세포 증식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대인 관계에서 우위를 가지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세포 증식력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 전혀 없는 삶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해마의 신경세포가 활발해집니다.
자기 뇌 건강을 위해서도 누군가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는 신경 쓰고 굽실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나’가 아닌, 고유한 ‘나’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유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 역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존재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건강한 나를, 계속 성장하는 나를, 지금을 기쁘게 사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또 과대한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런 사랑을 받기 위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또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나,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줄여나가고, 대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을 용서하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세라핌 미칼렌코 신부).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1,26)
제자들과 함께 직무를 받았던
유다가
제 갈 길로 가기 위해
내동댕이쳐버린
거룩한 직무를
마티아가 맡게 되었네.
사제나 수도자나
신자나 비신자나
우리 모두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작은이가 되어
하늘의 어좌에
앉아계신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네.
복음 말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