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예술가의 사회-24] 글렌 굴드 (피아니스트, 1932~1982)
매일경제 2019.05.09
글렌 굴드의 음악은 지금도 우주를 떠돈다
◆ 완벽주의자의 선택
어떤 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그는 환자와 몇 마디만 나눠도 셜록 홈스처럼 모든 걸 꿰뚫었다. 그의 통찰력이 환자만 도운 건 아니다. FBI는 의사에게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 사건 자문을 구했다. 의사는 몇 가지 단서만을 듣고도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는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리투아니아어에 능통했다. 귀족가문 출신답게 맵시 있는 몸짓과 빈틈없는 매너도 갖췄다. 문화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어 누구와도 유려한 대화가 가능했다. 고급 재료로 음식을 직접 요리할 만큼 섬세했다. 이 많은 장점을 가진 의사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그가 요리할 때 사용한 주요 식재료는 인간이었다.
천재 식인 살인마의 이름은 한니발 렉터. 영화 '양들의 침묵'에 15분 등장하고 전대미문 악역에 오른 캐릭터다. 영화 후반부 한니발 렉터는 경찰 2명을 살해한다. 이 거사를 치르는 동안에도 그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버리지 못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틀어놓고 피아노 선율과 살인을 동시에 음미한다. 18세기 바흐가 작곡한 이 곡을 연주한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많다. 완벽주의자 한니발 렉터의 선택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 굴드는 한여름에도 종종 코트와 장갑을 끼고 다녔다.
◆ 20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시대
20세기를 수놓은 피아니스트를 조금만 나열해보자. 압도적인 기교와 표현력을 지녔던 호로비츠, 쇼스타코비치를 감동시킨 리히테르, 쇼팽 최고 권위자 루빈스타인, 소련의 보물이었던 길렐스. 이들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인물엔 피아노 여제 아르헤리치, 열여덟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있다.
누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인지 순위를 매기긴 어렵다. 하지만 20세기 피아니스트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을 꼽는 데는 클래식 음악 팬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당연히 글렌 굴드다.
글렌 굴드는 '천재는 괴짜'라는 세상의 편견을 공고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굴드의 기행을 다 소개하려면 꽤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다. 굴드는 한여름에도 긴 코트와 장갑을 착용했다. 세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병적인 건강염려증 탓에 악수도 하지 않았다. 에어컨이 켜진 식당에도 안 들어갔다.
피아노 조율사가 인사 차원으로 굴드의 등을 가볍게 툭 친 적이 있는데, 굴드는 이 터치 때문에 손가락 두 개가 마비됐다고 우기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땐 연주에 심취해 허밍을 했다. 녹음 기사는 굴드의 흥얼거림을 차단하기 위해 방독면을 씌우기도 했다. 굴드는 피아니스트에게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쇼팽의 음악을 두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라서 싫다"고 말했다.
▲ 레너드 번스타인(왼쪽)과 굴드.
◆ 번스타인도 혀를 내두른 글렌 굴드
굴드의 연주도 그의 기행만큼 독특했다. 굴드는 기존 문법에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악보일지라도 굴드의 기를 죽이지 못했다. 굴드는 고전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해석을 밀어붙였다. 세계 최정상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과 카네기홀 무대에 오른 서른 살 굴드. 번스타인과 굴드는 공연 전 브람스 곡 해석을 두고 기싸움을 했다. 승자는 끝내 굽히지 않은 굴드였다. 번스타인은 청중에게 "자신은 이런 스타일의 연주를 원하지 않았다"며 해명까지 하고, 굴드의 요구에 맞춰 매우 느린 템포로 브람스 곡을 이끌었다.
독특한 연주 자세도 굴드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피아노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허리를 숙이고 건반 쪽으로 머리를 푹 박은 채 연주했다. 몸도 가만히 두지 않고 전후좌우로 비틀었다. 이 우주엔 나와 피아노밖에 없다는 듯이 심취한 모습이었다. 이 모든 굴드의 스타일은 점잖은 클래식 음악계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상식이다. 그럼에도 관습, 예의, 규칙을 깨부쉈던 굴드의 자유로움에 매력을 느낀 팬도 늘었다. 청중들은 황홀경에 빠져 피아노를 연주하는 굴드에게서 예술가의 영롱한 기운을 느꼈다.
▲ 1955년 미국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 중인 굴드.
◆ 가장 독특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굴드라는 이단아는 클래식 음악 변방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토론토 출신인 굴드는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도 않았다. 음악 중심지가 아닌 곳에서 성장했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굴드 역시 세 살에 악보를 읽고, 다섯 살에 작곡을 했다는 등의 천재다운 일화를 많이 갖고 있다.
10대 때 캐나다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며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갓 스무 살을 넘긴 굴드는 1955년 뉴욕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공연에 참석한 음반사 관계자가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앨범 제작을 제안하고 녹음실로 초대한다. 굴드 인생의 변곡점이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741년 바흐가 한 백작의 불면증 치료용으로 만든 음악으로 잘 알려져 있다. 32곡으로 구성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세상을 잠재우겠다는 듯 평화로운 선율로 시작한다. 첫 번째 아리아를 기반으로 30개 변주곡이 이어진다. 잔잔한 아리아와 다르게 1번 변주곡은 빠른 템포로 연주된다. 나머지 29개 곡은 빠르게, 느리게, 경쾌하게, 차분하게 변주하며 제각각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그리고 마지막 32번째에선 다시 첫 번째 아리아가 흐른다. 즉, 1번과 32번은 똑같은 곡이다. 아리아가 30개의 여정을 마친 후 귀환하는 구조다. 영문도 모르고 세상에 던져져 희로애락 속에서 여행을 하다 마지막에 다시 영문도 모르고 떠나야 하는 인간의 삶을 닮은 음악이다.
굴드가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파격이었다. 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음악가의 개성, 해석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굴드의 해석 스케일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이전까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던 음악가들은 32곡 연주에 60~70분을 썼다. 굴드는 38분 만에 끝냈다. 도돌이표는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휘몰아서 쳤다.
연주에 심취할 때 나오는 굴드의 허밍과 숨소리까지 그대로 녹음됐다. "미친 연주"라고 혹평한 비평가도 많았지만, 이 앨범은 큰 성공을 거뒀다. 고전 중에서도 고전인 바흐에 생동감을 더한 굴드는 단번에 스타로 올라섰다. 세상에 나온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가장 독특했던 굴드의 버전은 오늘날 이 곡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기준'이 됐다.
▲ 무대에서 은퇴한 굴드는 녹음실에서 레코딩 작업에 집중했다.
◆ 서른두 살에 무대에서 내려왔다
1957년 소련은 서방세계와 교역의 문을 조금씩 열 채비를 했다. 소련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서방국가 피아니스트 초청 공연을 계획한다. 냉전기류가 굳건했기에 차마 미국인 피아니스트를 초청하지는 않았다. 소련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이름을 알리던 캐나다 출신 굴드를 초대했다.
굴드는 소련에서 공식적인 피아노 연주회를 연 최초 북미인이 됐다. 소련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굴드는 독일로 넘어가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했다. 이후에도 전 세계 곳곳 순회공연을 다녔다. 굴드의 명성은 '괴짜 피아니스트'라는 독특한 이미지와 함께 멀리 뻗어나갔다.
연주자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1964년, 서른두 살 굴드는 아무도 예상 못한 선언을 했다. 그는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건 고통뿐인 속임수"라며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했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청중이 있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굴드는 사람과 대면하고 소통하는 행위를 꺼렸다.
대인기피증은 그가 무대를 떠나는 데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굴드의 머릿속에 '청중과의 교감' 같은 건 처음부터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단 하나의 음표도 원하는 대로 표현 못하면 괴로워한 완벽주의자였다. 예민한 굴드에게 청중의 박수와 환호는 연주를 방해하는 위험요소일 뿐이었다.
무대에서 은퇴한 굴드는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녹음 작업에 집중했다. 그는 완벽한 음악을 만드는 건 피아노 연주라는 '테크닉'이 아니라 녹음실의 '테크놀로지'라고 믿었다. 섬세한 음의 떨림, 미세한 음색 차이까지 담을 수 있는 녹음 기술에 큰 매력을 느낀 굴드는 직접 음향기술을 익혔다.
그는 같은 곡을 여러 번 연주해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뽑아 짜깁기해 한 곡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중음악에선 일반적인 방식이었지만,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선 굴드의 녹음을 사기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완벽한 소리'가 목적이었던 굴드에게는 녹음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덕분에 우리가 오늘날 감상할 수 있는 굴드의 음악은 선명하고, 섬세하고, 빈틈이 없다.
◆ 적막한 우주를 떠도는 굴드의 음악
세상이 굴드를 독특한 인간으로 기억하는 건 그의 기행 때문만은 아니다. 32세에 무대에서 은퇴한 굴드는 은둔자의 길을 택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독을 선택했다. 낮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틀어막고 깜깜한 집에 고립돼 혼자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밖으로 나와 녹음실로 향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에 등장하는 고독한 인물들처럼 굴드는 사람이 별로 없는 야밤의 교외 휴게소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가끔 차를 몰고 알래스카에도 갔다. 그곳의 적막한 풍경을 눈에 담고 돌아왔다. 사랑받지 않으려 노력했고, 앓지도 않는 병을 핑계 삼아 사람을 피했다. 제대로 된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그는 왜 적막을 선택했을까. 침묵, 명상, 은둔 속에서만 영감을 건질 수 있었던 걸까. 고독 자체가 그에겐 묵상이었을까.
1981년,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한번 녹음한 곡은 재녹음하지 않는 굴드의 원칙이 처음으로 깨졌다. 이번엔 32개 곡을 연주하는 데 51분이 걸렸다. 늘어난 시간답게 26년 전과 달리 차분하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더해졌다.
굴드의 삶은 아리아에서 시작해 아리아로 끝나는 이 곡의 구조와 유사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은퇴해 변주곡 같은 인생을 살았던 굴드는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유작으로 남기고 떠났다. 1982년 굴드는 쉰 살에 깜깜한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1977년 미국은 무인우주선 보이저호를 쏘아올렸다. 보이저호는 외계 생명체와 맞닥뜨릴 상황까지 대비했다. NASA는 우주선 안에 외계인에게 소개할 만한 인류 유산을 데이터화해 담았다. 여기엔 지구를 대표하는 음악도 포함됐다. 선곡 리스트엔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곡이 있다. 고독을 끌어안은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한 적막 속에서 유영 중이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