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열기가 뜨겁습니다.
대한민국 야구팀은 2라운드에서 멕시코와 일본을 연파하고 1회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4강에 진입하며 야구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1회 대회 때보다 전력이 약화됐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탄탄한 투수진과 불같은 투지를 앞세워 일본을 두 번 연속 꺾는 등 또 한번 저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대회전 한국의 전력이 약화됐다는 평가를 들은 이유는 박찬호(36ㆍ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이승엽(33ㆍ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대표팀의 얼굴이던 노장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2006 WBC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박찬호는 현재 필리스의 스프링 캠프장이 있는 미국 플로리다 주 클리어워터에서 선발 로테이션 진입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1994년 전격적으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명문 구단 LA 다저스와 계약, 미국 야구 도전사에 새 장을 열었던 박찬호는 어느덧 15년차의 노장이 됐습니다. 그 사이 빅리그에서 117승을 거두는 업적도 이뤘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부상과 부진의 어둡고 긴 터널도 거쳤고, 마이너리그도 추락하기도 했으며 또 작년에는 놀랍게 재기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최동원-선동렬의 계보를 잇는 한국 최고의 정통파 투수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여전히 선발로 빅리그 타자들을 호령하겠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는 박찬호의 야구와 생애를 돌아보겠습니다.
공주 전파상집 셋째 아들
박찬호는 1973년 음력 6월29일 공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파상을 하는 아버지 박제근씨와 정동순씨 사이에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남동생을 하나 둔 3남1녀 중 셋째였습니다.
어린 시절 온 식구가 전파상 다락방에서 사는 옹색한 가정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박찬호의 성공에는 부모님의 공헌이 대단히 큽니다. 자식에게 크나큰 애정을 가진 것은 여느 부모와 다를 바 없지만 절대 앞에 나서지 않고, 엄격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유지한 분들이었습니다. 박찬호가 성공한 후 아버지에게 외제차를 선물하려고 하자 박제근씨는 국산차를 고집한 일화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박찬호 하면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머니가 꾸었다는 태몽입니다. 정동순씨는 박찬호를 낳기 전 바다처럼 넒은 파랗고 커다란 호주에 하얀 커다란 백조 같은 새가 떠서 헤엄을 치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박찬호는 그 꿈을 이야기하면서 큰 호수는 태평양이었고, 파란 물에 하얀 큰 새는 다저스의 색깔이 아니었겠느냐는 해몽을 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998년 박찬호의 어머니는 덴버의 친척집에 들렀다가 인근 콜로라도 산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란 거대한 호수에 놀러갔는데, 그 호수를 본 순간 정동순씨는 꿈에서 본 바로 그 호수와 똑같다며 감탄을 한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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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박찬호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하루는 정동순씨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한 스님이 정씨를 유심히 보더니 큰 인물이 될 아들이 있는데 이름을 바꾸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원래 박찬호의 이름은 박헌호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가 이름을 박찬호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바꿔서 ‘코리안 특급’이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찬호의 이름은 그런 유래를 담고 있습니다.
공주 중동 초등학고 3학년 때 육상부원이던 박찬호는 4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어린 박찬호는 멋진 유니폼과 간식을 맘껏 먹는 야구부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강팀이던 중동초교 야구부 후원회에서 체격이 좋고 운동을 잘하던 박찬호에게 야구부 입단을 권하면서 야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부모님은 공부도 곧잘 하던 박찬호가 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중학교에 가면 운동은 안하고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습니다. 그렇게 야구선수 박찬호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공주중과 공주고를 거치면서 박찬호는 미완의 대기로, 무섭게 공 빠른 공을 던지는 ‘공주 촌놈’으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박찬호는 스스로를 늘 공주 촌놈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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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들어낸 지옥 훈련
1996년 다저스에서 처음 풀타임으로 뛴 시즌에 박찬호와 함께 그의 첫 자서전인 ‘헤이 두드’를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정말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에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박찬호는 천성이 여린 성격입니다. 중학교 2학년 말 투수로 전업한 후에도 공은 빠른데 배짱이 없고 자신 없는 피칭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중학생 박찬호는 자존심이 상했고, 스스로 담력을 키우겠다며 나름 지옥훈련을 고안해냈습니다.
그 하나는 공동묘지 훈련이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박찬호가 중학생이던 당시 공주에는 공동묘지가 많았다고 합니다.
웅진동 공동묘지라는 그곳은 무녕왕릉 옆에 있었는데 산길 옆으로 올라가면 을씨년스러운 묘지들이 쭉 늘어 있어서 낮에도 지나가기 겁나던 곳이었습니다. 박찬호는 그 공포의 공동묘지를 밤에 혼자 뛰어서 지나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도전에 나섰지만 처음에는 입구에서 줄행랑을 치고 만 박찬호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공동묘지에서 달밤에 홀로 야구방망이 춤을 추는 소년이 됐습니다.
박찬호의 두 번째 배짱 키우기 프로젝트는 산성 공원이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고 울창한 숲에 무너져가는 성벽, 커다란 대문 등으로 밤에 홀로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지난 겨울 박찬호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어려서 나무에 걸어 고무줄을 당기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밤에 혼자 운동을 했다고 설명한 바로 그곳입니다. 역시 몇 번의 시도 끝에 산성 위를 점령한 박찬호는 매일 천 번의 스윙을 하고 산성 공원을 내려왔습니다.
거기서 신기한 경험도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성에서 스윙 삼매경에 빠진 그가 1000번의 스윙을 멈추고 땀을 고르려는 순간 후다닥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돌아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바로 곁에까지 와서 스윙을 구경하다가 멈추자 오히려 놀래 달라난 것이었습니다.
스윙에 몰두한 모습이 다람쥐도 신기했던 모양이라며 박찬호는 그 일로 더욱 운동에 몰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의 소산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내내 그렇게 산성 훈련을 한 박찬호는 그 산성과 동네 언덕을 매일 오리걸음으로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어린 나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프로 선수가 된 후에도 박찬호는 자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습니다. 때론 훈련 중독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자신이 세워 놓은 훈련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하고나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프 시즌 같은 때 집에 놀러 와도 아침에 보면 어김없이 팔굽혀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어깨와 신체조건도 아주 좋았지만 박찬호의 성공에는 남다른 노력과 의지가 큰 요인이 됐습니다.
미국 야구의 꿈
박찬호의 야구 생애에서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991년이었습니다.
그 해 9월 LA에서 한-미-일 고교 대표팀이 만나는 ‘굳윌 게임’이 열렸고 박찬호는 당시 공주고의 부진으로 어렵사리 대표팀에 뽑혔습니다.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차명주 등의 고교 스타들이 총 망라한 호화진영으로 박찬호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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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타 본 박찬호는 굳윌 게임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2승1세이브를 기록하며 우승 주역이 됐습니다. 당시 미국팀으로 나선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작년에 다저스에서 동료가 되면서 그 당시 박찬호의 피칭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회는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를 꿈꾸게 되는 두 가지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하나는 다저스타디움의 충격이었습니다.
대회 기간 중에 박찬호는 자신의 첫 에이전트가 되는 스티브 김씨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LA의 야구 동호회 회원들이 선수들에게 민박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고교 선배들의 집으로 배정됐지만 박찬호는 공주고 선배가 없어 후원을 제공했던 김씨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쉬는 날 선수단이 다저스타디움을 방문했는데 당시 박찬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끝도 없이 넓은 주차장에 주차된 수많은 자동차들과 밤하늘을 환하게 수놓은 라이트의 빛, 외야의 대형 스크린, 그리고 융단처럼 펼쳐진 녹색 다이아몬드와 하얀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멋진 유니폼을 입은 다저스 선수들.
박찬호는 그날 경기를 보면서 꼭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처음 꾸기 시작했습니다. 열광하는 팬들 사이에 앉아서 다저스 중견수 브레트 버틀러의 환상적인 홈런공 캐치를 보면서 언젠가는 저런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저스타디움 맨 꼭대기에 위치한 대형 상점에서 당시 용돈으로 받았던 돈을 모두 털어 파란색 다저스 잠바를 샀습니다. 정확히 3년 5개월 후에 그런 잠바와 온갖 다저스 장비들을 배급받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입니다.
그 대회가 가져다준 또 한 가지 행운은 미국 야구관계자들에게 박찬호의 존재를 알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굳윌게임에는 빅리그 스카우트들과 에이전트 등 관계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미국 대표팀의 유망주들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섭게 빠른 공을 던지는 한국팀 투수에게도 눈길이 쏟아졌습니다.
희한한 것은 당시에 박찬호가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고교선발팀에는 박찬호보다 훨씬 지명도가 높은 선수들이 많았는데도 집중적으로눈길을 받은 것은 박찬호였다는 점입니다. 후에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된 스캇 보라스도 당시 현장에 있었는데 그가 점찍은 투수 역시 박찬호였습니다. 그 때부터 박찬호는 미국 야구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굳윌게임은 박찬호의 야구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된 대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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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와 계약, 꿈을 이루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
1990년말부터 스포츠 조선 특파원으로 미국에 파견됐던 기자가 박찬호를 처음 직접 본 것은 1993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뉴욕 주 버팔로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벌어졌고, 출장을 가서 여러 종목을 취재했습니다.
하루는 한국 야구팀의 경기를 취재하는데 스피드건을 쥔 스카우트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한 선수가 등판하자 스카우트들은 스피드건을 들이대고 서로 계기판을 보여주며 소란을 떨었습니다. 궁금해 가서 물으니 오히려 저 선수와 연락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등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박찬호였고, 그날 계기판에는 90마일대 중반의 숫자가 찍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양키스와 브레이브스 등 빅리그 팀들의 본격적인 박찬호 영입전이 시작됐지만 당시만 해도 병역 문제가 있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팀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빙그레 이글스와 대학 진학의 기로에서 고민했던 박찬호는 당시 한양대 2학년이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은 브레이브스로 공주까지 스카우트를 보내 20만 달러를 먼저 지불하겠으니 군대를 빨리 다녀오라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양키스도 조건을 내세우는 가운데 다저스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박찬호는 스티브 김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급격히 다저스와의 협상이 진행됐습니다. 인연이 되려는지 마침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가 LA 한인상공회의소 주최 행사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스티브 김과 명함을 주고 받은지 며칠 후에 박찬호가 김씨에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우여곡절은 많았습니다. 다저스에서는 오말리 구단주가 서울 방문시 박찬호를 만났고, 주치의 조브 박사를 보내 몸 상태를 검사하기도 했습니다. 계약금 문제로도 난항이 컸지만 김씨는 12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입단보너스에 한양대 야구부 지원 등 각종 조건을 따내며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리고 결사반대하던 한양대에서는 결단을 내리면서 1993년 12월 31일 박찬호는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와 다저스의 레이놀즈 스카우트, 스티브 김씨 등이 동행이었습니다. 비밀리에 진행된 다저스 행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박찬호의 미국 야구 도전과 성공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담벼락 인터뷰
1994년 1월 13일 LA의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국 호텔에서 LA 다저스 입단식이 열렸고, 박찬호는 정식으로 다저스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리고 첫 스프링 캠프를 거쳐 놀랍게도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진입하는 깜짝 뉴스를 전했습니다. 당시까지도 미국의 프로야구 시스템이 국내에 알려지지 않아 그저 놀라운 뉴스 정도의 반응이었지만 실은 미국에서도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196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아마추어 드래프트를 실시한 이래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빅리그에 진입한 선수는 박찬호와 동료 대런 드라이포트가 17, 18번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저의 벽은 높았고 빅리그 생활 18일 만에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로 배속받았습니다. 2년간 더블A 샌안토니오와 트리플A 알바커키에서 수많은 좌절과 쓴 경험을 하면서 미국 프로의 생활을 익혔고, 결국 1996년 빅리그에 복귀해 다저스의 기둥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저스에서의 맹활약은 익히 알려져 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렸고, 레인저스 이적 후 부상과 부진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것도 야구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일입니다.
박찬호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 계속 취재를 했고, 2005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 전까지는 박찬호의 거의 전 경기를 현장에서 취재하면서 수도 없이 만나고 인터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중에 하나는 2년 전인 2007년 애리조나 주의 투산에서의 만남입니다.
한여름 7월의 하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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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찬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산하 트리플A 라운드록 익스프레스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뉴욕 메츠 캠프에 갔다가 빅리그 진입에 실패한 후 팀을 옮겨 재기를 노리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힘들게만 꼬이던 시절이었습니다.
7월25일 박찬호는 원정팀 라운드록의 선발로 예정돼 있었는데 경기 두 시간 전부터 하늘이 짙은 회색으로 변하더니 폭우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캐치볼을 하던 박찬호는 피를 피해 들어왔고, 클럽하우스로 통하는 담벼락에 기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인터뷰 중 일부를 소개하면,
-마이너 생활이 힘들지 않는가
▶힘들죠. 여러 가지로. 특히 여행 다니는 것, 원정 다니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원정이야 메이저에서도 지겹게 다니지 않았나.
▶여기는 새벽에 이동해서 (다음날)게임을 하거든요. 경기 끝나고 새벽 3시, 4시에 이동을 해요. 비행기도 타고 가까운 데는 버스도 타고.
-왜 그 시간에 이동을 하나
▶그래야 낮에 도착을 해서 저녁에 경기를 해요. 메이저처럼 전세기가 아니니까 제일 첫 비행기를 타고 또 갈아타고 그러다보면 그 시간에 다녀요. 오늘도 새벽에 출발해서 오후 2시 반에 여기 도착했는걸요.
-왜 박찬호 선수가 이런 선수 생활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안 하면 뭐해요?
-할 일들이 많을 것 같은데.
▶다른 것들을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야구를 그만 둬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꼭 그건 아니지만 박찬호 선수는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가정도 가졌는데 왜 저렇게 마이너에서 계속 고생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돈도 많이 벌고 해볼 것을 다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럼 그런 사람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야겠네요? (크게 웃음)
저 같은 경우는 메이저리그 다시 가서 야구를 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지만 아직도 이렇게 배우고 있어요. 나름대로 맘 같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나를 굉장히 자극시키고 자극이 나를 노력하게 만들어요. 미래가 어떻게 갈 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하나하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까먹었던 것을 확인하고 그러는 것이 좋더라고요.
또 시골을 다니면서 적은 수의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옛날 생각도 많이 해요. 예전에 마이너에서 뛰던 때와는 또 다르더라고요. 예전에 다저스에서 마이너리그 있을 때는 사람들이 박찬호 하면 한국에서 온 선수로만 여기고 반가워했어요. 그러나 이젠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지금은 한국의 대표 선수라는 식으로 나를 생각하고 대해주고 그러시더라고요. 시골에서 어렵게 사는 분들을 만나고 하면 고마움도 또 많이 느끼고 야구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계속 할 생각인가.
▶모르겠어요.
-계속? 계속?
▶언제까지 사실 건데요?(함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우문현답이었습니다.)
사실 살면서도 때론 참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곤 하잖아요. 야구 하면서도 이젠 정말 못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처음에 야구를 시작할 때도 여러 환경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또 나를 만들어가는 것들이더라고요.
박찬호 도전과 승리 117+
| | | | 한국 최초 빅리그 승 | 11K 화려한 비상 | 복통도 이겨내고 | 발차기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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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생활을 정말 고달픕니다. 끝도 없는 이동과 쥐꼬리 연봉에 열악한 환경 등. 그나마 트리플A는 나은 편이라지만 특히 빅리그의 호화스런 생활을 10년 이상 했던 박찬호가 마이너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질 않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이너인데도 그의 성적은 형편이 없어서(97년 마이너 두 팀에서의 성적은 6승14패였습니다.) 야구에 왜 아직도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아직도 지켜내지 못한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빅리그에 복귀해서 잘 해낼 수 있다는 꿈이 살아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박찬호는 작년에 보란 듯이 친정팀 다저스에서 재기했습니다.
주로 구원으로 뛰었지만 빅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구위를 되찾았고, 올 겨울 일찌감치 필라델피아와 계약을 체결하고 어쩌면 그의 야구 생애에서 마지막 목표가 될지도 모를 선발 복귀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올 시즌 전망
박찬호가 작년 다저스에서 보여준 구위는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150km대의 강속구도 살아났고, 슬라이더와 커브로 예리함을 되찾았습니다. 5번 선발 포함해 53게임에 등판해 4승4패에 3.40의 평균자책점(ERA)을 남겼습니다.
사실 그의 기록은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었습니다. 정규 시즌이 끝난 후 필라델피아와의 NLCS 취재를 하며 만난 자리에서 박찬호는 ERA가 나빠진 뒷얘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야구 욕심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박찬호가 작년에 나름대로 세운 목표는 100이닝이었습니다. 시즌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그 목표 달성이 쉽지 않아 보이자 자원 등판이 늘었습니다. 아무래도 구원 투수로 첫 시즌 많은 등판을 겪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 그러나 박찬호는 토리 감독이 물으면 언제든 등판하겠다고 답했고,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전반기에 2.63이던 ERA가 후반기에는 5.04였습니다.(결국은 95.1이닝으로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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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동료 좌안 투수 조 바이멜의 부진도 한 몫을 했습니다. 시즌 막판 박찬호가 등판해 내보낸 주자들을 바이멜은 어김없이 실점했습니다. 14득점인가가 박찬호가 내보내고 바이멜이 들여보낸 점수라고 했습니다. 시즌이 끝나고 바이멜은 미안하다면 박찬호에게 제일 좋아하는 샴페인지 뭔지 한 병 사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작년 다저스에서의 재기는 박찬호에게 마지막 불꽃을 태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필리스 5선발 쟁탈전에서 박찬호는 호투를 거듭하며 선발 진입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3번의 시범 경기에서 11.2이닝을 던지며 2실점으로 1.54의 ERA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료 제이미 모이어에게 받은 정보로 새롭게 변화를 준 체인지업이 계속 효과를 발휘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경쟁자 중에는 카일 켄드릭(ERA 12.10)과 카르스코(ERA 6.30)은 힘들어졌고, A.J. 햅이 2.45의 ERA로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햅은 왼손이 부족한 불펜으로 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또한 에이스인 콜 해멀스가 팔꿈치 염증으로 고생하고 있어 개막전까지 회복이 불투명해 경우에 따라서는 4선발 이상의 자리를 차고 들어갈 가능성마저 생겼습니다.
만으로 서른여섯을 눈앞에 둔 박찬호가 다시 선발 자리를 꿰차고 풀 시즌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습니다. 특히 지난 시즌에 거의 구원 투수로만 뛰었기 때문에 긴 이닝을 소화하면서 장거리 레이스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꿈을 버리지 않고 도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최선을 노력으로 그 꿈을 다시 이뤄낸다면 야구팬들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올 시즌 박찬호가 선발로 재기할 것이라는데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첫댓글 아~진짜 찬호행님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한번 껴야 되는데..실력이면 실력 열정이면 열정 인격이면 인격..진짜 최고..
두말필요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스포츠 슈퍼스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