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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카 예배) "וַיֵּשֶׁב 바예쉐브" : 12월 첫째 주 토라포션 in 5784
창37:1-40.23(To), 암2:6-3:8(Haft), 마1:1-6,16-25(Brit), 눅4:14-8:56(신약), 대하10:1-16:14(Ke), 삼하19:15-24:25(Ne)
2부 예배 고세중 목사님
하누카와 바예쉐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 있었는데, 그때 유니스 사모님이 하누카 특별 메세지를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것들이 있어서, 마침 키슬레브월이라 베냐민들에게 특별한 에너지가 있는 시간이라, 나눠보자고 해서 오늘도 이렇게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Happy Chanukah, 주제 말씀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10:30), 이게 연관이 되시는가? 하누카라는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다 알고 계실 것이다. 하누카는 기름의 양,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한다. 그런데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게 좀 동떨어지지 않는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 토라포션과 하누카
원래 하누카가 속한 토라포션이 바예쉐브는 아니다. 주로 하누카는 많은 해에는 하누카는 미케쯔와 연동된다. 하누카라는 것은 First name이고, 바예쉐브, 미케쯔, 종종 바이가쉬가 거기에 따라온다. 하나 질문을 드리면, 토라포션에서 하누카가 나왔을까, 하누카에서 토라포션이 나왔을까? 어느것이 더 기초일까?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기에 대한 분명한 지식, 해석, 정리된 생각이 없으면 하누카 따로, 토라포션 따로가 된다. 하나님이 과연 따로 다니게 놔두실까?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토라포션에 해당된 어떤 지식 에너지, 계시, 이런 것들이 하누카와 관련이 있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foundation이 토라포션이고, 그 foundation 위에 하누카라는 어떤 event가 생긴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하누카라는 절기를 유대인들같이 지키지만, 지금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하누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토라포션과 하누카의 연관성들을 적절하게 연관지어서 설명해줄 수 있지 않으면, 하누카 따로, 토라포션 따로, 교회 따로가 되어버린다. 이것을 어떻게 연관시킬까?
예를들면, 올해의 하누카는 전쟁 중이다. 어제 신문을 보니, 네타냐후 총리가 전쟁터에 가서 위로도 하고, 국방부 장관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라. 그 군인들에겐 우리와 같은 happy 라고 말하기엔 너무 심각한 상황이다. 어제 이스라엘에 있는 평화 형제와 카카오톡을 했는데, 평화라 유대인 메랍 자매와 하누카의 분위기를 내려고 하는데, 예전같지 않다고 하더라. 키가 큰 호렌 형제가 군대에 다녀와서 같이 있어서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까불던 애가 머리 빡빡 깍고 군인같아 보였다.
올해의 하누카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상당히 고통 중에 있다. 여러가지 방법들이 나오지만, 그 적들을 진멸해야하는 것과 함께, 그들 사이에 있는 자기들의 어린이들, 젊은이들까지 다 죽을 수 있다면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굉장히 심각한 결정이다. 다 멸절시키다보면, 우리 형제들과 자녀들이 같이 죽을 수 있는데, 네타냐후 총리가 공식적으로 우리는 포로를 다 구출 할 수 없다고 하니, 인질들 가족들이 다 난리가 났다. 정말 어려운 시간들이다. 이런 시간들에, 어떤 한 사람들의 편을 위하거나,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주 가느다랗게보이는 저 빛,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찾느냐? 올해의 하누카는 그래서 바예쉐브인 것이다.
* 교회와 하누카 : 예슈아와 하누카
제가 다른 교회들에게 하누카 메세지를 올린 것을 보았다. 랍비들, 교회들도 있는데, 주제는 예슈아께서 하누카를 지켰는가, 아니었는가를 주제로 이야기하더라. 예수님은 하누카와 어떤 연관이 있게 하셨는가, 이 표준을 우리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중심으로 하누카를 지켜낼 때만이, 우리는 높은 차원의 에하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하드 사상의 꼭대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것은 에하드이다.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 해 수전절에 솔로몬 성전을 거닐고 계셨는데, 마침 그때 유대인들이 와서 논쟁을 벌였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말하라. 너희가 내 양이 아님으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을 하니까 돌을 들어 이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다. 이 사건이 하누카 때 벌어진 일이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고, 이것을 설득력있게 교회들에게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누카를 통해서 교회와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누카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누카에 대한 바른 해석, 예수님의 고차원의 에하드이다.
모든 말들, 우리의 모든 단어들은 생명의 수준에 따라서 해석과 적용이 달라진다. 에하드라는 말을 예로 들면,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조폭들도 하나가 된다. 정치 집단도 하나가 되려고 한다.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가 그런 것인가? 조폭들이 하나가 된다는 단결의 메세지는 동물들의 메세지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은 더 높은 수준, 네샤마 생명의 하나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케테르 의식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고차원의 에하드란, 케테르이다.
כתר 케테르 (태양-달-의식) - 독생자 생명
כתר 케테르 의식의 생명의 수준은 יחידה 예히다, 독생자 생명이다. 케테르에서 카프는 태양이고, 타브는 달이고, 레쉬는 의식이다. 이 이야기는, 작은 달 안에서 태양이 비추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의식이 있느냐? 매우 고차원의 의식을 가질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면 예히다 생명 수준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 이것을 알 수 있고, 예슈아는 그 의식 가운데서 말했기 때문에, 하누카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유대인들, 이방인들의 하누카가 따로따로라서, 가서 즐기더라도 visitation이 되지, 함께 에하드가 될 순 없는 것이다. 이 하누카 때 이것의 단서를 잡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누카는 미케쯔이다. 미케쯔 때 드디어 요셉의 고난이 끝나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 관점들을 잘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누카라고 즐기지만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화되는 것은 너무 좋은 것이지만,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서 우리가 속한 이방 땅, 한국, 미국, 온 세계 교회들과 격리되고 분리되어버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는 유익이 있겠지만, 아무에게도 빛을 비출 수 없고,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실 때, 파라, 라파, 말레, 카바쉬, 라다, 정복까지 다섯 단계를 주셨기에, 우리는 말레, 충만하다면 정복할 수 있는 영성으로 가야한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에너지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지식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이 많은 것들을 주셨을 때,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 요드 : 10주년 = 아버지와 아들의 에너지
주님이 이 요드를 주신다. 이제 곧 10주년이다.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미 10주년에 들어왔다. 교회의 10주년 행사는 내년이지만, 하누카는 벌써 10번째 하누카이다 우리는 이미 이 에너지 가운데 들어와있다. 여러분이 요드의 특성을 아실 것이다. 작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다 요드로 시작된다. 이것을 알 때 우리의 기쁨은 엄청나게 증가될 것이다.
제가 염려하는 것이, 다시 한번 우리는 너무나 이스라엘이 좋고, 유대화, 토라가 좋고, 많은 것들을 누리지만, 그 과정 가운데 격리된다면, 분리된다면, 세상과 분리는 상관없지만, 세상의 교회들과 분리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연결점이 하나도 없어진다. 다시 한번 예수님이 왜 땅에 오셨는지 기억하셔야 한다. 예수님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나에게 유효하려면, 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분리된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스라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과 동행한다, 제자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필수적으로 israeliz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제 결혼식 때도 경미가 성탄절 이브에 태어났는데, 하누카 때 결혼을 한다. 이스라엘이 된 증거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찾아져야 한다. 연결되었다는 것이 찾아졌다는 것이다.
이방 교회가 그래서 이 두 단계를 거치지 못하면, 연결도 되지 않고, 이스라엘화 되지도 않았다면, 자기는 어떤 것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슈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알기 전에는 이스라엘을 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안다? 어떤 분에 지난분이 와서 이스라엘을 정말 사랑하고, 위한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토라를 아십니까? 라고 물어봤다. 이스라엘을 아는데, 토라를 모르는게 말이 될까? 이스라엘을 안다. 야다. 야다의 관계로 들어갔다면, 이스라엘이 토라이고, 토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토라를 모르면서 이스라엘을 안다는 것은, 껍데기만 아는 것이다. 성전 마당만 밟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서 연결하는 것이고, 그 연결자들을 훈련시켜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그럴 때 이스라엘로 연결이 된다. 이게 올해 하누카 때 우리가 확실히 해야하는 숙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토라를 배우고, 이스라엘화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는 숙제를 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잘되고, 토라는 많이 아는데, 잃어버린 양들과 관계할 수 있는 끈이 하나도 없어져버리면, 뭔가 가서 사역을 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섬겨야 하는데, 섬길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정복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넘치는 에너지가, 충만한 에너지가 말레에서 서버리고, 정복할 수 있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וישׁב 바예쉐브
요드로 시작하는 것은 연결되는 것이다. 그 앞에는 바이슐라흐였다. 바예쉐브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바이슐라흐부터 조금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인데, 간단하게 몇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바이슐라흐에서 너무나 많은 교훈들을 들었다. 이것은 파송이고, 보냄을 받은 것인데, 제가 유난히 교회와의 관계를 들여다보니까, 바이슐라흐에서 네 명의 여자가 보인다. 바이슐라흐는 사실 교회들로 보냄을 받은 이야기이다. 이 여자들은 잘 아실 것이다
1) 디나 : 이방과 이스라엘의 충돌
디나 이야기는 잘 아실 것이다.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야기한다면, 디나의 스토리에서 주고 싶은 하나님의 교훈은 뭘까? 사실 이 디나와 오늘 이야기할 다말은 굉장히 관계가 많은 여자들이다. 디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이 하나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서 먹히게 했는데, 그 먹힌 사건 이후의 충돌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이 중요한 토라포션에서 중요한 이야기들은 여자들이 들어있고, 성적인 문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토라에서 말씀하는 성적인 문제에 대한 높은 차원의 지식들을 가질 수 있을 때만, 이것을 해석할 수 있다. 성적인 것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기에, 오해하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강간 사건을 통해서, 하몰의 아들은 성의를 다해서 이스라엘을 섬기고, 하자고 하는대로 그대로 다 했다. 그런데 처음에 접촉하는 방법이 그들식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식일 뿐이지,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옛날에 우즈벡에도 보쌈이라는 것이 있었다. 우즈벡에서는 그냥 다 받아준다.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보복이 일어난 것이다. 충돌이다. 이방과 이스라엘의 충돌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야곱이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악취가 나게했다고 말한다. 가까이 오기 싫게 했다. 적대감을 심어줬다. 이것 때문에 이 사람들과 잘 지내기에는 너무 힘들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 누이를 창녀로 대함이 가하니이까? 라고 아들들이 말한다. 기준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방은 이방대로 선의를 대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전통, 종교화된 전통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죽여버린 바람에, 지금도 성적인 방법으로 보복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방 교회 안에 반유대주의가 나온 것이다. 오랜 카톨릭 안의 반유대주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조차도 반유대주의에 선봉에 서서 홀로코스트와 연동이 되는 것이다.
2) 드보라 : 엘론바굿 - 관계 단절 -> 이스라엘 확정
두 번째는 드보라이다. 엘론바굿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거기서 죽는 바람에, 35장의 엘 벧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상수리 나무, 통곡이다. 엘론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카, 통곡이 일어났다. 관계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35장에 보시면, 그 다음에 다시 나타나서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리니, 이제부터 다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확정해주신다.
3) 라헬 : 죽음 = 베오니 -> 벤야민 // 긍정화 : 네샤마 파워
세 번째는 라헬의 죽음이 있다. 그렇게 야곱이 사랑한 여인이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었다. 7년 걸려서 라헬이 그때 야곱을 만났을 때가 10대 후반이라면, 거기서 만난 시간을 다 합해봤자, 40대 초반에 둘째 애를 낳으면서 죽은 것이다. 굉장히 불행한 사건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때 야곱의 나이가 100세가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97세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오기 시작했으니까, 이때 라헬의 죽음이 나오면서, 벤 오니, 베냐민 사건이 벌어진다. 라헬은 야곱의 생명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니까, 내 고통이다라고 말했지만,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벤야민으로 바꿔버린다. 이것은 네샤마 생명의 긍정화, 영어로 제가 positivation이라고 했다.
인간적으로 가장 사랑했던 이 여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는 그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야곱은 네샤마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이 고통을 긍정으로,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바꿔준 것이다. 이게 네샤마 생명의 능력이다.
네샤마 파워의 사람들은 모든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이야기한대로, 미처 부정적인 사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긍정성을 찾아주는 것이다. 박화숙 집사님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너무 좋다고 했다. 숨겨진 습관이 드러났다. 다시는 이것을 안 할 것이다. 당장 부정적이고 힘들고, 위급한 상황이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선, 하나님의 긍정의 아들, 오른쪽의 아들로 바꿔주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생명 수준이 네샤마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러분 삶의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을 바꿔줄 수 있는가? 같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욕하는 것은 동물로 같이 떨어지는 것이고, 그 안에서 선한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겠니? 하면서 토라의 지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긍정화이다.
4) 빌하 - 르우벤
유명한 빌하와 르우벤의 이야기가 있다. 르우벤은 육신의 장자이고, 빌하는 겉으로 보기에 야곱의 아내인 것이다. 이 시대에 사실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스라엘과 본질과 연결되지 못한 교회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다 교회와 이스라엘 이야기이다. 그래서 바예쉐브로 넘어가보겠다.
바예쉐브에서 오늘의 말씀이 시작되는 것이다.
창37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의 족보가 나오는데, 왜 요셉의 이야기만 나오는가?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이 야곱에게 초점을 맞추면 보인다. 요셉이 고통받는 시간 동안에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어떻게 고통받았을 것이다. 38장에 유다가 떠난 동안에, 떠난 유다를 생각하는 야곱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에, 야곱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는 것이 있다.
바예쉐브에서 처음에 우리가 생각한 것이 채색옷이다
* וישׁב 바예쉐브 : 같이 산다 = 회복, 티쿤 (슈브)
1) 채색옷 : 아버지의 사랑
야사브는 요드와 슈브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생명으로 슈브, 회개한다, 티쿤한다, 돌아간다. 하나님이 원래 예비하신 생명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목감에 동거한다, 같이 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힘으로 슈브하기 위해서 같이 사는 것이다. 왜 같이 사는가? 동거하는가? 야사브, 슈브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요드에 힘입어서 슈브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슈브를 하려면, 당연히 사랑이 필요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채색옷이다.
כתנת פסים 크토네트 파씸 : 채색옷
요셉이 정말 이상한 짓을 한다. 아버지가 사랑한다면서?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모든 아들을 다 골고루, 똑같이 사랑해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불평등해보인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를 유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요셉이 형들에 대하여 고자질한다. 고자질은 요셉이 크토네트 파씸을 입을 만한 자격을 말해준다.
파씸은 싸멕을 말하는 것이다. 평가를 말하는 것이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서 종종 쿠웨이트에서 아버지에게 다 고자질해야지라고 했다. 여기 고자질쟁이가 몇명 있다. 아버지 이거 알아요? 들어도 못 들은척하지만, 고자질하는 사람에게 채색옷을 싹 입혀준다. 싸멕 + 페이이다. 그러면 왜 크토네트 파씸을 입혔는가? 이것은 가죽옷, 크토네트 우르의 야곱 버전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니라 한 것에 대한 야곱의 적용이다. 이해가 가시는가?
עור 우르 : 가죽 = 피부
이것이 관점과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이라면, 파씸은 그것을 어떻게 하는 실행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פס 파쓰 : 흩뿌리다
이 내면의 뜻은 그런 것이다
외면 : 고자절 = 파씸 = 겉으로 드러난 사랑
내면 : 하나되게 함 = 생명 향상
고자질이 겉으로 드러난 사랑이다. 아버지 사랑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왜 이렇게 했는가? 이 고자질이 외면이면, 내면,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크토네트 우르대신 파씸을 입혀서, 하나되게해서 그 생명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되게 해서 생명 수준의 향상을 위한 것이다. 모든 형제들의 생명을 올려주기 위한, 이제 요셉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너희들의 생명이 올라갈 수 있는 의도와 사랑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증해주기 위해서 요셉에게 꿈을 보내는 것이다
꿈은 하나님의 인증 과정이다. 야곱이 요셉을 향해 하는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인증이 바로 꿈이다. חלום 할롬, 생명에 대한 훈련이 진리에 연결되게 하는 것이 꿈이다. 하나님이 꿈을 요셉에게 준 것은, 야곱을 위한 인증이다. 하나님이 불평등하게 만들었는데, 이 크토네트 파씸에 의해서 형들은 당연히 질투를 하게 된다. 갈등한다.
질투 / 갈등 -> 생명의 하등함 -> 살인 : 예슈아 살해
이 바다 목사님이 어떤 애들을 특별히 사랑하면, 쟤는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질투한다면, 질투는 그 자체로 자기 생명 수준이 하등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생명의 하등함이다. 생명이 높은 사람은 질투를 할까, 안 할까? 누군가를 위해서 질투하고,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생명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생명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질투하고 갈등한다면, 그 자체로 나는 네페쉬인 것이다.
바다 목사님이 특별히 사랑한다면, 제가 볼 떄는 신통하다, 쟤 잘하는 애구나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저는 그들보다 하등하진 않을테니까 말이다.
이 질투의 결과는 살인이다. 살인에 대한 많은 깊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말 그대로 살인이다. 기억하시기 바란다. 정말 명언인데, 생명이 낮은 사람이 능력을 받으면 반드시 생명이 높은 사람을 살인한다. 반대로, 생명이 높은 사람이 능력을 받으면, 생명이 낮은 사람의 생명을 끌어준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면, 그 대상은 여러분보다 생명이 높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유대인 탁월한 랍비들이 예슈아를 죽인 것이다. 예슈아 살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깨달을 수 있기 바란다.
채색옷의 결과가 형들이 죽이는 것이었는데, 이 형들의 살해 이후 두 가지가 나온다
1) 요셉 사건
2) 유다 사건
이 토라포션 안에 들어있는 두 내용이다.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은, 예히다 수준의 에하드 의식을 자꾸 격려하는 것이다. 그리로 올라가서 이것을 꺠달을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형들의 살해 이후에 이것 자체가 분리이다. 하나님은 자꾸 하나되게 하시지만, 사탄은 반드시 분리시키고 끊어버린다. 어떤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다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늙은 왕, 사탄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걸, 끊어, 말어? 그것은 저기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낮은 생명의 반증이다. 높은 생명은 반드시 하나로 융합하게하고, 야하드하게 하지, 절대로 끊는 법이 있다. 특히 이스라엘 안에서는 말이다.
1) 요셉 : 수동적 분리 - 폭행/살인의 결과 -> 의인의 고난
이것을 수동적 분리라고 한다. 폭행. 살인의 결과이다. 그래서 요셉은 쭉 미케쯔로 이어진다. 요셉은 계속 이 고난 가운데, 의인은 고난이 많다. 오늘 의인에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할 시간은 별로 없다. 여러분들은 너무 잘 알고 있고, 어떻게 할지 알고 계신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한다.
저는 오늘 유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2) 유다 : 능동적 분리
창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그 후, 폭행 후이다. 떠났는데 내려갔다고 한다. 끊으면 반드시 생명이 내려간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진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해드리고 싶은 권면이, 끊고 싶으면 끊지 마시기 바란다. 누가 마음에 안 드는가? 그러려니하고 일단 가만히 계시라. 끊는 것은 하나님이 끊어주기 전에는 하는 것이 아니다. 끊는 것은 아버지가 샬라흐할 때 유일하게 끊어지지만, 사실 육신적으로만 끊어지는 것이지, 관계는 더 강화된다. 우리의 관계는 끊어질 수가 없다.
우리 하영이가 미국에 갔지만, 오히려 여기 있을 때보다, 저한테 얼마나 긴 편지와 사진을 보내는지, 저 육신의 부모들은 모르실 것이다. 내일 시험인데, 장문의 사랑의 편지를, 보내심이 뭔지 알았다고, 신뢰가 뭔지 알았다고 하는데, 정말 눈물이 난다.
떠나면 내려간다. 하영이는 떠나도 안 내려간 것이다. 아버지가 샬라흐 했기 때문이다. 이게 유일하게 육신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지, 우리는 하나로 묶여있다. 한번 그것을 상기하는 의미에서, 믿음으로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하나로 묶여있다.
잠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제발 갈라지지 마시라. 마지막 고민 상담하기 전에는 저한테 제발 오시기 바란다. 대개 오지도 않고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 분리 : 아버지 브레이크(brake) <-> 브레이크(Break) 아버지
분리에서는 아버지 brake를 사용하라는 말을 드리고 싶다.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막 나가는 결정을 하기 전에, 아버지라고 하는 브레이크를 밟아보라. 아버지 브레이크의 반댓말이 브레이크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마음이 어떨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까? 제가 자꾸 격려하는 것은, 아버지 마음에 한번 들어와봐.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까 물어보기라고 해라. 그럴 때 브레이크는 걸리게 되어있다.
후회 / 자책 / 실망 -> 새 출발
유다가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화가 났을 것이다.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데, 르우벤이 그러지 말자고 할 때, 유다가 나타나서 죽이지만 말자고 비겁하게 한 자기의 행동에 대한 후회, 자책을 하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후회, 자책, 실망, 이런 것들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바다 아버지가 얼마나 수고하는지, 정말 눈물겨울 때가 많다.
심지어 자기에 대한 실망, 그래서 여기서 새출발할거라고 하면서 유다가 기껏 간 곳이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해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만난다.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b ) 만남
분리하면 반드시 또 다른 만남이 있다. 여기서 또 두 명의 여자를 만난다. 수아의 딸, 그리고 뒤에 며느리 다말을 만난다.
שׁוע 슈아 : 자기식 구원, 자기 행복 / 스스로 아버지 - 세 아들, 성공 -> 사망
예슈아에서 요드, 하나님의 능력이 빠진 자기식의 구원이다. 절대 기준이 없이, 요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아.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스스로 아버지가 된다. 이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서 세 아들을 낳는다. 이들이 10대까지 도달할 때까지, 일견 진짜 아버지가 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엘, 오난, 셀라. 세 아들을 낳았다.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되었는가? 앞에 두 아들은 다 죽는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분리는 사망이다. אבד 아바드, 멸망이다. 멸망은 사망이다.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함으로. 이때 유다의 생각의 지점을 거십이라고 이야기한다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כזיב 케찌브 : 거십
요드와 베트를 바꾸면, כזבי 코즈비가 된다. 속임수이다. 카자브이다. 속이는 것이다. 유다는 아들을 낳은 것처럼 보였고, 일시적 성공처럼 보였다고 할지라도, 사실 사망 가운데 빠져있었던 것이고, 스스로 속임수 가운데 빠진 것이다. 이렇게 관계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스스로 분리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남을 통해서 유다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창녀이다
c ) 창녀
다말은 며느리이지만, 지금 유다가 구원받는 것은 창녀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그냥 다말로 알고 있지만, 유다의 눈에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은 창녀이다. 물론 이름은 다말이다.
תמר 타마르 : 십자가의 죽음
이 다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많이 들으셨을 것이다. 이때 다행히 유다는 거십에 계속 있지 않고, 팀나로 간다. 양털을 깍으려고 말한다.
팀나 : 분깃
이 유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야기하신 자기의 portion. 거십에서 분깃의 자리로 왔기 때문에 창녀인 다말이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나타나서, 놀라운 계략을 피운다.
요새 우리 사모님이 흑염소를 드시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 줄까? 하면서 유다는 여전히 자기 쾌락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창녀와 하룻밤을 잔다. 바로 그날 담보물 작전을 행한다.
창녀의 담보물 전략
창녀의 담보물 전략을 통해서 빛을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저 하누카의 빛이다. 이것은 굉장히 높은 차원의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전략이다. 잘 새겨서 들으시길 바란다. 높은 케테르 차원의 하나되게하는 하나님의 전략이다. 이 창녀의 담보물을 통해서 창녀로 분장한 다말은 유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상기시켜준다.
유다 안의 하나님의 분깃, 당신은 그렇게 살면 안되. 내가 너한테 먹혀줄게. 디나는 먹혀줌으로 인해서 엉뚱한 결과가 왔지만, 이 여인은 먹혀줌을 통해서 유다에게 빛이 임하게 하는 것이다. 그 빛이 셋으로 나타난다
창38: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 도장 : חתם 호탐 = 완전한 생명
(2) 끈 : 파틸 = 훈련의 연결
(3) 지팡이 : 마테 = 지파의 권위
하나님이 이것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 개를 위해서 다말은 유다와 하나가 된다. 도장은 호탐, 완전한 생명이다. 끈은 그 생명을 위한 훈련의 연결이다. 마테는 권위이다. 유다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훈련을 위해 연결되어야 하는지, 그게 너무나 필요하다. 그래서 자기를 완전히 죽여서, 여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창녀의 모습으로 다가가서 새 생명의 빛을 나눠준 것이다. 8일까지 가는 생명의 빛을 나눠준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사망을 통과해서, 불태워라! 죽여라! 할 때, 이 담보물의 임자가 누구인지 보십시요. 담보물의 빛으로 와서, 유다가 하는 말이 있다. 사실 다말의 행음이 유다의 행음이고, 유다의 행음이 다말의 행음이고, 그것은 완전한 차원의 하나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창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의롭다. 짜딕, 의에 대한 불이 들어온다. 유다가 막 행하는 동안에는, 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죄가 없다, 의롭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담보물 전략을 통해서 하나님으로의 회귀의 길인 것이다. 하나님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뒤에 새 생명이 나온다
새 생명 : 베레스 + 세라
베레스는 그 자체가 의에 대한 인정이다. פרץ 페레쯔, 파라와 짜데이다. 세라는 זרח 제라흐, 쭉 겉으로 나오는 빛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 대한 예표이다. 8일째의 빛은 부활의 생명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말하는 것이다.
다말의 위대함은 이 담보물 전략을 사용하는데, 담보물 전략을 사용하려면 자기를 완전히 죽여야 한다. 누군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분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려면, 나는 완전히 죽여야 한다. 관계 가운데서 내가 완전히 죽고,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담보물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받을 때,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빛을 비출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도 사역의 높은 차원의 비밀인 것이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구원하고자 하고, 분리된 사람을 데려오려고 하면 담보물 전략을 사용하시기 바란다. 다말이 가르쳐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도장과 끈, 지팡이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나는 너의 그것이 나에게 필요했고, 부부 사이에, 이웃 가운데 필요하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8일째 생명,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저 생명의 빛을 볼 수 있고, 바랄 수 있고, 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기적이 있었다. 하누카는 네 가지가 있다. 위대한 기적이 있고, 기름이 있고, 8일 동안의 빛이 있고, 그것을 기뻐하는 축하, celebration이 있다. 위대한 기적이 뭔지 다 들어서 아실 것이다. 빛이 8일까지 갔다는 것은, 부활의 생명을 나눠주는 것, 죽은 것 같은 유다를 살려내는 다말의 완전한 자기 죽음인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누군가를 어둠 가운데서 꺼내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많은 도전이 되고, 어려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하누카의 시즌에 우리가 채색옷을 입은 사람처럼 할 때, 내가 고통, 고난 가운데 들어갈 것입니다. 그 빛을 보내셔서, 떠나가는 유다도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통해서 이 담보물 전략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기억나게 하는 자들을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 기도
이 시간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의식에 도달할 수 있고, 그 의식은 케테르 의식이며, 독생자 생명을 주는 것이다. 비록 깜깜해졌다가 아주 가늘게 드러난다 할지라도, 이 생명의 빛을 붙드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내가 어떻게 이 메세지를 나의 삶에서 적용해야할지, 특별히 자발적으로 떠난 유다를 돌아오게 하기 위한 다말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 내가 어떻게 담보물 전략을 사용해야할지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증거로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으로 인하여 형들이 요셉을 사망 가운데 던지고, 자책, 실망으로 능동적으로 떠난 유다가 돌아올 수 있게 하는데 우리를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다말의 생명의식을 배우기 원합니다. 창녀로 분장하는 철저한 자기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 형제들에게 원래 분깃으로 주어진 그 생명을 되살리는 빛을 발하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다말같이, 철저하게 십자가에 죽는 우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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