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진보
총각 시절 대구세관 민원창구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퇴근시간이 좀 넘은 어둑한 시간에 중절모를 쓴 말쑥한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시골 어디에서 왔는데 지갑을 잃어버려 돌아갈 수가 없다며 차비를 빌려주면 꼭 갚겠다고 하였다. 당시 대구세관은 동대구역과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었던지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차비에 더하여 식사라도 하시도록 5천원을 드렸다. 그리고는 잊고 지냈다. 그런데 한 달쯤 후 그 시각 즈음에 할아버지 한분이 찾아 오셔서 똑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얼굴을 보니 그날 그 할아버지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 전번에도 저한테 차비를 빌려 가시지 않았어요?” 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내 얼굴을 본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만 달아나듯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모른 척 해 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고 지낸 이야기가 오늘 생각이 난 것은 다음의 사건 때문이다.
삼십대 중반 쯤 보이는 여인이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왔다. 말을 어눌하게 쓰는 게 좀 모자라는 듯 보였다. 손님이 와서 업무 상담을 하려고 하는데 물건을 팔아 달라고 한다. 곁에서 버티고 서 있으니 고객과의 대화가 진행되질 않는다. 직원들이 내 보내려고 해 보았지만 들은 체도 않는다. 보다 못해 지갑을 열어 천원을 쥐어 주니 어눌한 말투로 ‘나는 거지가 아닙니다. 라고 한다. 나는 그 상황을 빨리 피하고 싶었을 뿐인데 자기를 거지 취급했다고 한다. 무슨 물건을 파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잡상인들이 가져온 물품들이니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없다. 가방을 끄르는데 칫솔이 보이기에 그걸 달라고 하며 천원을 주니 만원이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 3천원을 쥐어 주며 칫솔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시라고 하니 또 예의 그 말 “나는 거지가 아닙니다.” 라고 한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삼천 원을 다시 쥐어주면서 당신을 거지 취급한 게 아니라 당신이 지금 장사할 상황도 아닌 곳에 와서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어깨를 툭 치며 돌려세우려 했다. 정말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왜 때리느냐며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손님 두 분이 다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억지를 부렸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손에 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간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후 좀 있으려니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아저씨 한분이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또 나를 찾는다. 직원들은 사람의 외모만 보고 사장친구쯤 되는 줄로 안다. “어디서 왔습니까?”하고 물었다. 명함을 내민다. 무슨 단체의 00위원이라 적혀 있는데 명함 한번 거창하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선걸음에 돌아서 나가야 했다. 내 목소리가 싸늘해 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