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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 정 떼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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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정 떼기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시는데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이 세상 그 누가 하느님의 자녀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다 하느님의 자녀인데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숙한 하느님 자녀 또는 완성의 하느님 자녀라는 의미 말입니다.
사실 세례가 이런 의미입니다.
자기가 본래 하느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이 세상의 자녀로 살거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던 사람이 이제 자기 신원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기로 새롭게 마음먹는 것이 세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고 일평생 살았지만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이제 죽어 다시 태어날 때는 진짜 새로운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육신 아버지의 자녀로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었다가
회개한 후 주교님 앞에서 옷까지 홀딱 벗어 돌려드리며 상속권을 포기할 때
이제부터 나는 하늘의 아버지를 자유롭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선언했지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부자지간의 인연을 비롯하여
과거의 모든 인간적인 인연으로부터 훌훌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누구의 아들딸이 아니고,
더 이상 누구의 엄마 아버지가 아니고,
더 이상 누구의 아내 남편이 아닙니다.
오늘 천사와 같이 된다는 표현도 있는데
천사처럼 더 이상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천사처럼 더 이상 ‘누구의 누구’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것을 확실히 깨닫고 실감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머리로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이지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어머니를 이제 제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로 놔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헤어지기 섭섭하여 간신히 작별의 손을 놓듯 여간 슬프고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야지만 어머니께서 하느님께 훌훌 떠나실 것이기에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아니어도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정 떼기’라는.
옛날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 갑자기 전과 달리 모진 짓을 하면
그것은 정 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지요.
늙어갈수록, 아니 죽어갈수록
우리도 정 떼기를 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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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 22,39-40).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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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과거는 역사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오늘 주어진 선물을 통해서 옵니다.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 시대를 살면서도 과거의 율법 안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이 성장했고 마침내 목숨을 내놓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성경은“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죽음은 인간의 잣대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생이 있고, 그것을 믿는 한 우리도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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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들과 함께 ‘지 세실리아 수녀님’의 금경축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 후에는 본당에서 준비한 조촐한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1973년에 첫 서원을 하였고 어느덧 50년이 지났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30년이 넘는 인연을 이어온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우들이여 생각건대 이번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수녀님도 지난 50년 동안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을 지혜와 열정 그리고 기도와 헌신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금경축 축하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다양한 능력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듯이 수녀님도 수녀님의 내면에 많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은 낯선 미국 땅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교사로서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50살 밖에 안 돼 보이는 수녀님이 벌써 수도생활 50주년이라니 놀랍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미사에는 저를 포함해서 4명의 사제가 함께 하였습니다. 시몬 신부님은 3년 후에 금경축이고, 강론을 하였던 브로스논 신부님은 8년 후에 금경축이고, 저는 18년 후에 금경축이고, 가비노 신부님은 계산은 하지 않았는데 대략 33년 후면 금경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저도 제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제게 부지런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날 수 있기에 좀 더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기에 높은 목표를 정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교회의 직무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못하면 다음 분들이 이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는데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협조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았던 기억은 오래 기억하려 하였고, 나쁜 기억들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오디세우스처럼 불굴의 의지와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경축을 맞이하는 수녀님처럼 다양한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삶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능력과 업적으로 제국을 세웠던 왕들도, 이름 없는 산골에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도 부활 이후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능력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 모두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 아나니, 그때 아는 것은 예전에 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와 불만에서 사랑과 용서, 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천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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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물론 이 말씀의 의미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지만 오늘 주님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시대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숨 쉬는 이곳에서도 하느님이시며 천상이나 저승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모습이 바뀔 뿐 모든 곳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말은 지금 우리와 같은 모습과 존재로 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언젠가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다른 세상, 즉 하느님께서 계시는 다른 곳으로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확신할 수 없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우리는 천사의 모습으로 영적인 모습으로 지낼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바뀌겠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 그곳에 다른 모습으로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도 하느님의 나라요. 저곳도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맞이해야 하는 죽음은 소멸의 죽음이 아니라 ‘문’으로서 즉 다른 곳으로서 넘어감의 죽음일 것입니다.
헤일 메리 (Hail Mary)
농구에서, 경기 시간 막판에 버저 비터를 노리고 먼 거리에서 던지는 슛.
예로는 종료 1초를 남기고 백코트에서 던지는 슛을 들 수 있다.
마지막에 시간이 없어서 먼 거리에서 도전하는 슛.
너무 멀리서 던져서 들어갈 확률이 거의 없는 슛.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이 슛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림 같은 역전을 만들어 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는 안되든 한번 해보고 포기하자는 끊기 때문에
그림 같은 역전이 연출됩니다.
연말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또 다하고 거기다 조금 모자라면
마지막 헤일 메리를 준비하세요.
혹시 알아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적과 같은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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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적인 글로벌 유통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긴 토종 대형 마트가 있습니다. 이 대형 마트는 ‘노브랜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질 좋은 물건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팔기 위해 브랜드를 붙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자체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노브랜드가 햄버거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내세운 광고 모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검은 피부의 모델을 쓴 것입니다. 온라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등장했습니다.
‘검은 피부 모델이라니, 한국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라며 외국인을 모델로 쓰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소비자들의 직관적인 추측에서 보았을 때,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한국인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말만 쓰고 또 한국에서만 살았던 완벽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반박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한국인이 검은 피부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편협한 사람이군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당연히 함께해야 할 사람을 내쳤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은데, 함께하지 못할 이유 몇 가지를 내세워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모습도 또 얼마나 많습니까?
편협한 생각은 결코 하느님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떤 형제가 자식 없이 죽게 되면,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지만 자식 없이 죽었고 그래서 그 아래의 형제가 차례로 형수를 맞아들였지만 자식 없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부활할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상 생활의 연장선 정도로만 보고 있기에, 부활 자체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편협한 생각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바뀌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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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많은 사람은 실수 때문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조지 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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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여정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비명으로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의 착한 목자이자 벗인 살아 계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일 것입니다. 11월 위령성월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저는 위령성월을 희망성월, 성인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성부 하느님을 향해 성자 예수님과 함께 성령의 사랑안에서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향하는 성부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중 날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제 좋아하는 위령미사 경문중 한 대목과 위령감사송에 나오는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삶으로 직결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담게 하소서.
또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시작임을 알립니다. 참 요즘 주변에서 가을 단풍잎 지듯이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도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 또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끊임없이 충고하는 현자들입니다. 이어지는 위령 감사송의 다음 대목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며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여,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 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이 또한 거룩한 교회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가 된 이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생 함부로, 생각없이, 욕망대로 막 살 지는 못할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내 삶의 여정,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구체적 점검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을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완전히 실패인생을 살았음을 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뉘우치며 후회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자기 벗들을 불러놓고 고백합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 받는 사람이었는데....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참 허망한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문득 조선시대 서른 여덟 짧은 삶이었지만 ‘따뜻한 이상’과 ‘뜨거운 실천’의 힘으로 조선의 정신을 실천하다 억울하게 사사된 중종임금때 충신 조광조의 마지막 감동적인 유언시가 생각납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나라 근심하기를 내집처럼 하였노라.
밝은해 이땅을 굽어보고 있으니,
훤하게 이 충심 비추어 주리라.”
선조실록이 전하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 참 적절하고 아름답습니다.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일화라 인용했습니다. 또 하나 어른이 사라진 이 시대에 참으로 그리운 분, “김수환 추기경 영전에” ‘방문객’의 시인 정현종이 바친 추모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너무 늦게 말씀드리지요만,
우리가 모자라 어려움이 그칠 날이 없었던 그동안,
중대한 사안에 대하여 시의적절 말씀하시는 걸
우리가 얼마나 반겼으며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나라 위한 진정에 눈물겹고
그 생각의 균형과 그 내용의 적절함에 우리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당신은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실은 당신의 얼굴이 참 마음에 든다고 저는 늘 말해왔습니다.
그 얼굴, 그 표정은
천품(天稟)의 선의와 천품의 진정과 천품의 겸손의 육화였습니다.
말씀의 힘이 나오는 그 청정심(淸淨心),
그 마음, 그 말씀, 그 얼굴의 움직이는 표정이 없으니 나라가 텅 비었습니다.
궁핍감이 커집니다.
사람의 궁핍, 천진의 궁핍, 평화의 궁핍....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의 빛, 그 진귀한 아름다움을 추모하는 저희의 아쉬움과 슬픔 속에,
그리하여 그리움 속에 내내 꽃피소서.-
맑고 향기로운 삶이었기에 길이 맑고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는 추기경님입니다. 생각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겠는지요! 그러니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희망의 여정과 함께 가는 기쁨이요, 귀가의 여정과 함께 가는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참기쁨, 주님을 뵈올 참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부활의 삶이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일곱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두었을 때 사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라는 참 난해한, 말이 안되는 질문으로 주님을 시험했을 때 주님의 통쾌하고 명쾌한 답변이 죽음에 대한 궁극의 답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삶과 죽음을 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하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오경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천상영혼들, 연옥영혼들, 지상영혼들인 우리 모두가 살아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봉헌되는 연미사와 생미사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만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이자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벗’이 되어 하느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목자이자 벗인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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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너머 삶>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삶 너머 삶
삶과 삶
사이 죽음
삶 너머 삶
삶과 삶
잇는 죽음
삶 너머 삶
은총의 삶
은총의 죽음
삶 너머 삶
삶의 은총
죽음의 은총
삶 너머 삶
없는 듯
있는 삶
삶 너머 삶
있는 듯
없는 죽음
삶 너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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