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시대적 배경 Ⅲ. 商나라의 甲骨文 Ⅳ. 西周의 金文 Ⅴ. 春秋戰國時代의 墨蹟 Ⅵ. 고대의 石刻文字 Ⅶ. 六國의 古文 Ⅷ. 결론 |
Ⅰ. 서론
선진시대란 秦 이전의 商ㆍ周와 춘추전국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는 중국 역사상 노예제도가 가장 극성을 부렸던 시기이며 아울러 노예 제도가 서서히 봉건제도로 전환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선진시대는 시간적으로 기원전 16세기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1천년 이상의 긴 시간이다. 인류의 문명의 시작과 더불어 문자의 출현과 발전 양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 거대한 중국이 의사소통수단인 문자를 하나의 기호로 정리하고 정착시키는 과정과 그 과정과 함께 살아있는 삶의 흔적인 서예의 모습들이 어떠하였는지는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더구나 문자의 생성 이후 기록의 과정과 도구의 문제, 현대의 종이와 붓에 해당하는 서예 용구의 문제도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살펴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는 先秦時期 문자의 시작인 商나라의 甲骨文과 西周의 今文이 用筆ㆍ結體ㆍ章法 등 3가지 서법의 요소를 갖추고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어떠한 양식으로 남아있으며,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은 어떠하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맹서와 백서, 죽목 간독의 양상과 석각 문자의 종류와 내용, 그리고 육국 고문을 통하여서 선진 시대 서예를 대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시대적 배경
商(기원전 16세기-11세기)나라는 최초로 문자의 기록을 전하는 나라이다. 대량의 갑골문과 금문이 출토되어 이 시기 문자제도를 증명할 뿐 아니라 문명도 짐작케 한다. 周나라는 殷나라를 이어받아 흥성한 나라이다. 武王이 수도를 鎬京(지금의 陜西省 西安市의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에 정하자 역사에서는 이를 西周(기원전 1027-기원전 771년)라 불렀다. 주나라는 일찍이 문자가 있었으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말한 “주나라의 제도는 은나라의 예법에서 기인한다〔周因於殷禮〕.”라고 한 것을 보아도 周의 禮樂과 刑政은 은나라에서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西周는 기원전 771년 幽王이 犬戎과 연합한 申侯에게 사살됨으로써 마감하고, 기원전 770년 平王이 수도를 洛陽으로 옮기자 역사에서는 이를 東周라 한다. 이 시기는 지방의 제후국들이 날로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약육강식의 풍토가 격렬해졌다. 동주시대를 대체로 春秋時代(기원전 770년-기원전 403년)와 戰國時代(기원전 403-기원전 221년)으로 구분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고대사회의 대혁명기로 노예제도가 붕괴하고 봉건제도가 확립된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각 방면에서 극심한 변화를 일으키고, 학술의 百家爭鳴時代를 창출하였으며, 예술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중국의 문자는 고대부터 結繩과 刻契, 그리고 圖畵符號 등 일을 기록하는 과정을 거쳐 점점 문자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현재 발견된 것 중에서 한자의 기원과 관계되는 최초의 자료는 半破와 姜寨 등의 仰韶文化 유적지에서 발견된 6000년 전의 부호로 기록된 陶文이다. 또한 陵陽河 등의 大汶口 유적지에서 발견된 4000년 - 5000년 전의 圖畵式 陶文 중에 하나의 상형부호가 있는데, 이는 옛날의 한자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최초의 원시문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나라의 문자는 어느 정도 성숙된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언어를 기록하는 공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 甲骨文과 金文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형체미가 있을 뿐 아니라 用筆ㆍ結體ㆍ章法 등 3가지 서법요소도 갖추고 있다.
Ⅲ. 商나라의 甲骨文
갑골문은 河南省 殷墟에서 출토된 것으로 상나라 후반부인 은나라 왕실에서 겁북이의 껍질(龜甲)과 짐승의 뼈(獸骨)을 이용하여 점괘를 보았기 때문에 ‘卜辭’라고도 한다. 갑골문의 내용은 제왕과 신하의 이름 또는 전쟁, 혼인, 질병, 사냥, 제사 등에 관한 것들이다. 갑골문은 秦漢隋唐 시기에 이미 발견되었으나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1899년 淸末 王懿榮이 대량의 갑골문을 발견하자 학계에서는 이를 수집, 정리하여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갑골문은 현재까지 약 15만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거기에 쓰인 글자는 모두 5000여자에 이른다. 이 갑골문에는 또한 象形ㆍ指事ㆍ形聲ㆍ會意ㆍ轉注ㆍ假借 등 이른바 六書를 구비하고 있다.
갑골문은 龜甲과 獸骨 위에다 뾰쪽한 도구를 사용하여 새긴 문자이다. 그러나 때로 모필과 유사한 것을 이용하여 가만 먹물 혹은 붉은 것으로 쓴 흔적이 보인다. 갑골문의 필획은 굵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으나 모두가 힘차고 단단하여 풍부한 입체감을 가지고 있다. 갑골문의 형태는 자유로우면서도 활발하고 參差와 錯落이 뒤섞인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갑골문에는 상형문자와 같은 글자가 많이 보이는데, 어떤 것은 아주 간단한 선으로 사물의 모습을 개괄하면서 글자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거의 그림과 흡사한 것으로 갑골문의 미감을 강하게 할 뿐 아니라 예술적인 맛까지 풍기고 있다.
갑골문의 巫史(즉, 점을 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서예가인 셈이다. 郭沫若은 『殷契萃編』에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괘를 갑골에 새김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문자도 아름다워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그 정신을 전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갑골문은 실제에 있어서 당시에는 법도가 되는 글씨이며, 그것을 새기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왕희지ㆍ안진경ㆍ유공권과 같은 당시의 서예가들이다.
사실 ‘祭祀狩獵塗朱牛骨刻辭’ㆍ‘宰丰骨匕刻辭’ 등은 수량이 많은 갑골문으로
예술적 요소가 풍부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예작품이다.
그러나 갑골문이 상나라 문자의 전부는 아니다. 당시의 문자가 銅器ㆍ陶器ㆍ玉石 등에서도 나오지만 그 수량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尙書ㆍ多士篇』에 의하면 周公이 은나라 사람에 대하여 말하길 “은나라 선인들에게는 冊과 典이 있었다〔惟殷先人, 有冊有典〕.”라고 하였다.
한편, 갑골문에는 ‘聿’자가 나오는데, 이는 손으로 붓을 잡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갑골 위에는 붉은색 혹은 까만 먹색으로 글씨를 쓰고는 아직 이를 새기지 않은 문자도 보이는데 그 글자의 획순과 붓을 대고 뗀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상나라에 이미 毛筆이 있었다는 증거이지만, 아직 이를 증명할 고고학적 실물이 발견되지 않는 형편이다.
Ⅳ. 西周의 金文
상나라 말엽에 주물로 만들어진 명문이 비교적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를 金文이라 부른다. 또한 고대 사람들은 청동기를 만드는 주물을 吉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길금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기물 위에 새겨진 문자를 吉金文字라고도 부른다. 상나라 말기의 청동기 명문 중 글자수가 비교적 많은 것은 ‘戌嗣子鼎’ㆍ‘宰甫卣’ 등이다. 이시기 금문의 특징은 필획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뾰쪽하여 붓끝이 나오고, 중간은 두툼하게 살이 있으며, 붓을 거두는 곳에는 파책이 있다.
갑골문이 상나라의 대표적인 서법이라면, 금문은 西周를 대표하는 서법이다.『左傳』과『墨子』등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이미 夏나라 때부터 청동을 다룰 줄 알았으며, 商ㆍ周 때에는 마침내 찬란한 청동기문화를 이루었다. 서주의 청동기 종류와 수량은 상나라의 것을 훨씬 능가했다. 명문의 글자수도 많아지고 주조의 기술도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악기에 속하는 鍾과 식기에 속하는 鼎이 모두 중요한 禮器로, 그 위에 장편의 명문을 새겨 넣은 것이다. 그래서 금문을 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서주시대 청동기 명문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冊命과 賞賜, 또는 정벌과 소송에 관한 사항 그리고 선조들의 공훈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서주 금문의 풍격은 대체로 초기, 중기, 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명문은 여전히 부족을 나타내거나 그릇의 주인 이름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도 은나라 법도를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天亡簋’ㆍ‘眉縣大鼎’ㆍ‘大盂鼎’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필획에 파책이 분명하면서도 굵고 가는 획의 변화가 있고, 行氣에 주력하여 장법이 갈수록 정제된다는 점이다.
중기의 명문은 단정하면서 질박한 풍격으로 전환되면서 필획이 균형을 이루고 고르며 둥글고 윤택과 포만감이 나타난다. 전체의 구성은 완전히 정제되었으며 글자의 결구도 비교적 간략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온유하고 함축성이 있는 ‘靜簋’, 그윽하면서도 수려한 ‘牆盤’, 편안하면서도 단정한 ‘大克鼎’ 등이 있다.
말기의 금문은 ‘散氏盤’ㆍ‘毛公鼎’ㆍ‘虢季子白盤’ 등이 대표적이다. ‘散氏盤’은 형태가 넓적하면서도 평평하고 필법이 거칠며 형세가 기운 듯하면서도 고박하여 ‘草篆’의 실마리를 열어놓았고, ‘毛公鼎’은 명문이 무려 490자에 달하는 거작으로 서주 금문의 으뜸이다. 이것의 용필은 순수하면서도 익숙하고 필획이 둥글면서도 굳세며 기세가 웅건하면서도 강하여 당시 금문으로 이렇게 고루 갖춘 것은 아마도 찾기가 힘들 것이다. ‘虢季子白盤’은 글자의 형체가 좁으면서도 길고 필획이 둥글면서도 뻣세며 선의 굵기도 일정하면서 붓끝을 드러내지 않아 후세의 ‘玉箸體’와 같은 면모가 있다. 이 시기의 금문은 필획의 구성이 대칭을 이루면서 균형이 잡혀있고, 파책도 소실되어 玉箸體와 같은 모습을 지니고 글자의 형태도 세로가 긴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는 金文이 小篆의 형태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장법은 세워진 형태로 행간을 이루고, 가로도 정렬되어 있어 매우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맛을 풍긴다.
여기서 표현되는 특색은 후세 大篆의 모범이 되기도 하고, 진나라 계통의 문자와 서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籒書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한편, 籒書는 周나라 선왕 때 太史籒가『史籒篇』이라는 책을 지어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교본으로 삼았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許愼의 『說文解字ㆍ序』에 의하면 “주나라 선왕 때 태사인 주가 대전 15편을 지었는데 고문과 간혹 다른 데가 있었다〔周宣王太師籒著大篆15篇, 與古文或異〕.”라고 하였다. 晋나라 衛恒도 『四體書勢』에서 말하길, “옛날 주나라 선왕 때 사주가 처음으로 대전 15편을 지었는데 혹 고문과 같은 것도 있고 혹 다른 것이 있어 세상에서는 이를 주서라고 하였다〔昔周宣王時史籒始作大篆15篇, 或與古同, 或與古異, 世謂之籒書者也〕.”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주서는 바로 대전이고, 당시에 금문과 주 선왕 이전의 문자인 고문은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주가 지었다는 대전 15편은 볼 길이 없고, 허신의 설문해자에 수록된 주문도 대대로 전해지면서 그 진면목이 없어지고 말았다. 주서는 이전에 사용된 문자를 새롭게 변혁한 글씨체로 이는 당시 금문의 서풍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기물 위에 사용된 표준 서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毛公鼎’과 ‘虢季子白盤’의 풍격이 특이하지만, 혹시 주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문자는 殷ㆍ周 이래로 내려온 문자가 각 제후나라 별로 고유한 특성을 지니면서 발전하여 독특한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중 북방에 위치한 晉나라에서는 머리 부분이 뾰쪽하면서 배가 살찐, 마치 올챙이와 같은 문자가 출현하였는데 ‘智君子鑑’의 명문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를 蝌蚪文이라 부른다. 남방에 위치한 吳ㆍ越ㆍ蔡ㆍ楚 등의 문자는 글자에 항상 새의 형태로 장식을 하였기 때문에 이를 ‘鳥書’라고 한다. 곽말약은 이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문자를 예술품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혹은 문자 자체를 예술화 내지는 장식화 하려는 의도는 춘추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문자가 서예로 발전하려는 의식적인 단계이다.”라고 하였다.
Ⅴ. 春秋戰國時代의 墨蹟
춘추전국시기의 묵적으로 최근에 출토된 盟誓ㆍ帛書ㆍ竹木簡牘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서예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1930녀대 발견된 ‘沁陽玉簡’, 1966년 山西侯馬, 1979년 河南溫縣에서 발견된 대량의 맹서는 제후와 경대부들이 맹서를 하는 의식을 통하여 일정한 조약을 체결하였던 연맹문서로 ‘載書’라고도 한다. 맹서는 끝이 뾰족하게 드러나는 옥석 위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인데, 晉나라의 것은 붉은 글씨로 쓴 것이 많다. 이렇게 붉은 글씨로 쓴 것은 처음 붓을 대는 부분이 모가 나고 필획의 중간은 살찌고 끝은 예리하여 붓의 흔적이 모두 드러나며 짜임새는 생동감이 있으면서 자연스러운데 마치 과두문자와 흡사하다. 이는 당시 금문의 풍격과 다른 것으로 당시 민간에서 주로 쓰였던 속체이다. 맹서 중에는 왕왕 하나의 글자에 여러 종류의 필법이 등장하여 문자의 형태를 달리하였는데, 이러한 풍토는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현재 발견된 전국시대의 간독은 초와 진나라의 것 두 종류 뿐이다. 1940년대 이후에 옛날 초나라 묘지에서 출토된 적지 않은 전국말기의 죽간과 유책, 고서, 복서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전국시기에 묵적을 볼 수 있는 것으로 帛書가 있는데, 이는 하얀 빛깔의 모직물이다. 한나라 때에는 모직물을 총칭하여 帛 또는 繒 혹은 이것을 합쳐 繒帛이라고 불렀다. 1930년대 湖南省 長沙에 있는 한 무기고의 楚나라 무덤에서 한 개의 帛書를 발견하였는데, 이를 繒書라고도 한다. 이 ‘楚帛書’는 대략 전국시대 중기에서 말기로 추정하는데,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비단 글씨이다. 여기에는 기이한 귀신의 그림 또는 식물의 도형과 함께 900여자의 글씨가 있는데, 이는 일종의 예술적 성질을 지닌 글씨이다.
‘信陽楚簡’과 ‘楚帛書’는 초나라 백성의 손으로 직접 쓴 민간의 글자체이다. 이는 모필을 사용하였는데, 필획에 탄력이 풍부하고, 붓을 대고 떼는 곳이 뾰족하면서도 예리하며, 중간 부분은 굵으나 금문의 형태와 다르다. 이것은금문의 필획이 더디면서 무거운 것에 비하여 변화가 있으면서 아름답다. 또한 필법이 거칠고 형태가 간단하면서도 넓적한데 이는 예서와 접근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信陽과 長沙 등에서 전국중기로 추측되는 초나라의 옛무덤에서 모필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다. 長沙 左公山에 있는 초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모필은 질이 좋은 토끼털로 만든 것으로, 秦나라 蒙恬이 붓을 처음 만들었다는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실증적인 자료이다. 당나라 徐堅 이 지은 『初學記』를 보면 “秦
나라 이전에 이미 붓이 있었다. 몽념은 다만 이것을 보완하였을 뿐이다〔秦以前已有筆矣, 恬更爲損益耳〕.”라고 하였다.
한편,『國語ㆍ越語』에 “越王이 책을 만들 때 비단에 글씨를 써서 만들었다.”는 것이 나온다. 이것으로 볼 때 춘추시대에도 비단에 글씨를 쓰는 것이 이미 유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Ⅵ. 고대의 石刻文字
중국 고대의 석각문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 유전되는 夏나라의 ‘嶇嶁碑’와 周 穆王의 ‘壇山刻石’ 그리고 공자의 ‘比干墓字’ 등은 모두 고증하기 어려운 것들로 견강부회한 위작이라고 한다. 『管子』에도 “춘추 초기의제자라 관중이 태산에 가서 72종의 봉선 석각문자를 보았는데, 이 중에서 인식되는 것은 겨우 12종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청나라 龔自珍은 “돌은 천지 사이에 있으면서 수명은 금속에 비할 바가 아니다. 커다란 형태의 재질이 풍부하나 옮기기가 힘들다. 수명이 금속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금속을 버리고 돌에다 문자를 새겼나 보다.”라고 하였다.
고대의 석각문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石鼓文’이다. 이것은 10개의 북모양을 한 石碣 위에다 사냥과 행락의 내용을 四言詩로 만들어 새긴 것으로, 당나라 초기에 陜西省 鳳翔縣의 경내에서 발견한 것이다. 당나라 李吉甫는 『元和郡縣圖志』에서 말하길 “石鼓文은 고을 남쪽 20리쯤 떨어진 許라는 곳에 있으며 돌의 형태는마치 북과 같이 생겼고 그 수량은 모두 열 개이다. 내용은 周나라 宣王이 사냥을 갔던 일을 적었으며 그 문자는 史籒의 筆跡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석고문이 秦 나라 때 새긴 것으로, 여기에 새긴 문자도 籒書 계통의 秦나라 문자라고 인식하고 있다. ‘석고문’의 짜임새는 근엄하며 필법은 둥글면서도 굳세고 구성은 고르게 대칭되어 있으며 필의는 온후하면서도 고박하다. ‘석고문’은 상형문자의 의미가 적으며 몇몇 글자의구성이 복잡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小篆의 글씨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같다. 이것은 주서가 소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두가지 글씨체의 아름다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
진나라의 석각문자로 또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詛楚文’으로 원석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지만, 송나라 사람이 일찍이 이를 모각한 본이 남아 있다. 송나라 趙明誠은 이것에 대하여 “문자와 글이 기묘하면서도 고박하여 좋다〔文辭字札, 奇古可喜〕.”라고 찬양하였다.
Ⅶ. 六國의 古文
춘추 이후 제후국들 사이에는 쉬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 마침 秦ㆍ楚ㆍ燕ㆍ帝ㆍ韓ㆍ魏ㆍ趙 등의 七雄이 할거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ㆍ경제의 불균형이 심화됨에 따라 각국의 문자도 독자적인 경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추세는 춘추 말기에 이미 문자의 異形이 출현하였다. 각국의 문자는 같은 글자라도 필획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형태도 달랐으며, 글씨의 지방 색채는 더욱 농후하였다.
秦나라의 문자는 주나라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史記ㆍ秦本記』에 의하면 “秦 襄公 7년(기원전 773년)에 진나라는 平王이 수도를 동쪽의 洛邑으로 옮기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岐豊의 땅을 받았다. 이곳은 원래 周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문화가 낙후하였던 진나라는 자연히 여기에 살면서 주나라의 높은 문화를 그대로 흡수하였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문자의 풍격을 대표하는 ‘秦公簋’에서는 이미 소전의 필의가 나타나고, ‘石鼓文’은 아주 소전과 형태를 같이 할 정도이다. 이것으로 볼 때 진나라 문자는 복잡한 주서를 간단하게 고쳐서 쓰기 편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다가 마침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진시황은 이를 표준문자로 정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소전이다.
최근 진나라 문자로 추정되는 ‘靑川木牘이 四川省 靑川縣 郝家坪에서 발견되었다. 이 木牘은 두 개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먹으로 쓴 120개의 문자가 있다. 목독의 내용은 진나라 정부가 토지에 대한 법령을 발표한 내용으로 예서의 기원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된다. ‘靑川木牘’과 ‘睡虎地秦簡’(이것은 전국 말기에서 진시황 30년 사이에 쓴 것이라 한다.)이 발견됨에 따라 진나라 예서에 대한 문제가 분명하게 되었다. ‘청천목독’위에 쓰인 예서는 결구상에 있어서 아직까지 전서의 성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형은 정사각형과 옆으로 긴 사각형 혹은 길이로 긴 사각형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필획은 살찌기도 하고 파리하기도 하면서 강하고 부드러운 변화가 있으며, 점과 획에서는 붓을 엎고 일으키는 것과 파책이 분명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古隸이다.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응용도 날로 빈번해지고 광범위하게 되자 문자의 간략화를 꾀하게 되었다. 육국의 청동기 명문은 여전히 서주 이래의 문자체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秦 문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육국의 청동기나 병기 위에 새겨진 문자 중에 춘추말년에 출현한 鳥蟲書와 蝌蚪文, 楚의 명문 중에 거친 필치로 쓴 ‘曾姬無卹壺’와 ‘楚王盦肯鼎’ 등이 있다.
한편, 육국에서 사용하였던 옥새나 화폐, 그릇 또는 석각, 죽간, 비단 , 병기 위에 새겨 넣은 낙관과 청동기 위에 새겨 넣은 기술자나 감독관의 이름 위에서 대량의 거칠면서도 간략하게 쓴 글씨체가 발견되고 있다. 이를 六國古文이라고 한다. 六國古文이란 殷ㆍ周의 古文과 구별하여 전국시대의 문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육국의 고문은 글자를 쉽고 빨리 쓰는 것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조된 俗體로, 전서의 복잡한 결구를 깨뜨리고 간략하게 만들었으니 예서의 싹이라고 할 수 있다.
육국 고문은 진나라의 민간에도 영향을 끼쳐, 진나라의 ‘大良造鐓’와 ‘高奴禾石權’ 등도 육국의 고문과 같이 예서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국고문의 출현은 글씨체의 변화를 촉진시켜 고문자의 종결과 새로운 문자의 도래를 암시하였다. 이러한 육국고문은 기이한 자형과 간략한 형체를 가지고 있어 전국시대 서예에 또 다른 찬란한 경지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Ⅷ. 결론
이상에서 선진시대의 서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서기전 16세기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서기전 221년까지의 긴 시간의 여정 속에서 문자 예술인 서예는 신화적인 색채가 농후한 倉頡의 전설에서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와 존재 방식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고대의 結繩과 刻契, 그리고 圖畵符號는 원시문자로 창제되고 발전되면서 한자의 모태가 되었다.
상나라 갑골문은 龜甲과 獸骨 위에다 뾰쪽한 도구를 이용하여 새긴 문자로 육서를 구비하고 있으며, 한자의 근원과 서예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갑골에 글자를 새기던 무사들은 당시의 서예가들이었고, 점괘를 새기던 정성의 간절함이 문자의 아름다움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갑골문의 대표격인 ‘祭祀狩獵塗朱牛骨刻辭’, ‘宰丰骨匕刻辭’ 등은 예술적 요소가 풍부한 아름다운 서예작품이다.
상나라 말엽에는 주물로 만들어진 청동기 명문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를 金文 혹은 吉金文字라고 한다. 金文은 청동기 문화가 낳은 西周의 대표적인 서법이다. 대표적인 명문으로는 초기의 ‘天亡簋’ㆍ‘媚縣大鼎’ㆍ‘大于鼎’과 중기의 ‘靜簋’ㆍ‘牆盤’ㆍ‘大克鼎’, 말기의 ‘散氏盤’과 ‘毛公鼎’, ‘虢季子白盤’등이 있다. 말기의 금문은 소전의 형태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 주기도 한다.
춘추전국시기 墨蹟으로는 盟誓와 帛書, 竹木簡牘 등이 있다.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 글씨인 ‘楚帛書’는 초나라 백성의 손으로 직접 쓴 俗體로 필법이 거칠고 형태가 간단하면서도 넓적한 모양을 하여 후세의 예서와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초의 옛무덤에서 毛筆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고대의 석각문자를 대표하는 ‘石鼓文’은 10개의 북모양을 한 석갈 위에다 사냥과 행락의 내용을 담은 4언시로, 籒書가 小篆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두 가지 글씨체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한 秦의 석각문자인 ‘詛楚文’도 원석은 없어졌으나 기묘하고 고박하기로 유명하다.
六國의 古文은 민간에서 유행하던 俗體로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문자를 추구하던 민간에서 만들어졌다. 이는 육국에서 사용하였던 옥새나 화폐, 그릇 또는 석각, 죽간 비단, 병기 등에 거칠면서도 간략하게 새겨져 있다.
이상의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先秦時代 서예는 최초의 서예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예술로서의 서예의 길을 열어 놓기에 충분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