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두둑 떨어지는 날 미륵사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푸른 잔디를 건너 작은 연못 앞에 놓인 나무 의자는 비도 피하고 서탑을 전망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다른 방향에서 같은 곳으로 오는 사람이 있었다. 안돼, 내가 먼저 가서 앉아야지. 그런데, 상대편도 속도를 내며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자립니다.”
“저도요.”
내가 선점하려고 먼저 말을 걸으니, 그 여성이 대답했다. 주춤거리자, 그 여성이 부탁을 해왔다.
“사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하며, 여성은 가지고 온 개량 한복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부탁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상의만 걸치고 그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네. 좋아요. 돌아보세요. 옆 모습도,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그렇게, 그 여성의 핸드폰 카메라를 눌러주었다.
“사실, 이렇게 비 오는 날, 서탑을 배경으로 저만의 독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우리 딸의 옷을 갖고 왔거든요.”
하의도 갖고 왔으나 장소가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미륵사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설과 역사와 탑의 구조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혹시, 역사학자신가요?”
“네. 문화해설사이기도 해요.”
“감사합니다.”
“사시사철, 시간별로, 탑의 아름다움이 변해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오늘 같은 날이면 마치 서탑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해설사는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비는 굵어지고 나는 우산을 폈다.
“이곳에서도 해설하시는가요?”
“음…, 다음 주에 있을 거예요.”
“저도, 그 맛, 비 내리는 탑을 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네.”
그렇게 해설사는 가고 나는 서탑으로 올라갔다. 제법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탑을 돌아 서원 금당 터 위에 섰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석탑을 적시고 줄줄이 떨어져 바닥에 흥건한 물이 고였다. 그리고 저 위, 예전의 돌로 군데군데 꿰맞춘 석탑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나는 해설사의 ‘눈물’을 상상하며 한참 동안 바라봤다.
‘꾸덕꾸덕하게 굳어버린 상처 같기도 하고….’
그랬다. 내가 보기에, 누군가에게 얻어터지고 내상이 옷에 묻어나와 굳어버린 핏자국이랄까. 흰 화강암 사이에 낀 옛 石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 한자리 겨우 차지하고, 이제 새로운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비를 맞고 있다. 하기야 그 세월 동안, 지진과 벼락을 맞으며 논밭 경작으로 인해 지반 침하만 있었을까.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불장난을 얼마나 견뎠으랴. 지축을 흔드는 나당 연합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은 미륵산을 내려와 서연지 앞에 간이침대를 폈다. 흐르는 땀을 닦고 경량화 신과 양말을 벗었다. 벌컥대며 마시는 물이 기도를 타고 오장육부로 내려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조용남의 ‘모란동백’을 켰다. 푸른 잔디 위에서, ∼ 나를 잊지 마오.까지 들으니 땀이 바로 스며들었다. 아무리 더운 8월 날에도 그랬다.
그때,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그 틈을 타 남은 참매미가 시끄럽게 떠들다 멈추자, 연못에서 우렁우렁 맹꽁이가 울었다. 하늘에 제비가 날아다닐 때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바람은 쉽게 안을 만큼 선선해졌다. 수면에 잔물결이 생기고 늘어진 느티나무 아래에 세상 편하게 누웠다. 언제 날아왔는지, 노랑부리백로 한 마리가 발밑에서 쫑긋거리며 서 있다. 모르는 체할 수밖에. 방금 둥지를 벗어나 이소 독립을 한 듯, 작고 여린 몸짓으로 녀석은 홀로 호숫가를 걷는다.
노래가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구절로 넘어갈 즈음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여름은 지나갔고, 바람도 달라졌어. 발가락에 앉으려던 잠자리가 무의식적인 움직임에 놀라 허공으로 날아가고 매미가 다시 울었다.
첫댓글 서탑이 마치 눈물을 흐리는 것 같다는 해설사의 표현 -해설사답네!
백제 문화의 위대한 유산 미륵사- 그래도 복원이 되었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신라의 위대한 탑 무식한 몽고놈들이 태워버린 경주 황룡사는 언제 보게 될지?
미둔 즐겁고 넉넉한 한가위 명절 되기 바라네!
네. 황룡사의 비극 잘 지적하셨습니다. 작년 가을, 그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심초석이 애틋하였지요. 회장형님께서도 추석을 잘 보내시기를 빕니다. 새벽 달이 토실하게 차오르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