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베로니카(Saint Veronica)
축일 | 7월 12일 | |
신 분 | 신약인물, 부인 | |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 |
활동연도 | +1세기경 | |
같은이름 | 베로니까, |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카는 예수께서 골고타(해골산)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닦아 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성면을 씻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에 주님의 모습이 박혀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카로 알려졌는데, 라틴어 '베로니카'는 '베라'(vera ; 참, 진실한)와 '이콘'(icon ; 형상, 성화상)의 합성어로 성녀의 이름 자체로 그리스도의 '진실한 형상', '진실한 성화상', '참 모습'이란 뜻이 된다.
이 사건 이후 성녀의 운명은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른 전설로 전해온다. 그 한 가지 전설에 의하면 그 후 성녀 베로니카는 로마(Roma)로 가서 자신의 이 유품으로 티베리오 황제를 치유했으며, 임종 때에는 이 유물을 교황 클레멘스(Clemens)에게 드리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녀는 루카 복음 19장 1-10절에 언급된 세리 자캐오의 부인으로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남부 프랑스인들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하였다고도 한다. 또 "빌라도의 술책"이란 책에는 그녀가 마태오 복음 9장 20-22절에 언급된 여인으로, 12년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다가 예수님의 옷깃을 만짐으로써 치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 자세히 규명할만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가톨릭 홈)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 (상) 베로니카 수건
■ 베로니카 수건은 하느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
사순절 한 가운데 서 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의 길을 묵상할수록 참생명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을 상상하는 것만으론 그 고통을 실감할 수 없다. 예수의 수난은 실재했던 사건이다. 수난의 길에 남겨놓으신 예수의 자취를 통해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들은 성 십자가와 죄명패, 가시면류관, 못, 베로니카 수건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 수난의 증거들을 모아 사순기획으로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 호에는 '베로니카 수건'에 대해 알아본다.
■ 그리스도의 참얼굴
'하느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
너무 놀랍고 신비로워 감히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아케이로포이에토스'(헬라어 αχειροποιτοζ - 사람 손에 의해 그려지지 않은 그림)라 불렀던 성화. 바로 '베로니카 수건'이다.
라틴말 '베로니카'(Veronica)는 베라(vera, 참된)와 이콘(icon, 인상)의 합성어로 우리말로 '참 얼굴'을 뜻한다. 따라서 베로니카의 수건은 '참 얼굴을 담은 천'이라 직역할 수 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가는 것을 보고 한 여인이 마음이 아파 예수 얼굴을 닦아줬는데 그 얼굴이 그 천에 찍혔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 얼굴을 닦아준 여인이 바로 베로니카라고 하는데 여러 인물로 추정된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예루살렘 출신 신심깊은 부인으로 예수를 보고 통곡하는 여인들 중 한 사람(루카 23,27)이라고도 하고, 예수의 옷자락 술을 만져 혈루증이 나은 여인(마태 9,20-22), 또는 라자로의 누이인 베타니아의 마르타라고도 하고, 자캐오의 부인(루카 19,1-10)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베로니카는 이후 그리스도 얼굴이 새겨진 수건으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14~37)를 치유시켰고 여러 기적을 일으켰다. 심지어 죽을 위험에 처한 이를 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베로니카는 임종 때 교황 클레멘스 1세(재위 90~101)에게 그 수건을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베로니카 수건은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944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확인됐다. 이전까지 에데사의 만둘리온에 보관돼 오다가 이 때 비잔틴 제국 황제 로마누스 1세(재위 920~944)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13세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로마로 옮겨와 성 베드로 대성전 '베로니카 경당'에 보관했다. 로마 순례자들에게 베로니카 수건은 '로마 7대 보물 중 하나'로 알려졌다. 1199년 제랄드 드 바리와 틸베리의 거베이스라는 두 순례자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베로니카 수건을 직접 보았다고 기록했다. 1297년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는 베로니카 수건 앞에서 기도하면 대사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1300년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는 베로니카 수건에 감동을 받아 첫 성년(聖年)을 선포했다. 14세기 이후 교회는 행사 때마다 베로니카 수건을 내걸 만큼 대중적 신심을 불러 일으켰다.
베로니카 수건은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용병들이 로마 대약탈을 저지르면서 역사의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다가 1616년 교황 바오로 5세는 교황청 허락없이 베로니카 수건 복사품을 절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1629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복사품을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복사품은 모두 회수해 파기토록 지시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파문도 불사하겠다고 덧붙였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견해에 따라 진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베로니카 수건은 2개가 있다. 하나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보관돼 있다.
성 베드로 대성전 베로니카 수건은 대성전 돔을 받치고 있는 남서쪽 기둥 발코니에 있는 베로니카 경당에 보관돼 있다. 가장 최근에 검사한 것은 1907년으로 예수회 역사학자인 요셉 빌퍼트가 교황청 허락을 받고 수건을 덮은 2장의 유리를 옮기고 베로니카 수건을 본 것이었다. 그는 수건이 낡아 제대로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매년 수난 주일에 베로니카 수건을 담은 상자를 전시하고 있다. 수난 주일 오후 5시 저녁 미사 시작과 함께 수건에 대한 축복이 이뤄진다. 이후 성 베드로 대성전 내에서 간략한 행진이 거행된다. 수건에 새겨진 주님 얼굴 형상은 보기가 어렵고 다만 액자 테두리만 볼 수 있다.
■ 마노펠로 카푸친 수도원의 '베로니카 수건'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마노펠로 카푸친 수도원이 1660년부터 보관하고 있는 베로니카 수건이다. 1999년 저명한 성미술 학자인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 교수 하인리히 파이퍼 신부가 마노펠로 카푸친 수도원 성당의 베로니카 수건이 진품이라고 주장해 2006년 9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하는 등 오늘날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17세기 도나토 다 봄바 신부가 작성한 「베로니카의 수건 입수 역사」 기록에 따르면, 1508년 한 순례자가 마노펠로 마을에 나타나 마침 수도원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자코모 레오넬리라는 의사에게 주님 얼굴이 담긴 수건을 건넸다. 이 수건은 레오넬리 집안 가보로 1608년까지 전해졌으나 군인 판크라치오 페트루치가 어느 날 몰래 훔쳐 달아났다. 몇 년 후 범인은 잡혔고 레오넬리 집안은 이 수건을 도나토 안토니오 데 파브리티스라는 의사에게 팔았다. 파브리티스는 이 수건을 카푸친 수도원에 기증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파이퍼 신부는 1506년 교황청의 대대적 보수공사가 진행될 때에 분실된 베로니카 수건이 마노펠로 카푸친 수도원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최첨단 장비로 조사한 결과 천은 1세기 때 것으로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기 수건이며 사람 손으로 그린 흔적이 전혀 없고 토리노 수의에 찍힌 예수의 얼굴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수도원 중앙 제대 뒤편에 현시돼 있는 마노펠로 베로니카 수건의 예수님 얼굴은 왼뺨을 맞아 오른뺨보다 부어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마 위쪽 가운데와 관자놀이 쪽에는 가시관에 찔린 상처로 흘러내린 핏자국을 볼 수 있다. 또 오른쪽 눈두덩에도 폭행으로 인한 상처를 볼 수 있다. 얼굴이 한쪽으로 일그러질 만큼 폭행을 당했어도 예수님 눈은 바라보는 모두를 빨아들일 만큼 깊고 맑다.
진품 여부를 떠나 현존하는 베로니카 수건은 그리스도 수난의 증거로 하루 몇 번이고 나락에 떨어지는 우리 믿음을 굳건히 회복시켜주는 귀중한 성화임이 틀림없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18일, 리길재 기자]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 성녀 베로니카
사실적 · 추상적 묘사에 신비함까지
- 작품 해설 : 엘 그레코, <수건을 든 베로니카>, 1577-1580, 캔버스에 유채, 84×91cm, 톨레도, 산타 쿠루즈 성당.
베로니카(Santa Veronica)는 전 세계에서 가장 공경 받는 성녀 가운데 한 분인데 그 이유는 ‘십자가의 길’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다’ 때문일 것이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해골산을 오르실 때 군중 속에서 주님을 지켜보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니 마음이 아팠고,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드렸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얼굴이 찍혔다고 한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실존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으나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전설로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참고로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vera icona’,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실제 형상’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그 문제의 수건은 교황 보니파치우스 8세(재위, 1294-1303) 때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모셔져서 공경을 받다가 1527년 로마가 독일 황제군의 침략으로 약탈당하면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글의 시작에서 밝혔듯이 베로니카가 대중과 가까워진 것은 ‘십자가의 길’ 제6처에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다’가 포함되면서부터인데 14처가 오늘날과 같은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 때의 일이라고 하니 적어도 이때부터 성녀 베로니카는 신자들의 기도와 묵상의 대상이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베로니카의 수건이라는 주제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그것이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된 때는 중세 말로서 십자가의 길에 베로니카가 포함되기 전에는 독립적인 그림으로 그려졌다. 화가들이 그린 예수님의 얼굴은 ‘성스러운 얼굴’(Volto Santo)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보통은 가시 면류관을 쓴 모습이지만 때로는 면류관 없이 그려지기도 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여러 점의 ‘베로니카의 수건’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 하나다. 엘 그레코는 이름이 말해주듯 그리스 출신의 화가이지만 주 활동은 스페인에서 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스페인 왕실과 톨레도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종교분열을 겪고 있던 가톨릭교회에 가톨릭의 정신을 그림으로 보여준 위대한 화가다.
이 그림에서 상반신으로 그려진 베로니카는 두 손으로 성스러운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들고 있다. 수건에 찍힌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 검은 바탕에 거의 흑백으로 그려졌는데 이 같은 단순한 색상 처리는 성녀의 모습과 예수님의 얼굴에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듯하다. 수건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여 대단히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베로니카는 보다 평면적으로 처리되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어 관객의 시선을 예수님의 얼굴로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실 베로니카는 실물이고 예수님의 이미지는 수건에 찍힌 그림이지만 이 작품에서 두 인물 사이의 경계는 대단히 묘해서 그림과 실제 사이를 혼동하게 만든다. 사실 화가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그림이라는 사실을 감상자로 하여금 잊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유희야말로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성을 추구했던 엘 그레코의 매력이자 능력이다. 그가 20세기 추상 미술가들에 의해 가장 추앙을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26일, 고종희(한양여대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g/greco_el/06/0609grec.jpg)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
- 베로니카의 땀수건. 베로니카 마이스터, 목판에 템페라. 1410년경. 78x48cm. 뮌헨 고전회화관.
베로니카의 수고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모습(volto santo)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베라-이콘 곧 「참 그림」은 창세기의 구절 천사와 야곱이 환도뼈를 다친 뒤에 했던 말 『나는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았다. 그리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구절을 상기시킨다(vidi Deum facie ad faciem et salva facta est anima mea.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내가 여기서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라고 옮겼다. 창세기 32, 31).
■ 지상에 드리운 신성의 그림자
면사포는 신부의 상징이다. 가령 『면사포를 못 써 본 게 한이다』라는 표현은 결혼식 안 하고 그냥 살 거냐는 항변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는 풍속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감춘 것을 드러내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신부의 아름다움을 포장하려는 속셈에서 그랬다고 한다. 성당에서 식을 올리는 신부들도 면사포를 쓰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가 증거판을 두 장 얻으러 시나이 산에 올랐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야훼를 뵙고 내려온 모세는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한다.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 들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로 빛을 뿜었다고 하니 거의 할로겐 램프 만큼 밝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세가 제 얼굴을 수건으로 씌워서 가렸다는데, 여기서 면사포 전통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새 신부의 면사포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결혼식장 하객들의 눈이 멀까봐 배려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중에 단체사진 찍을 때 면사포 벗은 신부를 보면 차라리 그냥 쓰고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더러 들 때도 있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모세의 수건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베로니카의 수건이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골고타에 오르실 때 동참했던 여인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참혹한 수난의 여정을 지켜보다가 안쓰러운 마음에 피땀을 닦으시라고 수건을 내밀었는데, 그 수건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베껴져 나온 것이다. 잠시 땀을 훔쳤을 뿐인데, 눈과 코와 입 뿐 아니라 머리카락과 수염까지 모두 찍혀 나왔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마치 3D 스캐너로 훑어낸 것처럼 아날로그 형상정보가 수건에 입력된 것이다.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은 미술의 역사에서 두 가지 큰 논쟁을 정리한다. 하나는 화가가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신성이 직접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모든 그림의 원형이 되는 최초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땀수건 그림(sudarium)은 곧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림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의 개념을 촉발하고, 역사와 신화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전설들이 신앙의 담벼락을 타고 넝쿨처럼 뻗어나간다.
또 하나는 베로니카가 수건 그림을 들고 있는 그림이 이른바 「그림 속의 그림」이라는 간접화법의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성상논쟁의 화살을 교묘히 피해갈 구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세의 율법이 우상숭배를 금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림과 조각에 대한 경배를 배척한 구약성서의 금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성상의 미술적 재현을 수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서기 800년께 비잔틴의 성상파괴 운동에서 츠빙글리와 칼뱅에 이르는 신학운동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첨예하게 대립되는 논쟁의 역사는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마티아프레티_수건을든성녀베로니카
그런데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은 「그림 속의 그림」이라는 「에둘러 말하기」의 수사학으로 무서운 성상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면책특권을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마치 영화속 주인공들이 다시 영화관에 들어간다든지, 트로트 가수 송대관씨가 유행가에 관한 노래를 유행시키는 식으로 저작권법을 피해가는 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삶의 궤적에 전설을 끼워 넣으려는 노력이 늘 수건 그림의 실증적 정당성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베로니카(veronica)가 지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베로니카의 이름을 풀어보면 베라 이콘(vera-icon), 곧 참 그림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견해이다.
한편, 「황금전설」에 실린 베로니카의 전설은 줄거리의 배경이 골고타와 다르게 전개된다. 늘 예수님을 흠모하던 베로니카가 초상화라도 한 점 그려두고 싶었는데, 마침 길에서 만난 예수님이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훗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깊은 병이 들었을 때 베로니카의 그림을 보고 나았다고 한다.
베로니카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기록도 만만치 많다. 열 두 해 동안 하혈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고는 씻은 듯이 나았다는 루가 복음서의 여자나,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가 베로니카라는 주장이 서방의 라틴 교회에서 제기되었다. 또 비잔틴 교회에서도 베로니카가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파네아스의 입상을 세웠는데, 이것은 교부 에우세비우스가 직접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파네아스의 입상은 막시미노스 황제가 철거해서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베로니카의 땀수건은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944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확인된다. 그후 13세기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 로마로 다시 건너와서 바티칸의 보물이 되었으나, 1527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용병들이 로마 대약탈을 저지르면서 역사의 수면 아래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을 유명한 토리노의 수의와 연결시키려는 견해도 있지만, 중간 고리가 빠져 있어서 아직 학계에서도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일, 노성두]
한스멤링_성요한과성녀베로니카두폭제단화_우측날개
참고자료
■ 고종희 저, 명화로 읽는 성인전(알고 싶고 닮고 싶은 가톨릭성인 63인) - '베로니카', 서울(한길사), 2014년, 172-177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5권 - '베로니카',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3331-33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