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상사로 들어가는 입구엔 석장승이 있다. 왕방울 만한 눈이 툭 불거지고 큼지막한 코가 해학적이다.
지리산엔 그 이름에 걸맞게 산자락과 골짜기에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사찰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화엄사와 천은사 그리고 칠불사, 쌍계사, 대원사, 영원사, 벽송사, 연곡사 등 대개의 절들은 지리산 계곡에 터를 잡고 있으나 실상사는 지리산이 펼친 넓은 들판 한 가운데 기둥을 내려 천년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실상사를 찾게 되면 지금껏 절에서 느끼던 정적인 느낌이 싹 달라진다.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던 대자보가 보이고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아이들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역동적 감흥이 시작된다.
내용이야 그때 그때 달라지겠지만 종단과 스님들 자신을 꾸짖는 내용의 글로부터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글들도 있다. 종단 내에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꾸짖는 준엄한 내용도 있다. 너무 직설적이며 솔직한 표현이 꾸짖음이기보다는 자아비판적 고행의 표현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동족이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북녘아이들의 피골상접한 사진은 맛 타령에 입맛 타령을 달고 다니던, 허구와 허영에 찬 세 치 혀의 간사스러움과 입으로만 나발거리며 보시를 게을리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 일주문이라도 대신하려는 듯 소박하게 만들어진 문틀형태의 안내판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 실상사 하면 '인드라망'을 연상하게 한다. 인드라망(因多羅萬)이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는 그물 망'을 뜻하는 말로 '만물이 모두 상관관계를 갖고 연결돼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간들이 아무리 제 잘났다 날뛰어도 연기적 관계는 벗어나지 못함을 일깨워주는 큰 가르침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실상사에서는 생명체의 귀함을 일깨우는 이런저런 행사가 많이 열리는 듯하다.
실상사 천왕문으로 들어서는 분위기는 여느 사회단체의 역동적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천년 고찰이라고 하지만 대자보와 전시물에선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당찬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 '새만금 갯벌을 살리겠다'고, '일체중생의 평화'를 부르짖으며 부안 새만금 갯벌부터 800리 서울까지 아스팔트길에 골수 같은 땀 흩뿌리며 삼보일배를 하였던 수경스님이 이 실상사 스님이다.
많고 많은 다른 스님들에 앞서 수경스님이 삼보일배에 앞장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산선문의 맏형이라는 실상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저만치 천왕문이 보인다. 여느 절들과는 달리 벽면에 자연풍경을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실상사를 상징하는 말들은 꽤나 다양하다. 그 중 우선 구산선문(九山禪問)이란 말을 떠올리면 틀림없을 듯하다. 구산선문은 귀족과 왕실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진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된 아홉 산에 뿌리를 내린 선종불교의 상징적 사찰들이다.
선문이란 달마대사가 갈대 잎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온 이래 꽃피운 선법(禪法)을 신라의 젊은 스님들이 배워 와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선법이란 참신하고 개혁적인 신사조운동이었다. 인과율에 의한 기존의 교종불교는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인식이었다. 선종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의식을 제공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전제된다. 현실의 정치에서 기득권자들과 개혁세력들의 갈등쯤은 아무 것도 아닐 만큼 그 어려움은 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그 분야가 삶의 가치를 가늠하는 종교분야임에 더 했으리라 짐작된다.
▲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석등과 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고색창연한 보광전이 보인다.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도의),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홍척),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혜철),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범일), 창원 봉림사의 봉림산문(현욱), 영월 흥법사의 사자산문(도윤),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지증), 보령 성주사의 성주산문(무염), 해주 광조사의 수미산문(이엄)가 이른바 구산선문 사찰이며 괄호 안이 그 창시자들이다.
이 구산선문 중에서도 지리산 실상사가 최초로 문을 연 선문이다.
실상사는 창건 배경부터가 불의에 항거한 사회운동이며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참여정신에 있는 듯하다. 그런 역사가 인드라망을 강조하게 되고 수경스님이 삼보일배에 앞장서도록 한 배경이 된 듯하다.
지리산을 들어서는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마천 방면으로 가다보면 만수천(萬壽川)변을 따르게 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고개를 동쪽을 돌리면 손끝 대신 눈 끝에 천왕봉이 와 닿는다. 그 아래로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 보광전 우측 뚝 떨어진 곳에 약사전이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동으로는 천왕봉과 눈 맞추고 남쪽으론 반야봉을 의지하고 있다. 서쪽이 심원 달궁이며 북쪽으로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길지에 터를 잡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찰 대부분은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천왕봉을 어머니의 가슴이라고 한다면 실상사가 있는 들판은 어머니가 두른 행주치마의 가운데쯤에 해당한다.
뭔가를 따뜻하게 보관하고자 할 때 어머니들은 행주치마 가운데 그것을 싸서 옮겼다. 행주치마의 가운데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며 사랑의 자리이다. 지리산의 기가 머금고 혈이 맺히는 그 자리에 실상사가 있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인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에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귀국하여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니다 현재의 터에 정착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 약사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거무튀튀한 색깔에 투박한 형상으로 농사꾼 부모님처럼 푸근한 느낌을 준다. 지리산의 기가 일본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땅바닥에 그냥 모셔진 부처님이란다.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가 고향인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자신의 고향에 절을 세우니 이가 곧 구산선문 최초의 절이 되었다. 당시의 임금인 흥덕왕은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려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 선강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고 한다.
실상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화재에 의한 전소와 중수 복원이 반복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6·25 때도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말못할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스럽게 사찰이 전화되는 등의 불상사는 없었다고 한다.
실상사의 호국정신은 선종의 출현이 그러하고 인드라망의 기본이 그러하듯 민족의 암울한 시기였던 일제침략시기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약사전을 지키고 있는 보살님의 안내에서 들을 수 있다.
약사전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 경내에 있는 소나무 사이로 보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명부전이 보인다.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도 전해지고 있다 한다. 이러한 구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상사 보광전에 있는 범종에는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예불을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게 된다고 한다.
스님들과 일반인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가고 있다.
만수천 다리를 건너 논두렁 같은 진입로를 따라 걷다보면 일주문 없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정면에 석등과 양쪽에 선 석탑이 보이고 뒤로 고색창연한 본전이 보이는데 이 본전은 보광전이다.
보광전 우측 저만치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으니 이가 바로 약사전이다. 약사전과 보광전 중간쯤에 직각으로 배치된 전각은 명부전(지장전)이다.
▲ 맞배지붕 형태의 오래된 건물이 시선을 편안하게 해 준다.
약사전에는 여느 절들의 금색 찬란한 부처님들과는 달리 거무튀튀한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경배스러워 거리감조차 생기는 여타의 부처님과는 달리 방금 밖에서 농사짓고 들어와서 쉬고 있는 투박한 농사꾼 부모와 같은 편한 느낌이다.
실상사가 귀족과 왕실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선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친근한 모습의 불상이 제격에 어울릴 듯 하다. 대개의 불상들은 높은 좌대에 모셔진 것이 일반이지만 약사여래 불상은 그렇지 않다. 백두대간의 좋은 기가 일본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맨 바닥에 꾹 눌러앉아 계신 모습이다.
천왕문을 들어선 우측 바로 앞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보광전 좌측엔 커다란 소나무가 있고 그 뒤쪽으로 칠성각도 있다.
경내 좌측으로 요사채가 있으며 요사채와 뒷간사이를 따라 올라가면 연꽃 가득한 방죽이 나온다.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걷게되면 극락전으로 들어서게 되며 주변에는 이런저런 보물들이 즐비하다.
▲ 연지를 지나 찾게되는 극락전은 작고 아담하다. 극락전 주변은 온통 보고(寶庫)다.
천왕문과 저만큼 안쪽에 있는 석등과의 사이엔 실상사 규모를 고증이라도 하려는 듯 발굴을 한 상태로 주춧돌이 여기저기 보인다.
요즘 실상사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생명공동체' 아닌가 모르겠다. 생명공동체란 '일체중생의 평화'를 달리 표현한 것이며 실천이리라. 실상사에는 다른 곳에서 '해우소'로 표기한 화장실을 알리는 '뒷간'이란 푯말도 볼 수 있다.
뒷간은 단순히 생리적 배설만을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다. 뒷간이란 농약과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생명의 먹거리를 키워내는 소중한 거름이 만들어지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쌀을 비롯한 온갖 채소들은 똥과 오줌이 형태를 달리 한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냄새가 나지만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풍부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똥부터 대접하자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깨끗해 보이지만 하천과 강을 오염시키는 수세식 화장실을 거부하고 냄새 퀴퀴하지만 내면적 삶을 풍부하게 해줄 뒷간을 고집하는 그 정신이 바로 선문의 자존심이며 실천인 듯하다.
▲ 재래식 화장실인 실상사 뒷간의 모습으로, 실상사에서는 이곳에서 거름을 생산하여 논과 밭에 뿌려줌으로 먹거리로 돌려 받는다.
실상사 뒷간에서 맞게되는 똥 냄새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무형의 가르침이며 설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상사 여기저기에 산재한 십수 점의 보물과 유형문화재들이 실상사의 오랜 역사를 고증하고 있는 듯하다.
백장암 3층 석탑
지정 : 국보 제 10호
수청산(772m) 중턱에 자리잡은 백장암에 있는 탑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탑의 구조와 양식이 일반적인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높이는 5m인데, 받침부가 매우 낮은 반면, 1층 몸체는 폭에 비해 높다. 탑이 올라가면서 너비는 별로 줄지 않았다. 탑의 장식 역시 독특하여, 층마다 탑의 몸체에 보살, 선녀, 천왕 등 다양한 인물상을 화려하고도 사실적으로 새겨 놓았다.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지리산 남쪽 단성에 있는 덕천서원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 위패를 모시고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이죠.
사람이 돌로 만든 큰 북을 세차게 쳐도, 천둥번개가 지리산 천왕봉을 세차게 쳐도,
소리가 울리지 않는
그런 강하고 듬직한 대장부 품격으로 제자를 가르쳤는데,
안으로는 밝아서 스스로를 공경한다 하고
밖으로는 한결 같아서 스스로를 의롭다 하라는 게 모토였습니다.
<內明者敬 外斷者義>
그리하여 삶이니 죽음이니,
시간이니 공간이니를 넘어서서,
사람들에게 그 향기와 모습이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라고...
조선의 선비 조식(曺植)과 산천재(山天齋)
17 조선의 선비 조식(曺植)과 산천재(山天齋) 姜 中 九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 탄신 500주년을 맞아서 그가 말년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山天齋)를 찾았다. 산천재는 덕천강물이 흘러내리는 지리산 기슭 사리 강변에 있었다. 이것은 남명이 61세 때인 명종 16년(1562)에 지은 서재로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산천재는 방 3개에다 마루가 있는 몸채와 사랑채 그리고 남명의 문집과 책판(冊板)을 보관하고있는 서고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것마저 낡을 대로 낡은 건물이 생시에 청빈한 남명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산천재 벽면에는 낡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그림과 신선이 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는 그림, 버드나무 아래서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고사인 소부와 허유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그림이 소흘 한데다가 낡고 헐어서 벽화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했다. 단지 산천재 기둥에 걸린 ‘덕산에 터를 잡고서[德山卜居]'라는 목각주련이 위안이 될 뿐이다.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련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 건가
십리 은하 같은물 먹고도 남으리.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재실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냇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있는 것이 운치가 있었다. 뜰에는 남명이 산천재를 지을 때 심은 것만 같은 매화나무가 수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고.
남명은 합천군 삼가(三嘉)에서 출생했으나 어릴 때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여 한양으로 이사를 간 때문에 한양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19세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숙부인 조언경이 비명에 가고 아버지도 파직되어 집안이 쑥대밭이 되자 그는 다시 고향인 삼가로 내려왔다. 그리고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백가를 섭렵했지만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은 비정한 정치현장을 그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 때 받은 충격이 오죽했으면 그는 관아근처를 지날 때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을까.
부친이 별세하자 남명은 30세 때 처가인 김해(金海)로 옮겨가서 신어산 아래 탄동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48세 때 모친이 별세하자 다시 삼가로 돌아와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러다가 55세 때 명종이 단성현감을 제수 하였으나 소를 올려 거절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단성소(丹城疎)’이다.
“…국사는 잘못되어 나라의 근본이 폐하여 하늘도 저버리고 민심도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주색잡기에 낙을 삼고, 대관(大官)은 뇌물만 끌어 모아 치부를 일삼으며, 내신은 궁궐을 움켜쥐고 백성을 수탈하니 자전(慈殿)께서는 구중궁궐의 한낱 과부요 전하께서는 단지 선왕의 의로운 고아에 불과합니다. 저 많은 천재(天災)를 어떻게 감당하며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바로 수습할 것입니까….”
이 소로 조정은 벌집 쑤시듯 발칵 뒤집혔고 명종은 노하여 불경군상죄(不敬君上罪)로 다스리도록 언명했는데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승정원에서 그의 소가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산천재를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66세 때 명종이 상서원(尙瑞院) 판관을 제수 하자 어전에 나가기는 했지만 10일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몇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72세를 일기로 이곳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러고 보면 그가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말년을 보낸 이 산천재는 남명의 혼이 살아서 숨쉬는 곳이 아닌가.
그는 벼슬길에 나가라는 이언적(李彦迪)의 추천과 이퇴계(李退溪)의 권고도 뿌리치고 제자들의 교육에만 힘을 썼다. 그리하여 정구, 곽재우, 정인홍, 김효원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치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이러한 남명이 타계한 지 5년 후인 선조 9년(1576)에 제자들이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덕천서원(德天書院)을 세웠다. 이 서원은 광해군 1년(1609)에 사액을 받았지만 조선조 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국가문화재 제305호인 이 서원은 홍살문을 들어서면 시정문(時靜門) 앞에는 400여 년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이 나이에 못 이겨 수술까지 받았다. 거기서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뜰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고 정면에는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서있다. 내삼문 뒤에는 숭덕사(崇德祠)가 있는데 이곳은 남명과 그의 제자인 최경영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8월 1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깨우쳤고,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속으로 밝은 것이 경(敬)이요, 밖으로 끊고 자르는 것이 의(義)’라고 하는 글을 새긴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생각했다는 남명은 한번 결심하면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리에 벗어나면 자신에게도 용서 없이 질책을 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철저히 절제하는 생활을 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익히는 것 못지 않게 실천을 중요시했다. 그는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배우지 않음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수많은 제자들도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활동으로 나라를 지켰다.
“늘 뜻을 드높이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며, 구차스럽게 조정의 요구에 따르지도 않거니와, 또한 구차스럽게 정치의 잘못을 묵과하지도 않는다. 자기의 몸값을 가벼이 하여 세상에 쓰임을 구하지 않아 고고한 자세로 홀로 우뚝 선다.”
미수 허목이 남명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적어놓은 글처럼 남명은 조선조의 가장 대표적인 선비였고 참다운 처사였다.
그런데 그의 탄신 500주년을 맞아 이곳 산천재와 덕천서원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남명제(南冥祭)’와 함께 ‘선비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추모제와 함께 전국 한시백일장과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중국 등 국내외 학자들이 참가하는 학술대회도 개최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흐뭇하게 한 것은 퇴계 문중과 도산서원에서 남명제를 축하하는 대표단을 보내온 것이다. 이들은 남명 탄신 5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연명으로 작성한 ‘도산서원파록(陶山書院爬錄)’을 선물했다. 즉 “두 선생이 일평생 교분을 맺었으니, 후손들은 영원토록 돈독하게 관계를 이어나가자.”라는 축하의 글을 퇴계 후손 100여 명의 이름으로 보내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남명의 12대 손인 조창섭(曺昌燮)도 금년 10월 퇴계 탄신 500주년 행사에 남명 문중과 덕천서원 대표들이 축하방문을 할 것이라고 했고. 영남의 유림을 대표하는 두 학파가 정답게 교우 하는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시대 사람으로 당대 최고의 선비였으나 편지로만 교류했을 뿐 서로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퇴계는 남명에게 벼슬길에 나가라고 권했지만 남명은 듣지 않았고 그러다가 퇴계가 죽자 남명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도에 살면서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운명이라고 하면서 애통해 했다.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모두 동인(東人)이었으나 그 후 퇴계 학파는 남인(南人)으로, 남명 학파는 북인(北人)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는 수백 년 동안 두 문중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과 갈등과 경쟁이 있었으므로 이번의 덕천서원 방문으로 두 학파가 화해와 단합을 하게된 것은 참으로 뜻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보는 이를 흐뭇하게 했다. 앞으로 두 학파가 서로 손잡고 우리나라 유학발전에 공헌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단속사(斷俗寺)터는 절 이름에서 풍기는 초연한 느낌과는 달리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마을 한복판에 있습니다.
단속사는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경에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는 명맥이 유지되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당간지주와 동서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 단속사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信行, 704-779)의 부도비와 탄연(坦然, 1070-1159)의 비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일부 비편만이 동국대학교박물관과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에 각각 보관되어 있습니다.
- 단속사터 삼층석탑 서탑
단속사터가 아직까지도 사람들로 부터 잊혀지지 않고 발길을 끄는 것은 9세기 전반에 세워진 아름다운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로 자리잡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며,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어 안정감이 넘칩니다. 동서로 나란히 늘어선 삼층석탑은 둘 다 높이가 5.3m로 각각 보물 제72호와 보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단속사터 당간지주
동서 삼층석탑 앞 솔밭에는 부러진 채 쓰러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4년에 다시 복원한 당간지주가 서 있어 예전에 이곳 일대가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의 크기는 높이가 3.5m, 지름은 50cm입니다.
- 정당매
동서 삼층석탑 뒤쪽에는 600년이 넘었다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정당매란 이름은 고려 말 강회백(1357~1402)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면서 이 매화나무를 심었는데,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게 되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남강 촉석루
쌍계사와 불일폭포
전설·비경 품은 ‘호젓한 산사’ 의 멋
- 쌍계사와 불일폭포 -
지리산 쌍계사를 찾아가는 길은 멀다. 반나절이나 걸린다. 여행의 설랬던 마음도 잠시, 앞차의 꽁무니만 보고 달리니 짜증이 생긴다. 그나마 국도는 꼬불꼬불한 길이라 재밌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례에서 하동으로 빠지는 섬진강길 팔십리를 달리면 재미는 배가된다. 이 길 연변에는 배밭이 널려 있다. 배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신문종이로 배를 뒤집어 쓴 모습이 자그마한 고깔모자를 쓴 어린애들 머리통 같다.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다보면 어느덧 화개에 닿는다.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화개의 초입, 화개장터. 김동리의 소설 ‘역마’ 의 무대이기도 하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엔 전국의 3대 장터로 꼽혔던 곳이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번성했던 모습은 이미 사라졌고, 터미널 주변으로 식당만이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터미널 건너편에 ‘화개장터’ 라는 이름으로 장이 섰다. 음식과 기념품, 각종 산나물과 영지, 버섯, 마 등이 즐비하다. 지나가는 손님을 호객하는 게 부담스럽지만, 시골의 인심은 아직 남아 있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길목마다 찻집이 자리잡고 있다. 찻집만 얼추 30여 개. 저마다 덖음 솜씨를 자랑하는 전통찻집들이다. 사실 이 길은 4월초가 전성기다. 그때쯤이면 벚꽃 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린다. 하얀 꽃잎은 꽃비가 되고 연지 곤지가 되어 벚꽃터널 연인들의 가슴을 연분홍으로 물들인다. 화개천 야생차밭의 다향과 어울러져 멋들어진 향내를 뿜어낸다. 전국의 관광객들이 미친X 널뛰듯이 달려든다. 서로 향내를 맡고, 꽃망울을 보기 위해 주차장을 이룬다. 십리 벚꽃길를 구경하려 전국에서 모인 관광객으로 장사진이다. 벚꽃 터널을 구경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매년 4월에 쌍계사를 찾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신 5월엔 호젓한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비록 꽃은 떨어져 그 화려함은 다했지만, 초록색 나뭇잎은 터널을 이뤄 여행객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화개천 강바닥엔 여인의 살결을 닮은 매끄러운 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한껏 물이 오른 연둣빛 실버들은 긴 가지를 늘어뜨린 채 흘려 가는 물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다. 그 옛날 은어가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의 은어는 대부분 양식으로 기른다고 한다. 하동에 사는 친구는 5월 은어에서 수박 맛이 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양식으로 키우다보니 맛이 덜하다고…. 화개천변 계단식 야생차밭이나 보리밭이 가파른 산허리를 타고 지리산을 오르는 이색적인 풍경도 이곳에선 아주 흔하다.
쌍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다. 진주나 하동을 운행하는 버스가 있어 인근 대학생들이 하루 나들이 코스로 즐겨 찾는다. 화개천 다리를 건너면 절로 가는 길이 펼쳐진다. 그 길옆에는 산채비빔밥, 은어회, 재첩, 장어구이를 파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대한민국 어디 절을 가더라도 절 입구에는 ‘살생’의 음식점이 넘쳐나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을 게다. 그나마 이건 양반이다. 가끔 절 앞에 노래방이나 가라오케 시설을 갖춘 음식점이 있으니…. 하여튼 출가해서 참선(參禪)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 영… 쯧쯧….
쌍계사도 불사를 크게 일구고 싶은 모양인지, 새로 주차장을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주차장을 끼고 새로 도로로 내는 바람에 샛길의 호젓함은 사라졌고, 길옆에서 고사리, 햇차, 헛개나무, 토종영지를 파던 할머니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손님이 뚝 끊어졌다. 오래만에 본 손님인지 할머니가 지나가는 관광객의 손을 잡아끈다. “마수걸이라도 하게. 우리 집 물건 많아” 은빛 이빨을 드러내며 웃으면서 손자뻘 손님에게 연신 입담을 늘어놓는다.
쌍계사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운치가 있다(입장료 3,400원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른쪽은 계곡. 오솔길은 연초록 나뭇잎으로 뒤덮여 있다. 나도밤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단백나무 등이 울창하다. 터널을 이뤄 빛이 잘 통과하지 못한다. 나무숲을 뚫고 내려온 빛줄기가 초파일 연등같이 은은하다. 100m가 채 되지 않은 짧은 거리를 걷다보면 세속의 번뇌가 말끔히 씻겨져 버리는 듯하다. 절 입구를 들어가는 순간부터 경외감 때문인지, 대부분 느릿느릿 발을 옮긴다. 계곡 한번 쳐다보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나무 한번 만져보고….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마중 나오고,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을 봉안한 천왕문이 맞는다. 구층석탑과 팔영루를 지나면 대웅전 경내에 들어선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해서 대웅전으로 가는 이는 별로 없다. 보통은 그 옆에 개천을 끼고 난 오솔길을 따라 경내에 들어선다. 경내에는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호)가 있다. 비 몸체는 다소 손상됐으나 귀부와 금수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약수를 한 사발 들이키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모두들 비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다. 모두들 비에 대해 한자락씩 거든다. 비문의 글은 신라시대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이 대문장가 최치원에게 글을 짓고 쓰게 한 것이라는 둥. 호랑이의 인도로 쌍계사 금당에 이르러 절을 세웠다는 둥. 몸체에 난 파편자리는 지리산 빨치산과 군경합동군과의 치열한 쌍방 전쟁의 흔적이라는 답사 평까지 곁들여진다.
대공탑비 양옆으로는 설선당, 적묵당이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신라 석등의 특색을 갖춘 석등이 서 있다. 팔각형의 하대석은 복연대로서 8엽단판 연화문이 돌려져 있고 간주석은 가늘고 긴데 중간이 부러진 것을 맞추었고 상대에는 앙연을 조각했다. 대웅전 동쪽 경내에 있는 큰 암석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여래좌상이 두껍게 양각돼 있다. 부처라기 보다는 보살에 가까울 만큼 소박한 형상이다.
금당 옆으로 난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야영장과 불일폭포를 만날 수 있다.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폭포로 꼽히는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 지리산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의 계곡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는 오색무지개를 만들고 천지를 진동하는 물소리는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한다. 물의 양이 많을 때에는 높이 60m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이 협곡을 진동케 하며 그 소리를 사방 1km 내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비질비질 땀을 흘리고 오른 불일폭포는 사람의 손길을 거부한다. 그 이전에 올라왔을 때에는 폭포 밑에서 지친 몸을 씻었지만, 지금은 전망대가 세워져서 구경만 하고 갈 뿐이다. 폭포의 물방울에서 은이온이 나와 사람의 노폐물을 걸려내고,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는 설명이 써져 있다. 폭포를 바라보며 벤치에 누워 잠 한숨 잤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다. 서서히 날씨가 어두워진다. 내려갈 채비를 하고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찾아가는 길 = 서울에서 쌍계사로 가려면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장수IC에서 빠져나간다.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방향으로 가다가 구례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지름길.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 방향으로 30여분을 달리면 화개입구다. 화개장터에서 10여분을 달리면 쌍개사가 나온다.
<장원수기자 jang7445@khan.co.kr>
남원 용담사
전북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292 에 소재하고 있다.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위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여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절 안의 대웅전은 북쪽을 향하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위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여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절 안의 대웅전은 북쪽을 향하여 용담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하나의 돌에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거구의 석불입상으로 높이가 6m에 이른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바위의 손상으로 분명하지는 않으나 힘차고 박력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다. 목에는 형식적으로 새긴 3줄 주름인 삼도(三道)가 있다. 몸은 어깨와 가슴이 떡 벌어져 있고, 다리는 돌기둥처럼 강인해 보인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깨어진 곳이 많아 분명하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불꽃무늬를 조각한 흔적이 남아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타원형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한 거구의 불상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 시대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Tahidromos Pethane
Le jeune facteur est mort 젊은 우편배달부가 죽었네. Il n'avait que dix-sept ans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L'amour ne peut plus voyager 더 이상 사랑이 배달되지 못하지. Il a perdu son messager 사랑의 심부름꾼을 잃었으니.
C'est lui qui venait chaque jour 날마다 찾아오던 그였지. Les bras chargés de tous mes mots d'amour 내 모든 사랑의 말을 두 팔에 안고 C'est lui qui portait dans ses mains 두 손 가득 들고 있었지. La fleur d'amour cueillie dans ton jardin 그대 정원에서 꺾은 사랑의 꽃을...
Il est parti dans le ciel bleu 그는 떠났네...푸른 하늘 속으로. Comme un oiseau enfin libre et heureux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처럼 Et quand son âme l'a quitté 그리고, 영혼이 그 몸을 떠났을 때 Un rossignol quelque part a chanté 어디선가 밤꾀꼬리가...노래하고 있었지.
Je t'aime autant que je t'aimais 그대를 사랑했던 만큼...나 지금도 그대 사랑해. Mais je ne peux le dire désormais 하지만, 앞으론 그말...할 수 없지. Il a emporté avec lui 그가 함께 가져가 버렸으니. Les derniers mots que je t'avais écrit 그대에게 썼던 마지막 말들을.
Il n'ira plus sur les chemins 이제 그는 다니지 않지. Fleuris de roses et de jasmins 장미와 쟈스민꽃들 만발한 Qui mènent jusqu'à ta maison 그대 집에 이르는 그 길을
L'amour ne peut plus voyager 사랑은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아. Il a perdu son messager 그 심부름꾼을 잃었으니.. Et mon coeur est comme en prison 그리고 내 맘은...감옥에 갖혀버린 듯.
Il est parti l'adolescent 그는 청춘을 떠났지. Qui t'apportait mes joies et mes tourments 내 기쁨과 고통, 그대에게 가져다 주더니.. L'hiver a tué le printemps 겨울은 봄을 죽였고... Tout est fini pour nous deux maintenant 모든 게 끝났지...지금 우리 두사람.
이제 시작인데요. 서경전 님, 함께 걷지요.
'노란 봄에 반한 남복남 님'랑 4번이랑 동일인물 한사람이거든요. 처음걸 삭제해주셨으면 합니다.혼란을 드렸으면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참가 신청한 박나원입니다. 오늘 입급했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함께 합니다
참가 신청합니다. 서울 출발예정이구요 입금완료했어요. 벌써부터 행복해집니다.
반달이님 반가워요. 지난 초파일 걷고 다시 걸으시는군요. 이번에는 혼자가시나 봅니다.
신청이요! 출발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출발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됩니다. 서울에서 타야지 어디 다른데서 타실랴고?
김선 신청합니다. 아마도 1명 더 추가요.
남복남 님, 명태 이명재 님, 김호용 님- 연락처 알려 주세요. - 011-9640-3828 여리
이경인 권희나도 신청합니다.
저 꾸무럭대다가 이제서야 신청하는데 신청이 늦었나요? 못 가면 어카지? 여리님 등에 매달려 가야지.
업고 갈께요. 가다가 지쳐 쓰러지면 그 때 저 없고 가야 합니다.
그 때 <저 없고>라뇨? 여리님 없으면 안 되죠.ㅎㅎㅎ 가도 된다 이 말씀이죠? 그럼 저도 갑니다.
참가 신청합니다. 남편과 아이들 합이 넷 입니다. 서울 출발이고요. 오늘 입금했슴다. 010-8255-4043
반가운 분들과 함께 가는 2박 3일의 여정!! 그 느낌 그대로 살아 보려 떠납니다 아들과 함께..
여리님! 막차 떠났나요, 티켓 한장 남았으면 저한테 주시와요~~~
늦었죠? 푸른나무입니다. 함께 걷고 싶어요. *^^*
황안나님의 책을읽고 알게됐습니다..저 정말 처음인데 아직 마감안됐으면 함께 가고 싶습니다..^^
네 좋습니다 김보경 님. 함게 가시지요.
최진아입니다. 참가 신청이 좀 늦었는데, 아직 결정적으로 늦은 건 아니겠지요? 서울에서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강나루 님.
화엄사에서 29일부터 8월 1일까지 템플스테이를 할 생각인데 1일부터 4일까지 무방비 상태임다 ㅋㅋ 자유롭게 노닐다가 바로 실상사로 합류하고 싶은데(실상사 직행으로 일단 접수해주삼~~) 추천해주실만한 코스라도?
참가합니다.(서울출발: 입금완료)
알겟습니다. 반갑습니다. 장정애 님.
처음 인사드리고 참가신청입금합니다. 016-324-1958 김남숙, 양재역 출발입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오늘 입금했어요..혹, 안되면 연락주세요 016-408-0356 전 출발하게되면 서울에서 출발예정입니다^^
반갑습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함게 가시지요. 전화 드리겠습니다.
서경전입니다. 출발자 명단에 저의 이름이 있는 걸 보니 몹시 마음이 괴롭네요. 정말 가고 싶었지만 가족 휴가랑 날짜가 겹쳐 도저히 안되겠네요. 죄송함다. 좋은 답사 되시길 바래요.
알겟습니다. 휴가 즐겁게 지내세요.
대망의 final entry 되나요? 나무와 동반 2명, 합 3명 입금했습니다. 이선옥, 김민정 84생 딸, 김지현 85생 조카 입니다.
정말 "대망의 final entry"입니다. 그런데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final entry"라고 공고 써붙여야겠습니다. 나무님도 인원이 넘치는데 분명히 3명정도는 결원이 생길거라 .....
여리님, 내일 뵙겠습니다.그런데 이 노래는 너무 좋습니다. 이 음악 듣느라 계속 컴터 켜놓고 있습니다.
어머 안나언니도 그러셨어요? 저도 진작부터 ctrl 키와 n 키 눌러서 여러번 듣고 있어요. 이 참에 제목 여쭤봐야징~^^*
세계적인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의 곡, 노래 부르는 사람은 사비나 야나토우. 제목은 '젊은 우편배달부의 죽음'입니다. 작곡가가 정말 세계적인 작곡가인지는 확인 안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