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대사여 가라 세상으로(김은호 목사 저)
Chapt 5. 하나님 대사의 삶의 태도
16.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10)
얼마 전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 귀화해서 유창한 부산 사투리와 입담으로 인기를 누리던 모 방송인이 마약 투약 혐의로 기소되었스비낟.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몰몬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귀화한 몰몬교 신자였습니다. 몰몬교는 술과 담배, 마약은 물론 동성연애와 낙태, 심지어는 커피까지 금하고 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면서 몰려든 기자들에게 “함께한 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남에게 숨기거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고, 왕따를 당하고, 심지어는 얻어맞고 감옥에 갇혀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말라 -------
본문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부끄러워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딤후1:8a)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를 증언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증언은 바로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당시 이성의 자율성을 내세운 헬라 철학이 팽배하던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미친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헬라 철학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겠습니까? 에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은 사도 바울이 자신들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전했을 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26:2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은 너무나 미련하고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이 지불되어 죄의 문제를 해결받았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복음과 그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a)
사도 바울은 복음과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기 대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딤후1:8a)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여러 차례 감옥에 갇혔습니다. 도덕적으로 나쁜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면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평생 복음을 위해 달려왔고, 복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바울을 영적 리더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이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히자 부끄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한때 바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이 또다시 감옥에 갇히자 한 사람, 두 사람 그의 곁을 떠나고 후에는 많은 사람이 그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4:10-11a)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의 인생 말로가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은 침침하고 습한 로마의 감옥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엑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 그리고 올 때에 “겉옷을 좀 가져다 달라”고 말합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의 인생 말로가 너무나 외롭고 초라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 핸들리 모울은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는 디모데후서를 읽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고, 감옥에 갇힌 자신을 부끄러워할 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라.”
바울은 당당했습니다.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비록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복음을 위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혹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에 여러분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태신앙이거나 신앙생활을 오래했다 할지라도 오늘 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시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복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 보더라도 위축되지 마십시오. 복음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해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언제 어디서든지 “I am Christian!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b)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 말은 복음을 위해 살면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성경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난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색적인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는 같습니다. 서로의 길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받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로부터 당신은 ‘참 깨어 있는 사람’, ‘지성적인 크리스천’,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며 칭찬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라고 복음을 전하면 분명 고난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은 고난과 함께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랐습니다. 고난 없는 전도, 고난 없는 선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끊임없이 고난받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시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 바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이고니온까지 쫓아와 또다시 이방인들을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번에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그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고 쓰러지자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생각하고 성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죽지 않고 일어났고 또다시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는데, 이 일로 인해 무수히 맞고 옷이 찢겨진 상태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행23:21). 이렇게 바울은 진리의 복음 때문에 숱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b)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자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을 때 가장 실제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정말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고난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면서도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는 뜨겁게 감동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자 하는 데는 침묵합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갇힌 감옥에서, 그것도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할 수만 있다면 고단을 피하라”, “너는 절대로 나처럼 감옥에 들어오지 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복음을 이해 사는 자에게는 고난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구원은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인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고, 오직 그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은혜를 아는 자는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더 많이 수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복음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복음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와 죽음의 법 아래 있었습니다. 죄의 종이었고, 죗값은 사망이기에 영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죗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Good News’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복음인 에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모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아무렇게나 살지 않을 뿐더러 아무렇게나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죽음을 이기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지만 고난도 동반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그와 함게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