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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 페마 초드론
확실하다고 믿는 근거를 허물어라
붙들고 있는 그 확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내려놓을 수도 있고
삶이 내려놓게 만들 수도 있다.
2.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식의 본질을 살펴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음을 가볍게 갖는 것이 핵심이다.
수행이나 삶에 임할 때 마음을 가볍게 가지면, 자신과 타인에게 온화하고 감사하는 태도로 임하기만 하면 부담감은 자연히 줄어든다.
다음 경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식의 본질을 살펴라’이다.
앞에 나온 경구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확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 경구의 진짜 의미다.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신에 대해 득의양양하고 있다면 이번에는 그러한 확실성에 도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여기는 자는 누구인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식의 본질을 살펴라’는 경구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깨달은 자는 누구이며, 알아차린 자는 누구인가?
이 경구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나’라는 소중한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이때의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자신의 여린 가슴 주변에 갑옷을 두른다.
그리고 이 갑옷 때문에 많은 비극이 일어난다. 갑옷에 속아서는 안 된다.
사실 그 갑옷은 매우 투명해서 선명해질수록 더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보호막이라 생각하는 이 방패가 사실은 우리가 마음대로 마구 지어낸, 변치 않는 고정불변의 것이라 여기는 생각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방패는 철로 만든 것도, 다른 금속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순간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기억으로 만든 방패다.
무조건적 보리심(깨달음)의 특성은 ‘무엇’이라고 고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말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이미 지나버린 기억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다.
명상을 많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딱히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보다 더 생생할 수가 없다.
우리는 평소 모든 것을 응결시켜 일정한 이름 아래 못 박아 두려고 애쓴다.
모든 것을 고정된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지니고 있는 생생함을 무디고 모호하게 만들고, 외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패턴을 전체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일깨워야 한다.
마음을 일깨움으로써 모든 것을 응결시켜 고정된 것으로 만드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발 아래에 확실한 토대를 만들고자 하는 습관으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야 한다.
이처럼 안락함과 확실함에서 멀어지는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 이것을 깨달음, 혹은 해방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물을 대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발아래 확실한 토대와 기반을 구축하고 싶어 한다. 마치 달 탐사선을 타고 우주로 떠나 그곳에서 지구를 돌아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구가 훨씬 작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뒤에도 여전히 오늘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가 중요한 고민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우주가 훨씬 넓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오늘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을까, 핫도그를 먹을까, 고민하는 좁은 세계에 살고 있다. 늘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 생기지 않은 의식의 본질을 살펴라’에서 ‘살펴라’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이것은 그저 눈으로 확인한 뒤, “그래, 이제 알았어.”라고 말하는 식이 아니다.
힐끗 일별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깊이 있게 검토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다음 불안하고, 초조하고, 들뜬 마음 대신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다. 환희심은 여기서
생겨난다.
‘아직 생기지 않은 의식의 본질을 살펴라’ 간단히 말해, 통찰력있는 의식의 성질을 살펴보고 숙고하라는 말이다.
자신에 대한 고정된 정체성, 특정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는 자기라는 생각, 단일체로서 ‘나’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다.
좌선 수행을 하는데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이라고 가볍게 이름을 부르다보면 도대체 이 생각들은 ‘누가’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누가 무엇을 지어내고 있는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생각에 ‘생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파하는 자는 누구이며, 빨리 점심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는 누구인가?
해결책까지도 놓아 버리라
다음 경구는 ‘해결책까지도 놓아 버리라’이다.
이것은 만약 당신이 ‘아직 생기지 않은 의식의 본질을 살펴라.’는 경구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이해나 자부심, 확실성 토대가 되는 감각까지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내려놓으라는 해결책은 ‘순야타’라는 공 자체이다.
비어 있는 마음, 열린 마음, 빈 공간 같은 생각까지도 모두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인도에 사라하라는 별나고 지혜로운 스승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고정불변하여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을 소처럼 어리석다고 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비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고 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하게 정의를 내려 고정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니 확고한 결론을 내릴 때마다 당신이 붙들고 있는 그 확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내려놓을 수도 있고, 삶이 내려놓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이 확실하다고 믿는 근거를 내려놓는 것은 당신의 근본 패턴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마치 당신의 유전자를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방법은 그저 내려놓고 마음을 가볍게 지니는 것, 무슨 일이 되었든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더 온화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몇몇 단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확언’을 연습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확언은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속삭임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괜찮아’라고 고함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속삭임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한 속삭임이 한때 지나가는 기억임을 깨닫고,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두려움과 초조한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지나치게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없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있는 그대로 괜찮은 사람들이다. 모든 것에 한쪽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걸어 다니고, 말도 하는 모순덩어리인 것이다.
모든 다르마를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한때 지나가는 기억으로 여겨라. ‘생각’이라고 부르며 가벼운 마음으로 건드려 본다면 모든 것이 그렇게 견고한 단일체로 보이
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우리가 느끼는 부담감도 상당히 덜어질 것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이라고 불러보면, 생각이 실체가 없이 투명하다는 것,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영처럼 매우 가볍게 느껴진다.
일련의 생각들이 단단한 이야기로 굳어질 때마다 ‘생각’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라,
이 생각들과 관련해 일어나는 모든 정념, 공격성, 좌절감 역시 한때 스쳐지나가는 기억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단 일 초라도 그저 생각일 뿐임을 온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생각' 하고 이름표를 붙이는 방법은 ‘내려놓기’라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을 일깨워주고, 공이라는 무조건적 보리심에 다시 연결시켜 준다. 또한 자비심, 가슴, 타고난 부드러움 같은 상대적 보리심을 일깨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주 온화하게 ‘생각’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보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견고한 드라마에 변화를 줄 수 있다.
또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이 모든 드라마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해결책까지도 놓아버리라’라는 것은 머리에 떠오른 어떤 것이라도 가볍게 건드린 다음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아무리 멋진 해결책이나 원대한 계획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해도 그저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라.
계속해서 내려놓아라. 삶의 신비를 뿌리채 발견했다는 생각도,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싶은 생각도,
무조건 내려놓아라.
즐거운 일이 생기더라도, 태엽 장난감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말고, 멈춰 서서 그저 바라보며 내려놓아라.
이런 식으로 생각과 기억의 견고함을 부드러움으로 깨뜨릴 수 있다.
기억이 아주 강력하다면 단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무언가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본성에, 그리고 보리심(깨달음)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일어나는 생각은 그것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명상은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지 생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호흡을 따라가고, 일어나는 생각에 이름을 붙이면서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견고함에 대한 믿음이든, 텅빈 공에 대한 믿음이든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내려놓는 법을 익히면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은 대개 우리의 정체성이나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는 것,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페마 초드론(Pema Chodron)의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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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보신문 -
' 페마 초드론 '
▲ 페마 초드론의 최근 모습.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음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페마 초드론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행복한 유년기·학창시절 보내
남편의 일방적 이별 통보 받고
마음 부서지고 인생 멈춘 느낌
데이드르 브럼필드 브라운(Deirdre Bromfield Brown)씨는 1936년 7월14일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났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브라운씨는 태어난 지 세 달이 되던 날 뉴 져지 주 시골에 위치한 작은 농장으로 이사를 갔고 그 곳에서 즐겁고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엘리트들만 입학을 허용하는 파밍턴(Farmington)에 위치한 명성 높은 미스 포터(Miss Porter)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후에 캘리포니아 UCLA에 입학해서 미국 문학으로 학사 학위를, 그리고 초등 교육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데이드르 브럼필드는 이렇게 전형적인 미국 여성의 삶을 살아가면서 한번도 자신이 비구니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뉴 멕시코를 여행하던 때 그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뉴 멕시코 시골의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치던 그녀는 아름다운 꽃들과 기분 좋게 불어오는 미풍을 만끽하며 신발을 벗고 꽃들로 가득 찬 벌판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긴 금발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걷고 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젋은 랍비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랍비는 꽤 놀란듯한 표정과 함께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들판을 걷는 모습을 보는 순간 당신이 비구니로 보였고 그 옆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비구니가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랍비가 말을 걸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그 당시 비구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한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여기며 그녀는 이 에피소드를 잊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녀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교사로 일하며 어느덧 30대 중반에 들어선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주방 일을 마치고 잠시 의자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원 뒤쪽 문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왔다.
보통 그가 돌아올 시간이 아닌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놓고 일어나 남편을 미소로 맞이한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은 다른 설명 하나도 없이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혼을 해달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사랑하는 남편과 살아가며 소박한 생활에 행복해했던 데이드르 브럼필드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남편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멈춘 것 만 같았다.
그녀는 이혼을 하고서도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며 그녀는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져 내릴 때(When things fall apart)’라는 책을 집필해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려놓기도 했다.
절망 끝에서 불교 만나, 금강승 수행 마친 미 대표 불교인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와중에도 데이드르 브럼필드는 불교와 전혀 접촉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쵸걈 트룽파 린포체(Chogyam Trungpa Rimpoche)가 쓴 글을 읽고 그녀의 인생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에는 잘못된 게 하나도 없다’라는 글을 읽은 데이드르 브럼필드는 마침내 그녀가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던 고민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사실 그녀는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남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모든 상황에 대해 후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증오하면서 더욱더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됐다. 하지만 린포체의 글들을 읽으며 그녀는 증오와 미움을 내려놓고 자신을 용서하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게 됐다.
린포체의 글을 읽어가던 그녀는 부처님의 말씀들을 담은 작은 서적들을 한 권 한 권씩 읽어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차츰 인생에서 행복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쵸걈 트룽파' 만나 본격적 수행
법명 받고 정식 비구니 된 후
수행력 높여 사회 각계에 영향
마음전문가 불리며 존경 받아
기분 전환을 위해 프랑스 알프스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녀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우연히 치메 린포체(Chime Rimpoche)를 만나게 됐고, 그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침내 자신을 불교의 세계로 이끌게 한 장본인인 '쵸걈 트룽파 린포체'를 만나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수행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1974년 영국에서 제 16대 걀와 카르마파(Gyalwa Karmapa)로부터 ‘가르침을 위한 연등’이라는 의미의 ‘페마 초드론(Pema Chodron)’이라는 법명을 받고 정식으로 비구니가 되었고, 1981년 금강승 수행을 마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페마 초드론은 미국 역사 전체에서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불교인이다.
그녀의 글과 강연은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계의 다양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유명인들도 그녀를 찾아 인생에 대해 자문하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현재 그녀는 감포 에비(Gampo Abbey) 사원의 대표로서 사원을 다방면에서 이끌어 나가고 있다.
비구니로서 큰 존경과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어서 그녀가 쓴 글들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Start where you are)’ ‘낭비할 시간이 없다(No time to lose)’ ‘혼돈의 시기에서 평화를 얻는 법 (Practicing Peace in Times of Wars)’ 등은 하나같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마음 전문가’라는 별칭으로 불려지는 페마 초드론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며 미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명 인사이다.
또한 그녀는 현재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남편의 외도 때문에 절망의 끝에 섰던 한 주부가 이제는 세계 곳곳을 돌며 부처님의 말씀과 명상을 전파하는 미국 불교계의 자랑이 된 것을 보면, 우리 인생에서 힘들고 절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이는 어쩌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기회가 아닌가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본다.
알랭 베르디에 저널리스트 yayavara@yahoo.com
[1424호 / 2018년 1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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