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옥구들판이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늘만 보이는 두메산골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자랐던 나는 무제한으로 탁 트인 군산 옥구벌이나 만경강에 펼쳐진 부안 들판은 언제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넓은 평야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석양에 펼쳐진 지난 가을에 황금물결이 넘실대던 호남들판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열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군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1980년 말 당시)
1. 호남고속-경부고속도로를 경유하는 코스는
군산-익산-호남고속도-논산-서대전-경부고속-추풍령-김천-대구-부산.
2. 군산-전주 군산-전주 간 국도에서
1) 전주-임실-남원-88고속-함양-산청-의령-남해고속-마산-부산.
2) 전주-진안-장수-장계-88고속도-함양-산청-의령-남해고속-부산.
3) 전주-진안-장수-장계-육십령-거창-함양-산청-의령-남해고속-부산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경부고속도를 이용하는 길은 거리상으로는 가장 먼 길이었지만, 경부고속도가 붐비지 않는 시간대일 때는 가장 짧은 시간으로 약 4시간 정도면 가능했다. 하지만 주말이면 경부고속도로의 대구에서 부산까지 정체가 심했고, 고속운전으로 피로도도 높았다. 물론 고속도로의 통행료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가장 선호하는 길은 군산-전주-임실-88고속-함양-산청-생비랑-의령-남해고속-마산 부산 가는 길이었다. 거리상으로는 가장 짧은 길로 고속도로비도 가장 싼 코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의 경치도 좋고 호젓한 길이라 피로도도 가장 적었다. 그러나 보통 남해고속도의 정체로 항상 5시간 반은 보통이고, 6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군산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13시 30 분경에 출발하면 보통 7시가 넘어야 집에 도착했다.
나는 군산공장에 근무하던 시기는 두 차례로 1986년 후반기에서 1988년 전반기까지 군산 라이신 공장 건설시기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라이신 공장 증설기간이었다.
당시에는 대진고속도로도 없었다. 남해고속도로도 순천에서 끝나있었다. 포항-익산 간 고속도로는 물론 거론도 되기 전이었다.
곧게 뻗은 4차선 도로 그 양 옆으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벚나무 숲 길 그 길이 끝나는 곳에 [호남제일문]이라는 가장 멋진 한국적인 상징물은 호남을 대표한다.
전주에서 임실을 지나 남원까지 가는 국도는 4차선 공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1994년 이후에는 시원하게 4차선으로 뚫려졌다. 대체로 한적한 시골길이지만 주말에는 가끔씩 통행량이 늘어난다. 나는 아주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사람으로 좀은 꽉 막힌 답답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교통법규에 대해서는 초보운전이라서 더욱 그렇다고도 생각되지만 워낙 숫기가 적고 간이 작아서도 그렇다. 한적한 시골길에서도 나는 과속이라든가 신호 위반이라든가 교통위반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운전면허증도 없었고 당시에는 내가 자가용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그 때 1983년도에 일본 동북대학교의 유학생활에서 보고 느꼈던 경험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에도 일본의 대학원생들은 24시간 학교에서 연구 실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가용은 필수적인 소유물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모두가 법을 준수하는 국민으로 그 명성이 높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밤늦은 시간에도 교통 신호를 지키며 신호등 앞에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 당시에 한국은 거리병산제인 택시요금체계와는 다르게 일본의 거리-시간 병산제인 택시요금체계인 택시 속에서는 메타기의 요금 올라가는 소리에 가슴을 절이곤 했다.
예부터 작은 범법자에게도 가차 없는 법 집행이 오늘 날 일본인들의 준법정신의 모태가 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교직원이나 학생이나 회식 자리에서 맥주 한 잔만 해도 절대로 자동차를 운전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경험이 법대로 하는 나의 운전 습관을 만들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지금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그렇게 죄의식 없이 가끔씩 얌체운전을 하곤 하지만, 운전 시작 후 약 5 년간은 교통 법규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초보운전 시절 나는 대형 사고를 당할 번한 아찔한 경험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전주 시내의 번잡한 사거리에서 겪었던 일이다. 당시의 사거리에서의 교통체계는 먼저 직진-좌회전 동시 신호가 있고 일정 시간 후에 좌회전 신호가 끝나면서 직진신호로 바뀐다. 당시에 나는 옆 좌석에 동료를 태우고 부산가는 길이었다. 직진신호로 바뀔 때 좌회전 표시 신호가 황색불로 바뀐 후에 좌회전 신호는 꺼지고 직진 신호만 남게 되는데, 이 때 나는 큰 착각을 했다. 황색 신호는 좌회전-직진 신호가 꺼지기 전에 나타나는 시그날로 착각을 한 것이다. 황색 신호에서는 당연히 멈추는 나의 운전 습관으로 나는 그대로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다. 편도 6차선 대로이고 당시 70킬로 도로이기에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60킬로 이상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아직 백미러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는 멈추기 전에 백미러로 뒤차들을 볼 여유도 당연히 없었다. 그 때 나는 직진하는 중이었고 1,2차선은 좌회전 차선이고 나는 당연히 3차선 직진차선을 달리고 있었고 나는 3차선의 정지선에서 급정거를 해 버렸다. 내가 정지하는 순간 좌우에서 귀청을 찢는 듯 한 경적을 울리며, 대형 버스는 비워진 좌회전 2차선을 쏜살같이 지나서 3차선인 내 차 앞을 지나서 달렸고 우측인 4차선에서는 시내버스가 3차선을 달리던 버스의 진입을 막기 위해 강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태의 전말을 알아차리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직진신호도 어느 듯 정지 신호로 바뀌어 있었다.
그 때 만약에 좌회전 차선에 자동차가 있었다고 가정을 하면, 내 뒤차는 당연히 급정거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대형버스는 내차를 뒤에서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등허리에서 땀이 베였다.
어지간히도 무던했던 옆자리의 사람도 놀랐던 기색이 역역했다.
주말에 혼자서 가는 부산 길은 정말 멀고도 지루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만산홍엽이 높은 산에서 산허리까지 내려오다 도로변의 억새가 하얀 머릿결을 풀어 헤치고 춤을 추고 있었다. 가끔 장끼가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임실이 가까워지자 제법 넓은 들판이 나오고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바람에 매스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자동차 행렬이 빠르게 닥아 오고 있었다. 한적한 2차선에서 1차선을 달리던 나는 재빨리 2차선으로 비켜주었다.
그들은 70 킬로 속도의 길에서 100킬로 이상을 달리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나도 그들과 합류하여 달렸다. 규정 속도로 달리는 차는 위반 딱지를 끊기가 일쑤다. 70 킬로 속도의 4차선 길에도 동네를 지날 때는 60 킬로의 구간이 있고, 학교 앞을 지날 때에는 30 킬로의 구간도 있다. 혼자서 70 킬로의 규정 속도 이하로 달리는 자동차는 자기도 모르게 한적한 길에서 60 킬로 이하의 규정 속도를 지키지 못해서 커브 길에 기다리고 있는 경찰에 걸리기가 일쑤다.
80이상100킬로로 달리는 차량행렬은 대개가 7-10 대 또는 20 여 대의 긴 행렬을 이루고 달린다. 1차선만 달리는 게 아니라 1,2 차선 다 점령해서 달린다.
군데군데 경찰 1-2 명이 기다려 보지만 그들은 경찰의 멈춤 지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도 줄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빨리 달린다. 사실 이렇게 무리를 지어서 달리면 자동차가 갑자기 정지를 할 수도 없다. 잘못하다가는 뒤차가 추돌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경찰이 정지 신호를 무시했다고 해서 따라잡기도 여의치 않지만, 무리지어 가는 차는 따라잡기도 힘 든다. 그래서 경찰은 아예 이들은 방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달리는 이들과는 달리 규정 속도로 달리는 차는 언제나 혼자서 천천히 간다. 그러나 가끔가다 만나는 60 킬로 도로나 30-40 킬로 건널목에서는 규정 속도를 위반하기 일쑤다. 그 때를 알고 있는 경찰은 커브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여지없이 단속을 한다. 주로 법규를 준수하는 착한 운전자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한적한 길이기는 하지만 속도 표지판에 있는 규정 속도를 넘어선 것은 사실이고, 애꿎은 함정 단속 탓만 해봐도 소용이 없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이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리지어 달리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 사정을 알고부터는 무리의 뒤에서 주로 달린다.
무리의 뒷편에서 가능하면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달리면 아주 편하다.
갑작스런 돌발 사항에도 거리 확보가 되어 있고, 가끔씩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느라 약간 뒤처져서 달려도 문제가 없다. 시야가 좋기 때문에 금방 따라 잡을 수도 있다. 또한 뒤차가 없기에 갑자기 끼어드는 차도 없다.
임실에서 오수를 지나 남원의 밤티재 길이라는 춘향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
2차선의 굽이굽이 아름드리 낙엽송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은 단풍 길은 그 얼마나 낭만적이며, 구불구불 노송은 긴 세월의 역사를 말없이 간직하고, 어엿한 선비의 기상이 그 속에 서려있는 듯 산새들만이 바쁘게 지저귀며 날아다니던 당시에는 아주 호젓한 길이었다. 고갯마루에는 춘향이와 이도령의 나뭇조각이 나그네를 환영하는 작은 휴게소도 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 가면서 이도령이 춘양이와 헤어져 한양 가는 과거 길을 연상하기도 하고,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들어오는 금의환향하는 어사또 행차도 그려보며 그 지루한 드라이브 길에 피곤한 줄 모르고 자동차 운행을 하곤 했다.
지금은 편도 2차선의 거대한 터널이 개통되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춘양이 고개가 되었을 그 추억의 길을 가보고 싶다.
남원 IC에서 88고속도로에 진입하면 2차선의 멋진 산복고속도로가 굽이굽이 뻗어 마치 사행천을 연상하면서 길게 이어져 있다. 왕복 2차선도로라 트럭을 만나면 중앙선을 넘어서 추월해야 하는, 가끔은 그 추월 길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경험을 한 번씩은 했을 것이다.
험준한 지리산 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면서 영호남은 동서로 분리되어 지리적으로 소통이 어려운 지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구, 고령, 거창, 남원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옛날부터 있었고, 대구와 전주는 그래도 역사적인 많은 문물의 왕래가 있었다.
그 증거로 대구와 전주는 예부터 혼사가 있었고, 다만 광주와 대구의 길은 멀고도 험해서 거의 연고관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전두환대통령이 대구-광주의 소통을 위해 그 험난한 88고속도로를 완공한 후에 대구- 전라도의 통행이 처음으로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남원에서 인월까지는 지리산을 오르는 그 호젓한 길은 작은 분지를 이루는 유정리를 지나면 험한 산길을 가파르게 올라간다. 좌우에 낙엽송이 짙게 어우러져 있고 구비 처 올라가는 그 고갯길은 자동차도 힘겨운지 도무지 속도가 오르지 않는다, 고갯마루의 8부 능선 부근에서 좌측에 지리산휴게소가 깊은 산속의 별나라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휴게소에서 무인판매기에서 커피 한 잔으로 덕유산 줄기의 상큼한 산내음을 들이키고 나면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여기서 부터가 가끔 지나가는 반대편 차로의 교통경찰차에서 속도 측정으로 급커브로 유턴해서 따라오는 경찰에 속도위반으로 잡히기 일쑤다.
그들은 일단 위반차 운전자를 경찰차에 태워서 내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서 반대편 차로의 자동차 속도를 속도계로 찍어서 확인시켜주고, 서로가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서도 속도 측정이 정확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내가 속도위반을 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물론 속도위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운전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
이 첩첩 산 중 고속도에서 교통안전을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는 자기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말과 힘 드는 일에 식사비라도 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운전자로서도 정식으로 범칙금 딱지를 떼는 것보다 만 원 권 한 장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지리산 휴게소를 지나서부터 함양까지는 큰 고개 없이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전주에서 함양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 길이 있다. 위에서 지나온 임실을 지나 남원에서 88고속도로로 함양까지 가는 길과 전주에서 진안, 장수를 거처 육십령 고개를 넘어 거창, 함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육십령을 넘는 길은 길이 험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선호하는 길은 아니지만 주변 경관은 아주 좋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길은 진안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처음 이 진안 고개를 넘으면서 세상에 이런 험한 길도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왕복 2차선 도로는 진인 고개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는 만경강의 지류이다. 굽이굽이 고갯길은 대형버스가 바로 회전을 못하는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버스가 후진을 한 후에 회전해서 커브를 돌기도 했다.
고개 중턱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랫길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눈이라도 내리면 통행은 불가능한 급경사 길이다.
그런데 막상 진안 고개를 오르면 내려가는 길은 없다. 전주와 진안의 고도 차이로 진안 고개에서 땅이 직각으로 침강한 상태 같았다. 진안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전주벌은 광활하게 이어져 부안으로 기름진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진안에서 흐르는 내는 금강의 지류이고, 지리산에서 남원으로 흐르는 내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진안에서 장수까지는 평탄한 길이다.
진안을 지나면 우측으로 마이산이 그림같이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한다.
장수에서 함양 거창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육십령이다. 육십령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길은 남강의 지류가 되고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금강의 지류가 된다.
높이 734m. 육십현·육복치라고도 한다.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며 도적떼가 많아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이 모여야 한다고 해 육십령이라 했다. 소백산맥이 동쪽의 남강 상류와 서쪽의 금강 상류인 장계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낮아진 부분으로,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의 안부에 해당한다.
소백산맥이 활처럼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방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영남지방의 주요교통로로, 조령(643m)·죽령(689m)·팔량치(513m)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4대령으로 꼽아왔다. 특히 육십령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였으며, 현재는 전주-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난다.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던 고개였으며, 당시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다. 함양사근산성(사적 제152호)·황석산성(사적 제322호) 등 삼국시대의 성곽들이 남아 있다.
육십령을 넘으면 경남 함양의 서상면이다. 서상 서하를 지나서 안의로 가는 길은 풍광이 뛰어난 남강의 상류이다. 이 계곡에 위치한 농월정은 경관이 뛰어난 명소이다.
달을 희롱하면서 풍류를 즐긴다고 해서 농월정이라 한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금원산 아래 용추계곡이라는 멋진 계곡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농월정을 지나 안의면에서 거창을 좌측으로 하고 생초면으로 가는 길은 함양을 우측으로 남강을 끼고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생초에서 맛보는 남강의 은어 회는 특산물이다.
은어는 주로 낚시로 잡는데, 반바지 차림으로 무릎에서 배꼽아래까지 차는 강물에 몸을 담고 긴 대나무 장대에 인공미끼의 낚시대를 드리우고 쉬지 않고 낚시를 던져서 걷어 올리면 1-2 마리씩 올라온다. 남강변에 위치한 생초의 매운탕집은 대여섯개의 식당이 늘어서 있고 강변에 있는 정자나무 아래에는 나그네가 앉아서 쉬었다 갈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생초에서 산청까지 이어진 국도는 남강의 절경을 보여준다. 강변에 이어져 있는 굽이굽이 국도는 작은 언덕들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면서 진주까지 이어져 있다.
산청 신안에서 진주로 가는 국도와 남강을 건너서 단성에서 지리산 천황봉으로 오르는 최단거리인 중산리로 가는 길과 생비랑으로 들어가는 사거리 길이 나온다. 생비랑 길은 의령과 합천으로 가는 길목이다. 생비랑에 흐르는 남강의 지류는 맑기로 유명하다. 생비랑 가는 길에 도로변을 따라 흐르는 남강의 지류는 작은 소를 이루면서 초록 물감을 탄 것같이 푸르다.
생비랑에서는 가희를 거쳐서 철쭉의 명산 황매산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다.
생비랑에서 고개를 넘어 의령 대의면에서 합천으로 가는 길과 의령으로 가는 삼거리 길이다.
당시에는 아직도 의령군 궁류면의 우순경사건이 잊혀지기 전이라 이곳을 지날 때면 언제나 매스컴에서 본 그 끔직한 사건이 떠올라서 숙연해지곤 했다.
그 개요는 1982년 4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경남 의령군 궁유면 지서에 근무하던 禹순경(당시 27세)이 술에 만취해 지서와 예비군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과 카빈소총 2정, 실탄 1백80발을 들고 나와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禹순경은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미친 듯이 전기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려 자그마치 56명이 숨졌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이성을 완전히 잃은 禹순경은 생후 1주일된 영아부터 70세가 넘은 할머니에게도 총질을 하며 무려 8시간 동안 토곡리 등 4개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주민 신고로 1시간 20분 뒤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사살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禹순경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끔찍한 살상을 저지른 禹순경은 자정이 지나자 정신이 드는 듯 총기난사를 멈추고 27일 오전5시 30분쯤 평촌리 서인수씨의 외딴 농가에 몰래 들어가 서씨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수류탄 2발를 터뜨려 자폭했다.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고약했던 禹순경이 내연의 처 전말순씨(당시 25세)와 말다툼을 벌인 뒤 술취한 흥분상태에서 좌천에 대한 인사불만과 애정문제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대의면에서 꾸불꾸불 의령고개를 올라 망향휴게소에서 잠깐 휴식은 꿀 맛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서 망향휴게소의 그 멋진 정취는 느끼지 못함이 아쉽다.)
앞뒤로 탁 트인 고개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또한 일품이다. 달려온 길을 돌아보면 황매산, 허굴산, 아득히 보이는 덕유산 줄기가 안개 속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고, 고개 밑의 산남저수지의 그림 같은 풍경과 발아래 의령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의령천 뒤에 위치한 충익사와 의병탑은 옛 임진왜란시의 민족의 기상이 서려있다. 이제 부산이 지척이라는 안도감에 벌써 아이들과 아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당시에는 의령천을 지나는 백야교가 1차선으로 되어서 다리 끝의 양 방향에서 먼저 진입한 차량이 통과되기를 기다려서 통과해야하는 이색적인 통행로를 경험하는 것도 지금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백야교를 지나서 좌우로 이어진 수박밭을 지나면 금방 남해고속도의 진입로가 기다린다.
부산에 도착할 때면 겨울이면 깜깜한 밤인 8시를 지나서야 온 몸은 파김치가 된 후에 도착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