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운명
1949년 6월 末 소련軍 장비 수송 막으려고 38線 넘은 대원 252명 떼죽음
김태완
『작전에 성공하면 북한의 남침이 2, 3년은 저지될 것으로 믿었다』(호림유격전우회 황휘성 회장) |
6명의 生存者
호림부대는 1949년 10월부터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戰史(전사)에 잊혀진 전설이 있다. 한국 최초의 北派(북파) 유격대인 「虎林(호림)부대」. 한국전쟁 이후 50여 년간 虎林유격대는 베일 속에 가려져 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6월 말. 北派 임무를 띤 유격대 252명은 설악 산 대청봉에 손톱과 발톱을 잘라 생무덤을 만든 뒤 38선을 넘었지만 북한 인민군에 발각, 거의 떼죽음을 당했다.
가까스로 탈출한 생존자 40여 명은 세월을 못 이긴 채 늙고 병들어 현재 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왜 50여 년을 침묵 속에 살았을까? 육군 정보국 소속 부대였음에도 戰後(전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숨어 살아야 했던 그들을 대한민국 정부는 왜 외면했을까?
기자는 虎林부대에 얽힌 사연들을 추적, 자료를 모으고 생존자들의 기막힌 육성을 들어 보았다.
虎林의 실체를 찾기 위해 1949년 당시 발행한 일간지를 뒤졌다. 그해 8월10일字 조선일보에 실린 「이북 애국청년들 의거, 인제郡에서 무장궐기」라는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피끓는 이북의 애국청년들은 공산도배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하야 가면서,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여 약 六천 명에 달하는 다수의 인원으로서 救國統一救血團(구국통일구혈단)이란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1950년 3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중에. |
이북 愛國청년들의 인제郡 의거?
이북 청년들이 무장봉기해 북한 내부에 격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기사 말미에 실린 북한 측 주장이다.
<…(북한은) 사실을 은폐하고 날조하여 그들의 기관지에 맹랑한 소리를 늘어 놓고 있다.
「대대장 김현순이가 인솔한 호림부대 제6대대 전원을 7월6일에 인제군 서화면 부허동에서 포위 섬멸하였으며 소위 대대장 백이권이가 인솔하는 제5대대 전원을 인제군 서화면 이로리에서 포위 섬멸하였다. 이 섬멸전에서 공화국 경비대는…」>
북한 측이 밝힌 「김현순」과 「백이권」은 金鉉洲(김현주)와 白義坤(백의곤)의 오기다. 虎林 5대대장 백의곤과 6대대장 김현주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틀린 이름을 밝혔을 개연성이 높다.
이북 청년들의 「무장궐기」를 담은 기사는 같은 해 8월13일, 14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도 각각 「애국청년들 의거, 이북(인제)서 무장궐기」, 「수천 명 이북 애국청년들, 인제서 무장궐기」란 제목으로 실렸다. 모두 북한 애국청년이 봉기했으며, 우리 국군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蔡秉德(채병덕·1916~1950) 장군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한이 虎林부대를 보냈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남한에서 보낸 일은 없고, 자주적으로 정의감에 불타서 공산세력을 섬멸하기 위하여 무력항쟁운동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터인데, 아마 이 사건은 그것의 한 표현이 아닌가 느껴진다. 학대 속에서 신음하는 애국동포들, 특히 청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리라고 믿는다』
北의 강동정치학원에 맞서 虎林 창설
1986년 9월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세워진 虎林유격군 전적비. |
虎林부대는 이북 청년들이 결성한 무장단체가 아니었다. 남한 정부는 호림부대 北派가 북한이 주장해 온 「6·25 北侵說」의 증거로 이용될까 봐 虎林의 실체를 철저하게 숨겼다. 독립유공자이자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전우회 회장인 印淳昌(인순창·77)씨의 증언이다.
『蔡총장이 당시 말한 구국통일구혈단은 虎林부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내세운 가상 조직입니다. 당시 정부로서는 虎林부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되면 북침의 빌미가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虎林부대는 북한 출신의 서북청년회 젊은이들로 구성된 우리 육군의 비밀유격대였습니다. 북한이 「江東정치학원」을 만들어 월북한 청년들을 교육한 뒤 태백산맥을 통해 남한으로 침투시켜 빨치산 투쟁을 일으키자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만든 것입니다』
1949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왜 무모하게 北派작전을 세웠을까. 정식 군인도 아닌 고작 수백 명의 유격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도 북한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과대망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당시 북한 인민군은 10개 사단에다 소련제 탱크와 미그 전투기 및 자주포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경무장한 여단규모의 10개 보병사단을 보유했을 뿐 탱크나 전투기는 아예 찾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은 「江東정치학원」을 설립, 게릴라를 양성하여 지리산 등지에 무장공비를 내려 보냈다. 당연히 국군 병력은 이들을 막기 위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주한미군, 북한의 선제공격 정보 不信
독립유공자인 印淳昌씨 |
이승만 정부가 북한의 선제공격 및 남침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당시 美軍 측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1948년 주한미군을 철수하는가 하면 극동지구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美軍 몰래, 그것도 정규군이 아닌 대원들로 1948년 국방부 제4국 아래 虎林부대를 창설, 북한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北派작전을 세운 것이다.
虎林부대 생존자에 따르면 『작전에 성공하면 북한의 남침작전이 2, 3년은 저지될 것으로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식량준비도 하지 않았던 200여 명의 대원들이 한꺼번에 북한 땅에 숨어드는 것은 무모할뿐더러 게릴라 작전의 ABC도 모르는 행위였다. 虎林부대 5·6대대는 38선을 넘은 지 10여 일도 안 돼 발각, 거의 모든 대원이 전사했다.
당시 북한은 남로당 출신 월북자를 끌어 모아 평양 교외에 「江東정치학원」을 만들어 게릴라戰 훈련을 시킨 뒤 설악산·태백산·오대산·보현산·팔공산 루트로 南派(남파)시켰다.
육군 정보국 출신 金根化씨 |
예비역 대령으로 육군 정보국 출신의 金根化(김근화·80·육사 5기)씨 역시 虎林부대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대한민국 군사상 가장 환상적인 부대였습니다. 저는 1948년 12월 국방부 제4국 창설에 참여, 군사교관으로 임명됐어요. 제4국에는 강원도 주문진에 거점을 둔 「동해 특별대」(대장 白義坤)와 태백산에서 활동하던 「오대산 유격부대」(대장 金鉉洲)가 소속돼 對北 첩보공작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오대산 유격대장인 金鉉洲는 일제 99식 단발소총을 개조, 연발식으로 만든 시제품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중 虎林 6대대장으로 장렬히 전사했지요』
그러나 두 유격대는 1949년 초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되면서 육군 정보국 소속으로 편입된다. 앞서 유격대원들은 육군본부 산하 훈련소인 「水色(수색)학교」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水色학교는 江東정치학원과 대비되는 군사 훈련소였다. 1949년 2월25일 열린 水色학교 수료식에는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인 이범석, 문교부 장관 안호상, 참모총장 蔡秉德 장군 등이 참석, 성대하게 치러졌다. 金根化씨의 계속된 증언이다.
『국방부 제4국에 많은 요원을 배치, 직접 對共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행정조직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따라 1949년 초 제4국을 해체했습니다. 그 뒤 훈련 수료생들은 육군 정보국 산하 虎林부대로 편입됐어요.
저는 제4국이 해체된 뒤 육군본부 정보국에 복귀, 韓王龍(한왕룡·육사 3기 소령)의 부관이 되어 虎林부대를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방부 제4국 소속
국방부 제4국 소속이던 虎林부대는 1949년 육군 정보국 직속 특수부대로 개편, 「육군 虎林부대」로 명명됐다. 작전을 하달하는 주체가 국방부에서 육군으로 바뀐 셈이다. 그러나 대내외적 국가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현역 장병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으로 부대를 편성했다.
李承晩 정권 당시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文鳳濟(문봉제·1915~2004)씨의 生前 회고다. 그는 虎林부대 창설 당시 국방부 고문으로 위촉됐다고 한다.
『저는 육군 水色학교에 서북청년단원 300여 명을 입교시켰습니다. 이는 정책적 차원이었으며 조만식 선생 비서를 거쳐 먼저 월남한 백선엽을 정보담당으로 하는 육군본부 정보국장 취임도 건의했어요. 부대명은 「猛虎出林(맹호출림)」이라는 평안도 기상의 표어에서 虎자와 林자를 따서 虎林부대로 칭하게 됐습니다.
虎林부대 작전에 관해 여러 가지 말씀드릴 것도 있으나 그보다 제가 직접 관여했고, 꽃다운 청춘을 금강산 모란봉 지역에서 피 뿌려 산화한 서북청년 결사대원들에게 아무 보상도 하지 못한 이 안타까운 심정을 전합니다』
소련軍 군사장비 수송 저지하려 침투
호림부대 전적비 동판에 새겨진 전사자와 생존자 명단. |
육군 水色학교에서 단기 군사교육을 마친 虎林부대는 5대대와 6대대로 나뉘었다. 5대대는 동해 특별대장이던 白義坤, 6대대는 오대산 유격대장인 金鉉洲가 지휘했다. 이들은 1949년 6월23일 北派 임무에 나섰다. 北派는 李承晩 대통령과 軍 수뇌부 일부를 제외하고 비밀에 부쳤다.
5대대와 6대대 대원 200여 명은 전원 인민군복을 입고 일본 99식 소총과 TNT 10kg으로 중무장, 서울을 출발했다. 5대대는 동쪽으로, 6대대는 중부 고원지구로 이동해 각각 작전을 수행한 뒤 7월 말쯤 양덕~맹산~고원지구에서 합류키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虎林부대는 왜 북한 양덕~고원지역을 최종 침투지로 택했을까.
당시 소련 극동군은 군수물자를 원산港(항)을 통해 북한에 공수, 평원선을 통해 평양에 전달하고 있었다. 평원선은 산악지대인 양덕~고원지역으로 연결돼 있었고, 산을 뚫어 만든 터널이 2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虎林부대는 이 터널을 파괴, 평원선을 마비시켜 소련군의 군수장비 수송을 지연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5·6대대 대원들은 함께 38선을 넘은 뒤 7월3일 봉정암에서 각자 흩어졌다. 5대대는 함경남도를 통해, 6대대는 영서지역, 그러니까 평안남도를 통해 北上하기로 한 것이다.
5대대 제2중대장이었던 생존자 金鍾翊(김종익·82)씨의 설명이다.
『5대대는 120명으로 편성, 점봉산을 넘어 박달령~양양지구 오색촌으로 침투했어요. 이동 도중 金九(김구) 선생의 암살소식을 듣고 대원들이 모두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 7월1일 설악산 화채봉을 향해 나아가 대청봉 1708m 고지에 이르러 동지들의 생무덤을 만들었어요. 全대원이 결사를 다짐하고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담뱃갑 은종이에 싸서 한자리에 묻고 그 위에 돌을 쌓아 표시를 했습니다』
5대대는 향로봉 북방 고성군 수동면 상리를 거쳐 7월17일 오후 4시쯤 국사봉 삼각고지에 다달았다. 하지만 敵에게 이동경로가 노출돼 인민군과 격전이 벌어졌다. 네 시간가량의 전투에서 대부분의 대원이 전사했다. 당시 敵은 원산 3사단, 3·8경비사단, 월북한 특수부대 1개사단 등 3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었다.
金鍾翊씨의 계속된 증언이다.
『7월17일 내금강 국사봉 삼각고지를 점령했을 때 敵 3개 사단이 우리를 포위해 전투를 벌여야 했어요. 대대장 이하 전원이 TNT를 안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저는 衆寡不敵(중과부적), 도망을 가다 동료대원 함병주·이기우를 만나 목숨을 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분들은 지금 모두 죽었어요』
전우의 신음소리 메아리쳐
북한에 체포된 호림 5·6대대 대원 40여 명이 평양 모란봉의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 북한은 『남한이 북침을 시도했다』며 정치공세를 폈다. |
6대대 역시 최후를 맞았다. 7월7일 인제군 서화리 가마골로 이동한 6대대는 인민군 1개 연대병력과 맞닥뜨렸다. 敵은 전후좌우 4면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다. 당시 죽고 부상당한 전우들의 신음 소리가 메아리쳤다고 한다.
당시 6대대 제1공격 소대장이었던 李英秀(이영수·78)씨의 회상이다.
『7월7일 인제군 서화리 속칭 가마골에 이르렀을 때 적의 1개 연대 병력이 완전포위, 공격을 가해 왔어요.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생포한 포로병과 노동당원 30여 명을 내세워 「쏘지 말라」고 외쳤지만 이미 전사자가 수십 명을 넘어섰어요.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동지들은 가지고 간 TNT를 안고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저는 김병제·이영수·권오덕과 함께 도망치다 어느 화전민 집에 들어갔습니다. 김병제는 상처가 깊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며 수류탄 두 발을 달라고 했습니다. 야음을 틈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할 때 김병제는 수류탄 한 발을 던져 敵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 유인한 다음, 나머지 한 발로 괴뢰군과 함께 자폭했어요. 살아남은 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北, 생포된 虎林대원 전국 순회선전
5대대와 6대대 200여 명의 대원은 거의 전멸, 생존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다만 일부 대원들은 북측에 생포, 인민재판에 넘겨졌다고 한다.
체포된 虎林대원들은 1949년 9월11일 평양 모란봉의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은 『남한이 북침을 시도했다』고 주장하며 생포대원들을 북한 주요 도시와 각군 부대로 순회선전에 동원시킬 정도였다. 또 사건이 종료되는 그해 10월 말까지 全軍에 비상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인민군 중좌 출신으로 한국전쟁 직후 귀순한 姜東皓(강동호)씨의 증언이다. 그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을 역임했다.
『(북한은) 체포된 虎林부대 40여 명을 「귀순용사」라고 선전하며 평양·함흥·원산 등지에 5~6명씩 분산 배치시켜 세뇌공작을 시작했습니다.
1949년 9월쯤 虎林부대원에 대한 판결을 평양 최고재판소에서 개정, 고위간부들과 각급 지도인사, 언론계 등을 동원해 참관케 했어요. 이후 虎林부대 姜모 중위를 비롯한 6명의 간부들은 평양 모란봉에서 金日成이 참관한 가운데 총살형을 집행했고, 잔여대원들은 이듬해 총살형이 내려진 것으로 압니다』
당시 인민재판 모습은 국내 방송사를 통해 이미 방영됐다. 1990년 KBS는 한국전쟁사를 특집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서 虎林대원들이 인민재판을 받는 필름을 처음 공개했다. 이후 10년 뒤인 2000년 6월22일 MBC도 미국 특파원이 입수했다며 같은 장면을 보도했다.
TV 화면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재판정에 선 虎林대원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담겼으며, 북한 측 검사가 「虎林부대가 남한의 채병덕 참모총장 등 육군 수뇌부가 직접 조직한 특수부대」라고 주장하는 대목과 함께 북한 아나운서의 음성(『모두 다 무직자며 방탕생활을 하던 자들로서 서북청년회, 대한노총 등에 가입하여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한…』, 『제5대대는 양양군 일대를, 제6대대는 인제군 일대에서 갖은 만행을 다하며 다니다가…』)도 나온다.
하지만 TV 화면에 비친 虎林대원들이 진짜인지 여부에 대해선 다소 이견이 있다.
虎林부대 훈련조교 출신의 黃輝成(황휘성·76) 호림유격전우회 회장의 설명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대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재판정에 선 대원들이 虎林부대 출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당시 생포됐던 대원들을 모두 처형시킨 뒤 가짜 인물을 재판정에 세웠을 것이란 얘깁니다. 같이 훈련받고, 같이 사선을 넘었는데 얼굴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입수경로를 물었더니 미국 특파원이 필름을 구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북한 선전용 제작필름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6대대 생존자인 李英秀씨 역시 같은 주장이다.
『虎林부대의 실제 대원이 아닌 듯해요. 다른 사람을 대원으로 가장해서 재판한 것입니다. 따라서 TV에 소개된 재판 기록 필름은 북한이 선전용으로 제작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과 生還한 호림 5·6대원들. 앞줄 왼쪽부터 함병주·김근찬·이범석·박의남. 뒷줄 왼쪽부터 이영수·이영학·이흥렬씨 등이다. 현재 이영수씨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
虎林 2대대와 3대대
虎林부대는 北派임무를 수행한 5·6대대 외에도 2대대와 3대대가 있었다. 훈련은 5·6대대와 같이 받았지만, 임무는 서로 달랐다. 5·6대대를 지원하는 성격이라고 할까.
3대대는 1949년 6월24일 당시 美軍 탄약부대 자리(나중 「보병학교」로 바뀜)에 있던 경기도 시흥에서 출발해 軍 수송차량으로 강원도 횡성에 도착한 뒤 7월2일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38선 접경 국군 주둔 지역이 인민군에 피습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대원 전원이 불암嶺 방향으로 이동, 인민군 2개 대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5·6대대가 전멸당한 뒤인 7월19일 육본으로부터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져 7월22일 용산에 있던 본부로 이동했다.
2대대는 3·4·5대대와 달리 서해상 쪽 작전이 主임무였다고 한다. 1949년 8월초 대원들은 평남 진남포 서남쪽에 위치한 椒島(초도)에 침입, 정치공작 활동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북한 요인을 납치하거나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백령도 용기포港에서 출항해 적지 장산포 앞 해상을 거쳐 椒島해안에 도착, 어부들로부터 군사정보를 듣고 북한군 경비상태를 확인한 뒤 남하했다. 이후 한 차례 더 월경했지만 북한과의 교전은 없었고 다만 총기오발 사고로 대원 1명이 사망했다.
2·3대대가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5·6대대가 작전에 실패해 대원들이 인민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작전계획이 노출됐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게다가 당시 인민재판은 북한 측 라디오를 통해 실황 중계될 정도였고, 남한 쪽에서도 북한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美 고문관들, 「3차 세계대전 일어난다」
작전 중 동료들과 함께. |
2대대 1중대장 출신인 金東植(김동식·80)씨의 증언이다.
『2대대가 경기 시흥에서 훈련받고 있는데 6대대 李英秀가 부대 한쪽에서 고개를 숙여 울고 있더라구요. 얼굴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얘기할 수 없어」라며 눈물만 흘리더군요.
당시 북한방송을 남쪽에서도 들을 수 있었어요. 북한이 대대적으로 虎林부대의 北派작전을 비난했고, 생포된 대원들의 목소리가 방송으로 흘러나올 정도였어요. 우리 국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이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美軍 고문관들까지 나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며 난리를 쳤어요. 軍 당국으로선 당황스러웠지요. 그래서 2·3대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虎林부대는 서울 용산 삼각지 소재 보병 제17연대가 주둔하고 있던 兵舍(병사)로 집결, 육군 정규군으로 재편성된다. 당시 軍 당국은 虎林대원들에게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아라』고 명령, 편입을 원치 않는 대원들을 제외시켰다.
1949년 9월 초 虎林부대는 잔여대원들과 일반 현역지원자를 입대시켜 「육군 영등포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1개 대대로 재편성,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영덕·강구·포항 전투와 팔공산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北派 유격대인 虎林부대의 대원들. 1949년 6월 말 직접 北派됐던 5·6대대 대원들 중 상당수가 사망, 현재 생존자는 6명에 불과하다. 2·3대대 대원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
아무런 보상 받지 못해
생존한 5·6대 대원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남은 40여 명의 대원 중 대부분은 늙고 병든 채 생을 마감했다. 겨우 6명(2명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만이 노구를 이끌고 대구와 인천, 강릉, 충남 서산에 흩어져 외롭게 살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보상을 받지 못했다. 나라가 이들을 버렸지만 한국전쟁 이전에 北派됐다는 이유 때문에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채 지내왔다.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는 억지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50여 년간 함구하며 지내온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관련 기록들도 사라져 버렸다.
군번 없는 군인들의 戰史는 이후 「호림유격전우회」가 결성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2·3대대 대원들이 중심이 돼, 흩어졌던 5·6대대 대원들을 불러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정부 지원을 받아 1986년 9월30일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통일안보 공원內 「호림유격군 전적비」가 세워졌다.
전적비를 세울 당시 외무부는 6·25 북침자료로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건립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반대했고, 내무부와 국방부 역시 「북괴가 악용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처리하라」고 건립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안기부가 「북괴악용의 실보다 안보의식 고취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해 그 뜻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전사자들이 국립묘지에 묻히기까지는 다시 7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3년 지난한 병적 확인 작업을 거쳐 전사자 174명(장교 2명, 사병 172명)이 국립 현충원에 봉안된 것이다. 숨진 지 54년 만에 겨우 신원을 회복한 셈이다.
하지만 몇 해 전 결성된 호림유격전우회(회장 黃輝成)가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육군 첩보부대(HID) 창설 이전에 구성돼 유격전 등에 종사한 경우는 보상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음은 2004년 12월5일 국방부가 장관 명의로 호림유격전우회에 보내온 공문의 일부다.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 관한 법률은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특별한 내용·형태의 정보수집 등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를 위한 특별한 희생이 요구되는 활동)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을 받은 자를 보상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관한 법률시행령」 제2조에 외국군에 소속되었거나 군 첩보부대의 창설 이전에 구성돼 유격전 등에 종사한 경우는 이를 제외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입법 취지 고려시 보상대상에 포함될 수 없음을 통보해 드립니다>
육군 첩보부대, 즉 HID는 한국전쟁 당시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1951년 3월 독립시켜 발족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전 육군 정보국 직속 특수부대로 발족한 虎林부대는 보상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제5육군병원에서 치료 중인 호림부대원. |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돼 보상에서 제외
黃회장의 설명이다.
『虎林부대는 한국전쟁 전인 1948년 12월7일 대통령령 제37호에 의거, 창설됐으며 당시 4개 대대가 38선 이북 땅인 국사봉·노전평·북암령·초도 등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虎林부대 창설이 한국전쟁 이전이라는 이유로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엄연히 대통령령 37호에 의거해 창설됐고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이었습니다.
국방부·보훈처·국회 등에 수차례 걸쳐 건의했지만 「관련 규정에 없다」 혹은 「유족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정보부대도 없었고 北派 보상규정도 제정되지 않은 채 虎林부대가 처음으로 北派됐습니다. 당시 부대원 전원이 이북 출신으로 독신으로 월남한 열혈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유족이 있을 수 없겠지요』
2대대 중대장 출신인 金東植씨는 虎林부대가 北派 당시 육군이 여러 보상을 약속했었다고 회고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육군 본부에서는 대원들에게 「당신들이 작전을 무사히 수행하고 귀환할 경우 가족들의 생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대장은 소령, 중대장은 대위, 소대장은 소위, 사병은 상사나 준위의 계급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원들은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사선을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50년 넘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5대대 중대장 출신인 金鍾翊씨는 北派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생존한 부대원들과 함께 육군참모총장 蔡秉德씨를 만났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생존한 동료들과 함께 蔡총장을 만났습니다. 그분 말씀이 「고생했다」며 얼마간의 돈을 주면서 「지방으로 내려가 있어라. 나중에 부르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생존자들의 근황_대구의 崔漢鵬씨
6대대 대원이었던 崔漢鵬씨. |
北派됐다가 살아남은 6대대 대원 崔漢鵬(최한붕·79)씨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 내려갔다. 그는 만촌동 청구시장 옆 작은 사찰(관등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아내 韓順模(한순모·73)씨는 비구승이었다. 崔씨는 현재 치매를 앓고 있어,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虎林부대 얘기를 꺼내자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했다.
아내 韓씨는 崔씨가 평생을 직업 없이 살았다고 했다. 전쟁 당시의 악몽 같은 체험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식구들을 괴롭혔고 매질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업으로 알고 부처님을 의지해 살다가 1990년 서경보 스님의 30번째 제자로 법문에 귀의, 「관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녀의 말이다.
『「전쟁병」 때문에 남편은 아무 일도 못 했습니다. 사람 죽는 모습을 보고 놀라 마음에 병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무섭다며 좌불안석,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심할 때는 「총 들고 일어서」 라며 식구들을 세워 놓고 매질을 하곤 했어요. 자다가도 악몽을 꾸었는지 벌떡 일어난 적도 많았습니다.
정신이 온전할 때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았나」하면서 울곤 했지요. 불쌍한 사람이지요. 저는 살기 위해 옷·건어물 장사 등 안 해 본 보따리 장사가 없습니다. 결국 중이 돼 기도로서 살게 됐습니다. 독한 여자라면 벌써 도망을 쳤겠지만 부처님을 믿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韓씨는 남편이 원망스럽지만 나라도 원망스럽다고 했다.
『남편은 스물여섯 살에 제대한 뒤 반병신처럼 살았는데 나라에서 너무 몰라 주니 정말 억울합니다. 몇해 전 남편을 데리고 육군본부를 찾았지만 虎林부대에 있었다는 병적기록이 없어 보상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5대대 중대장 출신의 金鍾翊씨는 현재 강릉에 살고 있었다. 기자를 만나기 1주일 전 그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버스와 부딪혀 찰과상을 입고 병원신세를 졌다고 했다.
강릉의 金鍾翊씨_『戰史에 기록되길』
5대대 중대장 출신의 金鍾翊씨. |
金씨에게 虎林부대는 잊지 못할 상흔이다. 일본 관동군 수송병 출신인 그는 광복 후 북한 인민군의 입대권유를 뿌리치고 월경, 강원도 주문진에서 결성된 서북청년회에 가담했다. 당시 서북청년회 위원장은 虎林부대 5대대장인 白義坤이었다.
『서북청년회에서 계림유격대를 조직해 공작활동을 하던 어느 날 白義坤 위원장이 육군본부에 갔다오더니, 「계림부대가 육군 정부4국에 들어가게 됐다」며 「희망하는 자는 오라」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이후 육군 水色학교에서 2개월 동안 유격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을 마친 그는 1949년 6월24일 서울을 출발, 나흘 뒤 38선을 넘어 북방 60여km 가까이 진입, 내금강 국사봉 삼각고지를 점령했을 때 敵 3개 사단과 맞닥뜨리게 된다.
『대대장 이하 전원이 TNT를 안고 장렬한 최후를 다했습니다. 어찌 돌아갈 수 있을 거냐며 죽고자 다짐했지만 저는 살았고, 아직 눈을 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후 해상특수공작대에 편입돼 해군 묵호경비부대에서 對北(대북) 공작원으로 활동했고, 육군 보병8사단 소속 금강유격대, 美 극동사령부 도치라이트 부대에서 훈련 중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金씨는 현재 참전용사로 月 7만원씩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을 언제부터 받았는지 물어보니 지난해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쯤인가, 제 병적증명서를 떼보니 계급도 없고 입영날짜도 1949년 9월14일로 기재돼 있더군요. 하도 화딱지가 나서 육군본부에 찾아가 虎林부대 활동 경력을 담은 서류를 내미니 담당자가 「군인 할아버지군요」 해요. 그러더니 7만원씩 연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병적증명서를 보니, 병과도 전역날짜도, 전역사유도, 軍 경력사항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육군 정식군번이 아닌 호국군번(8500422)이 적혀 있었다.
『우린 자발적으로 전투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외면하고 정부가 몰라 주니 섭섭합니다. 지금 와서 보상을 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간 동지들의 신원을 풀어 주고, 동지들의 기꺼운 죽음을 戰史에 올려 달라는 것이에요』
인천의 李英秀씨_『죄책감으로 살아왔습니다』
6대대 소대장 출신의 李英秀씨. |
평양 출신의 李英秀씨는 인천 만수동 영세민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는 6대대 소대장으로 계급과 군번 없이 전투에 참여했다. 1949년 7월8일과 11일 양양군 서화리 가마골에서 두 차례 인민군과 교전 중 후두부와 우측 대퇴부 관절 부위에 총상을 입었고, 사투 끝에 몇몇 대원과 살아남았다.
『살아 귀환했다는 사실은 전사한 동지들에게 무거운 죄책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처절한 유격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그 얼굴들이, 죽어 가는 신음소리가 제 가슴을 멍들게 했습니다. 지금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부상당한 몸으로 귀환한 뒤 현역군에 再입대, 한국전쟁 당시 경북 우보지구 전투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 1952년부터 3년간 HID 요원으로 北派공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그의 몸에는 10여 개의 파편이 등과 가슴, 머리에 남아 있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선 100m도 걷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1986년 12월 상이용사로 인정받아 매월 110만원씩 연금을 받고 있다. 그나마 그의 부상이 虎林부대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 셈이다.
『저처럼 부상을 당한 사람은 虎林부대 경력을 인정받아 연금이라도 나오지만 崔漢鵬씨처럼 외상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어요. 게다가 虎林부대 대원 대부분이 이북 출신으로 가족들이 모두 북한에 있습니다. 그러니 보상을 요구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그러나 동지들의 죽음까지 헛되이 잊어선 안 됩니다』
충남 서산의 姜五太_『애국심의 몫으로 돌려주세요』
6대대 대원이었던 姜五太씨. |
6대대 대원이었던 姜五太(강오태·89)씨는 충남 서산에 살고 있었다. 현재 거동이 불편해 외출이 불가능 상태였다. 고향이 평북 창성군인 그는 공산주의가 싫어 남하했고,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虎林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姜英勳(강영훈) 前 국무총리와 가까운 집안이다.
『양양군 서화리 가마골 전투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기암괴석이 많았는데 인민군 총알이 빗발칠 때 담배를 피우며 침착하게 반격을 했습니다. 한참 기다리니, 총탄도 그치더군요. 그때를 이용해 반격했고 인민군을 몰살시켰습니다. 이후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저는 열흘간 굶으며 후퇴해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그는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함께 살아 돌아온 동지를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120여 명이 38선을 넘어 여섯 명인가밖에 살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 물어보았다.
『전혀 받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보상을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애국심은 애국심의 몫으로 그냥 돌려줘야 합니다. 무슨 보상을 바란다는 겁니까. 그것은 애국심이 아닙니다. 만주 벌판에서 애국자가 얼마나 죽어 갔는지 아십니까. 그분들을 생각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7100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