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장 1-11절 하나님과의 화평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통보를 하였습니다.
남자는 가슴이 아팠지만 물러서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축하의 전보를 보내기로 결심 했습니다. 무슨 말로 축하할 것인가 고민하던 이 남자는 성경말씀으로 축복을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요한일서 4장18절” 이렇게 보냈습니다.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였습니다.
그런데 우체국에서 전보를 옮기면서 ‘요한일서’에서 ‘일서’를 빠뜨리고 전보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우체부가 전보를 들고 결혼식장에 도착했습니다. 극적인 분위기 연출을 위해서 축전을 사회자가 친절하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전보의 발신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한 가운데 전보 내용을 듣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요한복음4장18절 네가 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느나, 지금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나니니라.”
결혼식장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평화가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고, 내 마음에 화평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상처 받고 병드는 주된 원인이 화평의 관계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무병장수하는 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잘 먹고 잘 자는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투거나 원수 맺는 일이 없고, 자기 마음도 항상 넉넉한 평화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화평의 관계와 마음의 화평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필수조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두 가지 화평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입니다.
둘째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입니다.
십자가를 설명할 때 수직선은 하나님과 화평을 상징하고, 수평선은 사람과의 화평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입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화평은 믿음으로 얻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으니 그 화평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인 줄 믿습니다. 오늘 주일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1장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라는 말은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서 왕에게로 나아가 알현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엡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직접 대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단 한 명 대제사장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딱 한 번 있습니다. 그는 온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의 피를 언약궤 위에 부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날을 위해서 하루하루 말씀과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하며 지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게 되면 지성소에 들어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갈 때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에는 옷에 방울을 달고 허리에 줄을 매고 들어갔습니다. 만약 죽게 되면 그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체를 거두려고 지성소에 들어갔다가는 그 사람도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일반성도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가능했습니다. 제사장의 중보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제사장을 중보자로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사람들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와 특권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은혜를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가톨릭은 신부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신부를 구약적인 개념으로 설정해 놓고,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필수적인 중보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가톨릭의 고해성사 제도와 신부의 제사장적 역할입니다.
가톨릭의 신부와 개신교의 목사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는 목사에게 가톨릭이 더 우월하다고 뽐내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면 반드시 비서관을 통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 신부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비서관입니다.”
그러자 개신교 목사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까?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자녀들은 비서관을 거치지 않고서도 대통령 아버지를 직접 만날 수 있겠지요. 개신교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만난답니다.”
어떤 말이 더 성경적인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영생을 얻었고, 천국의 시민권을 얻은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도 천국도 모두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가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2장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평을 아는 사람들은 환난도 즐거워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바울은 이것을 풀어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의 고난이나 환난은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여 더 좋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게 섭리하십니다.
인도의 선교사 윌리암 케리는 여러 해 동안 인도 말을 배워서, 인도의 문법과 사전을 저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귀중한 원고를 아직 인쇄도 하기 전에 화제가 나서 그 원고가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다시 그 책을 고쳐 저술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전에 여러 번 정치에 실패하였습니다.
한 번은 일리노이 주에서 입법을 위해 일하다가 실패했고, 그 다음은 정치 활동에 나아가 활동하다가 세 번이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환난과 인내는 성공의 첫 경험이었습니다.
2018년 작년에 동계올림픽이 끝났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메달을 딴 선수들은 더 큰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들의 영광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훈련을 하면서 인내하고 연단을 이겨냈기 때문에 얻게 된 상급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환난을 받는 것은 마치 운동선수가 상급을 바라보고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해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제3장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진정한 평안을 주십니다.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마귀가 구원 받은 성도들을 공격할 때 그들의 목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마음속에 화평을 잃어버리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잃어버리면 마음에 평안이 없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은 환난을 당해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 퇴출을 당해도, 사업이 망해도, 사고를 당해도 다쳐도, 병에 걸려 앓아누워도 마음이 즐겁습니다. 분명히 어려운 일을 만나서 마음이 괴롭고 힘들어야 하는데, ‘목사님, 마음에 편해요.’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이 복이라고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악한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전신갑주를 살펴보면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에 쏙 드는 것은 평안의 복음의 신입니다.
엡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마귀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평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평안한 마음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때 주시는 마음입니다.
임종이 가까운 어느 권사님에게 교회 목사님이 찾아가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권사님 죽음이 두렵습니까?” 권사님이 대답합니다. “죽음이 두렵다니요. 하나님 품으로 가는데!” 또 목사님이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글쎄요, 두려운 까닭이 없지 않나요?” 목사님이 다시 묻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정말 두렵지 않습니까?” 재차 다짐하면서 물었더니, 권사님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면서 “나는 죄 많은 여자이지만 나를 위해 주께서 보혈의 피를 흘려 내 죄를 용서하시고, 화평을 이루어 놓았으니 나는 그 화평 속에 들어가 쉬기만 하면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 놓은 것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문에 <경아의 오른팔>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고 3년생의 꿈 많은 여고시절에 “단백질이 빠져나가는 신증후군”이라고 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였는데, 그는 중환자실에서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힘든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의 오른팔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팔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수술 후 그가 찍은 사진에서 ‘오른팔은 잘리 운 채,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밝게 웃고 있는 그녀의 평안한 얼굴’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설명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팔을 절단하러 들어갈 때도 평안했다” 고 고백하는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평안입니다. 정말로 신비한 평안입니다. 잔인하리만큼 갈기갈기 찢긴 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그토록 평안하게 붙들고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제4장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은 ‘은혜에 들어감’에 축복을 얻습니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면 그때부터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은 몇 가지 구체적인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은혜에 들어감’에 축복을 얻습니다.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앞으로 직접 인도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대제사장도 필요 없고, 교황이나 신부의 고해성사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직접 하나님께 나가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환난을 당해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환난이야말로 더 큰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면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장로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복을 받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