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生寺彌助 - (부츠죠오지 야스께)
막부 말기의 에도에서 가장 많이 제자를 모으고, 번영한 검술유파로
北辰一刀流, 神道無念流, 鏡心明智流가 알려지고 있다.
어느것이든 쿠미다찌(組太刀) 연습을 줄이고, 넓은 도장에서 서로 치기를 하는 죽도 연습을 중시한 신흥 유파었으나, 실력은 발군이었다. [位는 토리이(桃井)], [技는 치바(千葉)], [力은 사이또오(齋藤)]라고 불리면서, 이들 에도(江戶) 3대도장의 번영은 시중의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3유파가 성대해지기 이전의 에도에서는 直心影流와 一刀流의 도장만이 번창하여 다른 유파의 도장에는 제자가 모이지 않고, 경영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직심영류가 번창한 것은 上泉이세노카미 이래의 新陰流(신카게流)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군가 사범인 야규우家는 히다노카미 宗冬(무네후유) 다음에는 다이묘(大名)로 들어가고 말아 검도의 계통을 이어갈 실력을 갖춘 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카게류 문하에서 長沼四郞左衛門이 나와 유파를 직심영류라고 고치고, 쿠미다치 연습을 그만두고 죽도 검법으로 바꾸어 눈부신 융성을 보였다.
오노(小野)파 일도류에서는 2代인 中西忠藏子武가 죽도검법을 채택하고, 그 뒤 4代에 걸쳐 번영하고 있었다.
직심영류와 일도류가 에도를 풍미하는 기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은 어느것이나 막부의 어용병법으로서 장군가의 비호를 받아 온 긴 전통과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2유파는, 일본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장군가의 弟子 誓約 文書의 권위가 어디까지나 쇠퇴하지 않아, 전국 여러번의 무사가 기대하는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시세의 흐름에 새로이 나타난 이들 新興 세 유파는 당연히 아주 심한 도태(淘汰)를 견뎌내온 실력파였다.
토리이, 치바, 사이또오가 옛날부터의 2大유파에 대항하여 입문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다양한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은 입문자를 신분에 따라 나누지 않고, 기량이 떨어진 자도 버리지 않았다.
소질이 뛰어난 제자는 물론 열심히 지도했으나, 검술의 재주가 없다고 확신이 선 자에 대해서는 특히 세심하게 지도한 것이었다.
[力은 사이또오]라고 할 정도로 타류 시합에 강하고, 거친 연습으로 유명한 사이또오 도장도 무사와 시민, 농민의 차별을 전혀 하지 않는 밝은 기풍의 도장이었다.
神道無念流는 野州 都賀郡 藤原(후지와라)村 출신의 무사인 福井平右衛門(후꾸이다이라 우에몽)이 열었다.
그는 처음에 일원류(一圓流)를 배우고, 뒤에 信州의 飯綱權現에게 소원을 빌어 神의 도움으로 開眼했던 것이다.
무념류라고 하고 있으나, 念阿彌慈恩이 연 念流와는 관련이 없다.
후꾸이다이라는 에도에 나와 도장을 열었으나, 입문자가 적어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제자인 토가자끼熊太郞暉芳은 武州 淸久村의 부자집 아들이었으나 스승의 어려운 처지를 보지못해 고향에 스승을 모시고 가서 일생을 안락하게 지내게 해주었다.
1778년 熊太郞은 다시 에도에 나와 기꾸쪼(麴町) 2번쪼(町)에 토가자끼도장을 열었다.
어떻게 하든지 스승의 유파를 세상에 퍼뜨리고 싶었던 그의 열의는 우연한 사건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도장을 열고 5년후인 1783년 大橋富吉이라는 농민 출신의 제자가 行元寺 경내에서 아버지의 원수인 니노미야를 벨때, 熊太郞이 모든 제자를 거느리고 도움칼을 해주었으므로 세간에 이름이 들리게 되었다.
行元寺의 원수 갚기싸움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이 토가자끼도장 제일의 강호로 알려진 오까다(岡田)十松吉利였다.
그는 熊太郞의 고향에 가까운 스나야마 村 출신의 무사로서 유서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13세때부터 野州 都賀郡에 사는 토가자끼熊太郞의 제자인 마쓰무라 겐로쿠(松村源六)에게서 검을 배웠는데 15세에 에도에 나와 토가자끼熊太郞의 도장에 입문했다.
키 6척, 힘은 두사람의 힘이라고 했는데, 온화한 성격으로 예의를 가릴 줄 아는 영리한 미소년이었다.
입문후 3년만에 목록을 허가받아 22살 때 免許皆傳을 얻었다. 토가자끼는 타류시합을 바라는 자가 찾아오면 오까다 十松을 내세웠다.
오까다는 어떠한 상대가 와도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3년간의 사범대리를 한 후, 신도무념류 3대를 잇게 되었다.
성질이 온후하고 무예자들 사이에서도 드물게 보는 인격자였으므로 제자들의 신뢰를 받았다.
문하생에는 다이묘 여러집안, 하타모또의 자제들이 운집하였다.
水戶의 후지타, 이즈(伊豆)의 代官江川, 와타나베등이 그 가운데 있었다.
오까다의 문하에는 걸출한 인재로서, 스즈끼(鈴木斧八郞), 사이또오(齋藤彌九郞)가 있었다.
스즈끼는 뒷날 스즈끼派 무념류를 열어 일파를 새로 세웠으나, 사이또오는 그냥 문하에 머물렀다.
사이또오는 오까다가 만년에 들어 얻은 제자였다.
그는 엣쮸우(越中)國 氷見郡 佛生寺村의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信道라하며, 보통 新助(신스케?)라고 했다. 가계(家系)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가(加賀)國 호족인 사이또오의 혈통에 연결되는 名家였다.
1810년 13살 때 高岡의 기름가게에서 일했으나. 가끔 藩의 주인인 마에다(前田)의 에도 上京대열을 보았다.
천명이 넘는 행렬이 위의를 반듯이하여 대오당당히 소리지르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는 남아의 일생을 시골에 묻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무일푼인채로 집을 뛰쳐나와 여러가지 고생을 겪은 뒤, 에도에 나오자 고향의 인연있는 하타모또(旗本)의 집안 신하가 되어 이윽고 오까다 十松의 문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에가와(江川), 후지타(藤田), 와타나베(渡邊)등 동문의 사무라이들과 친하게 사귀며 격검 연습에 열중함과 동시에 兵學은 平山子龍, 淸水俊藏에게, 馬術은 시나가와(品川)吾作에게서, 그리고 서양의 대포술을 高島秋帆에게서 배웠다.
문무에 뛰어났던 사이또오는 침식을 아끼면서 노력한 노력가였다.
검술의 진보도 눈부시어 3,4년의 수행으로 무수히 많은 선배를 뛰어넘어 사범대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오까다十松이 1820년 졸도하여 급서한 뒤, 스승의 도장 격검관의 운영을 위임받게 되었다. 오까다의 장남인 熊五郞利貞이 2代째를 이었는데, 검의 기량은 아버지를 능가할 정도임에도 마음에 들지않는 제자에게는 가르쳐주지 않는 名人의 기질 때문에 도장경영에 적합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이또오는 6년간 격검관도장의 인기를 올려놓은 뒤, 에가와(江川)등의 진언에 따라 1826년 독립하여 練兵館 도장을 열었다.
飯田(이다?)쪼오(町)에 세운 도장은 1838년에 불타 3번쪼오에 이전했다.
그사이에 신도무념류 총본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융성을 구가했다.
연병관은 개관 다음해 격검관의 2代 사범인 十松利貞이 연병관에 찾아와 머물렀다.
그는 그의 격검관 경영을 싫어해 제자인 利章에게 十松3代를 물려주고 연병관의 食客을 희망해온 것이었다.
稀代의 명검사를 맞아 사이또오는 감격하여 利貞을 연병관 대사범으로 대우했다.
제자들에게는 그를 隱居先生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때 은거선생은 34세였는데 그 뒤 30여년에 걸쳐 연병관의 인재를 육성하게 된다.
검의 솜씨에 있어서는 사이또오가 평생 10판 승부 가운데 4판의 승리를 얻었을 뿐이라고 알려질 정도의 利貞이었다.
사이또오의 장남인 신따로(新太郞), 3남 歡之助를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劍豪로 키워낸 그는, 참으로 실력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라고까지 불렸던, 검의 천재, 佛生寺彌助虎正(이하 편의상 '야스께'로 번역함)도 세상에 만들어내었다.
야스께는 사이또오의 고향인 氷見 佛生寺村의 농민인 彌兵衛의 아들이었다.
16살 때 에도에 나와 연병관의 하인으로서 묵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으면 도장안의 연습하는 것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隱居先生은 그에게 물었다.
[너는 항상 도장을 보고 있는데 검술이 좋으냐?]
[예. 죽도소리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사이또오님께 부탁해 에도에 온 것은 검술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관장에게 물어보아 주지. 만약 관장이 좋다고 하면, 내가 검술을 가르쳐주어도 좋겠지]
은거선행은 사이또오에게 말을 넣어, 허가를 얻어주었다.
[허락했으니, 지금부터 가르쳐 주지. 도구를 갖추고 도장으로 와.]
연습을 하여 검술의 초보를 가르쳐주니 야스께의 劍 놀림은 은거선생도 눈을 둥그렇게 할 정도였다.
[음, 내가 격검관 이래 연습을 시켜온 제자의 수는 많다. 아마 몇 천명이 될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이만큼 재주가 뛰어난 녀석은 없었다]
천재형인 은거선생은 야스께에게 하인의 일을 그만두게 하고, 밤낮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검의 기술을 가르쳤다.
야스께는 글을 몰랐으나, 은거선생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배워 2년여의 기간에 연병관을 대표할 정도의 솜씨를 지니게 되어 免許皆傳을 얻었다.
보통 면허를 얻는데 빨리 얻는자가 7,8년을 요하는 데 야스께의 진보는 참으로 드문 것이었다. 나이는 아직 18세, 사이또오의 장남인 신따로는 21세, 셋째 아들인 歡之助는 16살이었다.
신따로는 늘 야스께에게 공부를 권했다.
[자네와 같은 솜씨가 있으면, 어떠한 다이묘집안의 사범으로 추천하여도 훌륭하지만, 학문이 없으면 사람들의 스승으로 설 수가 없다. 문자를 모르는 자는 말하자면 半인간일 뿐. 지금부터는 학문에 몸을 던지게] 무사가 되기위해서는 야스께라는 이름만으로는 모양이 서지 않는다고 하여, 고향 佛生寺 村을 기념하여 불생사를 성으로 하기로 했다.
그의 검솜씨는 날이 감에 따라, 더욱 날카로움을 더해 실력은 사이또오 신따로, 歡之助형제를 월씬 뛰어 넘는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글씨는 전혀 진보하지 않았다.
히라가나조차 만족하게 기억하지못하고, 모처럼 지어받은 자기 이름조차 쓸 수 없었다.
[야스께, 자네는 도장 연습은 적당히 하고, 좀 글 쓰기를 배워!] 라고 은거선생조차 말할 정도로 야스께의 글씨 싫어하기는 대단했다.
당시, 야스께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알려졌던 사이또오 신따로, 歡之助형제의 솜씨는 어느정도였을까?
우선 신따로는 1847년 20살에 은거선생으로부터 무술의 비결을 배우고, 무사 수행의 여행을 떠났다.
高弟인 후지따(藤田), 유리(百合)등 9명을 데리고 동북을 돌며, 여러지방에서 시합을 하여 무적의 전과를 올렸다.
1848년 정월에는 에도에서 지냈으며, 2월초에는 츄우고꾸(中國), 큐우슈(九州)에 여행했다.
長州藩 萩城에 도착한 것이 3월 초순이었다.
藩의 도장인 明倫館은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신따로등은 거기서 번의 무사들을 상대로 타류시합을 하였다.
시합은 간단하게 전승으로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유리가 부주의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과연 도장은 훌륭하나, 이것이라고 할 정도의 솜씨있는 자가 한사람도 없지 않은가. 이래서는 금으로 만든 새장에 참새를 키우고 있는 것과도 같다]
현관까지 전송하러 나와있던 번의 무사가 유리의 말을 귀에 듣고 격노했다.
[우리들을 모욕하는 말을 뱉은 사이또오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내서는 안된다. 한사람 남기지 말고 희생의 제물로 하자]
젊은 무사들이 무리를 지어 신따로 일행의 숙소를 습격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老臣들은 중지시키려 했으나, 듣지 않기 때문에 신따로에게 급히 알렸다.
일행은 그날 밤 난을 피해 큐우슈로 여행을 떠났다.
혈기넘친 번의 무사들은 신따로등의 숙소를 습격했으나,
노리던 상대가 없었다. [이녀석들을 놓쳤다면, 에도에 가서 연병관을 쳐 부수자] 藩에서 굴지의 솜씨를 지닌 來島又兵衛, 山尾庸三등 난폭자 40여명은 藩廳에 여행신고서를 내고 즉시 에도에 올라갔다.
도착하자 여행의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3번쪼오의 연병관에 가서 타류시합을 신청했다. 3월도 하순에 가까워 따뜻하게 맑은 날의 아침이었는데,
신따로의 아버지인 사이또오 彌九郞은 외출중이었다.
長州번의 무사들은 명륜관 도장에도 뒤지지 않는 굉장한 연병관의 깨끗이 닦은 도장의 마루바닥에 앉자, 삼엄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정숙한 태도를 되찾았다.
도장 정면에는 카또리(香取)카고시마의 수호신인 거울이 희미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도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20쌍 정도의 문제가 죽도를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은거선생은 장주번의 무사들이 대거 시합을 구해온 것은 보통일이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歡之助, 오늘의 시합은 드물게 상대가 많구나. 야스께에게 조금 도우게 할까?] 은거선생은 우선 신중하게 야스께에게 시합을 시켜, 상대의 솜씨를 알고,
그뒤에 歡之助로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사람을 내어서 요리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우선 없다.
歡之助는 거절했다. [나 혼자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스께는 대기시켜 주십시요] 歡之助는 호구를 챙겨 죽도를 쥐고 도장에 나갔다.
키는 5척7촌이나 되지만 아직 얼굴은 소년이었다.
장주번의 무사들은 환지조가 너무나도 어렸기 때문에 맥이 빠졌으나, 사이또오 집안의 3남이라고 듣고는 투지를 불태웠다.
歡之助는 머리와 손목을 착용하고, 허리는 착용하지 않았다. 來島又兵衛가 물었다.
[귀하는 왜 허리를 착용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양없이 허리를 친다네]
환지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허리를 착용하지 않아도 좋다] 놀림을 받았는가 하고 노기를 폭발시킨 장주번의 선봉이 환지조와 칼끝을 교차하고 뛰어들려는 기색을 보임과 동시에 목에 열화와 같은 찌름을 먹고, 큰 대자로 무너졌다.
두사람째, 세사람째도 움직임을 보일 틈도 없이 찔려 쓰러졌다.
어느 새 13명이 한판 승부에서 서로맞춘듯이 찌름을 먹고, 그대로 패배했다.
주장인 來島는 어떻게하든 한판을 따고 싶어하여 조심하며 달려들었으나, 이것도 위험하게도 목젖이 찢어지는 듯한 찌름을 먹고는 마루에 엎어졌다.
당시의 죽도는 약간 두꺼운 先革을 사용하여 그 끝을 베어내어 뾰줏하게 했기 때문에 찔리는 쪽은 피부가 찢어지고 목이 부어올랐다.
이 시합으로 歡之助의 검명은 에도 시중에 널리 퍼졌다.
연병관의 鬼歡(귀신 환지조)의 찌름을 막을 자는 없고, 그의 허리를 칠수 있는 자 없다고,
과장하여 선전하는 자가 제자들 사이에 있었다.
歡之助는 차츰 자만하게 되었다. 한편 형인 신따로는 가는 곳마다 적이 없어 큐우슈 여러나라의 여행을 마치고, 신도뮤념류의 진가를 보였다.
그가 승리를 얻은 상대가운데는 전성기의 오오이시(大石進)와 호각으로 싸웠다고 하는 體捨流의 뛰어난 인물인 다나까(中田幸助)도 있었다.
그들은 큐우슈에서부터 돌아오는 길에 장주번의 심부름꾼과 만나고, 藩主인 모리(毛利敬親)의 간청으로 萩城에서 영접받았다.
신도무념류의 실력을 안 장주번은 신따로를 명륜관 도장의 사범으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년반을 長州에서 보내며 번의 무사들의 훈련을 맡았다.
야스께는 신따로, 歡之助 형제의 그늘에 있어서, 눈에 뜨이지는 않았으나, 시합에서는 패배한 일이 없었다.
단지, 신따로와 歡之助에는 간단히 패배하는 것이다. 문자를 배우지 않아 무학인 것은 여전했으나, 20살 때 사범대리를 맏고 있었다.
단지 문맹이기 때문에 정식 사범대리는 아니었다.
은거선생은 야스께의 솜씨가 신따로 형제를 능가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야스께가 두사람에게 지는 것은 은인인 사이또오彌九郞의 자식에 대한 1보 양보였다.
틈이 있을 때는 언제나 기숙사 방에서 누워 뒹굴던 야스께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常陸笠間(히따치)藩의 龍虎라고 불리던 카또리(香取)神道流의 小松恒三郞(코마쓰?)이 타류시합을 신청해 온 때였다.
그의 대도 씀씀이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사이또오彌九郞와 歡之助는 부재중이어서 고제들이 상대했으나 모두 일격에 쓰러졌다.
숙달된 선배들이 세살짜리 아이처럼 아무렇게나 맞고, 반격의 여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제자 한사람이 기숙사에 있던 야스께에게 급히 알렸다.
[좋아. 알았다. 곧 가겠다]
야스께는 도장으로 갔다.
코마쓰는 호구를 착용한 채로 도장의 중앙에서 다음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스께는 옆에가서 말했다.
[기다리게 했네. 그러면 즉각 10판 승부를 겨루자]
코마쓰는 야스께를 유명한 鬼歡으로 알고 기세좋게 마주섰다.
한판째, 야스께는 좌상단을 취했다.
코마쓰는 靑眼이다.
서로 움직임을 살필 틈도 없이 야스께는 손쉽게 죽도를 날렸다.
연기가 일어나는듯이 보기좋게 머리가 맞아 들어갔다.
두판째도 야스께는 같은 자세를 취하고 코마쓰는 상단을 취해 공격하려고 내디딘 순간,
두눈에서 푸른 불꽃이 튈 정도로 확실하게 머리를 빼앗겼다.
3,4,5판 모두 머리를 빼앗겼다.
야스께의 움직임은 변하지 않았다.
코마쓰는 여러가지로 자세를 바꾸고, 거리를 바꾸었으나, 그대로 움직임을 봉쇄당해 10판 전부 머리를 맞고 참패했다.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야스께의 싸우는 모습을 본 은거선생은 그의 깊이를 알수 없는 힘을 엿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1851년 6월 초순. 19살의 歡之助는 에도 시내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연병관의 인기있는 인물이었으나, 중요한 타류시합에서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상대는 北辰一刀流 千葉周作(치바슈우사꾸)의 둘째 아들인 榮次郞(에이지로오?)이었다.
치바 슈우사꾸의 작은 텐구(天狗)라고 불리던 그는 환지조와 같은 나이였는데 여러 다이묘의 저택에서 개최된 격검 시합에 가끔 나가서 劍名은 높았다.
歡之助는 언제나와 같이 하얀 연습복에 검은 하까마, 허리(甲)를 착용하지 않고 시합장인 치바도장 玄武館에 갔다.
에이지로오은 하얀 연습복, 하얀 하까마에, 日月의 문양을 금으로 그린 검은 허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승부는 3판으로 하기로 했다.
歡之助는 허리를 착용하고 있지는 않으나, 연습복 밑에 여자 옷의 넓은 띠를 몇겹으로 감고 있었다.
첫판은 서로 청안으로 대결했다. 서로 틈을 엿보아 간격을 줄여간다.
머리를 치려고 검선을 올린 에이지로오의 목에 환지조의 화살과 같은 찌르기가 들어갔으나, 에이지로오는 상체를 활과 같이 뒤틀어 패하면서 맹렬한 허리치리를 가했다.
두판째는 에이지로오는 상단, 歡之助는 청안으로 취했다.
서로 몇번인가 치고 들어, 도장의 넓은 바닥을 달리면서 주고받음을 한 결과 또 에이지로오의 상단 손목이 들어갔다.
세판째도 환지조는 청안이다.
최후의 한판에서도 찌름을 넣지 못하면, 면목은 엉망이 된다.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에이지로오에게 손목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제까지의 긍지에 흙칠을 하고 만 歡之助는 자만심을 버리고,
허리를 착용하고 은거선생과의 연습에 열심하게 되었다.
3년 뒤, 1854년 환지조는 영지의 봉록 200석으로 肥前大村(비젠오오무라?)藩의 검술사범으로 발탁되었다.
22살이 되어 그의 실력은 형인 신따로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은거선생은 그가 비젠으로 떠나기 전에 치바 에이지로오와 시합을 시키고 싶다고 했으나,
신따로가 반대했다.
[지금이라면 歡之助가 이긴다]
[아니오, 모처럼의 출발에 앞서 만일 패하기라도 하면 이름에 손상이 됩니다]
연병관에서는 매일 환송 시합, 주연(酒宴)으로 기세를 올려 환지조의 밝은 출발을 축하했다.
오오무라번의 검술 사범이 된 그는 번의 무사들을 열심히 지도하여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오오무라번의 일도류 사범인 宮村久馬(미야무라)의 차남인 紫江運八郞은 門弟들 가운데에서도 출중한 존재였다.
오오무라번에서 1년을 보내고, 1855년이 되어 환지조는 久留米의 加藤田平八郞(카또오) 도장에서 큐우슈에서 무적으로 이름을 자랑하던 松崎浪四郞(마쓰자끼?)와 대전했다.
세판 승부 가운데, 처음 한판은 환지조가 찌름을 넣어 이겼다.
두판째는 마쓰자끼가 손목으로 이기고, 세판째는 격렬한 타격전이 되었다.
환지조의 특기인 찌름은 잘 들어가지 않고,
끝내 그는 몸받음으로 마쓰자끼를 쓰러뜨리고 머리를 치려고 했다.
순간 밑에서 휘두른 마쓰자끼의 죽도가 환지조의 허리를 쳐 궁지에 몰리면서도 어렵게 승리를 하였다.
큐우슈에서의 최초의 타류 시합의 패배는 환지조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치바 에이지로오에게 패배를 맛본 이후 중요한 승부에서 승리를 서둘러, 자멸하는 버릇이 붙어있었다.
큐우슈에서의 두번째의 타류 시합에서도 나쁜 버릇이 나왔다.
1856년 여름의 일로서, 상대는 周防岩國번의 무사인 宇野金太郞(우노)와 福原範輔(후꾸하라)였다.
우노는 츄우고꾸(中國)에서 마주 설 사람이 없는 달인이었다.
유파는 岩國 片山友猪에게 배운 片山流였으나, 에도에 나와 직심영류, 북진일도류를 수행한 일도 있었다.
그는 손목치기의 달인으로서 상대가 맞고 가볍다고 말하면, 즉시 제2타를 가해 맞은 사람은 팔이 부어올라 며칠간이나 괴로워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 치기 전에 머리, 찌름, 손목등으로 미리 말해 주지만 상대는 피할 수 없었다고, 山岡鐵舟 門下의 香川煇의 저서에 적혀있다.
옛날, 桂小五郞(카스라)이 우노의 도장을 방문했을 때 우노는 우선 카스라에게 손목을 빼앗겨 주었다.
[정확하게 한판 얻었네. 그러면 나의 손목도 감상하시게]
두번째는 우노의 손목치기가 들어가고, 카스라는 팔이 마비되어 죽도를 떨어뜨렸다.
그는 그대로 죽도를 쥘 수없게되어, 숙소에 돌아와 수일간 아파서 침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환지조는 우노등의 방문을 받고, 우선 제자를 상대로 내세웠으나, 후꾸하라는 문제로 하지 않았다.
환지조는 후꾸하라와 다섯번 승부를 겨뤘으나, 처음과 두번째를 잇따라 빼앗겨 남은 세판을 겨우 찌르기와 머리치기로 이겨 승리하였다.
환지조의 시합을 보고있던 우노는 처음부터 공격으로 나왓다.
5판 승부에서 환지조는 허리 2판과 손목을 잇따라 맞아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환지조는 시합이 끝남과 동시에 에도의 은거선생에게 편지를 내었다.
우노에게 설욕하기 위해 야스께를 급히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환지조는 뽐내던 것을 버리고 야스께의 원조를 청하여 어떻게 하든지 우노에게 이기지 못하면 오오무라번의 사범의 면목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야스께는 환지조의 요청을 은거선생으로부터 듣자말자 비젠을 향해 출발했다.
길을 서두른 야스께는 보름 뒤에 오오무라성에 도착했다.
수일 후 그는 환지조와 紫江과 함께 岩國(이와쿠니)성을 향했디.
우노는 큐우슈지방의 여행을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있었다.
[저번에는 일부러 오셔서 영광스러웠습니다만, 저의 不調로 보기싫은 시합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시합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노는 환지조의 말을 듣자 엷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은 좋은 마음가짐이다. 졸자는 몇번이든지 시합에는 응합니다]
그는 환지조의 뒤에 버티고 있는 야스께의 존재등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럼, 여기있는 야스께가 상대를 합니다. 이 사람은 에도 연병관의 助敎입니다]
환지조가 소개하고, 야스께가 손을 짚고 인사를 하자 우노는 상체를 뒤로젖혀 옆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야스께는 몸도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얼굴도 부드러웠다.
눈꼬리가 찢어진 우노의 얼굴에는 환지조 師弟를 경시하는 마음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있었다.
우노와 야스께가 준비를 갖추고 도장에 마주섰다.
[승부는 10판으로 합시다]
[좋아]
야스께는 갑자기 호탕한 좌상단의 겨눔을 보여 우노는 의외라는 표정을 비쳤다.
상단은 몸의 수비를 포기한 공격 일방의 겨눔이므로, 자기보다도 숙달된자에 대하여 취할 것이 아니다.
고약한 녀석이다, 라고 우노는 한호흡에 간격을 줄일려고 했다.
그때 번개와 같은 공격이 그의 머리위를 강타하고 있었다.
환지조의 제자 따위에게 왜 맞았는가 하고 우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혼란하여 2번째 승부를 시작했다. 이 미운 상대는 유연하게 같은 좌상단을 취하고 있었다. 우노는 좌로 돌면서 무아의 경지에서 손목으로 치고 들어갔다.
순간, 또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강타를 맞았다.
두판째도 패배. 이런일이 있는 것일까? 왜냐, 우노는 초조했다.
야스께는 좌상단의 겨눔하나로만 우노와 죽도를 서로 마주치지도 않고 세판을 얻었다.
우노는 머리로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4판째의 승부를 우노는 사퇴했다.
완전한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우노에게 환지조는 시합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저와 시합을 바랍니다]
[아니, 오늘은 상태가 나쁘다. 내일 할까?]
우노는 사퇴했으나, 환지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사의 용기를 내어 일어난 우노는 마주섰으나, 환지조와의 3판 승부에서도 비참한 3패를 맛보았다.
야스께의 강함이 어느 정도였던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배운것도 없이 주색에 몸을 상하여 저속한 생활을 거듭하면서 여러나라를 방랑했다고 한다.
信州路에서 桂小五郞(카스라)을 만난 때, 창독(瘡毒-매독)을 앓고 있었다.
시합을 신청받자 5판 모두 이겨 카스라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長州의 낭인패거리에 가입하여 尊王攘夷낭인으로서 활동했으나, 조악하고 난폭한 행동으로 인하여 쿄또에서 취해있던 것을 사이또오 신따로가 베었다기도 하고,
그 곳을 도망쳐 몸을 감추었다고도 한다.
신센구미(新選組)의 검호인 芹澤鴨이, 만나면 머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는 희대의 천재, 야스께의 생애는 1862년 32세로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