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사
송순은 어려서부터 영오하여 독서를 좋아하고 재예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글을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박상과 박우, 그리고 송세림과 송흠 등 당대 명사들의 가르침이다.
중종조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눌재 박상으로부터 종학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1,22세때의 일이다. 눌재가 갑술년(중종89년) 담양부사로 임지에 이르렀을 때 평소 엄준했던 그는 송순을 잠깐 보고도 문예가 대진할 것을 예견하고 크게 칭찬하였으며 송순은 또 평조에 이르되 학문하는데 힘입은 바는 실로 눌재 선생의 도움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그의 시에 「奉和訥齋先生祥贈僧韻봉화눌재선생상증승운」,「奉和訥齋先生韻」등이 있는데, 이는 섬겨오던 스승, 눌재의 시조에 화답한 시다.
눌재가 졸한 뒤에도 그는 항시 불우하게 타계한 스승의 처지를 잊지 못한 나머지 창회를 펴기도 했으니, 학문은 물론 인격 면에서 송순은 눌재를 사사하면서 받은 감회가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또 눌재의 아우인 육봉 박우에게도 사사하였다. 육봉은 박선생 또는 석헌선생이라 존칭하면서 섬겼던 것으로 전한다. 이 역시 눌재에게의 존경이 그의 동생에게까지 미친 까닭이다.
송순은 당시 사림들이 패할 때마다 이를 애통하게 여겨 왔다. 그의 「庚辰仲秋登無等山口號綠呈石軒善生경진중추등무등산구호록정석헌선생」은 이러한 심정을 노래한 시다. 이는 곧 28세때 가을 광주에 있는 무등산에 올라 노닐면서 석헌선생(박우)에게 준 글인데, 사림 눌재와 육봉형제에 대해 가졌던 사사의 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육봉과의 사이는 당대의 명사 성수침과 이황 등과 함께 도의지교를 맺고 지내던 가까운 친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순이 스승으로 섬기던 취은 송세림 역시 문명이 높은 문장가로서 소화집 「어면순」을 지었던 사람이다. 본래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위인임을 알고 무인년(중종13년) 그가 전라도의 능성현에 출재하였을 때 나아가 글을 배우게 되었다. 송세림의 아우 송세행(자:헌숙)과 함께 수학하게 되어 두 사람 사이 역시 막역한 지간이었다고 한다.
송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또 한 사람은 그의 족장인 지지당 송흠이다. 평소 자재나 다름없이 애중히 여기고 대해주었던 인물이다. 일찍이 양고계와 함께 그의 문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그가 담양에 이르러서는 사랑과 화목이 더없이 돈독했다고 한다. 송순이 이별의 시로 「봉별종장령공흠부광주」를 짓고, 송흠이 관수정에 나아가 차운했던 일들도 모두 송흠을 어른으로 모시면서 받았던 정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 송순과의 이별에 임하여 지은 지지당의 시에서도 둘 사이의 정분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덕업이 새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희망으로서 족질에 대한 정의 표시였다.
2)교유
송순의 인물됨을 덕망과 관후, 지조와 충효, 그리고 시재와 풍류의 인물이라 함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당시 사회적 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 벼슬에서 쫓겨나 유배 가는 등 척진 사람과의 불목도 없는바 아니었으나, 그의 사람됨은 비교적 원만하여 오랫동안 관로에 있으면서 사귀던 친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작시를 좋아하여 이러한 사람들과의 사이는 대개 시교로서의 사귐이었다. 한때 송도의 박연폭포와 강원도의 관음굴, 의상대, 대흥동, 흥왕동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여 신역, 송수심, 조사수, 주세붕, 심수경, 원호섭, 정유길 등 당대의 명류들과 혹서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함께 노닐었다 하는데, 이 한가지만 보아도 우리는 그의 시적 교우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면앙집」에 의하면 그의 후진은 김인후, 임형수, 노진, 박순, 기대승, 고경령, 정철 이하 20여 인사라 하였고, 성수침은 이에 감탄하여 천하 현사가 모두 송순의 문하에 모였다고 하였다. 송순과 사귀던 이러한 명사들을 볼때 그의 사우는 대부분이 당시의 명류신사였으며, 그들은 주로 덕망과 지조로 또는 시와 풍류로 맺었던 인물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면앙집」에는 이처럼 송순과 사적 교분을 가졌던 인물들이 110명이 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들의 개별적인 시활동을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다. 개중에는 이미 밝혀진 경우도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기로 하고 다음은 그의 시적 교류 중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만 들기로 한다.
■정만종과 교유 : 자를 仁甫인보, 호를 조계棗溪라 하였다. 박상이 개유 갑술년간 담양 부사로 부임해 왔을때, 광주에 살던 정만종이 그 문하에 가서 수업함으로써 송준과는 박상의 동기 문하생이 되었다. 그의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고 준성현령 또는 경상, 충청, 황해, 경기, 함경 등 5도의 감사를 역임하였다.
송순은 임오년(30세때) 7월 친교가 있던 정만중, 윤순 등과 용천사에 놀러가서 서로 영남 감찰사로 갔을 때는 송순이 그와 석별의 정을 감추지 못해 「송인포관찰영남사수」를 지었다. 이 시에서 ‘모두가 왕사로 떠 감이니 어찌 자주 있는 이별을 한하랴, 허전한 마음 술로 달래고 흐르는 눈물 수건을 적신다’고 하여 이별의 아쉬움을 시 속에 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만종은 송순과 이별한 그 다음 해에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송순은 결국 그와의 사별을 통곡하면서 속절 없는 세상사를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시」에서 ‘하루라도 잠시 떨어져 있으면 그립기만 했는데, 이제 영원히 이별하는 그대 어찌 잊으랴’라 하고 통곡하였으니 이 두 사람 사이의 교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양산보와의 교유 : 양산보는 자를 彦鎭언진, 호를 瀟灑翁소쇄옹이라 하였다. 원래 제주인 이었지만 담양의 창평에 와서 살았던 송순의 내종제이다. 그의 「소쇄원사실」에 의하면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현사들이 파직되는 것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서석산 아래에 소쇄원을 짓고 두문한거 하였다고 한다. 송순이 이 곳 소쇄원을 왕래하면서 그 주인 양산보와 돈독한 친교를 가졌다. ‘소쇄원’이라는 이름도 원래 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42세 때는 「제외재양처사언진산보소쇄정사수」를 지었다. 이에서 그는 ‘속된 세상사가 둘 사이의 방약을 어기게 하여 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대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라는 아쉬움을 털어 놓기도 했다.
임인년 50세에 전라도 관찰사로 피출되자 관직에는 즐거움이 없고 다만 고향의 일에 관심을 두어 양산보의 소쇄원 수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해 소쇄원을 방문하고 지은 시 「소쇄원소이방매」가 있다. 62세 때는 인생이 늙어감을 한탄하는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송세형과의 교유 : 송세형은 자가 獻叔헌숙이요, 호는 盤谷반곡이고, 송세점의 아우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송순은 그와 함께 송세림에게서 글을 배웠다.
26세때에 송세림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그처럼 태인의 인물들과도 인연을 갖게 되었는데 송세림의 생질인 김약해, 김약묵과 친하게 된 것도 그 중의 한 예다. 30세 때 광주의 정만종과 담양의 윤순, 그리고 태인의 송세형과 같이 용천사 유람을 약속한 적이 있다. 그 때 송세형이 그 곳에 이르지 못하여 송순은 다정한 벗과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한 아쉬움을 「차인보운」으로 서회한 바도 있다.
52세 때의 가을 태인 현감 신잠과 송순은 부제학 송세령이 귀향해 온 틈을 타서 김약회를 찾아 그의 정자위에서 시주를 즐기며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57세(을유년)때 송순은 또 송세형과 함께 밤을 세우며 금가와 시주로 회포를 풀며 정만종의 죽음을 통곡하였다. 다음해(경술년) 초여름 그는 송세형, 김광준, 임붕 등의 지기와 어울려 탕춘대에서 놀았다. 그 때의 시는 ‘성세를 만나 무사한 이몸, 날로 환오를 즐기며 태평함을 누리자.(중봉성세신무사일취환오보태평)’는 태평구가의 내용을 주로 한 것이다.
송게형과의 시적 교유에서 이루어진 송순의 시는 10여권이 넘는다. 그처럼 많은 시 중, 가장 많은 시가 나오도록 한 것이 송세형이다. 만나면 즐거움에 앞서 이별을 아쉬워함이 두 사람이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가 ‘이별의 날은 많지만, 만나는 날은 적다(별일상다 견일지)’라고 하였고, ‘타일 다시 만남을 기약할 수 없기에 이별의 술자리에선 슬픔이 앞선다(타일중봉미가기 일존론별자생비)’라 함이 그들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송순이 송세형을 두고 ‘세상에 진정한 우도가 없었더니, 천재일우 만난 것이 다만 그대이름이라(세간무우도 천재지봉군)’고 한 이 한마디에서 양자간의 정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상 「면앙집」에 나타난 인물을 보면 이미 말한 정만종, 양산보, 송세형을 비롯하여 그 밖에 윤순, 송희규, 신잠, 이충원 조희 등이 송순과의 시적 교유를 더욱 활발히 가졌던 명사들이다. 이들과 송순의 시적 관계는 이미 말한 차운과 증시로 말미암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송순이 이미 말한 100여 인물에게 시정을 느끼고 시작을 하게 된 동기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위인을 좋아하여 벗이 되고, 또 이러한 인품을 존경한 나머지 그와 종유함으로써 송순도 이들에게서 정을 느끼기 때문에 시교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을 으뜸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또 다음과 같은 관계에서 한층 가까워진 것을 유념하게 된다.
첫째, 문과 동년생으로서 다정하게 된 경우이다. 송순의 문과 동년생은 19명인데, 그 중에서도 박한, 정편, 상진, 정원, 성수심, 송희규, 김광준 등이 그와 더욱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이다. 송순이 이들과의 관계에서 지은 시는 근 20여 편이나 된다.
출째, 기묘사화 때 피척된 사람으로서 송순으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 경우이다. 기묘년 송순의 나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던 해다. 당시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숭앙하던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척사가 일게 되자, 그는 이를 퍽 통분해 마지않았다. 29세에 지은 「모사」시는 바로 이러한 심정을 편 작품이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최세절의 중상으로 큰 해를 당할 뻔 했으나, 동료들의 도움으로 겨우 화를 모면한 적이 있다. 기묘사류로 알려진 유성춘, 최산두, 안처순, 윤구, 박문, 구수복, 장응두 등과의 관계에서 송순이 작시하게 된 것은 대부분 기묘년 이들의 피척을 평소 애통해 하던 심정에서 연유한 것이다.
셋째, 사사를 같이 한 데서 더욱 가까워진 경우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정만종은 박상의 문하에서, 그리고 송세형은 송세림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함으로써 절친하게 된 것이 그때이다.
넷째, 갑계의 친구로서 더욱 가까워진 경우이다. 송순이 태어난 해가 계축년이므로 계의 명칭을 계축갑계라 하고 계원은 24명이었다. 이는 그의 35세때 시수한 모임이다. 「면앙집」에는 갑계원 중 성수침, 상건, 민제인, 장옥, 이산연과의 교유로서 이루어진 시가 전한다. 그 중 성수침과 상진 등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송순과는 갑계원일 뿐만 아니라 문과 동년생으로서 남다른 교분을 가졌던 사우로 알려져 있다.
송순은 중종 14년 그의 나이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해 겨울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된 것이 파란 많던 출사의 첫출발이다. 그러나 당시 과거시의 전시고관이요, 자신을 심히 사랑해 주었던 조광조의 유배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피척되던 기묘사화를 보고 그는 이때부터 사관에 뜻이 없었는데 단지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이 앞서 부득불 벼슬길에 오른 것으로 전한다.
송순의 입조는 이처럼 27세때부터 시작하여 피관유배, 좌천퇴휴 등의 일이 겹치기는 했지만, 성실과 덕망, 지조와 정도로써 공무에 임하여 윗사람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출사 경력은 어느 누구 못지않은 오랜 기간이었다. 직급으로는 종9품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성부판이 또는 중구부지사 등 정2품의 고관에 이르기까지 근 60곳의 부서를 옮겨 다니면서 비교적 무사한 관직생활을 해 왔으니 당시의 혼탁한 사회상을 생각할 때 송순은 한편으로 관운이 좋았던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라, 경상 등의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를 지내고 나주 또는 광주 목사를 역임하는 등 외관직에서의 출사 경력을 갖기도 했다. 「면앙집」에 전하는 송순의 34세 때 기록에 의하면 입사 이래 그의 출입이 총문과 수찬이 되면 나아가 동 교리가 되고, 사련원 정언이 되면 다시 동 헌납으로 승진되고 또 사헌부 지평이 되면 곧 동 당령에 오르고 이조 또는 병조 좌상이 되어서는 다시 동 정량에 승진하는 등 조정의 축망이 대단하여 여러 요직을 재삼 역임하였다고 하니, 이러한 조정의 신망 때문에 그의 관직생활은 그처럼 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후대 사람으로부터 송순은 송흠, 이련보 등과 같이 장수하면서 만년에까지 높은 벼슬을 지냈던 복이 많은 사람으로 기림을 받았다.
한편 그의 출사 경력은 「면앙집」에 전하는 년보에 비교적 자세히 전한다. 종래 그의 출사는 흔히 이에 의해 연보식으로 소개하는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연보의 기록은 작가의 나이에 따른 순차적 소개이므로 맡았던 부서의 관직이 중출되기도 하고 관급을 서열에 의해 제시하지 아니하여 출사생활의 전체를 체계적으로 손쉽게 조감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년보식 서술을 탈피하여 송순이 역임했던 벼슬의 직급과 그 부위를 전체적으로 파악함을 필요로 하는 바, 이미 언급한 송순의 출사에 대한 개관은 이같은 정리에 의한 것임을 덧붙여 둔다.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송순의 출사는 비교적 화려한 편이지만, 반면에 몇 차례의 파관과 좌천 그리고 입군생활의 가장 험악한 지경에서 귀양을 가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출사 기간 중 강등되거나 파직되었던 까닭은 대개 분쟁의 파란 속에서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첫 번째 예가 중종 29년(42세때) 있었던 귀양 등이다. 이 경우는 김안로 등의 척거로 인해 당한 일이다. 송순은 동궁에 있었던 작지변의 규명으로 김안로의 원한을 산 적이 있었다. 중종 26년(39세때)에 박시 모자가 이 동궁 사건에 무고되어 양사에서 이를 청살하려 하니 송순은 그 일이 김안로의 계책임을 알고 이의 불가함을 주장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험악해진 것이다. 중종 28년(41세) 김안로는 권세를 잡고 채무택, 허항의 무리들과 소란을 선동하여 현류를 배척하므로 송순은 분연히 그들의 포악을 면박하기도 했다. 42세때는 이로 인해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가게 된 것이다.
두번째 황헌, 윤원형 등의 배척으로 인해 당한 일이다. 중종 36년(49세) 양연, 황헌 등이 비굴하게 굴며 임금의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송순이 그를 척거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황헌은 이조판서가 되어 척신 윤원형과 결탁하여 더욱 날뛰었다. 결국 송순은 중종37(50세)에 외직으로 피출되었지만, 황헌 등은 간악배들과 작당하고 윤원형의 권세가 날로 심해져 가므로 그는 관직에서의 뜻을 버리고자 했다.
세 번째의 경우는 진복창, 이무강 등의 배척으로 유배 당한 일이다. 명종5년(58세) 이무강, 진복창 , 이기 등이 합세하여 사론을 편다는 이유를 내세워 배척함에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수일 후 그곳은 남쪽 고향에서 가깝다 하여 평안도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귀양갈 때에는 해관, 해용 두 아들이 동행하였다. 그해 6월 순천으로 이배될 때 「경술6월출고순천 율관용이아역상부벽두 용루상운서회이수」를 지었는데 이에서 부자는 함께 부벽루에 올라 눈물로 적시는 천리귀양의 객정을 노래하였다. 다음해(59세)의 9월에는 수원으로 옮겨졌다가 겨울에야 방환되었다. 당시 양사에서는 합동으로 이무강과 이기를 비난하고 대신들은 송순의 무리를 주장하며 석방되었다. 그는 원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사생을 헤아리지 않으며 지조로써 살아왔기 때문에 불과 1년6개월만에 방환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 송순이 입군 50년동안 가장 크게 충격을 받았던 일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처음은 김안로, 채무택, 허항 등에게 배척되었고, 다음은 윤원형, 황헌, 양연 등에게, 그 다음은 이기, 진복창, 이무강 등에게서 배척되었던 것으로 정리된다.
한편, 송순의 퇴휴는 타의적인 경우와 자의적인 경우의 두 가지다. 이는 예부터 벼슬하던 사람의 생활에서 의례히 찾아볼 수 있었던 일인데 송순의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첫째, 타의적인 퇴휴는 이미 언급한 파관 또는 파귀 등 출사에서의 갈등으로 말미암을 경우이다. 예를 들면 중종 17년(30세) 1월 승정원 주서로 재발되었다가 그해 봄을 넘기지 못하고 파직되었던 일이 있다. 그의 시 「자경」또는「임오춘이주서파환금강송상구점삼수」 등은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할 때 지은 작품이다. 중종22년(35세) 여름에도 일시 파관되어 고향을 찾아 귀관한 적이 있다. 심한 실의에 빠져 퇴휴할 것을 계획한 것은 41세(중종28년)의 일이다. 그는 이때 김안로에게 패할 것을 예견하고 향리에 돌아와서 면앙정을 창축하였다. 김성원이 석천 임억령의 퇴휴를 생각하여 담양 창평의 별뫼에 식영정을 지어 주었다는 것과 같이 루정은 대개 관계에서 물러난 뒤 퇴휴할 안식처로 삼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데 송순도 마찬가지의 뜻으로 이에서 거하고자 하여 정자를 창건한 것이다. 중종29년(42세) 마침내 김안로에게서 배척되어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는 이 면앙정에서 필명할 계획을 세우고 수수자적하였다. 중종 32년(45세) 겨울 김안로 등이 사사되면서 다시 등용되었지만 출사기간에도 고향에 돌아오면 안식처로서 마음을 달래주던 곳이 면앙정이다.
둘째, 자의적인 퇴휴는 주로 나이가 들어 퇴휴한 경우이다. 그밖에 부모를 모시기 위해 혹은 신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 때도 이 경우이다. 송순은 중종 38년(51세)에도 병을 이유로 귀성하였다. 이같은 만년의 퇴휴는 대개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때 향원으로 돌아가고자 누차 간원하였으나 선조께서 허락하지 아니하고 한산한 직계를 명하여 중구부지사를 제수하였다가 중당에 치사 귀향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14년간을 향리에서 우유하며 여생을 즐기었다.
「면앙집」에서는 그간의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비록 80-90의 년노한 나이이지만, 조선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력도 쇠하지 않아 80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바둑을 두고 활을 쏘며 독서를 하고 글을 짓는데 젊을 때나 다름이 없었다. 매일 극흥을 타고 면앙정을 왕래하여 산옹계우와 섞어 앉아 담소를 즐겼으며 애군 우국지성은 예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다.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세월리에 있는 정자이다. 호남의 명산이라 일컫는 무등산의 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제월봉을 이루고 그 아래 산자락에 있는 용바위에 위치한 면앙정은 행정적 구역으로 봉산면에 속해 있으나, 이는 정자가 많은 고서면에 인접하여 같은 시가 문화권의 고적으로 간주되는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조선조 중-명종간의 문신인 면앙정 송순이 41세 때에 사관원 사간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담양에 내려와서 정자를 창축하였다. 나라의 어진 선비들이 배척당함을 통분해하며 바른 말을 하다가 진신 역시 패하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달은 그는 귀향하며 정자를 짓고 천지 우주의 뜻을 담아 그 이름을 면앙정이라 하였다. 다음에 드는 한시체인 「면앙정삼언가」와 「이가이수」라 하여 전하는 한 수는 면앙정 건립의 동기와 당시 작자가 추구하는 삶의 뜻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면앙정 삼언가 俛有地 仰有天 면유지 앙유천 : 굽어 보면 땅이요, 우러러 보면 하늘이라 亭其中 與浩然 정기중 여호연 : 그 중에 정자 세웠으니, 호연한 흥취이네 招風月 절山川 초풍월 절산천 : 풍월을 불러대고 산천을 끌어들여 扶藜杖 送百年 부 발 송백년 : 망아주로 지팡이 삼고 한평생을 보내리라
‘이가이수’중 시조 한수 십년을 경영하여 초로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에 소개된 송순의 자술에 의하면 개사년(1533)에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비로소 초정을 엮어 세우고 바람과 햇빛을 가리며 5년 동안 유유자적하였다. ‘계사처직환향 시전초정이잔풍 일우유오제’라 하였으니 면앙정은 건립 당시 초정이었음이 확실하다. 때문에 위의 시조에서 말하는 초려는 곧 건물이 초정임을 가리킨다. 또 ‘십년을 경영하여라’한 표현구는 누정을 건립하기 10년전부터 정자 건립의 뜻을 세워 누정생활을 계획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32세가 되던 중종19(1524)에 정자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곽시의 산전을 구입해 두었다가 약10년이 되어 그 곳에 정자를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송순이 다시 출사하여 관직 생활에 임하고 또한 유배되어 귀양의 삶을 보내면서 정자의 관리는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60세가 되던 명종7년(1552)에 면앙정은 제대로의 모습을 갖추어 중창되었다. 담양부사 오겸이 정자에 올라 명사의 누정으로서 너무 초라하다 하고 지존의 건물마저 퇴색되어 감을 안타까이 여겨 이의 증창을 추진한 것이다.
그 성사를 축하하여 고봉 기대승이 「루정기」를 쓰고 백호 임재는 「면앙정적」을 지었으며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사암 박순 등은 「면앙정 삼십영」을 제작하였으니 이때부터 면앙정은 누정조영의 획기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겠다.
그런데 선조 30년(1597)에는 나라에 험난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면앙정은 모진 병화를 입고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정내에 걸어놓은 여러 선비들의 루정제영 마저 소실되었다. 그후 57년이 지난 효종5년(1654)에 후손들은 힘을 모아 면앙정을 다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350여 년 전의 일이 되어 역시 오랜 세월을 겪은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면앙정의 경관으로는 정자의 뒤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 춘하추동 네 계절에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빼어난 풍경을 비롯하여 원근의 산과 시냇물 등 산수경계의 승치요 정자의 주인인 송순은 물론 탐승객들의 마음을 매료시켰다. 각종 면앙정 제영에 나타난 상경의 흥취를 보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려니와 특히 송순 자신이 지은 「면앙정가」를 대하면 주위에 전개된 누정 경관의 수려함을 재삼 느낄 수 있다.
예로부터 천하제일의 정자라고 상천되어 오던 그 이유를 가히 알 만하다 하겠다. 일례로 작품 속에서 칭송된 산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무등산, 제월봉, 옥천산, 용천산, 추월산, 용구산, 호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 등 이들 산 모두가 면앙정 경관 형성의 한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송순이 면앙정 정자를 세우고 「면앙정 삼언가」와 「면앙정 잡영2수」를 지어 누정 건립의 취지와 그 감회를 표명하였다 함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전자는 한시체의 삼언시이고 후자는 국어체의 시조 작품이다. 그는 한시와 시조 외에도 장편의 시가 형식인 가사체로서 루정제영을 이루기도 하였다. 국문학상 전원 가사의 으뜸이요, 후대에 더 유명한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짓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면앙정가」를 제작한 송순은 한국 시가문학의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일게 하였다. 이로부터 면앙정은 시가문학 산실의 무대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하면서 면앙정 시단 형성의 주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면앙집」에 의하면 그는 위에서 말한 작시 두 편을 포함하여 「면앙정」,「차면앙정운이수」,「면앙정단가칠수」,「면앙정가」등 10편의 면앙정 제영을 남겼다. 흔히 루영제영이라 하면, 한시를 위주로 한 누정시의 제작이었지만 그는 자주의식이 남달라 우리 고유의 시가형인 시조와 가사의 제작에 서슴지 않고 작사를 통한 국어미의 구현에 큰 공을 세웠다. 누정시조와 누정가사의 제작을 선도한 손꼽을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신번면앙정장가일수」는 후자에 속한 「면앙정가」의 번역이요, 「면앙정단가칠수」와 「면앙정잡영이수」는 전자에 속한 시조 9수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원래의 제작이 우리 고유한 시가 문학이었음을 의심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송순이 이처럼 다수의 한시와 국모시가를 이루어 대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떨치며 면앙정 시단이 크게 발전할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 인해 이곳에서의 시적 교유는 더욱 활발하여 시단의 대성황을 이루었으니 당대에 시인으로 이름 놓은 임억령을 비롯한 수많은 명루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명종7년(1552) 정자를 중창할 때는 시회를 겸하여 이를 축하하는 대성사가 이루어졌는데 이에 즈음하여 백호 임재는 「면앙정부」를 짓고,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임제 고경명, 사암 박순 등은 창주와 차운을 통해 장편의 「면앙정 삼십영」을 짓는 등 시문학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시단의 일대 성사가 있었다. 「면앙정」을 위시하여 유명 인사들의 각종 문집을 통해 면앙정 제영에 참여한 누정시인들을 가려보면 액 60명 내외로 집계된다. 이를 보면 송순이 60세때 정자를 중창한 이후 누정시인과의 유대와 그 영향으로 면앙정 제영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시단 흥성의 계기가 끊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문풍의 명성과 영향으로 고을 원님들까지 이곳에 참여하여 화수, 김응조, 최상익, 임광필, 신사유, 김중량 등이 면앙정 제영에 임한 사실이 바로 이를 말한다.
이상에서 말한 갖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면앙정 시단은 호남 시단의 중신에 위치하여 한국의 누정문학 발전을 선도한 대표적 시단이었다.
송순의 나이 87세때는 과저급제한지 61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는 축하행사가 면앙정에서 거행되었다. 이른바 회방연이다.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제 등 이름 있는 문인 명사들은 각 고을 수령 등 백여 명이 자리를 함께 하여 한 고을이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밤이 깊어가자 송순이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니 정철의 제안으로 남여에 태워 모셨는데 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부러워하고 감격케 하였던 미담으로 전한다. 고경명 등 남여를 맨 사람들은 모두 평소 송순을 따르던 면앙정 시단의 주역들이었으니 회방연에서 보인 이같은 일 역시 시단 형성으로 말미암은 훌륭한 승사였다고 하겠다.
한국문학상 송순의 위상은 자못 크다. 시가 문학상 사풍의 진작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누정시단의 형성발전에 있어 단연 으뜸으로 손꼽아야 할 인물이다. 소쇄원이 처음 경영될 때 양산보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 시단 흥성의 주역이 된 사람이 바로 송순이요, 성산시단에 참여하여 「식영정 이십영」을 짓는 등 임억령 등 식영정 4선들과 교유를 깊이 하여 식영정 시단에서의 역할을 활발히 하였던 인물도 그이다. 따라서 남도 시가 문화권의 누정 8승에서 전개된 누정 시단의 주요 무대는 소쇄원 시단을 위시하여 식영정, 환벽당을 중심으로 펼친 성산 시단 그리고 이곳 면앙정 시단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국문학상 시가 문학의 백미로 손꼽은 「면앙정가」의 문학적 형태는 조선조에 크게 유명했던 가사 문학의 표본으로서, 작품의 내용은 무등산의 동쪽 산맥 끝에 자리한 재월봉의 벼랑에 세워진 호남 제일의 누정인 면앙정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풍광을 읊은 강호가사이다 자연 경관을 묘사한 수법이 뛰어나고 작품의 내면에 담긴 정서와 이에 수용한 말의 아름다운 표현법이 독특하여 조선조 가사의 대표작으로 일컫는다.
이 「면앙정가」에 대해서는 과거 여러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조선조 제일의 가사작품으로 평가하여 왔다. 어숙권의 「비관잡기」를 비롯하여, 홍만종의 「순오지」, 면앙정가의 원사를 전하는 「잡가」등에서 이를 극찬하였다. 홍만종은 특히 「면앙정가」를 두고 그 내용이 가슴속 깊이 들어있는 호연한 정취를 드러낸 작품이라 하였다. 심수경도 「견한잡록」에서 우리말로 된 가사로는 오직 송순의 「면앙정가」와 진복창의 「만고가」가 뛰어나다. 송순은 평생 노래를 잘 하였으니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과거 조선조의 평자들이나 현대의 국문학자들이 「면앙정가」에 대하여 한국의 가사 중 가장 우수작이라 함은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근래의 학교 교육에서도 「성산별곡」을 우선적으로 지목하는 편인데, 이는 한국의 가사 문학 중 주목되는 작품의 하나가 이 같은 「면앙정가」임을 말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참고로, 다음은 이 작품의 앞, 뒤 부분을 가려 현대역으로 소개해 둔다.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무등산을) 멀리 떼어 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 없는 넓은 들에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한데 움치리어 우뚝우뚝 벌여 놓은 듯, 그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혀 놓은 듯하며,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혀 놓았으니, 마치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 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다.
(중략)
의황시절 모르고 지내더니 이 때야말로 그것이로구나. 신선이 어떻던가 이 몸이야말로 그것이로구나. 江山 風月 거느리고 (속에 묻혀) 내 평생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에 이백이 살아온다 한들 넓고 끝없는 정다운 회포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인가.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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