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사람들을 우선하는 나라
마가복음 5:21-30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22. 야이로라 하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24.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갔다.
25.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27.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윤석열 정부가 대대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부자 감세 정책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집권 첫해에 종부세, 법인세, 상속세 등 전방위적인 감세를 실시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대기업에 최대 25%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감세 조치(임시투자세액공제제도 도입 등)를 했습니다.
올해 들어서서도 1월 한 달 동안만 새로운 감세 정책을 쏟아내었죠. 한번 볼까요? 조금 쉬운 용어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자와 배당소득이 연 2,000만 원을 넘는 금융소득자의 세금을 감면해 준다는 겁니다. 2021년 이자와 배당소득이 연 2,000만 원을 넘는 대상자는 18만 명입니다. 전체인구의 0.3%인 이 최고 자산가들이 감세 혜택을 보는 것이죠.
▲전국 신축 소형주택(아파트 제외)과 비수도권 준공 후 미분양 상태인 주택의 경우 여러 채 사더라도 양도소득세, 취득세, 종부세 산정 때 ‘주택 수’에 넣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를 영구히 폐지하겠다는 말도 흘리고 있죠.
▲이미 여야가 합의한 금융투자소득세도 도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금투세는 주식을 종목당 10억 원 이상 보유하는 대주주에게만 양도차익을 과세하는 것으로 2021년 금융투자자 1,400만 명 중 7,045명에게만 해당되는 세금입니다. 종목당 10억 원 이하로 여러 주식에 분산투자를 하면 그 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시설투자에 대한 세금도 최대 25% 감면해 준답니다. 이도 거의 대기업에게 해택이 돌아가고 있죠.
▲상속세 완화를 추진한답니다. 21년 기준 최고상속세율 50%를 납부하는 건수는 1만 2,749건(3.7%)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대통령실이 최고 상속세율을 30%로 낮추겠다는 의견을 들고 나왔습니다. 최고세율(50%) 적용 대상자는 22년 기준 955명이고 1인당 평균 상속세 과세가액(상속재산에서 문화재 등 비과세 재산과 공과금·장례비용·채무 등을 제외한 금액)은 420억 원입니다. 정부가 ‘중산층 부담 완화’를 명분으로 들었지만 사실은 재벌·대기업과 초고액 자산가들에 대한 감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경제는 파탄 지경입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서도 밀려났고, 경제 전망도 좋지 않습니다. 고금리, 고물가로 서민들의 실질소득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장기화하는 내수 부진과 세수 펑크, 서민 증세로 자영업자들은 줄 파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의 관심은 민생보다 극소수 부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내는 소리만 들리고, 서민들의 아우성은 안 들리는가 봅니다.
어려운 경제 얘기가 귀에 잘 안 들어 오실 겁니다. 어쨌든 현 정부는 가난한 자들을 털어서부자들 돈벌이해주는 일을 자신들의 최대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을 고치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처럼 합쳐져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 이야기 가운데 혈루병 여인의 치유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죠.
혹자는 이렇게 배치된 이유가 시간의 흐름상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마가의 의도가 숨어 있는 배치라고 생각을 합니다. 즉 마가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대비시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 했다는 것이죠.
먼저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앓는 여인의 대비입니다. 당시의 회당장은 매우 높은 지위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산해드린에서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다음의 지위였죠. 지방에서는 회당장이 가장 높은 지위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단체장 또는 시도의회 의장의 지위라 할 수 잇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구성원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산헤드린의 공식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회당장은 그 지역의 종교적 활동에 대한 모든 것들을 책임졌습니다.
야이로는 가버나움의 회당장으로 지역의 유대인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고 존경받는 남자었습니다. 그에 반해 혈루증 앓는 여인은 존재감이 별로 없거나 자신을 숨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지위나 성별, 경제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죠. 종교적으로도 여인은 부정한 자로 멸시당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지금 매우 고통스런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위나 재산 조건이 이들의 삶을 달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처지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 종교적 시스템으로 해결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다 죽게 될 만큼 중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야이로의 태도를 보면 얼마나 상황이 급박한 지를 알수 있죠. 야이로는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합니다.
당시 예수를 적대시하는 시대 상황을 본다면 산헤드린의 승인을 받고 그 체제하에 있던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멀리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야이로는 예수님 찾아와 간청합니다. 상황이 너무 다급했기도 했지만 야이로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야이로의 간청에 예수님은 그를 따라 나섭니다(마가 5:22-23).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만성자궁출혈병’인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레위기 15:19-33절에 보면 혈루증은 여성의 월경과 무관하게 피가 흐르는 부인병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여성의 월경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피가 흐르니 혈루증은 부정함을 넘어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되었던 거죠.
사회적 편견과 육체적 고통 때문에 여인은 병을 고치고자 12년 동안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며 가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죠(마가 5:25-26).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습니다. 여인은 야이로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고 도움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혈루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누구라도 그녀를 피하고, 멀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몰래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마가 5:27-28).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순간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아니 그의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진 순간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며 군중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가 5:30)"하고 물으셨죠.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옷에 손을 댄 여자를 계속 찾으셨습니다.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나와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예수께님은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마가 5:34)"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병이 나은 것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최약자의 처지에 있는 이 여인에게는 사회적 약자 편에서 일하시는 예수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그녀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진 사건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 종교적 관습으로 본다면 혈루병 앓는 여인이 공공장소에 나오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여인과의 접촉이나 그가 썼던 물건과의 접촉도 다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인이 옷을 만진 순간 예수님도 부정한 사람이 되버린 것입니다.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여인은 예수님이 부정한 사람이 되도록 폭력을 가한 셈이 됩니다.
본인이 사회적으로 부정한 사람이 된 순간, 예수님은 그를 부정한 사람이 되도록 만진 여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묻죠.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사회 종교적 시스템에 대한 폭로를 군중들이 듣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곤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을 비롯한 군중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겁니다. 혈루병 앓는 비천한 여인이 공공장소에 나타나 자신들이 존경하는 예수님을 부정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녀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 병이 나은 것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끝까지 남아 있을 것(고전 13:13)이라고 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것이죠. 마지막 남은 예수님을 향한 소망은 그녀에게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되었고 이는 예수의 사랑 안에서 생명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여인의 병이 낳는 놀라운 체험의 현장에 야이로의 집 사람들이 나타나 비보를 전합니다. 따님이 죽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을 모셔 가는 폐를 끼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충격에 빠진 야이로를 돌아보면서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고 하시며 야이로의 집으로 향합니다.
야이로의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시죠. 하지만 이 말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코웃음 칩니다. 소녀의 죽음을 확인한 군중들은 예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거죠.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방에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관습은 죽은 시신을 만지는 것을 부정한 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구태여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죠. 이것 역시 당시 사회 종교적 관습에 대한 강한 거부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38-42절).
야이로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혈루병 여인의 믿음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했죠.
예수님은 혈루병 여인에게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라‘며 당시 사회 종교적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을 선언하셨죠. 그리고 야이로에게는 아이가 죽었다는 비보에도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고통받는 이들을 죽도록 방치하거나 방조하는 죽임의 문화, 죽임의 시스템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12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여인은 12년간 혈루병 앓았고, 죽었다 살아난 야이로의 딸은 12살 된 소녀였습니다. 또 12제자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으키는 기적을 목도 하면서도 그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옷을 만진 사람을 찾을 때도 그러하였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도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12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12라는 숫자를 완성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12아들, 12지파, 12사도, 성령의 12가지 열매 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죽자 베드로가 사도 한 명을 채워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12라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12면류관, 12천사, 도성벽의 12초석, 어린양의 12사도 등이 그것입니다. 압권은 구원받을 사람 144,000명입니다. 그 구성을 이렇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12(완성수) x 12(이스라엘 지파) x 1000(셀수 없는 많은 수) = 144,000명(최후 심판에서 구원받을 사람 수) 이라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부조리한 이 세상의 문화, 종교 사회적인 시스템을 걷어내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로 바꾸고 완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죠. 두 개의 이야기는 사회에서 존중받는 사람과 천대받는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이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인과 야이로의 딸은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의 표상입니다. 예수께서 만드시는 세상은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보호되는 세상입니다. 이는 빈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강자들과 최소한의 동등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우선적인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 두 사건은 아직은 부족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듣고 전하는 모든 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넓혀져 갈 것이고, 마침내는 완성될 것을 보여주신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역시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약자들이 우선시되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죽음으로 몰아가는 문화, 사회, 종교 체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가진자들과, 권력자들의 뜻대로 돌아가는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대치되는 사탄의 나라이고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대상입니다.
참담한 고통과 죽음에 이르러 있는 여인과 소녀는 오늘날 우리 민중들의 표상입니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에 짓눌려 대부분의 민중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을 무너뜨리고 하느님 나라를 우리와 함께 만들고자 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여셨지만, 그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고통당하는 이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도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수많은 약자들이 있습니다. 장시간 힘든 노동 때문에, 위험의 외주화, 이주화로 죽음에 내몰린 사람들, 사회적 참사에 희생된 사람들, 온갖 차별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양산하는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가진자, 권력자들과의 싸움에 기꺼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