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올려다보며
정원정
무언가에 끌리듯 마당으로 나갔다. 늦가을의 청량한 밤공기가 싸하게 나를 휘감았다. 올려다 본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별빛은 선명치를 않았다. 잠시 서있는 사이 불을 켠 비행기만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천천히 7,8대가 시간을 두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게 뚜렷이 보였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별빛이 그립다. 지금은 공기 맑은 이곳 시골에서도 가로등과 집집에서 새어나오는 전등불빛들이 그것도 그렇지만 내 눈도 늙어 맑지를 못한 탓이려니 싶다. 내가 어렸을 때 봤던 별빛은 하늘도 땅도 깜깜한데서 제 빛을 뿜어냈었는데....
내가 별을 본 첫 번째 기억은 6,7세 무렵, 어느 남성의 성악소리에 마음을 홀리는 순간, 어쩌다 본 찬란한 별이었다. 그 때 봤던 별은 새까만 넓은 천에 흩뿌려 놓은 보석 같았다.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 영롱함에 가슴 설렜으며, 남성의 성악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설렘을 감지한 첫 경험이었지 싶다.
두 번째 기억은 공부가 하고 싶어 도시로 처음으로 집에서 나오려는 참이었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에 일이다. 이리(지금의 익산) 보육학교가 설립되면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신설이라 입학이 쉽다고 했다. 꿈을 안고 아득한 길을 찾아 20 리 밖, 큰언니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잠이 들었었다.
그 시절은 교통편이 하루에 이리까지 갈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깨우기에 이러나 보니 난데없는 오빠였다. 데리러 온 것이다. 집에서 뒷받침할 형편이 아닌데 여자아이가 대처에서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 시절 그렇게 생각 했을 터이다. 무슨 요령으로 객지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집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가시내들이 집을 나선다는 것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뜨신 뒤였고, 오빠가 생계를 맡아 가장 노릇을 할 때였다. 어머니는 아무 능력도 권한도 없으셨다. 당연히 오빠의 채근에 거부할 내 처지가 아니었다.
위험천만한 내 작심은 생각 되지 않고, 오빠가 무척 야속했다. 소가 고삐에 메여 끌려오듯이 오빠 뒤를 따라 20 리길,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밤이라 어서 집으로 가고자 청년인 오빠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오빠는 그날 40 리 길을 걷는 셈이었다.
나는 숨이 가빴다. 검정치마를 펄럭이며 흰 저고리에 단발머리인 열다섯 살의 시골 계집아이는 훌쩍훌쩍 울며 빠른 걸음으로 오빠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억울하고 서럽고, 내종에는 꺽꺽 복받치는데 아무리 울음을 멈추려 해도 멈추어지지 안 했다. 오빠는 속으로는 화가 났을 테지만 아무 티도 안 내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걸었다.
어디쯤의 솔밭 사이, 약간 언덕진 길이었다. 그 신작로를 막 넘으려는데 낮게 바라다 보인 하늘에는 찬란하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된 내 눈 속에는 별이 각각 긴 화살이 되고 예쁜 꽃이 되어 박히고 또 박혔다.
그 오빠가 지금 89세시다. 그 때의 일을 기억이나 하실지 모르겠다. 다시 눈물이 어린다. 그 때의 오빠의 마음이 헤아려져서다. 공부하고 싶어 하는 어린 누이를 뒷받침하고 싶었겠지만 가난한 게 한이었을 그 심정을 생각하니, 오늘 밤에 별빛도 그 때와 다름없이 아름답게 꽃처럼 아롱진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기댈 곳도 없으면서 어떻게 집에서 탈출 하려 했을까, 그 열정을 다 잃어버린 지금 나는 79세의 나이를 헤아려 보며 조용히 지난 일을 회상할 뿐이다.
뒤에, 고마운 인연들을 만나 그 구석진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학기 종강 할 때 마다 이불만 기숙사에 놓아두고 짐을 싸들고 귀향했었다. 그때 짐이라야 옷 몇 가지, 책 몇 권뿐이었으니까. 다음 등록금은 생각할 여지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새 학기가 되면 누군가의 후원이 이어저서 가까스로 졸업을 했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공부를 하고 싶어 하게 했을까.
훨씬 뒤, 쉰 살에 다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어느 수업 시간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 이 말의 의미가 생전 처음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공부를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려니 싶었다. 나이 들면서 말의 의미도 되새김질하게 되고, 깨달아 가는 가 보다. 머리야 녹이 슬고 열정은 사그라지고, 몸은 쇠해지지만 가슴으로 정이 쌓이고 깨닫는 새로움이 있다.
뒤늦게 수필공부를 하다 보니 날마다의 생각이 정리가 되는 듯하다. 지난 날 서운했던 것, 내 삶에서의 찌꺼기들이 흩날려 버리게 된다. 사람과 우주만물을 보는 눈이 설렘으로 다가 오는 때도 있다. 미세한데도 관심을 갖게 된다. 생각을 정리하고 진즉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내는 즐거움이라니……
늙으면 사람의 관계에서 서운한 게 많다고들 한다. 그것은 자신이 몸도 마음도 약세(弱勢)가 되어서일까? 그렇지만 왜 젊어서 미처 몰랐던 주옥같은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 힘들게 비록 비루하게 살았다 해도, 깊이 뒤져 보면 그 속에 보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건져 생각을 더하고 깨달음을 갖는 작업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붓 끝으로 표현하는 행운을 만났다.
수필을 쓰는 일이다. 우주만물을 설렘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미세한데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꿈을 갖게 했다. 살아 온 길을 뒤돌아보며 얼마 남지 않은 다가올 길을, 정영 슬프지만은 않게 바라보게 되었다. 누구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금쪽같은 여생이지 않은가. 그러기에 새로움의 연속으로 이어가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2008년 대한문학 수필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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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의 수필감상>
다음은 작가 정원정의 수필이력이다.
-2008년 대한문학 수필 등단/79세
-2012년 목포문학상 대상(군불을 지피며)/83세
-2014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맷수쇠)/85세
주목해 볼 것은 작가의 나이다.
마음이 뜨거우면 몸이 녹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작가는 현재 녹슬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청년의 시기가 밖이 화려한 나이라면, 중년은 안과 밖이 균형을 이룬 나이다. 그렇다면 노년은 무엇일까. 내면이 화려한 나이다. 작가는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날을 지금 살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수필이다.
신춘문예당선후 그의 소감을 들어본다.
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꾼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쓰지 않을 수 없는 기억 저편의 순정한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또는 지극히 주변이 고요할 때, 종잡을 수 없는 갈등과 공상, 가슴 뛰는 순간마다 자신을 태질하듯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기어이 늦은 나이에 수필을 만나고, 수필을 공부하면서 내 안의 허기를 다독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 속 꼬다케는 불씨로 남았습니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2014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감>중에서
첫댓글 와! 저는 아직 정말 젊습니다. 힘을 내 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유년시절의 찬란한 별을 가슴에 품었기에 드디어 스스로 별이 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용기를 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