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특수부대 그들은 누구인가>
검은베레모의 특전사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사진/특전여단의 아침구보. 강인한 체력은 특수부대원의 첫째 조건이다.)
“내 뺨에 뽀뽀하고 공수부대 가신 아빠. 훈련이 고되다지요 낙하산도 탄다지요…”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노래다. 그러나 지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여단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노래였다. 1년의 절반 이상을 야외에서 보내야만 하는 특전사 요원들은 이 동요로나마 두고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삭여야 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고되고 일상적 행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고단한 삶보다 훨씬 더 이들을 더욱 가슴아프게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동원이 용이하고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원치않던 일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그것이다.
아침 산악구보, 장군도 열외는 없다
5.16쿠테타의 선봉부대, 신 군부의 12·12 반란. 80년 5월의 광주…. 특전사는 항상 한국현대사의 우울한 장면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역사가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특전사에게는 견딜 수 없을만큼 따가운 시선과 질책이 쏟아졌다. 한때 긍지와 명예의 상징인 검은베레모를 쓰고는 외출·외박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말한다. “그것이 명령이라면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다시는 그런 명령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진/야간침투훈련. 천리행군중에도 침투훈련은 계속된다.)
82년의 두차례 비행기 추락사고부터 최근 눈보라가 몰아치는 민주지산에서 가파른 능선에서 헤매다 차디차게 얼어죽어간 동료들을 향해, 군복조차 입어보지 못한 이들까지 나서 터무니없는 곡해를 해댈 때도 그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주어진 임무만을 되새길 뿐이었다. 무수한 비난이 쏟아지던 그 시간에도 다른 특전사 요원들은 몇주간째 계속된 훈련으로 이미 물집투성이인 발바닥에 실을 꽂으며 천리행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임무보다 목숨을 먼저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강릉 잠수함사건 때 상륙한 북한 정찰요원은 누가 잡겠습니까. 보병들이 산자락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적은 그 산중턱 어디쯤에서 총을 겨누고 있을 것이고요. 우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산꼭대기에 내립니다. 거기서부터 적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뒤지고 다닙니다. 수색에서 수색자는 항상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포위망이 좁혀지다 보면 아군의 오인사격을 받을 수도 있고요.” 만약 자신의 목숨을 생각했다면 골짜기 편안한 곳에 숨어 있다가 작전이 종료되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전에 참여한 한 요원은 솔직히 자신도 두려웠노라고 말한다. 5살짜리 딸 생각, 시골의 노모 생각이 왜 안 났겠냐고 반문한다.
특전사 요원들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임무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유사시 비정규전 수행과 평상시 대간첩작전, 여기다 테러의 위협이 높아지면서 대테러작전도 그 임무에 추가됐다.
이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상황까지 경험해야 한다. 그러자면 항상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영내에서 맞는 아침은 항상 6Km 이상의 산악구보와 무술연마로 시작한다. 영외거주자들도 평일에는 되도록 술을 피한다. 다음날 아침 산악구보가 염려되는 탓이다. 산악구보는 보초근무자나 부상자 이외에는 열외 없이 실시된다. 40살 이상의 고령자들에게만 조금 굴곡이 낮은 코스를 뛰게 하는 배려를 할 뿐이다. 별 하나 여단장이 맨 앞장에 서서 아침구보를 이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테러진압훈련. 레펠은 언제든 사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부상 위험이 높다.)
우리는 북한정찰요원을 찾아다녔다
평상시 교육훈련도 일반부대와는 다르다. 우선 총검술을 하지 않는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특공무술로 총검술을 대신한다. 물론 전원이 태권도 유단자다. 새로 자대에 배치된 신입요원들에게 가장 먼저 실시되는 교육은 태권도 유단자화와 사격술. 집체교육을 통해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안에 태권도 유단자가 된다. 특공무술은 말 그대로 인명살상을 위한 무술이다. 특히 무성무기 사용법에 집중한다. 특공무술에선 대검, 야전삽은 물론이고 젓가락 등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무기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사격의 경우도 조준사격보다는 야간사격과 즉각대응사격에 주력한다. 강릉 잠수함사건 뒤 더 강화된 즉각대응사격은 적을 발견하자마자 엎드림과 동시에 자동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다.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총이 신체의 일부분처럼 될 때 비로소 훈련은 한 고비를 넘어선다. 유사시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겨 과녁을 관통시킬 때 완성된다. 강릉 잠수함사건 때 칠성산에서 잠복하고 있던 북한정찰요원의 저격에 희생당한 고 이병희 중사의 총을 조사한 결과 5발의 총알이 이미 발사된 것으로 확인돼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 중사는 이마에 두발의 총을 맞으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던 셈이다. 계속된 사격술 훈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전사의 비정규전 임무는 유사시 적 후방에서 정찰과 감시를 통해 주요정보를 획득하거나 적의 주요 핵심시설 파괴와 요인 암살, 납치된 요인 구출, 적 후방에 유격전선 형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임무는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전쟁의 조기에 종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3명에 지나지 않는 1개 팀에 위관급 장교 2명을 배치하고 팀원 전원을 하사관 급으로 배치하는 것도 이런 막중한 임무가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또 특수전에 익숙한 특전사 만큼 대간첩 작전에서 효율적인 부대는 없다. 평소 자신들이 침투, 도피, 은거 등의 훈련을 받는 탓에 적이 어떤 곳에 숨어있을지를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강릉 잠수함사건에서도 특전사는 전체 동원된 병력 가운데 5%도 안 됐지만 전과의 절반에 해당하는 6명의 북한정찰요원을 사살했다. 한국전쟁 이후 있었던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서 이룬 특전사의 전과를 돌아보면 이 전과가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표)
임무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특전사 요원에게 요구되는 전력은 대단히 방대하다. 1개 팀은 폭파, 화기, 통신, 의무를 주특기로 하는 요원들로 구성된다. 1개 팀이라도 독립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또 각 요원은 정보를 분석하고 작전을 수립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주특기 분야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폭약을 다뤄야 한다. 노획한 적의 개인화기도 언제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통신은 기본이다. 침투과정에서 혼자 생존해 목표지점에 도착하더라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맥가이버, 못하는 일이 없다
(사진/아침마다 실시되는 태권도 교육. 전원이 태권도뿐 아니라 특공무술 유단자다.)
특전사 요원들은 지도를 펴면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끊임없이 실시되는 야외훈련을 통해 실전 독도법을 익힌 탓이다. 원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경우 다량의 폭약을 소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폭약 제조법도 알아야 한다. 요원들은 폭약이 없더라도 교량 하나쯤은 쉽게 날려버릴수 있다고 장담한다. 바셀린이나 설탕 유황 등과 쉽게 구할 수 있는 몇가지 화공약품만으로도 폭약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폭약뿐만 아니라 간이수류탄이나 크레모아 등도 유사시 직접 제조해 사용해야 한다. 크레모아는 못으로 만든다.
지하철 기관사들이 파업에 돌입할 경우 군 요원을 투입해 지하철을 정상 운영하겠다는 지하철 공사의 호언 뒤에도 특전사가 있었다. 일부 요원들은 적 후방에서 교통수단을 획득해 운용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해 기관차는 물론이고 어선과 같은 함정을 운항하는 방법까지도 교육받는다.
흑룡부대 사건을 계기로 유명해진 천리행군은 대대종합전술훈련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한달이 넘는 대대종합전술훈련 기간 중 요원들이 걷는 거리는 대략 1천Km가 넘는다. 훈련기간 동안 그들은 모의 목표에 대한 침투, 타격, 도피 훈련이 반복한다. 목표를 바꿀 때마다 은거지를 옮겨야 한다. 은거지에서 목표지점까지의 거리 또한 만만치 않다. 교범은 1천3백Km를 걸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전사의 각 팀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즉각 출동해 타격해야 할 목표를 갖고 있다. 어쩌면 그곳이 그들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각 팀은 항공사진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되는 정보를 분석해 끊임없이 작전을 세우고 수정하는 모의 타격 훈련을 갖는다. 대대종합전술훈련은 바로 이 능력을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기회다. 따라서 대대종합전술훈련은 목표와 지형 등이 작전목표와 유사한 지형에서 실시된다. 수송기를 통한 공중침투와 현지 작전 그리고 도보 퇴출이 대대종합전술훈련의 골간을 이룬다. 천리행군은 도보 퇴출에 해당한다. 물론 육상침투를 위한 장애물 극복과 적 화선 침투, 장거리 종심침투 개념도 포함된다. 걷더라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천리행군 이전에 실시되는 훈련은 곧 실전이다. 목표지점에 도착하면 비트를 파 은신처를 만들고 여단에 최초침투보고를 한다. 모형을 만들어 목표를 분석하고 한 팀을 다시 3∼4조로 편성해 조별로 타격대, 정찰대, 지휘부 등의 역할을 나눌 때면 만약 누가 부상을 당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토론은 대부분 부상자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작전정보를 알고 있는 팀원이 포로가 될 경우 작전 수행은커녕 모두가 몰살될 것이 뻔하다. 그들 자신도 포로로부터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전사에서 대대종합전술훈련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훈련 자체가 취약지 거부라는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훈련은 군이 주둔하지 않는 지역에서 실시된다. 이런 지역은 만에 하나 강릉잠수함 사건 같은 돌발적인 일이 벌어질 경우 현지에 머무는 특전사가 즉각 대응에 나서도록 돼있다. 대간첩작전의 경우 대응이 늦어질수록 작전기간이 길어지고 지역이 넓어진다. 따라서 초기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대대 훈련시 요원들은 항상 현지에서 실탄을 휴대한다.
평균 5.7명당 1명이 부상
무장구보나 산악급속행군 등 주둔지에서 벌어지는 교육훈련을 빼놓고도 특전사 요원이 야외훈련을 통해 걷는 거리를 종합하면 대략 1년에 3천Km에 달한다. 대대종합전술훈련 이외에도 독수리 훈련이나 산악극복훈련, 중·지역대 훈련, 그리고 각군이 실시하는 대간첩훈련 등에서의 대항군 역할 등 숨가쁘게 이어지는 훈련 대부분이 도보로 이뤄지는 탓이다.
걷는 것과 함께 특전사 요원들을 괴롭히는 것은 해상침투훈련. 속모르는 사람들은 한여름 바다에 가서 피서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속사정은 정반대다. 아침밥 먹고 바다에 나가 밥 먹는 시간 빼놓고는 바다에서, 혹은 뻘밭에서 박박 기는 일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게 한다. 인명구조반과 해상척후조, A, B, C, D, 앵카조로 나뉘어 실시되는 해상침투훈련은 수영능력을 키우는 게 최대의 목표다. A조에 속한 요원들은 맨몸으로 4Km의 수영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해상침투훈련이 가장 괴로운 것은 물에만 들어가면 가라앉는 앵카조. 뜨거운 모래밭에서 엎드린 채로 지상에서 박박 기는 것이, 수영 동작을 완전하게 익힐 때까지 이들이 해야하는 과제다.
해상침투는 해군 함정에서 떠나, 고무보트를 이용해 해안에 무사히 상륙해야 하는 훈련이다. 각 팀별로 주어진 고무보트(IBS)는 그야말로 고생보따리다. 파도를 뚫고 노를 젓는 일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의 체력소모를 요구한다.
전문산악인에 버금가는 암벽 등반 능력을 키우는 산악극복훈련, 시궁창에서 2∼3일을 보내는 게 보통인 독수리 훈련 등 특전사가 치르는 수많은 훈련들은 언제나 실전을 방불케 한다. 또 위험하다. 훈련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는 부상은 요원 개인은 물론 특전사 전력 유지에도 큰 부담이 된다. 지난 97년에만 특전사 요원 5.7명당 1명 꼴로 의무대에 입실하거나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것으로 나타났다. 부상의 원인 가운데 운동과 훈련이 전체원인의 57.5%를 차지한다.
특히 완전무장 강하는 특전사 요원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일로 꼽힌다. 특전사가 출동을 위한 완전군장을 꾸리면 그 무게는 30Kg을 넘는다. 인원은 적은 데다 장비는 많기 때문이다. 강하시 등에는 낙하산을 메고 가슴의 예비낙하산 아래로 군장을 매다는데 지상이 가까워질 때 무장을 분리해야 한다. 분리하는데 실패하면 다리 골절상을 입기 쉽다. 강릉 잠수함사건 뒤 더 강화된 헬리콥터 레펠훈련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줄울 타야 하기 때문에 강하 때보다 더 많은 사고 위험을 안고 있다. 강릉 잠수함사건 때도 레펠 과정에서 7명의 요원이 부상을 입었다.
고급장교들은 왜 특전사를 기피하나
한때 특전사는 온갖 특혜의 대상이었다. 하나회가 장악한 군부에서 특전사를 거치지 않으면 고급장교로 진급이 어렵다는 말이 흘러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이병이든 상사든 대위든 소령이든 모두가 똑같이 걸어야 하는 천리행군이 싫어 특전사에 오지 않겠다는 장교들이 수두룩하다. 위관급 장교시절 특전사 경력이 있는 소령이 다시 특전사로 돌아오는 비율은 30% 정도에 머문다. 어떤 장교는 특전사 배속 명령이 나자 차라리 제대하겠다며 전역지원서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 하사관 지원율은 꾸준히 늘고 있다. 98년 1/4분기만 해도 특전하사관 모병은 3.6 대 1의 경쟁율을 보였다. 스쿠바나 고공 UDT 등 특수교육 자청자가 많아 오랫동안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것도 특전사의 내일을 밝게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사나이 태어나서 한번 죽지 두번 죽나”라는 부대훈을 외우며 특전사 요원들은 국가의 부름에 즉각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제 국가와 사회가 이들을 돌봐야 할 때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2차붕괴의 조짐으로 모두가 피신했을 때도 현장을 지켰던 것이 이들이다. 수해가 나면 제일 먼저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달려가는 것도 이들이다. 곧 다가올 어린이날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저 아득한 하늘에서 몸을 날리는 것도 이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다.
흑룡부대 사고때 사회는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가리기도 전에 지휘관을 질타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원하던 가벼운 침낭과 고어텍스 방한복이 지급됐었더라도 그런 사고가 났을까? 요인경호, 대간첩작전, 재난재해구조, 심지어는 철도파업 때도 국가와 사회는 이들에게 평시에도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깊은 산골짜기를 무장공비처럼, 빨치산처럼 누비고 다니는 특전용사들이 있다.
< 윤승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