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어느 허공을 허물면서 온 것일까
가까운 곳의 잎들이 꿈을 꾸기 시작하고
나비의 행방이 연두빛으로 변하는 이 알 수 없는 느낌
오래 전 사람 하나가
접혀 있던 몸 안으로부터 한순간 모로 돌아눕고
나는 정지된다
어제 읽은 서책의 페이지가 날개처럼 열릴 때
그래, 길이란 나비로부터
또다른 몸 안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유배 같은 것
세상의 모든 하루가 금지된 행방이기 때문이고
저뭄이 서녘하늘을 물들이는 서러움 때문이다
나비가 날아온다
내 폐허의 고요를 깨우며
어느 나른한 오후 나비 한 마리 너울너울 건너왔고
나는 서둘러 오래 동안 밀쳐놓았던 莊子를 꺼내어
잠언의 날들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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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고되지 않을 은유
짠기 잃은 잠언들이 바닷가로 모여든다
오랜 세월 기억의 모퉁이
허름한 날들을 보낸 사연들이
햇살 사나운 때를 골라 태양의 경전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지상의 한 켠이 불의 힘살에 잔뜩 웅크려지고
근시안의 내면이 붉은 설교에 몸을 맡기고 있는,
노인은 말이 없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수차에 둘둘 감기는 걸 무심히 받아낼 뿐
긴 세월 자신의 얼굴을 주름으로 밀고 왔던 바다에게도
넋두리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오직 비워낼 거라곤 태양의 잠언 밖에 없는 듯
몸 속을 가로질러 불의 날들 속으로 사라지는 머나먼 관습
누군가는 화석이 될 집착이라 했고
누군가는 재가 될 허망의 환영이라 했다
그럴 때마다 조난에 빠진 구름들
그의 눈빛을 독수리처럼 움푹 파먹곤 사라졌지만
망각이란 바다를 제물로 바치는 낡은 상인들의 규범 같은 것,
그래, 내가 여기에 있는 건 태양의 설교를 지상 한 켠
불의 미사로 바꾸는 일
그 망각의 어느 쯤에선 가 몇 방울의 잔해로 드러날
내 안 불치의 잠언들을 창고 속에 가두는 일
한동안 멈춰 있던 바다가 다시금 수차를 돌리기 시작했고
노인 하나 탈고되지 않을 풍경의 바깥으로
천천히 잊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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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안
뒤뜰 한 켠 감잎들이 푸르다
웃자란 계절이 되면 가을을 훔치려는 것들
저처럼 분주하다
바람의 묵직한 발자국이 이곳저곳 찍힌다
길게 내려왔던 햇살 몇 올 지상의 심증을 더듬는 사이
나는 호흡의 넓은 잎들이
가슴 속에서 수런거리는 걸 애써 참아내며
생각의 가장자리를 서성인다
지나간 날들은 새도 물어가지 않는다
중력을 잃은 세월만이 열매 하나씩 뒤집어쓰고서
뭔가 금방이라도 입이 막힐 듯 중얼거리고 있는 한 때,
그 사이로 중력들
산책들이 어딘가의 푸른 신호에라도 화상을 입은 듯
낙인이 찍히고
이곳의 시간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약속이라도 배운 듯
수런대기 시작했다
우기가 찾아오기 전 모든 바람들은 힘겹다
그러나 이곳에선 어떤 구름들도 쉽사리
마른 삭정이의 끝에서 비가 되지 못하고
모든 것들은 감나무에 이르기 전 참아야한다
다만 푸름의 긴 표식만이 바람의 묵상에 밑줄을 긋는 오후
칠월의 안쪽으로 더딘 호흡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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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렉탈
물방울 속엔 수많은 바다들이 들어차 있다
어떤 바다가 물방울을 피해 산으로 도망을 쳤겠는가
바다들의 집은 물방울이다
물방울에 창을 내고 문지방을 내고 안마당을 내고서야
조금씩 잠잠해지는 바다
나는 매일 밤 꿈을 꾼다 물방울들을 꾼다
깊고 견고한 내부에서 시도때도 없이 소금을 줍고
현관의 방석만한 심연을 깨끗이 털어낸다
똑똑똑, 끊임없이 바다를 낳는 물방울의 집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물방울이 바다에 이르는 법칙을 배운다
하나의 내가 또 하나의 나로 돌아가는
무수한 길들을 낳는다
그 시간이 열어주는 만큼만 휴식을 담아
하루치의 물방울을 모아들일 뿐
조금도 찾아낼 수 없는 바다의 행방,
방금 전 가득 담은 바다를 베란다로 들고 가
화분 몇 촉촉하게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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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떨어진 落葉은 바람의 豫言이다
계절이 지나치고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전봇대 속 가난한 이웃들의 크고 작은 체온들이
오후 햇살에 너덜거리는 길모퉁이에서
문득, 바람이 낙엽들의 들것이 아닌
가을의 예언이었음을 느낀 건 내 귀가 작아졌기 때문일까
작은 슈퍼를 빠져나온 한 여인이
목덜미 깃을 움츠리며 길을 건넌다
철 지난 묵시록 같은 신호등 밑을 가로질러
반지하가 있던 연립주택 쪽으로,
모든 바람은 가을에 이르러 예언이 된다
더는 머물 수 없는 것,
높은 곳의 질서를 지상 가까이 수런거리던 것,
낙엽들의 못다 한 생애라도 담아내듯 바람의 예언을 붉게 들쓴다
제 몸을 태우며
바람의 한정된 분량만 웅웅 거리는 저 오래된 예언들
계절이 지나치고 있어 내가 말라가고 있던 게 아니었다
길 건너 반지하의 습기 찬 묵시록이 있어
내가 낙엽을 들춘 게 아니다
세상은 오늘도 비좁은 햇살만 갖고 몸을 녹일 줄 안다
막간의 틈을 비집으며 저뭄이 끼어들었고
주위엔 또다른 바람의 예언을 찾는지
낙엽들 몇 누군가 켠 손아귀 담뱃불 속으로
지상의 따뜻한 예언 하나 감싸주듯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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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移動
흰 꽃가루가 집을 지나친다
삼월 초,
아직은 저것들이 있을 때가 아니다
혹, 묵은 행방들일까
봄이 오기 전 지난 가을 잠적했던 햇살의 일부가
나무를 뚫고 싹을 틔운다
우기가 찾아왔고
이미 전성기를 보낸 계절의 추위는 뒷걸음질을 친다
벌써 새살이 돋는 자연의 법칙을 배우기에 좋은 한 때,
일찍 외출한 민들레의 무리들만이 길을 잡으려는지
흰 이동을 꾸리고 있다
내 안에도 저처럼 빠르게 깨어났던 사연들 많았다
눈에서 멀어졌던 첫사랑이
가슴에 틈을 내는듯한 멀미를 느끼며
지금 내가 내어주려는 불의 사연들은 어느 시절의 나였을까
손톱이 싱그러워지고 눈썹이 푸르러진다
잊고 지낸 정전기들을 송전하는 듯 찌릿,
호흡의 한 켠으로 전기줄들이 가로지르고
해묵은 어깨가 들썩거린다
어느 곳에선지 문득 뛰쳐나온 그리움 한줄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람의 이동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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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안에 들다
그 안엔 헤진 세월을 기우는 오랜 바늘들의 분주함이 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쏟아지는 고요의 무게들
한 때 중심의 깊이를 찾던 새소리들도
졸음의 횡포에 모두 다 날아갔다
그 껍질의 안쪽에서 붉게 덧쌓인 수액의 길들도
이젠 어둠의 몫이다
이미 누설이 되었거나 누설되어져야 할 은둔의 악취미는
이곳 어디에나 지천이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이승의 침묵을 깨워
날려 보낼 누추함의 첫 거처는 어느 삭정이어야 했을까
문득 내 안의 기워지지 않는 계절이 먼저 눈을 떴는지
오솔길 하나 더듬더듬 들어차는 중이었고
밖엔 붓의 끝을 빠져나온 어둠들로 지상의 기억들이
쿵쿵 저물 것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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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목월 원고
시작노트/홍문숙
오랫동안 오후 4시의 관습 속으로 실종되곤 했었다
오후 4시의 바람들과
오후 4시의 문지방들
그리고 오후 4시의 바깥 햇살들 속으로 유실되곤 했었다
그리하여 오후 4시는 멀리 떠나와 되돌아보면
귀 잘린 고흐처럼 애틋해지곤 했고
이럴 때 세상의 어떤 행간들이
오후 4시의 침침한 페이지를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며
영영 고립의 규범 속만 고집하겠는가
나는 오후 4시를 좋아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무렵의 도시 저쪽을 좋아하고
끝내 집에 돌아와서야
아직 4시가 되지 못한 미수에 그치곤 하는
무수한 종류의 오후 4시는 더더욱 좋아한다
시 ( 산책 )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다분히 공격적인 운명의 항변일 것이다
나의 문턱을 뛰어넘어가
시의 미증유적인 도탄에 빠지고 싶은 풍토병 같은 몸짓일 것이며,
다시금 무모한 귀가를 향해 뚜벅뚜벅 지친 행간들을 돌려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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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책들의 틈에 끼어 있던 시침이 오후 4시를 가리킨다
나의 외출은 불안해지고 십년 째 초상화처럼 무표정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
나는 그 두께를 한번도 엿본 적이 없다
나의 외출도 대부분은 읽히지 않는 페이지들 뿐
그러나 이 시간이 꽃들에겐 재빠른 외출이 행해지기에
가장 좋은 때임을 나는 안다
나를 따라나설 우울의 제목들과 먼지 안쪽의 제목들이 따로 있음을,
저수지 표면을 걷고 있었다
낮은 감촉만 갖고도 내 발소리를 엿듣는 풀들의 근황을 지나쳐
노른자위 같은 저녁의 해가 걸려있고
마을 속 한 노인을 주름 속에 가두는 지상의 하루를 떠올려 보는 일
지금쯤 집 안의 책들은 누군가의 일생을 곱씹고 있을까
오랫동안 비워놓았던 호흡에게 풀씨 몇 개 건네주었고
그럴 때 마을은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
어둠의 알이 부화되는 소리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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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신작 2편
시작노트
얼마나 많은 사유들이 내 안으로 찾아 들었을까
어느 날은 햇살로
어느 날은 구름으로
혹은 붉은 수줍음이 저녁의 노을을 딛고서 넘어왔을까
그러나 나는
세상의 상처 난 발길들에 대해 시로 마중하기가 두렵다
한 편의 가슴으로 번역하는 위선의 진지함이 두려우며 그리하여
시 <9월 >은 어찌 보면 8월의 퇴적물에 불과할 것이다
시월의 불길한 예감에 불과할 것이며
어쩌면 햇살의 반대편 집으로 향하는,
문득 나보다 먼저 발길을 돌리곤
나보다 나중에 귀가할 내 분신의 그리움들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 <蟄居>는
내가 얘기할 이승의 습관이 아닌 듯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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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햇살 속에서 자란 법칙들은 다 믿을 수가 없다
리듬들 막간의 상상들,
상상에 내준 부지중의 삐걱거림까지도
햇살의 반대편에서 찾아야 한다
비로소 제 허위를 버리고
조금씩 체온을 내주는 안쪽의 근황들
나는 오늘도 몇 줌의 맥박을 지켜내기 위해
저수지 오솔길을 걸었다
내 하루치의 안부엔 구두점도 되지 못할
구름 몇 줌 지켜보았고
그럴 때마다 이마를 짚어도 만져지지 않는
기억 저 안쪽의 날들을 무기력하게 흘려보내야 했다
혹시 내가 바깥에 버렸던 건 아닐까
태양의 건너편을 살핀다
보랏빛 가시엉겅퀴들이 고독을 오므리고 있고
풀잎들은 낯설어진 바람을 더듬어 제 자리를 찾는다
저절로 깨어나지 않는 칩거의 관습들,
나는 한동안 방치하던 몸 속의 구름들을 내쫓고서
햇살의 반대편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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蟄居
경전의 텃밭이다
월동의 후예이며
태양의, 햇살이 띄워 보낸 그리움들의 약도다
자벌레만한 사유들이 내 안에서 자라난다
그리움이 투명해 진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몸짓
거칠게 뿌리박힌
태양의, 햇살이 띄워 보낸 그리움들의 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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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文學
점자들의 행방
보도블록 활자 위를 걷는다
차가운 대화가 발바닥으로 스며든다
얼떨결에 읽고만 사연이라서 그럴까
전생의 어느 행방 같은 조언들이 따스하게 고이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내 몸에 맞지 않는 이정표들을 걸치고 살아왔다는 말인가
몸에 맞지 않는 모퉁이와 저녁의 약속들
때론 아무런 용건도 없이
낮게 서성이던 달팽이 같은 날들도
다 몸에 맞지 않는 조언이었을지도 모를,
가까이 내려온 햇살들
몇 줌의 점자들을 콕콕 찍어보고선
행방의 맛이라도 깨달은 듯 끄덕끄덕 빛나기 시작하고
성장기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나온 소녀들이
그 낮은 곳의 질서라도 배운 듯 종종 걸음으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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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文學
어머니와 항아리
콘크리트 장독대 위
오래 애지중지 아끼던 항아리 하나
어느 때나 소홀하지 않았다
마른 행주 검어지도록 닦으시던,
어머니의 일생 또한
깨지지 않을 깊이로만 얼비치다가
멀어질 것을 그러나 나는 안다
해마다
장독 뒤 숨바꼭질도 하얗게 익히고
지짐돌에 눌린 장아찌도 깊은 맛들여주던,
평생 한 자리에서 발자국 소리를 닦고
내 마음 속 당신을 풍금소리처럼 닦곤 하셨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던 한 여인의 기척
그리하여 늦봄의 장독대엔
아직 꺼내지 않은 말의 슬픔들이 있고
담장을 잘못 넘어온 뻐꾸기의 붉은 나른함이 있는
쉿, 어머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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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청춘
이 한편,
지워진 사랑 55
박경원
햇살 좋은날
나는 몇 잎의 지난 가을과 오후들을 끌어모아
거름을 만든다
햇살 좋은날
나는 몇 잎 봄의 나른함과 공상들을 끌어모아
실팍한 거름을 만든다
기일로 가는 무덤 하나 일러주던
산 아래 사람들의 이름과
몇 년째 너의 바깥만 떠돌던 *말라르메의 책들
그 오랜 페이지들을 타이르며
네가 될 거름을 만든다
정원 저쪽의 찻스푼이 달그락 너의 공백으로부터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오전 한 때 햇살 좋은 사연들을 섞어
네가 될 날들의 그리움을 만든다
* 시집 <목신의 오후>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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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워지면 몇 줌의 거름이 되는 걸까
지워진 사랑,
한때 햇살의 날들과 주머니 속의 바람
때로는 비에 젖은 눈물을 말리곤 했으리라
사랑이란 한번 떠나면 부메랑이 되는 걸까
실팍한 거름을 만든다는 것은
*말라르메의 관능적인 꿈과 여행과
어느 날 거리에서 문득
다가올 음악들을 탐닉하는 것과도 흡사하리라
사랑에 있어 거름이 되는 길은
햇살의 소관일 것이다
아니 불확실한 추억의 소관일 것이고
그래도 거름이 되지 못하는 것들에겐
沈黙的 저층의 낮은 발소리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
그럼에도 나는 하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에게 거름이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두려워한다
성서 속에 돌아가
지난날들을 위로받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 테고,
그리고 나는 기원 한다
하나의 사랑이 성서 속을 빠져나와
지워진 사랑을 찾아 검은 망토처럼 떠돌 수 있는 가을을,
시인 박경원의 (지워진 사랑)을 미행해 본다
정원 저쪽의 찻스푼이 달그락,
나의 악취미를 충고하는 것도 잊은 채
근시안의 햇살이 어깨 너머로
내 궁금증을 엿보는 오후의 끝까지
지워진 분량의 거름들을 훔쳐간다
이곳 어느 쯤은 아니었을까
먼 옛날 내가 거름이 되려 했던
무모한 계절의 후미진 하루도,
시집을 접고서
내 삶의 한때가 기다리고 있을 집 안으로 향한다 홍문숙 60
사랑니
지천명이 되고서야 비로소 시가 아린 것을 알았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는 사이 어느덧 가을이 지나쳤고
연해주 티벳,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몇 번째 첫사랑이었을까
무수한 간이역들이 지나쳤지만
어떤 해바라기도 그 역을 떠나 더 큰 태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가 아니었다
방역을 나온 기관원들이 그 해 여름을 가로질러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동안에도
나는 사회주의를 배우지 못했고
그 도시의 변두리에서만 칩거했을 뿐
일생 한번만 제 심장을 독수리에게 던져주는 티벳에서도
시가 되지 못하는 날들을 그것들에게 던져줘야만 했다
지천명이 되고서야 비로소 시가 떫은지를 알았다
해바라기도 몇 번의 고개를 내리눌러야 꽃이 되는 것처럼
낡은 입 안에서 죽순 같은 사랑니 하나 돋아나는 것을,
지천명이 되고서야
나는 먼 길 떠날 수 없는 이승의 나이 하나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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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Motto 적인 隱喩 속으로
다시 또 박방영 작가님의 畵幅 속에 끼었다
이는 따뜻하게 뎁힌 저물녘
화기애애한 취객의 관습으로부터 유래된 인연도 아닌
풀밭을 말(栗色馬)로 달려온 깔끔한 초인의
엄장嚴莊 큰 취미도 아닌
그저 내 몫의 인연을 따라 발길을 곧추세운 끝의
무례한 방문일지도 모를 일,
그리고 나는 오래 전,
최소한 몇 년 전이었던 2000년 중반의 작품들을
머리 속에서 뒤적이는 일부터
이 무거운 화두에 대한 예의를 헤아려보기로 한다.
대체 화폭畵幅이란 게 무얼까
설정된 fiction픽션과 그 바깥의 시공은 작가의 內面 속에서
어떤 拮抗길항작용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 혼미함 속에 위안을 빙자한
오직 하나의 단서端緖가 되고 있는 검은 색의 의미는 또한 뭘까
내 진부한 상상력으로는 좀체 풀리지 못할
면벽감面壁感을 깨뜨리기 위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횡포橫暴는 그리 많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여백이라는 미궁의 함정을 무기교無技巧라는
필선의 외곽에 배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62
작품 花氣를 보자
공교롭게도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가 시간의 시공을 태양에게
제물로 바친 후의 심플한 구원 같아 좋다
아니, 색이 제 돌아갈 곳을 허구 저쪽에 버린 채
우리의 민화적인 담장을 이루는
한자들의 양분에 의지하고 있는듯해 교묘巧妙하다
작가의 의도는 어쩌면 꽃이라는 익명匿名의 환영(潛在意識)을
피워놓고서
모든 만물의 씨앗인 한자(象形文字)로 귀속시키는 은밀한 도발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모토motto적인 은유의 틀 속에서 가끔씩,
혹은 자주 재발되듯 드러나는 검은 색의 정체는 뭘까
詭辯궤변 같지만
작가의 시공 속에서 예의(검은墨) 은 자못
위협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태양이 공급해주는 한낮의 상징인 색깔들을 자객처럼 엿보는
이 不請의 구조야말로
비로소 시간들의 첩자인 밤의 세계를 얘기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자면 박방영 작가의 화폭 속엔 동일한 시간 속에서
두개의 세계가 거처하는 셈일 것이다
낮이라는 인위적인 의미들과 밤이라는 무의식적 의미들이 나른한 醮禮廳 같기도 한,
다시 한번 도시 저쪽의 거추장스러운 형식을 버리고서
작가의 무속과도 같은 和解 속으로 들어가 본다.
63 시인 홍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