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6) 김성수(1891~1955)
내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한국 현대사의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한평생 존경하던 인촌(仁村) 김성수에 대하여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인촌은 일제하의 35년과 해방 후의 10년을 오로지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일관한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인촌 김성수는 189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조선조의 저명한 성리학자이던 김인후의 13대손으로 태어났고 그 할아버지도 군수를 지낸 바 있다. 아들이 없던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김연수와는 친형제이지만 사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촌은 가히 호남의 명문 태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열세 살 때 다섯 살이나 연상인 고광석과 결혼하였고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창흥의숙에서 신학문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의숙에서 인촌은 한평생 친구요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일본 유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촌은 송진우와 함께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였고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한일합방의 비보도 거기서 접하였다. 인촌이 와세다대에서 사귄 친구들은 장덕수, 신익희, 안재홍, 김병로, 김준연 등이었다.
1914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곧 귀국한 그는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의 청사진을 마련하였다. 나이는 스물네 살밖에 안 되는 젊은이였지만 그의 꿈은 2000만 동포의 살길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혁명가 손문이 삼민주의를 제창한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도 '민족, 민권, 민생'을 살리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나는 중앙고보에 다닌 적도 없고 보성전문에 입학한 적도 없지만, 인촌 김성수를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47년인가 1948년의 일로 기억되는데 3·1절 기념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어 나는 대학생의 한 사람으로 그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때 인촌이 단상에 올라가서 던진 한마디가 족히 70년이 지난 오늘도 내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요약하면 이런 말이었다.
'여러분, 전체주의나 독재 체제에서는 모든 일이 즉시에 해결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일이 되기는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라는 한마디였던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평범한 말이지만 김일성의 하는 일을 내 눈으로 보고 월남한 나로서는 남조선의 모든 일이 느리게만 느껴지고 답답하게만 생각되던 터에 그 해답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인촌을 나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인촌은 비록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기를 위하여는 동전 한 푼도 아껴 쓰고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해 전달하였고, 가난한 학생을 돕는 일에 가진 것은 아낌없이 주었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 중 한 사람이던 고려대학 교수 유진오가 들고 온 농지개혁법에 동의함으로써 그는 자진하여 3000정보(町步)가 넘는 막대한 농토를 국가에 헌납한 셈이다. 그러고도 인촌은 단 한 번도 공치사를 한 일이 없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인촌 김성수가 항일에서 친일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비방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강요에 못 이겨 라디오를 통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학병에 나가라고, 징병에 응하라고 권고한 일이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지만, 오죽 탄압과 협박이 심했으면 그런 방송을 하였겠는가 짐작해 볼 만한 아량은 없는가.
그가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학병에 나가라고 권하는 글을 쓴 것이 있다고, 또는 징병제도를 찬양한 적이 있다고 인촌을 매도하는 자들도 있지만 생각하여 보라. 학생들을 이끌고 조선신궁을 찾아가 참배 아닌 참배를 한 일제하 기독교 학교의 교장들이 그 일을 원해서 했겠는가. 유명한 친일파 박춘금이 시내 식도원에서 인촌을 청해 놓고 권총을 휘두르며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하라고 공갈 협박을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인촌 김성수의 64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무슨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인촌은 일제하 35년을 이 나라 지식인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 고통스럽게 살았을 뿐 아니라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 뒤 혼란한 정국 속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당시의 자유당 정권이 그의 사상과 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임기가 차기도 전에 그 자리를 물러났다.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앙앙불락 지칠 대로 지친 인촌은 병을 얻어 20년을 더 살아야 할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손문의 삼민주의를 실천에 옮겨 보려고 온갖 시련을 다 겪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실패했다고 자인하였다. 본디 정치인이 아니었던 인촌은 정치인으로는 실패했지만, 중앙학교와 고려대학은 아직도 민족의 역군들을 길러내고 있고 그가 나이 30에 일궈놓은 동아일보는 오늘도 이 나라 굴지의 언론기관 중 하나로 국민의 존경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이 눈부신 시대를 맞이했지만, 경성방직은 국민의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인촌의 일생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촌 김성수를 생각하며 나는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여기부터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 논란이 있다. 대한민국 초기 정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하여 부안 줄포에서 자랐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나 56년 만인 2018년에 박탈되었다.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다.
1. 출생과 가계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화순 군수, 진안 군수, 군위 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① 유년기
조부 김요협은 전북 고창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고, 김기중과 김경중 형제는 줄곧 그 곳에서 거주하였으며 김성수 역시 조부가 세운 집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중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맏손자인 인촌에게만큼은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 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② 청소년기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고정주(高鼎柱)의 딸이며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고정주는 장흥 고씨로서 전라도 창평군(현 담양)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 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③ 송진우와의 만남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④ 수학과 서구 문물 수용
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 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2. 청년기
① 도일 유학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동경 유학을 결심 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② 대학 재학 시절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③ 교육·계몽 활동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이때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3.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
식민치하의 조선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했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 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에서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경성방직’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① 독립운동 준비와 만세운동 계획 수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② 3·1 운동 전후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 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 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1919년 10월 3.1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한 이아주(李娥珠)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이아주의 문병을 갔다. 이 인연으로 후일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다. 이아주는 용인이씨 이봉섭(李鳳涉)과 김해김씨의 딸로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아주는 후에 2005년 3월 7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③ 의류사업 확장과 경성방직회사 창업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고,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 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④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 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 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⑤ 언론과 계몽운동
송진우 출감 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석농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 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계몽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계몽 및 문맹자 교화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⑥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제품애용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 보냈다.
⑦ 자치, 실력양성 운동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문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⑧ 간디의 영향, 세계 일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⑨ 브나로드 운동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 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 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4. 교육과 언론 활동
① 보성전문학교 인수와 사업 경영난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
② 일장기 말소 사건과 교육활동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정책으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보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보고 귀국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 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③ 1930년대 후반. 창씨개명, 조선어학회 사건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④ 태평양 전쟁 전후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칩거, 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⑤ 광복 직전
한편 그는 1941년부터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자,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윤치영 등과 함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창씨를 거절했다. 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졌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 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5. 친일 행적 논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 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 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
—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성하라.“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며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 매일신보 1943년 11월 6일자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 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6. 정치활동
① 광복과 군정기. 한민당 창당 조직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
②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③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 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④ 암살 미수와 김구와의 결별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 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가 미수로 끝났다.
⑤ 총리 인준 부결과 야당화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⑥ 내각 책임제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건국 초에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여 정권의 교체가 잦아지면 정치적 혼란을 막기 어렵고 새 나라의 초석을 놓는 일에서도 비능률적일 것이므로 이 박사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⑦ 부통령 취임 이후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⑧ 민국당 조직과 전란
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 (대한민국, 1955)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전쟁 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⑨ 제2대 부통령
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
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
...(이상 생략)...우리가 공산주의를 격멸하기 위해서는 여러우방과의 제휴와 친선을 촉진시키는 한편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확보하여 확고부동한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확립해야 한다. ...(이하 생략)...- 1951년 5월 18일 부통령 취임사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⑩ 부통령 사퇴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⑪ 야당 결성 운동
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 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7. 사망과 사후
① 사망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재야세력을 망라한 신당의 조직은 국민의 여망이다. 우리 민주국민당으로서도 구각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자세를 갖춰야 할 때다.”
그 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 15일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그의 위독 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 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
② 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국민장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
③ 사후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의 묘소와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8. 평가와 비판
① 긍정적 평가
일제 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 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고 평했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김성수론> 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② 비판적 평가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 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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