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
본문은,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들에게 형통함을 허용하신다. 그들은 건강하고 물질적 부요를 누리고 자녀들이 번창하고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사람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까닭은 외적인 것, 세상적인 것, 즉 건강과 물질과 세상적 출세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상 허무한 것들이다. 전도서 1:2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것을 다섯 번이나 '헛되다'는 말을 사용하며 증거하였다.
성도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고 말한다. '강포'라는 원어(쇼드)는 '강포, 파괴'라는 뜻이며, '품는다'는 원어(하가)는 '묵상하다, 상상하다, 계획하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강포한 마음을 품고 강포한 일을 계획하고 강포한 말을 하고 강포한 행동을 하며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의 복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고 조만간 심판하시며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육신적인, 물질적인, 세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두고 그의 뜻대로 경건과 의와 선에 두어야 한다. 시편 15:1-5은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는 의롭고 정직하게 행하며 진실을 말하며 남을 비방하거나 악을 행치 않는 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악인들의 악 자체를 미워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가치를 두고 또 경건과 도덕성에 가치를 두자.
[3-4절]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본문은,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이 집은 물질적인 집이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다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건축자가 집을 지을 때에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명철하며 지식 있는 설계자와 건축자가 아름답고 견고한 집을 잘 지을 수 있고 집의 내부구조도 적절하게 배치하여 각종 좋은 것들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을 건립하는 데도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유다서 20,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
지혜롭고 명철한 자는 자신의 삶을 견고히 세우며 지식이 있는 자는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울 것이다.
가정의 건립도 그렇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가정을 세울 때 가정은 든든히 세워지고 복된 자녀들도 얻을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고린도전서 3:9, 16,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나 이 성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 건립되는 과정에 있다(엡 2:21-22). 교회의 교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엡 4:12). 모든 교우들은 믿음과 지식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엡 4:13-16).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집을 건축하자. 물질적인 집도, 개인의 삶도, 가정도 그렇게 하고, 특히 교회를 그렇게 세워가자.
[5-6절]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본문은,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말한다. 후반부는, "이는 네가 모략으로 싸울 것이며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음이니라"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NASB).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이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 곧 지혜
와 명철이며, 또 거기에서 힘과 용기가 나온다. 시글락의 많은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의 침략으로 잡혀갔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상해 다윗을 돌로 치려 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삼상 30:6).
이사야 40:28-31,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본문은 "이는 네가 모략으로 싸울 것이며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음이니라"고 말한다.
전쟁은 군사력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작전이 매우 중요하다.
잠언 20:18,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우리는 전쟁뿐 아니라, 일상 사업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지혜와 지식을 얻고 힘과 용기를 얻어, 일상생활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승리하자.
[7절]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의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의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함으로 얻는 지혜는 미련한 자가 깨닫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고상한 덕이다. 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미련한 자는 육신적 차원의 것, 물질적 차원의 것, 세상적 차원의 것만 이해하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영적인, 천적(天的)인, 내세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본문은 미련한 자가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한다고 말한다. 옛 시대에 성문 앞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곳이며 또 소송사건들을 처리하는 법정으로 사용되었다. 신명기 21:19에 보면,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처벌할 때 그 부모는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여 처벌케 하였다.
지혜자는 사람들 앞에서나 법정에서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주장과 변론과 반박을 할 수 있다. 그는 무엇이든지 양심적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지혜와 용기와 담력이 없는 자이다.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반박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경우에 맞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고 이성에 맞지 않고 양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말은 경건한 자에게는 더 반박을 당할 것이다. 왜냐면 그의 말이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성경 교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무엇을 주장하고 변론할 때, 이성에 맞고 양심에 맞고 성경에 맞는 지혜롭고 합당한 의 말을 담대히 하자.
[8-9절]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
본문은,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바아르 메짐모스)는 '음모의 사람' 즉 음모자(schemer)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는 남을 해하려고 음모하는 자이다.
본문은 또,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라고 말한다. '생각'이라는 원어(짐마)도 '계획, 음모'라는 뜻이다. 미련한 자의 계획 혹은 음모는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남에게 악을 행하려는 악한 계획이다. 그것은 죄악되다. 우리는 그런 생각이나 계획을 품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또,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는 '조롱하는 자'라는 뜻이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조롱한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행위와 태도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지 남을 조롱하면 안 된다. 또한 양심적으로도 그것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다 그만그만하지 특히 선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자신이 대단히 선한 것처럼 생각하고 남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더욱이, 성경말씀에 의거해도, 그것은 바르지 못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며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겸손히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의 계명은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처신하며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 즉 악한 음모자가 되지 말고, 미련하고 악한 계획을 품는 자가 되지 말고, 남을 조롱하는 자가 되지 말자.
[10절]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본문은,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고 말한다. 환난날은 어려운 일이 닥친 날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중한 병에 걸렸다거나, 부모님이나 남편과 아내나 자녀 등 사랑하는 가족이 중한 병에 걸렸거나 죽었거나, 실직, 부도, 파산 등 경제 파탄이 생겼거나, 지진, 기근, 전쟁, 대형사고의 경우 등을 가리킨다.
또 '낙담하다'는 원어(라파)는 '느슨하다, 기운이 없다'는 뜻이다. 평소에 건강하고 활달하던 사람도 환난날에는 기운이 빠지고 맥이 풀리고 식욕이 없어지고 일할 의욕도, 심지어 살 의욕도 없어지기 쉽다. 만일 우리가 환난날에 낙담하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의 미약함 혹은 제한적임을 보이는 것뿐이다.
이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사람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다 연약한 존재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도 일시적으로는 낙심하였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만 먹는 것을 싫어하고 고기 먹기를 원하여 울었을 때, 모세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들을 잉태하여 낳았습니까? 제 책임이 너무 무거워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즉시 나를 죽여 저로 이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갈멜산의 대승리를 이룬 다음날 왕후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힘을 얻는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힘이 되신다. 다윗은 많은 사람이 그를 대적하였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평안과 담대함을 얻었다고 고백하였다(시 3:1-
8). 또 그는 하나님을 힘과 도움으로 삼았다(시 18편).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힘과 위로로 삼자. 특히 어려운 문제가 우리를 덮친 환난날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힘을 내자.
[11-12절]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 . . .”
본문은,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말한다.
본문은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살육을 당하게 된 자들을 외면치 말고 구원하라는 교훈이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교훈과 같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큰 계명이다(마 22:39).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 재물을 가지고 굶주리는 형제를 돕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어떻게 거하겠는가고 말하였다(요일 3:17-18).
본문은 오늘날 특별히 두 가지 일에 적용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에는 지금도 20-30만명이 정치범수용소들에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북한의 인권탄압을 규탄해야 한다. 또 여러 해 동안 일방적 퍼주기식의 지원을 반성하고 북한에 대해 자유와 개방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300만명의 아사자를 내고 20-30만명의 인민들을 학대함으로써 유지되는 독재정권이 무너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고, 그들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다.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무관심하지 말아야 한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며 가장 힘써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구원하자. 특히,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영혼 구원의 전도에 사명감을 갖고 힘쓰자.
[13-14절]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 . .
본문은,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꿀은 벌들이 꽃의 꿀을 모은 것이다. 그것은 무기질을 포함한 설탕 성분으로서 아주 뛰어난 에너지 식품이다. 그것은 입에 달고 몸에도 힘이 되므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식품이다.
본문은 지혜가 꿀과 같다고 말한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이다. 또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는 꿀과 같이 우리 마음에 즐거움이 되고 유익이 된다.
시편 73편 저자는 하나님께 대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고 고백하였고(시 73:25), 시편 84편 저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말했다(시 84:1).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했고(시 19:10, 11),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즐거움과 위로라고 말했고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하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4, 50, 92, 103). 잠언 3:17은 지혜의 길이 곧 즐거움과 평강의 길이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우리가 지혜를 얻으면 정녕히 우리의 장래가 있고 우리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 3:18은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지혜는 확실히 영생의 길이다.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자.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자. 또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15-16절]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 . .”
본문은,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악한 자에게 의인의 집을 엿보거나 그의 쉬는 처소를 헐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도,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슥 7:10-11).
악한 자는 교만과 욕심과 시기심 때문에 의인을 해치려 한다. 겸손한 사람은 선의의 경쟁은 하나 시기심을 품고 남을 미워하고 해치려 하지는 않는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때 그것 때문에 동생을 미워하며 시기했고 마침내 들에서 그를 쳐죽였었다(창 4:3-8). 구타나 살인 뿐만 아니라, 남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비난도 매우 악한 일이다.
본문은 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한다. '대저'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의인을 해치려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의인도 때때로 넘어진다. 그는 자신의 부족과 실수와 하나님의 징계로, 혹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 가운데 넘어진다.
그러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또 그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시편 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그러므로 선지자 미가는 미가 7:8에서,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질 것이다.
우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의롭게만 살자. 특히 미움과 시기와 남을 비방함을 조심하자. 또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17-18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 . . .”
본문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말한다.
원수는 사람을 악하게 비난하고 괴롭히고 해치고 심지어 죽이려 하는 자이며 그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탄원하며 호소하기도 하는 자이다. 사람은 교만과 욕심, 시기심과 미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된다. 다윗에게는 사울 왕과 압살롬 같은 원수가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에돔, 암몬, 모압, 애굽, 앗수르 나라 등의 원수가 있었다.
원수는 때때로 넘어지고 엎드러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에 대해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악한 원수는 엎드러질 것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거나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상 우리는 행위로 그들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족과 실수와 범죄함이 많았고 또 많다.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도 간음하고 살인하는 큰 죄를 범하였었다. 성도의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을 기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높은 마음과 자긍하는 마음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셔서 그의 진노를 옮기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심을 감사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높은 마음이나 남을 멸시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족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오늘까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해치는 악인이 되지 말고 원수가 엎드러질 때 기뻐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감사하며 오직 의와 선을 행하자.
[19-20절]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본문은,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한다.
행악자는 남에게 악을 행하고 남을 해치는 자를 말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며 악은 남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행악자가 득의한다는 말은 악을 행하는 자가 그의 바라던 뜻을 이루고 그의 하는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하다는 말이다. 악한 자가 돈도 잘 벌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고 그의 자녀들도 건강하고 번창하는 것 같은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성도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해 마음이 상하거나 분을 품거나 또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세상의 것들을 너무 크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도가 세상의 것들을 너무 크게 여기면, 그는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현실을 보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성도는 영적, 도덕적 가치, 즉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물질적, 현세적 가치와 복보다 더 크게 여기는 자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성경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다.
그러므로 행악자가 현세에서 혹 형통한 것 같아도, 성도는 마음이 상하거나 분을 품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본문은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한다. '장래'는 후손의 복을 포함할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내세(來世)의 복 곧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행악자에게는 복된 내세가 없다. 또 악인의 등불 곧 그의 행복은 조만간 꺼질 것이다. 잠언 13:9도,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한다. 행악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결코 복되지 않다.
우리는 행악자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의 뜻인 계명을 행하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두자.
[21-22절]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본문은,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나라의 왕을 경외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의무이다. 하나님은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화산과 지진과 폭풍과 홍수를 주관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겨야 한다.
한 나라의 왕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 나라의 백성이 가지는 기본적 의무이다. 왕은 한 나라에 세움을 받은 최고의 통치자이다. 제5계명의 정신은 집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학교에서 선생을 존경하고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하고 사회에서 통치자를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질서이며 순리이며 선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나 단체나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을 원치 않으신다.
본문은 반역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반역자'라는 원어(쇼님)는 '변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했다가 변한 변절자들이다. 우리가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로 본문은,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고 말한다. '이 두 자의 멸망'(피드 쉐네헴)에서 '이 두 자'는 하나님과 왕을 가리키며 '이 두 자의 멸망'은 '이 두 자로부터 오는 재앙'이라는 뜻인 것 같다(NASB, NIV).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를 벌하실 것이며 왕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반역자와 사귀면, 우리는 같은 재앙과 큰 해를 당하거나 당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을 경외하자. 우리는 반역자, 변절자가 되지 말고 또 그런 자들과 더불어 사귀다가 함께 재앙을 받지 말자.
[23-26절]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 . . .”
23절은,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지혜로운 자들에게 속하는 것들](KJV)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고 말한다.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아는 사이니까, 고향 사람이니까, 선후배니까 배려하여 재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출애굽기 23:2-3은,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하며, 또 잠언 18:5에도,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재판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4-25절은,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신다.
잠언 17:15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한다.
사람들도 불의한 재판을 미워한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이 있어서 사물의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분별하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악인을 옳다 하면 사람들의 저주와 미움을 받을 것이며, 그를 책망하면 기쁨과 복을 얻을 것이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할 것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확실히 악인을 대적할 것이다(잠 28:4).
26절은,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는 [그의] 입술에 입맞추리라"이다. 본문은 앞의 구절에 연결되는 것 같다. '[그의] 입술'은 악인을 견책하는 자의 입술을 가리킬 것이다.
재판할 때 사람의 낯을 보아주지 말고 공평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선과 악을 공의로 판단하고 선을 칭찬하고 악을 책망해야 한다.
[27절]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본문은,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고 말한다. 요즘에는 안과 밖의 일의 구분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안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남편은 '바깥양반'이고, 아내는 '집사람'이다. 바깥일은 농사, 목축, 공장, 장사, 직장, 회사 등의 일을 다 포함한다.
본문은 밖에서 다스리고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집을 세우라고 말한다. 집을 세우는 것은 가정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가정을 세우려면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집을 세우려면, 먼저 안정적 직장을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얼마큼 저축한 후에 해야 한다.
물론,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자세한 구상과 설계를 하고, 거기에 드는 충분한 비용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자재들과 건축기술자들과 일꾼들을 확보하고 지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는 것도 비슷하다. 결혼하려는 사람은 결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먼저 준비해야 한다. 그는 성숙한 마음과 참된 사랑과 건강한 몸을 준비해야 하고, 또 얼마간의 물질도 준비한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치밀한 계획과 순서 없이 즉흥적으로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을 고칠 때, 먼저 새 장판으로 바꾸고, 그 다음에 벽지를 뜯고 새것으로 바르고, 그 다음 싱크대도 고치고, 그 다음에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한다면, 그는 일을 완전히 거꾸로 하는 자일 것이다. 그는 먼저 낡은 장판과 벽지를 뜯어내고, 그 다음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하고, 그 다음 새 벽지를 바르고, 그 다음 싱크대를 고치고, 그 다음 새 장판을 깔아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에는 순서가 있고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 후에 해야 한다. 가정을 세우는 자도 상당한 준비를 한 후 해야 할 것이다.
[28-29절]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 . . .”
28절은,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증인은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증거를 해야 한다. 까닭 없이, 즉 정당한 이유, 타당한 이유가 없이, 부당하게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증거를 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것은 제9계명을 어기는 거짓 증거하는 일이다. 그것은 남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신임성을 손상시키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하는 일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성도는 서로 지체가 되므로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며(엡 4:25), 항상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 29절은,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행한 악에 대해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한 공적 형벌은 필요하지만, 사사로운 보복은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며 심지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2:17, 20,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우리는 범사에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개인적 보복을 하지 말고, 오직 선만 베풀자.
[30-34절]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 . . .
30-32절은,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고 말한다. '증왕에'라는 말은 '이전에'라는 뜻이다. 본문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같은 부류에 둔다. 게으름은 곧 미련함이요, 부지런함은 곧 지혜이다.
게으름의 표시는 삶과 일터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게으른 농사꾼의 밭과 포도원에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고 표현된다. 이와 같이, 게으른 학생, 게으른 주부, 게으른 직장인, 게으른 목사, 게으른 직분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그의 게으름의 흔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33-34절은,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말한다. 게으름의 한 표는 잠을 과도히 많이 자는 것이며, 그 결과는 물질적 궁핍이다.
잠언 10:4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잠언 31장에 묘사되었다(잠 31:13, 15, 27).
세상 일도,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디모데전서 4:15, "이 모든 일[경건훈련]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우리는 세상 일 뿐 아니라, 또한 믿는 일, 즉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하자.
펴온 설교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