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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창경궁 종묘(宗廟)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1395년 조선이 태조가 한양을 새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경복궁)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진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른 것이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 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합쳐서 종묘라 부른다.정전의 신실 19칸 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영녕전 16칸에는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왕위에서 쫒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고, 왕위에서 쫒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 전,영녕전,공신당,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향대청,악공청,전사청 등이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이는 존엄과 신성한 분위 기를 위한 의도적인 것이다. 또한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으로 연면적 5만6천평에 달한다.
종묘의 가운데 길은 신도로서 신령만이 걷는 길이며, 양쪽길은 임금과 세자가 이동하는 길이다. 따라서 종묘에서는 신도(神道)로 일반 관광객들이 걷지말라고 안내판을 비치해 두고 있다.
종묘의 정문인 외삼문을 지나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보이는 연못이 지당(池塘)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세상의 모습을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모양이라고 생각하 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말해 납작한 사방형의 땅위에 반구의 형태로 하늘이 덮혀있는 모양으 로 생각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연못 가운데 있는 섬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는데 이곳은 제사지내는 곳 이라 그런지 향나무를 심어 놓았다.
향대청/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잡고 있어 두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향대청 동남쪽으로 망묘루가 있고, 그 뒤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망묘루 자료실 향대청 남쪽에 위치한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 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향대청이 종묘 교육홍보관을 겸하고 있다. 제기도병풍으로 우측은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으로 종묘대제 등 종묘에서 치러 지는 주요 제사에 대한 그림을 상단에 그리고, 이에 대한 절차 등을 하단에 자세하게 풀어 쓴 병풍이다. 좌측 꽃병풍은 모란꽃이 그려져 있는데 모란꽃은 향기가 없다. 그러나 모란꽃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재궁일원/우측 건물이 어재실이고 좌측은 어목욕청이다.
왕은 대여를 타고 종묘 앞까지 온 뒤 종묘에서는 이 소여로 갈아탔다. 어재실의 좌측에 세자재실이 있다. 어목욕청이 어재실 우측에 있다.
바로 보이는 건물이 전사청이다.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평소에는 제사에 사용 하는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ㅁ'자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좌측 건물은 수복방(守僕房)으로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그 앞에 천막단과 성생 위가 있고, 전사청 동쪽에 제정(祭井)이 있다.
찬막단(饌幕壇)은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단이다. 종묘제례에는 날음식을 올렸으므로 특별 한 주의가 필요했기에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둘러 청결하게 하였다.
성생위(省牲位)는 제물인 소.양.돼지를 검사하는 곳으로,제물로 올려도 좋다는 판정이 난 후에야 잡아서 썼다. 종묘제사에는 왼쪽 표(어깨 뒤 얿적다리 앞살)에서 오른쪽 우(어깻죽지 앞살)로 관통하는 상살(上殺)만 올릴 수 있었다. 전사청 동쪽에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제정 주위에는 담을 쌓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전(正殿)은 왕과 왕비가 승하한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곳에 있다. 남문(우측)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그래서 동문이나 서문과는 달이 살문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동문(사진 왼쪽)은 제례 때 제관이 출 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춤을 추는 일무원,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역대 왕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의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몇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세로 69m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낸다. 건축양식도 변화가 있다. 처음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이나 증축된 기둥은 민흘림 기둥으로 변화하였다. 정전의 신실을 잇는 통로가 아름답다. 모두 19실의 신실이 연결되어 이어져 있다. 동문에서 신로가 이어지고 월대 앞에도 신로가 이어져 있다. 월대의 물받이돌도 아름답다. 신실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이 있다. 정전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태극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전의 신위 봉안도 19 신실에 49위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1실 : 태조 고황제와 황후 한씨,강씨 2실 :태종대왕과 원경왕후 인씨 3실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4실 : 세조대왕과 정희왕후 윤씨 5실 : 성종대왕과 공혜왕후 한씨,정현왕후 윤씨 6실 : 중종대왕과 단경왕후 신씨,장경왕후 윤씨,문정왕후 윤씨 7실 : 선조대왕과 의인왕후 박씨,인목왕후 김씨 8실 : 인조대왕과 인열왕후 한씨,장열왕후 조씨 9실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 10실 : 현종대왕과 명성왕후 김씨 11실 : 숙종대왕과 인경왕후 김씨,인현왕후 민씨,인원왕후 김씨 12실 : 영조대왕과 정성왕후 서씨,정순왕후 김씨 13실 : 정조 선황제와 효의선황후 김씨 14실 :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 15실 :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 16실 : 헌종성황제와 효헌성황후김씨,효정성황후 홍씨 17실 :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 18실 :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 19실 ; 순종효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순정효황후 윤씨 공신당 / 역대 임금들을 보좌한 공신들의 사당으로서 총 16칸 규모이며, 안에는 모두 83위의 공신 위패 들이 모셔져 있다. 칠사당(七祀堂)/칠사란 인간의 삶과 생활에 관여하는 일곱 신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현재는 복구작업으로 막을 치고 가려져 있다. 영녕전은 왕실의 신주를 모신 별묘로 1421년(세종3)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다. 그 이름은 왕실과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조廟)라고도 한다. 정전보다 규모가 작지만 친근감 있게 지어졌다. 영녕전 신위 봉안도/ 16감실에34위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영녕전에는 중앙의 각 신실에 태조의 4대조상인 목조,익조,도조,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서협실(西夾室)에는 정종(2대), 문종(5대),단종(6대),덕종(추존),예종(8대),인종(12대), 동협실에는 명종(13대),원종(추존),경종(20대), 진종(추존),장조(추존),영왕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34위위 신주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제레는 유교 예법에 따라 신을 맞는 절차,즐겁게 하는 절차,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 구분하여 종묘 제례악에 맞추어 행한다. 종묘제레는 정전에서는 각 계절의 첫달과 음력 12월에 좋은 날을 정하여 일년 에 다섯번 지냈고,영녕전에서는 봄,가을에 두번 봉행했다. 지금은 매년5월 첫 일요일 오전에 영녕전, 오후에 정전에서 각각 봉행하고 있다.
창경궁(昌慶宮)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이라 칭하였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 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離宮)으로서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창경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중심부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지형을 고 려하면서도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감을 두루 갖춘 궁 궐이 되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이 때 재건된 명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궁궐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내전 건물들은 1830년 환경전 화재 이후 1834년(순조34)에 재건한 것이다.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이지만 일제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고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일반에 공개하였으며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3년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게속하고 있다. 아직 많은 전각이 복원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창경궁 일원 동향의 홍화문에서 명정전도 동향으로 동저서고(東低西高)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홍화문-명정문-명정 전으로 이어지나 일직선이 아니라 꺾인 길로 되어 있다. 홍화문(弘化門 : 보물 제384호)/창경궁의 중심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에 세워졌 다. 1484년(성종15)에 창건,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좌우에 한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옥천교 / 옥천교 귀면/옥천교 보물제386호 명정문/보물 제385호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방형의 전돌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전/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신하들의 하례,과거시험,궁중연회 등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렀 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1616년(광해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며,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 편액/다른 궁궐처럼 편액글씨가 황금글씨가 아니라 검정바탕에 흰글씨가 특징이다. 1800년대 말경에서 1900년대 초에 쓴 원본글씨이다. 명정전 귀공포 명정전 내부 옥좌와 일월오악 병풍 천장에는 왕을 표상하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왕실 상징의 봉황이 그려진 천장 월대 답도/봉황과 신수가 조각되어 있다. 월대 계단 신수 월대 답도계단 봉황이 그려져 있다. 명정전 계단 태극문양 꽃창살문양 바닥돌 문정전(文政殿)/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이런 특이한 배치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동 행각과 함께 복원되었 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이 문정전 앞뜰에서 벌어졌었다. 문정전 편액 문정전은 편전으로 명정전과 내부가 비슷하나 천장에 봉황이 없다. 문정전 천장 숭문당 벽면 하단/드므 숭문당(崇文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 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1830년 소실, 그해에 재건되었다. 경사진 터를 교묘히 이용하여 뒤는 낮은 주초석을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처럼 되었다.영조의 친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숭문당 기둥모양이 특이하다. 위는 좁고 아래는 굵은 사각기둥이다. 건물 아래에 통풍구가 있다. 우물천장을 한 내부에는 일감재자(日監在玆)란 게판이 있는데 이것은 외부의 숭문당 현판과 함께 영조 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태학생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숭문당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특이하게 설계되어 잇다. 빈양문은 외전과 내전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문이다. 빈양문을 들어서면 왕의 일반 생활 공간이 기 때문에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되었다. 함인정(涵仁亭)/함인정은 원래 인양전이 있던 터에 1633년(이조11) 건립된 정자이다. 남향에다 앞마당 이 넓게 트여 잇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 건물 사방이 벽체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안 네면의 벽에는 晉나라 고개지(시인,화가)의 사계시가 걸려 잇다. 함인정과 편액 진(晉)나라 고개지(顧愷之)의 사계(四季) 봄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많은 기이한 봉우리를 만들고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겨울 산마루엔 한그루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통명전(通明殿)/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 한 박석을 깔았다.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었다. 장희빈이 숙종 때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 시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는 역사의 아픈 상처를 남긴 곳이다. 통명전 편액 글씨는 순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통명전과 양화당 편액 양화당(養和堂)/양화당은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 도 했다. 통명전과 함께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환경전(歡慶殿)/환경전은 경춘전,통명전,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그러나 환경전은 주로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건물은 화재로 소실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조선시대 의녀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를 담당했던 대장금이 이곳 환경전에서 중종 을 치료했다. 중종이 승하한 것도 이곳 환경전에서였다. 경춘전(景春殿)/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 가 이루어졋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 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 하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경춘전 현판 건축연도 미상의 중국식 불탑이 서 있다. 석탑 옆 정원에 우물도 보인다. 풍기대/풍기대는 대 위에 구멍을 뜷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탁자모양의 돌기둥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보물 제846호로 지정되었다. 앙부일구/입체해시계인 앙부일구는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보물 제845호의 모사품이다. 성종의 태를 모신 태실과 태실비다.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그 태를 항아리에 넣어 명당에다 묻었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왕의 태실로서 석물을 갖추고 태실비를 세웠다. 일제가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왕의 태실을 대부분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는 이곳에 두었다. 백송/춘당지 근처에 두그루의 백송이 시선을 끈다. 자작나무로 오인할 수 있지만 껍질이 하얀 소나무이다. 중국에서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인이 심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춘당지(春당塘池)/춘당지는 현재 두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 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 었다. 이 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 다. 가운데 있는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춘당지 뒤쪽에 대온실(大溫室)이 있다. 190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온실이다. (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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