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나는 날
이형국
자유로워졌구나! 손을 뻗어 허공을 한 움큼 쥐어 본다. 가볍다는 느낌이다. 솜털보다도 더 가볍다 싶어 손바닥을 펴보니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지금부터는 나 혼자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를 가두고 있는 건 입고 있는 내 몸에 걸쳐진 한 벌의 옷뿐이다.
세월이 흘러가니 (흐름에 따라) 아내와의 (나) 사이에 옅거나 짙은 정이 쌓여가는 (도타워지는 정의) 이면에는 마찰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가니 둘 사이엔 사랑이란 단어 (위)에는 먼지만 쌓여갔다. (덕지덕지 앉았다.) 포옹하고(과) 입맞춤은 사치가 된 지 오래였다. 십 년도 넘게 각방을 썼다. 각방을 사용하게 된 요인은 자고 깨는 시각이 다르고 (제각각이고) 선호하는 TV 채널이 다르다는 것, (도 다르고,) 그리고 사생활에 있어(의) 불편과 침해 등이었다.(가 싫어서다.)
아내는 새벽마다 운동하러 나가고, 일주일에 두세 번 사우나에 들린다. 그때마다 내가 잠을 설칠까 봐서 신경을 썼나 보다. 나의 삼시 세끼와 휴대폰도 (부부살이를 저해함에) 한몫한다. 은퇴 이후 꼬박꼬박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려는 내가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또 통화든 SNS든 누군가가 옆에 붙어 있으면 폰 사용이 불편한 건 누구나 그럴거다. (피차일반일 것이다.) 특히 아내나 남편이 곁에 있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하루의 삶이 (아내의 하루가) 폰으로 시작해서 폰으로 끝나는 모습을 허구한 날 봐왔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는 늘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려 잠을 설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심해지는 아내의 잔소리는(에) 자존감이 흔들리다 못해 뿌리 체(채) 뽑혀 나가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아내의 눈치를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워진다.→
그러나 이런 이유는 구실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원인은 육체적 접촉이 없어진 마당에 굳이 같은 침대에서 살을 맞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신적 면이야 당장에 어쩔 수 없지만, 이제 육체적 구속에서만은 해방되고 싶었던 바람 때문이(어서)다.
부부가 살면서 다툼없이 살아왔다면, 거짓말이거나 철저히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라 본다. 태어남도 성장도 다른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다름에서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는 삶일진대 마찰이 없다는 건 서로 무관심의 삶, 소위(이른바) 쇼윈도 부부의 삶이 아니겠는가. 어설픈 나는 철저히 청교도적인 아내와의 마찰을 사랑이, 정이 익어가는 거로 받아들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이면에서는 여러 가지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를 위해 내가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각종 문화센터나 도서관에서 개설하는 강의를 수강하거나 여러 동아리에 가입했다. 또, (끼니를 잇는 것 또한 문제다.) 집밥에 길들어져 있던 나에게는 끼(어 밥) 때가 되면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혼밥이 싫어서다. 굶을까 말까. 결론은 거의 건너뛰었다. (망설인 끝에 대부분은 건너뛴다.) 그러기에, 내 배낭 속에는 항상 초콜릿과 사탕을(이) 들어 있었다.
초콜릿을 씹으면서, 혼밥조차 하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저주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둘 사이의 실타래가 너무 엉켜 있구나. 더 나빠지기 전에 매듭을 찾아 풀어야겠다.’라는 결심이 섰다. 자존감이 다 무너져버린 나에게서는 희망이 없다. (‘내가 아내의 눈치를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워진다.) 더이상 아내 앞에서 사랑 타령을 하기도 싫다. 사십 년 넘게 고생시키고 애먹여왔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간단한 옷가지만 들고 나왔다. 나머지 책이랑 소소한 물건들은 방 구하는 대로 가지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백업한 노트북만 가져갈 테니 기타 잡동사니는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덧붙였다. 아내는 한마디 말(입)조차 떼지 않았다. 아이들과의 연락은 각각 직접 주고받기로 했다. 당분간은 저절로 알게 될 때까지 아이들에게 (집 나간 사실을) 이야기 말라고 했다.
이번에는 가출이 아니다. 가출도 두 번이나 했으니, 아이들이야 “(‘)아빠 병이 도졌구나.”(’)하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이번은 다르다. 쉽게 말해 별거였다. 아내는 넋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아이고 저 화상!’ 하며 속 시원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껏 한두 달 안에 제 발로 걸어 들어 올 거야.’ 하고 대수롭잖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내와 나는 결혼이란 올가미에 씌어 반평생을 서로의 종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언제인가부터 죽기 전에 오롯이 나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인식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이 대담한 시도의 주사위는 내가 먼저 던졌다. 예상외로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개고생도 한 번 해보라는 뜻일 게다. 자기의 그늘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직접 느껴보라는 암시인지도 모른다.
비록 원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현실이 될까 두려워했던 별거란 용어가 나에게까지 촉수를 뻗을 줄은 몰랐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했다. 내가 혼자 헤어날 힘이 있겠는가. 나 자신도 미더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사내로서 체면이 있다. 뱉어낸 말이다. 거둬들일 수 없는 쏟아진 물일 뿐이다. 이전보다 갑절의 머리를 굴린다.(려 보지만) 자신이 없다. 하지만 시행되어야만 한다,
‘만약에 아내의 집에서 나온다면, 나는 그야말로 알거지가 된다. 모든 재산이 아내 명의이고. 나에게는 몇 푼 되지 않는 연금뿐이다. 동사무소에서 영세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기초연금을 받는다 해도 겨우 입에 풀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자리를 구해야지. 그렇게 (그리) 되면 지금껏 해오던 모든 일상사를 단절해야 한다. 그래, 그래도 사십 년을 훌쩍 넘었지만 이런 구질구질한 삶의 굴레에서는 일단 벗어나야겠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되겠지.’
이십 대 이후 오랜만의 독신생활이다. 내가 살던 이곳에서 (아내의 집에서) 정반대 쪽으로 가서 방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말해 쪽팔리는 일 아닌가. 사내새끼로 태어나 이 나이 먹도록 가정 하나조차 온전히 다스리지 못한 무능력자, 지금껏 겪어온 굴곡 많은 삶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거처 근처는, 수치스러워서라도 도저히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
일단 자리 잡으면, 동사무소나 노인 고용센터, 혹은 시니어 클럽 등을 방문하여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
‘아마 한 달 이내로 자식들의 전화와 손주들의 회유성 연락을 수도 없이 받게 되겠지. 아내에게서는 단 한 통의 문자, 톡이나 전화도 오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냥 자유로움과 평안함만 있지는 않겠지. 틀림없을 거다. 그래, 내 그늘도 그리 만만치 않게 그녀 주위를 너울대고 있을 테니까. 내 머릿속에도 벌써 경박한 내 행위에 대한 후회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듯이.’
자유를 소리치며 뛰쳐나왔던 지난 사십 대의 가출이 지금 나의 처지에 겹쳐진다.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 그땐 직장이라도 있었다. 주머니가 두둑했으니, 어느 정도 겁을 상실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갑자기 두려움이 앞선다. 나 같은 겁쟁이가, 인형극의 인형 같이 살아온 자가 칠순이 넘은 이 시점에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갑자기 아내가, 자식이, 손주들이, 친구들이 모두 모두 보고 싶다.
☜미치겠다, 벌써 ‘이번에도’ 하는 돌발적인 생각에, 나는 화들짝 놀란다.
(2022.08) (18.1매 2564자)
○ 중복 문맥 삭제
안돼 안돼
(그럼 안녕)
이연희
날 좀 봐봐. 일부러 고개 돌리지 말고 나를 보란 말이야. 아무리 갈대와 같은 것이 여자 마음이라지만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드니? 나 아직 젊어. 살결도 뽀얗고 몸매도 날렵하고 아직 몸에 흉터 하나 없어. 네 손으로 내 옷을 벗겨 봤잖아. 아까(도) 직접 옷을 벗겨 내 몸을 쓰다듬을 때 솔직히 두근거리고 떨렸어. 아직 쓸만한 몸매라 자부심이 있어 설렜는데 너는 아무런 감정이 없더구나.
너와 내가 사귄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네.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세월이 시속 70km(로) 가까이 달리니 그 빠르기가 감당 못하겠네. 돌이켜 보면 너랑 같이 한세월이 참으로 좋았단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것 말고 뭐가 더 중요하겠니!(.) 내가 너를 좋아하고 너는 나를 무조건 아끼고 (는데) 우리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염려는 없었지.
언제부터 너의 사랑이 조금씩 식어가는 걸 느꼈지만 내 눈에는 중간에 끼어든 그가 경쟁자로 보이지 않았어. 내가 사정이 안될 때 그가 너랑 시간을 보내는 정도는 눈감고 봐줄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밤이야. 밤에는 내가 너를 품에 안고 잠이 들잖아. 그 이상 뭘 바라겠어. 동짓달 긴(긴) 밤도 너랑 붙어 비비고 자면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데(았지).
올여름에는 내가 좀 많이 섭섭했어. 잠들 때까지 품에 앉(안)고 사랑의 언어(을) 속삭여준 나에게 섭섭한 소리를 하더군.
“이상하게 너랑 자고 나면 머리가 아파.”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너는 모를거야. 밤새워 사랑한 대가가 고작 (머리 타령이라니).
우리(린) 서로 삐친채 몇 달을 보냈어. 먼저 손을 내밀 줄을 모르고 평행선만 달리고 있으니 (둘 다 어지간했지). 네가 나에게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다현이 공인 듯하네. 고것이 서로 화해를 하라고 부추기니 어쩌겠어. 다현이가 집에 있는 동안에라도 친한 척해야지. 네가 또 (‘)척(’)하는 것은 잘하잖아.
너의 냉대에 나는 이제 지쳤어. 얼마 전부터 입으로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더라. (이 깔깔해 곡기를 끊게 되더라.) 먹는 게 전혀 없으니 내 목숨이 위태하다 싶었는지 인터넷으로 명의를 찾고 난리를 치네(데).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너는 나를 안고 병원으로 가더라. 몇 날 며칠 곡기를 끊어 (허기져) 흐릿해진 눈으로 너의 (네) 품에 안겨 가만히 바라다봤어. 우리 인연이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 찾아가는 의사가 명의라 나를 낫게 해 주면 좋으련마는.
유명한 병원이라 역시 대기자가 많더라. 너는 나를 안고 안마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지. 오롯이 나 혼자 너를 차지하고 있으니 새록새록 옛 생각이 나더구나.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네. 너랑 의사 앞에 앉으니 왜 그리 떨리는지. 의사는 너를 보고 분홍빛 내 드레스를 벗기라고 하더구나. 너는 꽉 죄는 내 옷을 벗기느라 손톱이 부러지기까지 했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깜빡 깜박 정신을 잃을 때가 많다고 의사에게 증상을 얘기하더구나. 나한테 영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다 알고 있었네.
의사가 한참 동안 이곳저곳 진찰을 하더니 개복해 봐야 겠다고 하네. 이 무슨 소리야 아이고 떨려라. 시간이 좀 걸린다고 너 보고 편하게 한참 쉬고 있으라 하더구나. 너는 안절부절 왔다 갔다 하더라. 아마 허리가 좋지 않아서 그럴 거라고 짐작했어. 의사가 보호자를 찾더구나. 뱃속을 본 결과 속이 많이 상해서 인공 장기로 바꿔야겠다고, 그럼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네. 의사는 차라리 그 돈으로 이쁘고 젊은 애를 하나 데려오면 어떻겠냐고 한다. 이런 나쁜 의사 같으니라고, 네가 나를 끝까지 낫게 해 줘야 할 거 아니냐. (조강지처) 나를 안락사를 시키고 이쁜 애를 입양하라니 그게 인간으로서 (차마) 할 소리(인)가?
몇 달간 냉대를 한 미안함이 남았던지 너는 나를 안고 집에 오더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음식을 먹이더라. 너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삼키려 해도 안 넘어가고 그만 기절해 버렸어.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 전화 목소리가 들리네. 다현이 아빠랑 통화하더구나. 다현이 아빠가 아마 이쁜 애를 입양시켜 준다 (주겠다) 한 모양이네. 만면에 미소를 띠며 들어와 나를 한 번 쓰다듬더니 한쪽으로 밀쳐 버리네. 이대로 영영 이별이구나. 한 번만 더 나를 봐 달라고 소리쳐도 안 들리는 모양이네.
며칠 후 다현이 아빠가 내 손자 뻘쯤 되는 베어 먹은 사과가 붙은 풋내 나는 애를 데리고 오겠지. 많이 애통하고 아쉽지만 아쉬(서러)워 말자. 다른 사람들이 그 애를 '아이패드 10세대'라 부른다더라. 이게 세대 교체 라는 것이겠지. (사랑을 나누던) 그동안 행복했었단다. 우리 서로가 몇 년간 사랑했었잖아. 그간의 (세월에 장사 없지.) 아름다운 추억만 안고 갈게. 바이 바이.
○ 아까 : 신선한 표현
↳ 통상 조금 전
비난과 웃음
권자이
잘못하면 비난하(받)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면 웃음거리가 된다.
☜비난과 질책은 그래도 관심일 수 있지만 웃음은 경멸하는 것이다. 밭에 난 바랭이풀이(가) 왜 비난 받다 못해 웃음거리가 될까.
수십 세대가 하는 (한두 망씩 나누어 경작하는) 주말농장에(,) 길가 쪽으로 두 망(과) 건너에는 한 망은 전부(온통) 바랭이풀이다. 바로다음(어느) 망은 봄에 모종을 심긴 했지만 역시 바랭이풀이(가) 옆에 망 못지않다. (무성하다.) 바랭이 풀 사이에 옥수수, 가지, 취나물, 호박, 방울토마토, 고추가 같이 자라고 있다. 고추와 토마토가 붉게 익어 사이사이 꽃처럼 보인다. 이망 주인은 가끔씩 나와서 열매를 따가는 것 같기도 하다.
길에 붙어 있는 망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해놓아도 풀이 울타리 사이를 뚫고 침범해 들어온다. (그)뿐만 아니라 반듯한 한망도 아니다. 물도 제일 멀리 있으니 아무도 (경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밭 전체를 맡아서(관리)하는 이장인 아우가 세는 안 받겠다며 나에게 떠 넘겼다. 어부지리(울며 겨자 먹기)로 하(맡)게 된 것이다. 물이 있는데서 멀어도 (물통을) 수레나 시장바구니로(에 실어) 끌고 갈수가 없다. 밭머리에 난 길이 너무 좁아서다.
울타리 넘어 길은 폭이 좁아서 차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닌다. 시장가는 사람이나 운동 다니는 사람, 차가 거의 안다니니 보행보조기를 끌고 다니는 노인네들이 주로 다닌다. 그러자니 농사를 했(지었)거나 하고 (짓고) 있는 사람들(분)이 대부분이다. 길가 전답엔 행인들은 (농사를) 잘해도 한마디 못해도 한마디다. 말하는 사람은 무심히 한마디씩 흘리지만 듣는 사람은 한 시간정도만 머물면 수십 마디쯤은 듣는 것 같다.
우거진 바랭이는 키가 내 턱밑까지 오(닿)고, 다른 잡초와 다르게 사방팔방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모기가 벌떼처럼 앵앵거린다. 풀이우거진 두 망 양쪽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모기와 사투를 벌려야하고(는데다) 풀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 내 쪽 옆에 망은 여든 노인네고, (그) 너머에 옆 망은 예순쯤으로 보이는 중년이(남자가 경작한)다. 글로 쓸 수 없고 입으로 옮길 수(도) 없는 말로 스스로 화를 푸더니 요즘 와서는 (그조차) 체념한 거 같다. 오히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만)이 아직도 여전히 빈정거린다.
이장이 바랭이 풀만 있는 밭주인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하니 가을되면 쪽파를 심는다고 하더란다. 이렇게 키운 풀을 걷어내고 정말 쪽파를 심을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모종 심어놓은 밭주인은 예순이 넘어 대학공부를 하는데 리포트 쓴다고 바쁘단다. 리포트는 매일 쓰는지, 쓰다가 머리도 식힐 겸 풀을 좀 뽑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장이 전화를 몇 번이나해도 꿈적도 안하는걸 보면 돈(경작료를) 냈으니(,) 하고 (안 하고는) , 안하는 건 내(제) 마음이(대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요즘 위정자들이 사상 초유로 격이 떨어지는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서 많이 보았다. 국민의 선택을 받고 국회라는 아무나 입성 할 수 곳에서 국민들 웃음거리를 주니, 본인들은 누구의 선택도 받은 사람이(니) 아니니까 이쯤이야 하고 배운(는) 모양이다. 그렇다. 바랭이 풀도 길섶 노상에 있었으면 그저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 문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성한 신선한 장소에서 품위와 품격은 어디에 두었는지(.) 비난과 질책이 솟(쏟)아져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문 분야 용어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청문회 후보자 검정(증)자다. 대통령 출마했던 사람은 여러 가지 법적 리스크에 휩싸여도 여전히 건재하다. 여당대표였던 사람은 자신이 몸담았던 곳에 똥물을 끼얹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옆에 있던 사람이 웃는다고 정색하고 호통치고, 목소리는 더 높아지니 안타깝다.
그들도 우리처럼 야인이었다면 저토록 비난과 질책을 받고 웃음거리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럴 거면 왜 저곳에 갔을까. 자리에는 그것에 맞는 격이라는 게 있는데, 저들은 바랭이 풀이나 무엇이 다를까.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늘 이런 경우를 봐왔어도 요즘같이 카메라조차 의식안하는 어이없는 때가 또 있었던 가싶다.
한낮 잡초인 바랭이 풀이야 가을이 되면 서리에 사라지겠지만, 저런 사람들은 언제쯤이면 저 무대에서 사라질까. 어떤 비난과 질책에도 눈 한번 깜짝 안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을 넘어 헛헛한 마음이다.
○ 중년 : 청년과 노년 사이의 나이. 곧, 마흔 살 안팎의 나이.
○ 길섶 : 길의 가장자리
○ 노상 : 길바닥
○ 맞춤법 검사기 활용 권장 : 부산대학교 맞춤법 검사기
커피 예찬 시대
이지연
커피는 1일 1잔을 선호한다. 방문수업을 가면 오전 첫 수업하는 가정에서만 커피를 마신다.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라 오후에 마시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수업 당시 마시던 팜티 씨네 커피는 유난히 맛이 좋았다. 베트남에서 커피 가공 공장을 하는 이모가 보내주었다고 했다. 오전에 수업하던 팜티 씨 집에서는 수업 중간쯤에 커피를 마셨는데 그녀가 내려주는 커피는 쓴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커피에 일가견은 없지만, 진한 커피색에 비해 쓰지 않았고 향도 좋았기에 좋은 커피이겠거니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품질의 커피를 취급하는 이모가 이역만리로 시집간 조카에게 품질 좋은 커피를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커피 맛이 좋다며 커피에 관심을 보인 내게 집에서도 드시라며 커피 한 봉지를 선물로 주었다. 부드러운 커피 맛에 반한 나는 그날(바)로 커피머신을 주문했다.
그런데 얼마 후 더 획기적인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이모부가 야생 족제비 똥에서 채취한 위즐 커피를 보냈다며 맛을 보였다. 아주 쓴맛일 것 같은 짙은 색이었지만 전혀 쓰지 않았고, 향과 맛이 부드러웠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감미로운 발라드 느낌이었다. 사향고양이나 코끼리 똥에서 맛좋은 고가의 커피를 가공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족제비 똥에서도 채취하는 줄은 몰랐다. 베트남에서는 족제비에게 얻은 위즐 커피가 고급이라고 했다. 커피 맛에 감탄을 몇 번 했던가 보다. 그녀는 이모부가 험한 산에 올라 채취한 귀한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명절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미풍양속이 있는 우리나라이다. 내가 받은 선물 중에는 차茶 선물이 간혹 있다. 게다가 고향을 다녀온 학습자들이 내미는 차까지 더하면 국산차를 비롯하여 중국, 대만 등 원산지가 다양하다. 차를 즐기지 않기에 개봉을 미루다 결국 마시지 못할 지경으로 만든 것이 (유효기간을 넘긴 차가) 많다. 선물을 주는 이는 몸에 이로운 것이라 주었겠지만, 내 몸은 차보다는 커피에 길들여져 있다.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남편은 매일 커피를 대여섯 잔이나 마시고, 아이들은 학생일 때부터 커피 값으로 용돈을 엄청(나게) 쓴 이력이 있다. 시어머니도 매일 커피 한 잔씩 드시는 걸 보면 전 국민의 (가족 모두) 커피 사랑이 넘치는 현실이다.
규모가 작은 커피숍이 주택가 곳곳에 자리 잡은 현실(요즘)이다. 대형 커피숍 프렌차이즈도 계속 늘어나 우리 동네만 해도 대여섯 군데나 된다. 커피 소비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어린이집 차가 떠난 후에 누구네 집이든 들어가 커피타임을 갖곤 했는데 요즘은 누구네 집 대신에 커피숍으로 몰려간다.
모두들 커피 평가단이라도 되는 듯 어느 커피숍이 맛있는지 평가(한마디씩) 하며 마신다. 가게를 하는 친구는 물건을 사러 오거나 방문하는 손님을 위해 접대용 커피를 준비해 둔다. 별다방 커피가 (단골 커피숍 커피가) 제일 맛있다며 거기서 원두를 구입하여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내린다. 가끔 들르는 스터디카페에서도 별다방 (그 가게) 커피를 사용한다고 홍보하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맛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남편과는 취향이 많이 다르다. 커피 취향조차 다르다. 나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커피를 선호하는 반면, 남편은 설탕과 프리마가 적당히 배합된 믹스 커피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점심시간 이후에는 마시지 않지만, 잠들기 직전에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즐기는) 남편이다.
커피머신을 구입한 직후에는 집에서도 고급 커피를 즐기기 위해 커피 내리는 일을 곧잘 했었다. 모임이 있을 때는 보온병에 가득 담아 가서 나눠 마시기도 했는데 그것도 시들해졌다. 한꺼번에 여러 잔을 내려놓고 마시니 첫잔을 제외하고는 팜티 씨가 내려주던 그 감미로운 맛이 아니었다. 커피머신 청소도 번거로워 혼자 마시자고 성가신 일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 못 마신 베트남 산 커피는 친구 가게에 갖다 주고, 위즐 커피는 냉장고에 보관하고 아주 가끔씩만 마신다. 고향을 다녀오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학습자나 지인들이 커피 선물을 하면 이제는 개봉도 하지 않고 친구 가게에 갖다 준다.(주기 일쑤다.) 친구 가게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내가 keep 해둔 거 마신다며 당당하게 마신다.
☜단톡방에서 다음 모임 때 ‘아아’를 쏘겠다는 카톡이 울린다.
○ 그래서 어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 나열에 더하여 커피가 내 생활에 끼친 영향 등을 표현하면 더 좋을 듯.)
○ 커피 얘기라고 커피를 중복 표현하셨네요. ^^
서울대가 뭐라고
배정행
오빠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대로 진학했다. 그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지방대에 다니기에는 오빠의 성적이 너무 아까웠다. 지방 의대 정도는 장학금 받고 갈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렇게 공부한 후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고집이 센 오빠는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전자과에 가고 싶은 마음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결국 꿈을 이루었다.
그렇게 아무 대책 없이 오빠가 서울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부모님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학비는 커녕 하숙비도 못 대주는 부모님은 마치 죄인처럼 주눅 든 얼굴로 오빠를 배웅해야 했다. 세끼 밥 먹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아픈 아버지 대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엄마는 연신 눈물을 찍어대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그렇게 맨 몸으로 상경한 오빠는 어렵게 살아야 했다. 주말은 물론이고 방학이나 명절에도 집에 한 번 내려오지 못했다. 우리가 서울 친척 집에 갔다가 거기서 잠깐 오빠를 보고 오는 게 유일한 가족 간의 만남이었다. 오빠는 혼자서 학비와 숙식비를 해결하느라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해가며 버티고 있었다.
어떤 때는 입주 과외를 하기도 했다. 지방에서 올라간 명문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자녀들을 가르쳐 줄 과외 선생을 구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런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기 공부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특히 귀가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하고 아이 성적 때문에 눈치 보는 일이 제일(가장) 힘들다고 했다. 차라리 몸을 써서 일하는 단순 육체 노동이 더 낫지(,) 정신적인 고통이 심한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는 버텨 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빠가 대학교 2학년이 되고 여름 방학으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댓돌 위에 오빠 운동화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오빠를 부르면서 마루로 뛰어 올라가려는데 엄마가 급히 나오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오빠가 잠들었으니 조용히 하라는 거였다. 오랜만에 오빠가 집에 왔는데도 엄마의 표정은 깊은 우물처럼 어두웠다.
그 이후로 오빠가 있는 방에 엄마 외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었다. 오빠의 기침 소리만이 문풍지를 뚫고 새어나올 뿐이었다. 한 집에 있으면서 얼굴 보는 게 금지되다니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으면 그랬으랴 싶었다. 어린 나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그저 오빠가 서울에서 너무 고생만 하다가 병을 얻은 거라고 자책하는 말만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집안은 매일 한약 달이고 수상한 고기 고아내는 냄새로 가득 찼다.
가족 모두 힘든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간 뒤 오빠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기침도 잦아들게 되자 우리는 오빠가 온 후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마주보게 된 오빠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윈 모습이었다. 손으로 눌러도 쉽게 들어가지 않던 팔뚝 살과 근육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뼈만 앙상했다.
"그 까짓거 서울대가 뭐라고 사람 잡겠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했냐. 지방대나 가지 주제 넘게 서울로 가더니 꼴 좋다."
" 아이고, 이 양반이, 아픈 애 붙잡고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을 핀잔으로 얼버무리려는 눈치였다. 그런 아버지를 홀(흘)겨 보면서 엄마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기쁜 재회의 순간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로 바뀌어버렸고 서로 상처만 확인한 채 끝이 났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부모님은 자리를 떴다(.)
밤이 이슥해지자 평상엔 오빠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그날따라 별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마치 오빠의 회복을 축하해 주려고 폭죽이라도 터뜨리는 듯 우주의 별이란 별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오빠는 평상에 말없이 누워 있더니 별들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은 가고...........내 님은 기다리는 나를 찾아오실 거예요..(~♬)"
그 이후로 밤마다 평상에 나와 불렀던 그 노래는 평생 님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솔베이지의 노래' 였다. 하도 들어서 나도 줄줄 외워 부를 줄 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빠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에 어떤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혼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비와 숙식비까지 해결하던 힘든 서울살이 중에 오빠에게는 그보다 더 마음을 힘들게 했던 비밀이 하나 있었다. 20대 초반의 피끓는 청춘에게 사랑이 찾아왔던(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필이면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과 서로 마음을 의지하면서 싹튼 힘든 사랑이었다. 그 집에서 그 사실을 (연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일은 마침내 오빠를 사지로 내몰았다. 결국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 오빠는 육체마저 무너져내릴 지경에 이르렀다.
생의 끈을 놓으려던 마지막 순간에 오빠를 살게 한 건 엄마였다. 엄마가 밤낮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덕분에 오빠는 힘든 병을 이겨내고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구에서 대학에 편입하여 학사,(·)석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교 강사, 코딩 플래너를 하며 살았다. 오빠는 옛날의 힘들었던 일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오빠의 늘 편안해 보이는 표정만 봐도 그 일들이 밑거름이 되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위 천주교 납골당에는 부모님과 오빠의 납골함이 안치되어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오빠는 젊을 때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평균 수명에 훨씬 못 미치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빠의 옆 자리가 몇 년이 지나도록 비어 있다. 다른 자리는 다 찼는데 그 자리만 유독 주인이 없어 갈 때마다 나는 소설 같은 공상을 해본다(.) 누군가 그 자리를 찜해 둔 것이 아닌가 하고, 혹시 솔베이지의 노래 속 그 주인공이 아무도 몰래 왔다 간 건 아닌가 하고.
‘아아’나 ‘따아’가 아닌
엄영희
카페마다 만원이다. 가족 모임이 있어 팔공산 주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요즘 ‘핫’하다는 카페에 들렀다. 커피 향보다 소음이 먼저 반긴다. 사람들 소리가 노출 천정에서 증폭되어 와글거린다. 빈틈없는 주차장에 자동차 몇 대를 겨우 주차하고 들어오긴 했는데 함께 앉을 자리가 없다. 이 층 탐색에 나선 남자들을 따라 올라갔다. 자리가 없긴 마찬가지다.
주말이고 휴가철임을 감안하더라도 커피 한 잔 마시기 참 힘들다. 차를 돌려 평소 점찍어 두었던 자그마한 카페로 향했다. 화가 주인장이 화실 겸 쓰고 있는 카페다. 짙푸른 관엽식물들이 실내를 채우고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타임을 가졌다.
커피는 무엇보다 분위기다. 아무리 커피 맛이 좋아도 분위기 그럴듯한 카페가 아니면 커피 맛도 떨어진다. 인터넷에는 카페 순례기가 넘쳐난다. 팔공산 주변이나 근교에는 대형 카페들이 유행처럼 들어서고 있다. 사진과 후기가 그럴듯해 실제로 가 보면 사진발일 때도 있고, 취향과 달라서 실망하기도 한다. 조망과 편리함을 앞세워 거대 자본을 들인 흔적을 보면 지레 주눅이 들기도 한다.
집 가까이 마음에 쏙 드는 단골 카페를 정하지 못했다. 적당히 커피 향이 배어있고, 사람이 많진 않으면서 약간의 백색 소음이 있는 곳, 인위적인 그것보다는 식물이 공간을 나눠주는 자연 친화적인 카페면 좋겠다. 너무 자본의 힘이 드러나지 않고, 인간적인 맛이 나면 좋으리라. 거기에 말이 통하는 친구가 함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유행을 따르지 말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카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유럽은 전통 있는 카페들이 많다. 여행 때 이런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기자기한 테이블 세팅에 제라늄과 페츄니아가 어우러진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조막만 한 에스프레소 잔을 앞에 두고 종일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 유럽 카페 아니던가.
작은 로마라 불리는 남프랑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의 도시다. 그가 입원했던 정신병원도 아를에 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영혼의 편지’에서 한낮의 밀밭에서 작업하는 것이 매미처럼 즐겁다고 할 정도로 아를의 태양을 좋아했고, 그 덕분인지 2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그곳에서 그렸다.
가스등 불빛 아래 짙고 푸른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밤의 카페테라스’. 그림의 배경이 된 아를 포럼 광장의 카페 반 고흐(Cafe Van Gogh)에 들렀다. 노란 건물에 같은 색 테라스와 테이블 세팅도 인상파 색상처럼 강렬했다. 남자 종업원은 이어폰을 귀에 달고 찻잔을 치우면서도 전화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에게 말했다.
"Two cappuccinos, please."
(카푸치노 두 잔 주세요.)
“upstairs.”
(2층)
쳐다보지 않고 그가 말했다. 듣지도 않고 화장실을 묻는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었다. 마침 소변도 마렵던 차에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화장실을 이용했다. 세상에서 제일 수다스러운 듯한 이 남자는 아직 통화 중이었다. 다른 종업원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포가토라 부르는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을 넣고, 계핏가루가 뿌려진 달콤하고 향기로운 카푸치노를 마셨다.
엑상프로방스는 폴 세잔의 도시다. 세잔 그림의 흔한 배경이 되었던 생트 빅투아르 산이 있고,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별이 되어버린 동생의 화실과 닮았던 세잔의 화실을 다녀온 후 엑상프로방스의 중심지 미라보 거리에 나섰다. 플라타너스가 무성하다. 길 끝머리에 폴 세잔이 즐겨 찾던 '카페 레 두 가르송(Cafe Les Deux Garcons)'이 있다. 가르송 카페의 차양에 쓰인 1792는 이 카페가 문을 연 해이다. 20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폴 세잔은 비슷한 또래이며 같은 중학교 출신인 에밀 졸라와 친구였는데, 에밀과 자주 찾던 카페가 바로 여기다.
조붓하고 푸른 차양에 쓰인 숫자를 확인하고 노천카페에 앉으려니 빈자리라곤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너 명이 앉아 있는 어두침침한 실내에 자리를 잡고 카푸치노 두 잔을 시켰다.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 사그라질 무렵이었다. 역시 아포가토와 비슷했다. 덕분에 (분위기 찾아 커피를 홀짝인 바람에) 불면의 밤을 보내고 힘들게 하루를 버텨냈다.
커피는 마시고 싶은데 카페인 때문에 차선으로 선택하는 커피가 카푸치노다. 카푸치노 명칭은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회의 카푸친 수도회 수도사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사들은 청빈의 상징으로 모자가 달린 원피스 모양의 옷을 입는데,(다.) 진한 갈색의 거품 위에 우유 거품을 얹은 모습이 카푸친 수도회 수도사들이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와 닮았다고 하여 카푸치노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한다는) 설이 있고, 수도사들이 입던 옷 색깔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분말커피와 설탕과 크림으로 시작된 커피는 나이에 따라 변해왔다. 한 때는 에스프레소 맛에 빠져 이탈리아 모카 포트를 애용했다. 가스 불에 올려 바르르 끓어오를 때 온 집안에 풍겨내던 그 향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의식 치루(르)듯 원두를 갈고 물 온도를 맞추어 핸드드립을 하던 때도 있었다. 핸드드립 최고 맛이라는 융드립은 관리가 어려웠고, 시간이 흐르니 간편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어가니 확실히 입맛도 회귀하고 있다. 요즘 내 입맛은 ‘아아’나 ‘따아’가 아닌 커피믹스다. 아침에 커피믹스 한 잔을 마셔야 하루 보내기가 수월하다.
퇴직 후 잘한 일 중 하나는 캡슐커피머신을 들인 일이다. 몇 번 시범을 보였더니 남편이 손수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맛을 전전한 후 본인에게 잘 맞는 맛도 찾아냈다.
아침 커피 한 잔은 생활의 호르몬이다. 혼곤한 정신을 깨우고 뻑뻑한 일상에 유연함과 여유를 준다. 남편이 엉거주춤 커피 두 잔을 들고 온다. 본인이 마실 N사의 오리지널 콜롬비아(와) 한 잔과 내 취향 커피믹스 한 잔이다.
이럴 때 행복하다.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긴 앞치마 두른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가 아니면 어떤가. 옛날 맛 커피믹스에다 남이 타 주는 커피 아닌가. (15.5매)
*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아: 따뜻한 아메리카노
맛이 아리송한 스님 커피
(아리송 커피)
이광조
대학 동아리에서 문화탐방에 나섰다. 문경지방의 유적을 돌아보던 중 철학과에 다니던 회원이 유서 깊은 절을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반정부 데모에 앞장섰다가 정보요원의 추적을 피해 사찰에 은신했던 사람의 말이어서 믿을 만했다.
그를 따라 어느 절 들머리에 닿으니 통제 시설이 있었고 한 사내가 나와 길을 막았다. 일 년에 사월 초파일 단 하루만 개방되는 특별한 선원(禪院)이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절에 들어가지 않고 일주문 근처에 있는 비석은 좀 보고 가야겠다고 우겼다. 사찰 경내에 있는 것이 아니니 간섭하지 말라는 거였다. 논리에 막혀 마지못해 허락하는 관리인을 뒤로 하고 조금 더 올라가 논 가운데에 있는 비석을 둘러봤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워 절을 향해 치달았다. 일주문에 이르자 건장한 젊은 중이 나타나서 참선에 방해가 되니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계속 올라오면 지서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겠다고 하고는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그가 사라지자 개울가를 통해서 조용히 올라갔다. 어렵게 사찰에 닿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중이 다시 막아섰다. 왜 돌아가지 않고 억지를 부리느냐며 서슬이 시퍼랬다. 불교학생회에서 왔으니 한 번 만 봐 달라고 사정했지만 어림없었다.
바로 그 때 높다란 방의 봉창이 열리면서 “그 손님들 이리 들여 보내라.”는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태도를 바꾼 그 중은 조실스님 앞에서는 예를 잘 갖추라는 주의를 주면서 우리를 그 분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 들어서자 철학과 데모꾼이 스님 앞에 3(삼)배를 했고 나머지 회원들은 유가 식으로 넙죽 절을 했다. “너희들 불교학생회 아니지.(?)” 스님이 일갈에 기가 죽어(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둘러 댔노라고 실토를 했다. 실랑이 하는 소리 들으면서 거짓말하는 걸 알았지만 젊은 패기가 맘에 들어서 용납했다고 하셨다. 스님이 과일과 떡을 꺼내 놓으며 권했다. 스님의 짱짱한 목소리와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은 분위기 (로 주눅 든) 탓에 과일을 깎는 여학생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님은(이) 봉암사는 전국 유일의 문공부지정 선원으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대학교수들이 공문을 보내서 탐방 요청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억지를 부려가며 들어온 걸 보면 우리 일행이 불연이 조금 있긴 있는 모양이라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 분(스님)의 말씀은 우리를 압도했다. 우리는 멋을 아는 민족이라고 하시며, 방문의 창호지 안에 들어있는 단풍잎과 접시에 담긴 절편의 문양을 들추었다. 그런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민족이니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나라의 관문에는 우아한 소나무를 심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목청을 돋우셨다. 외국인이 한국에 닿아 맨 처음 보게 되는 김포가도의 가로수로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는데,(는 현실이다.) 서양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신물 나게 본 플라타너스를 보러 한국에 왔겠느냐며 지각없는 처사를 나무랐다.
그 다음에 들려준 (이어진) 얘기는 더 인상적이었다.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서구문화에 휩쓸려 커피소비가 늘어날 것인데 죽자고 일해서 벌어들인 외화를 커피수입에 다 써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느냐고 혀를 차셨다. 그러면서 녹차개발에 얽힌 이야기(일화)를 들어 보라고 하셨다.
오래 전부터 봉암사 뒷산에서 차를 재배해 마시던 스님은 재미 로비스트 P씨와 교분이 두터우셨다고 (한다). 미국의 내 노(로)라 하는 정치인도 그의 파티에 초대되는 걸 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사교계의 거물이었다. 그런 사교계 거물(사람)에게 스님은 같이 애국 좀 하자고 보챈(챘)다. 스님의 설득에 공감한 그는 자기 집에 파티를 열고 우리나라 재계의 거물(총수)들을 초청해서 멋진 파티를 열었다. 그 날의 목적은 녹차를 선보이는 일(이었다). 파티에서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그가 녹차를 우아하게 마시면서 그 맛을 두고 찬사를 퍼부었으니 재벌 총수들이 가만있지 못했으리라. 그 중 A화장품회사의 주인(회장)이 상품으로 개발해서 시판하고 싶다고 미끼를 물었고 그렇게 녹차가 개발 되었단다.
시제품이(을) 개발 되어(하여) 스님 앞에(게) 가지고 왔(선 보였)을 때 가격을 물어본 스님은 실망했다. 숭늉 마시듯이 편하게 먹어(혀)야 국민음료가 되어(로) 커피에 맞설 수 있을 텐데 한 봉지에 칠팔천 원이면(나 하니) 이까짓 풀잎을 누가 사서 마시겠느냐고 호통을 치셨단다. 기업가에게 이문 남기지 말라는 소리였으니 본인이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며 껄껄 웃으셨다.
오랜만에 그 일을 다시 떠올린 것은 지난겨울 ‘수필의 날’행사에서였다. 맨 마지막 순서로 발표된 작품(속)에서 우리를 봉암사로 안내했던 철학도가 명망 있는 스님이 되어 등장했다. (내용인즉슨,) 유명한 스님을 만나러 해인사를 방문한 여류 문인 몇 사람이 차 대접을 받았다. 법 높은 스님이 따라 주는 특별한 차를 황송하게 받아 음미했다. 너무 조심한 탓인지 신문에 음식칼럼을 쓰는 작가조차 그 차의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법 높은 스님을 만나서 차 대접받았다고 자랑을 한다손 치더라도 차의 이름은 알아야 할 터(다). 다담상을 물리고 일어서면서 작가는 용기를 내어 묻는다. “스님, 저희들이 마신 이 차 이름이 뭡니까?” 의아해 하던 스님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아, 이거요. 커피도 모릅니까.(?)”
의외의 반전에 폭소가 터졌다. 선입견에 가려 실상을 보지 못한 얘기로 대중을 즐겁게 했으니 도(력) 높은 스님과 법담을 나눈 여운이 그대로 베(배)어 있다고나 할까.
온 나라가 커피 파는 카페로 가득하다. 봉암사에서 큰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해인사 스님조차 커피를 마실 정도이니 앞일을 걱정하시던 큰 스님의 혜안이 새삼 우러러 보인다.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그 만큼 변했다. 국가 경제가 커피 원두대금 신경 안 쓸 정도는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위가 숙지고 나면 해인사에 들러보고 싶다. 이제는 승복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그 옛날 철학도를 만나 승속僧俗이 마주 앉게 될 터(이다). 고담준론(高談峻論)은 밀쳐두고 겁 없이 껍죽대던 학창시절 얘기가 제격이리라. 녹차 개발하신 봉암사 큰 스님께는 양해를 구하면서, 맛이 아리송하다는 스님 커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녹차 개발하신 봉암사 큰 스님께는 먼저 양해를 구할 일이고.) (22년 8월 22일, 15.2매)
○ 수필의 날 행사 부문이 약간 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