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갑자기 밖이 소란해졌다. 까치 소리였다. 앞 베란다로 나가 내다보니 까치들이 건너편 동(棟) 지붕 위에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보다 더 많은 까치들이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상층 베란다 난간에 내려앉기도 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뭔가 위태로운 기운이 흘렀다.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연재해에 민감한 것이 미물들이라 했는데, 혹시?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두고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뒤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그곳에서 본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동과 동 사이를 불규칙하게 날아다니며 우짖는 까치들로 인해 불안감은 더욱 짙어졌다. 불현듯 미스테리로 남은 두어 해 전 일이 떠올랐다.
이곳 아파트에 입주한 지 30년이 넘는 동안 우리 아파트 텃새는 까치였다.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신다는 말도 있듯이, 낯선 이를 분별할 줄 아는 영민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친숙하게 느끼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까치 대신 까마귀들이 지붕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몸통이 온통 시커먼 데다 울음소리도 덩치도 까치보다 크고 거칠어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음산하다는 느낌은 어쩌면 선입견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시체를 먹는 식성으로 인해 죽음을 상징하는 새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은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까마귀 빛깔을 검다고만 함은 눈으로 정하고 마음으로 미리 정한 것일 뿐 그 검은 빛은 보기에 따라 여러 빛깔이 될 수 있다며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라 했고, 시인 김현승은 까마귀 울음을 ‘목에서 맺다/살에서 터지다/뼈에서 우려낸 말,/중에서도 재가 남은 말소리’라며 여타 새소리와 격조가 다름을 노래했는가 하면,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자오야제(慈烏夜啼)〉라는 시를 지어, 새끼가 크면 늙은 어미를 먹여 살리고 어미가 죽으면 밤을 새워 슬피 운다며 까마귀의 반포지효(反哺之孝)를 칭송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오랜 세월 지배해온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지 못해 좀체 그들과 가까워지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를 얼쩡대는 그들을 보면 섬뜩하기까지 했다. 까치들은 도대체 왜, 그리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런데 까마귀의 자리를 오늘 다시 까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부산하고 위협적인 까치들의 단체행동은 그들이 마침내 까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그래서 이곳이 그들의 영역임을 상대에게 과시, 인식시키려 함인지도 모르겠다.
만물의 운동과 변화를 이야기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35~475)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며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주장했다. 그 변화의 주체는 대립자다. 만물은 대립자로 되어 있고, 세계는 투쟁에 의해 다스려지며, 만약 투쟁이나 대립이 없다면 세계는 정체되고 죽을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전쟁을 만물의 왕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벌이고 있는 무차별 파괴적인 전쟁까지 당위성을 얻을 수는 없겠다. 하지만 만물이 대립자와의 경쟁에 의해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덩치에서 까마귀에게 밀린 까치들은 그동안 절치부심 개체수를 늘려 힘을 비축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대립자에 의해 깨치고 변화하고 발전한 것이리라. 까마귀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언젠가는 영역을 되찾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까치와 까마귀는 상생(相生)의 길을 도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도 뉴스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세상 속 싸움 소식을 전한다. 역사는 대립과 경쟁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술도 철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새로운 논리, 새로운 경향임을 주장하는 OO주의, OO론도 살펴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대립자 안에 대립자를 받아들인 결과물인 연합 내지는 조화(調和)에 가깝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도 영구불변의 것도 없다는 얘기다. ‘나’라는 존재 역시 알게 모르게 내 안에 들어온 대립자들에 의해 늘 거듭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십 년 전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TV를 틀자 문학 토론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명의 토론자가 수시로 상대방의 발언을 치고 들어가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지만, 진행자는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싸움의 장을 열어두고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방송은 그들이 언쟁하고 있는 채로 페이드아웃 되었다. 판단은 오롯이 시청자 몫이었다. 하지만 어느 편으로 기울었든, 개입자 없는 열린 싸움으로 인해 시청자 중 누군가는 두 토론자의 의견이 조화를 이룬 자기만의 의견을 갖게 될 터이다.
싸움은 동식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생물인 바위도 오랜 세월 비와 바람, 파도와의 싸움으로 모래가 되어 변화된 삶을 산다. 자연은 열린 싸움의 장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냉혹함은 있지만, 중재자 없는 싸움에 의해 자연은 스스로 변화하고 진화하며 질서를 이룬다.
부화뇌동, 편 가르기 싸움이 만연한 요즘 우리 사회. ‘자연을 순수하다고들 하는데, 그 자연은 섞여 살고 있으니, 섞여야 순수한 것’이라며 통섭을 주장한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역설을 되짚어보며, 광화문 광장이 편견이나 선동 없는 열린 싸움의 장이 되어 시대적 아포리아(aporia)*를 함께 헤쳐 나가는 날이 오기를 꿈꿔 본다.
*aporia: 그리스어로 a+poros(not+road),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