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이덕보원
연능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축령고와 혼강룡 오패를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연능운은 축령고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패를 차마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가 없는 것 같았으며 또 어떻게 보면 그 동안 쌓인 울분을 연능운에게 양보를 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망설인 연능운은 천천히 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오패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걸음 걸이는 보기에도 가벼웠고 거침이 없었다.
축령고는 연능운이 점차 오패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며 전신을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을 감아 버렸다.
"뚜벅, 뚜벅!"
그녀의 귀엔 연능운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피비린내를 풍기는 발걸음은 죽음을 쫓는 걸음이었다.
"뚜벅! 뚜벅! 뚝!"
드디어 걸음이 멈추었다.
이와 동시에 축령고의 몸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또 한 번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뒤로 돌렸다.
순간, 예리한 파공음이 그녀의 귓속을 후집고 들려 왔다.
축령고는 순간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두말할 것 없이 오패는 파란 만장한 일생의 종지부를 찍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오패의 죽음이 너무 조용했다.
비명이 없었던 것이다.
축령고는 두 눈을 감은 채 몸을 돌리고 있어 오패의 죽음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의혹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혹시……"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오패의 독기 어린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 오패는 죽을망정 그 어떤 모독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의 음성이었다.
몸을 돌리고 눈을 뜬 축령고의 안색은 일순 급변했다.
그녀의 의혹대로 오패는 죽지 않았다.
비단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신을 꽁꽁 묶인 밧줄이 풀어졌고 혈도도 풀려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축령고는 의혹에 찬 표정으로 연능운을 쳐다보았다.
"연세제,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어째서 저 악당을 죽이지 않은 것이지?"
연능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축소저, 소제는 최근에 두 개의 금계를 정했습니다."
"금계?"
축령고는 미간을 절로 찌푸리며 물었다.
"두 개의 금계라니 그게 무엇이지?"
연능운은 오패를 한 번 쳐다보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첫째, 저항력이 없는 사람에게 살수를 전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능운의 말을 들은 축령고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그리고 한참 멍청하게 서 있다가 오패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소리를 쳤다.
"그럼 두 번째 금계는 무엇이지?"
연능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소제의 두 번째 금계는 바로 일방적인 공격을 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연능운은 잠시 말꼬리를 흐리더니 장검을 축령고에게 건네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오채주께선 과거에 비록 강압적인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소문에 듣자 하니 세저에 대해선 그리 각박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런 점으로 볼 때 두 분에겐 아직 부부의 정이 어딘지 모르게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소제가 어찌 과거에만 집착하여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생각을 해 왔다.
그의 이러한 말을 들은 오패는 감격에 벅차서 절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축령고는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닥쳐라!"
하지만 그녀의 고함 소리는 그다지 크지가 않았다.
그녀의 고함 소리는 자격지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그녀의 심정은 모순으로 뒤엉켜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청매 죽마인 연능운과 새로히 결합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오패의 지극한 사랑에 대해서도 그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자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주던 오패이었으며 연능운의 말대로 부부의 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결정치 못하고 모순의 노예가 되어야만 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오패를 처치하지 못하고 연능운에게 넘긴 것이다.
만약 여기서 연능운이 오패를 처치한다면 그녀는 연능운에게 마음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연능운도 오패를 처치하지 못하니 그녀로선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축령고는 절로 난처해 했다.
한참을 넋을 잃은 채 서 있던 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더니 연능운을 향해 대뜸 고함을 질렀다.
"세제가 죽이지 않겠다면 내가 죽이겠어!"
그러더니 수중의 장검을 들어올리며 오패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오패는 피하기는커녕 장탄식을 터뜨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날 이같은 일이 있기까지는 모두가 나 때문이오. 이제와서 잘못을 뉘우친들 소용이 없겠지만 현매가 나를 죽여서 원한을 풀 수가 있다면 나 역시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을 것이오."
악명이 드높던 해적 오패에게도 이런 다정한 면이 있을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축령고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검을 뻗어 내 오패의 요혈을 향해 찔렀다.
"잠깐만!"
바로 그때.
연능운이 갑자기 외마디 고함을 지르더니 몸을 날렸다.
동시에 신속한 동작으로 축령고의 검을 뺏어 들었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신속한지 마치 전광 석화와 같았으며 축령고는 멍청하니 검을 빼앗기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검을 뺏어 든 연능운은 오패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귀하의 당당한 표정으로 보아 본질은 악인이 아닌 것 같군. 내 귀하에게 한 가지 분명히 묻겠는데 차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할 수가 있겠소?"
오패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연소협께서 원한을 덕으로 갚으시니 나 오패가 어찌 감히 거역을 할 수가 있겠소."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사실 나는 다시 영세저와 결혼을 한 후 그녀의 뜻을 어김없이 따랐으며 한 사람도 망살해 본 적이 없소. 다시 말해 나는 벌써부터 개과천선하여 다시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의 태도는 진실했으며 어떤 가식적인 것을 볼 수 없었다.
오패의 말을 들은 연능운은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계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축령고는 몹시 불안해 했다.
그녀는 연능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쳐 다그쳤다.
"연세제,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지? 어째서 그 자를 살려 두는 것이지?"
축령고는 흥분할 대로 흥분하여 있었으며 몸을 심하게 떨었다.
이에 연능운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담담히 말했다.
"축세저, 진정하십시요. 세상의 일이란 다 그런 것입니다. 되는 듯하면서 안되고 안되는 듯하면서 되는 것입니다. 지금 두분은 한 배에 몸을 같이 실은 입장입니다. 인생이란 긴 항로를 헤쳐 나가려면 두 분의 힘을 합쳐 노를 저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저께선 어찌 과거에만 그렇게 집착을 하십니까? 지난 과거는 망각을 하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오."
연능운이 말을 들은 축령고는 일그러진 표정인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오패는 연능운의 말에 힘을 입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애원을 했다.
"고매,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내 하늘에 두고 맹세를 하리다. 다시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년초에 남해로 간 것은 고매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설사 구하지 못한다 해도 죽음을 같이할 각오로 갔었던 것이오. 그러나 고매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생포되어 온갖 곤역을 치루었지만 고매에 대해선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소. 나의 이런 진심은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오."
그의 이같은 말은 모두가 사실인 것 같았다.
오패의 말을 들은 축령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로선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축령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연능운에게 말했다.
"세제, 세제는 나의 일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렸으니 만약 내가 세제의 일을 간섭하겠다면 세제는 나의 뜻에 따라 주겠어?"
연능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제께선 말씀을 해보십시오."
축령고는 연능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세제와 영매의 혼인을 성사시켜 본문에 입문시키고자 하는데 세제는 나의 뜻에 따라 주겠어?"
연능운은 축령고가 이렇게 나올 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제차에 걸쳐 임저와 혼인을 성사시키려는 것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예측했다.
축령고의 물음을 받은 연능운은 잠시 망설이더니 정색을 했다.
"세저의 뜻은 고맙지만 소제는 두 가지 일 중에 한 가지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일순 축령고의 안색은 가볍게 변했다.
그녀는 연능운이 이렇게 한마디로 잘라서 말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축령고는 어이 없다는 듯이 멍청히 서 있다가 냉랭히 소리쳐 물었다.
"어째서 따를 수 없다는 것이지?"
"……"
"무엇 때문이냐니까?"
"……"
"영매가 세제에겐 미흡하기 때문인가?"
"……"
"아니면 본문이 자네가 입문을 하기엔 부족하기 때문인가?"
그녀의 음성은 점점 더 격해졌다.
그녀의 계속되는 다그침에 연능운은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영매가 미흡하기 때문이 아니며 사문이 부족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침착한 어조로 말을 받은 연능운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세저께서 사명을 받으신 것입니까?"
하지만 축령고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눈썹을 곤두세웠다.
"사명을 받았건 안 받았건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연능운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저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축령고는 마치 흉악범을 신문하듯이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연능운은 태연하게 그리고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영매에 관한 일은 아까도 말씀을 드려 생략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남해파에 입문하는 것에 대해선 분명하게 거절을 하겠습니다. 소제는 이미 명사를 만나 보았으며 저에 대해서 무익하다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축령고의 안색은 다시 한 번 변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연능운을 노려보던 축령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본문의 무예가 세제에겐 배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인가?"
연능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소제가 원치 않고 있을 뿐입니다."
축령고는 갑자기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을 하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세제, 내 자네에게 묻겠는데 아직도 백여협을 만날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순간.
연능운의 안색이 급변했다.
연능운은 경악과 의혹에 찬 눈초리로 축령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저께선 무슨 뜻으로……"
축령고는 연능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암담한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만약 세제가 본문에 입문하지 않는다면 백여협을 만나지 못할 거야."
연능운의 안색은 일순 다시 한 번 변했다.
축령고의 말은 협박이 아닌 협박이었다.
동시에 그는 어젯밤 일어난 백봉선의 실종이 남해파의 행위였다고 단정을 내렸다.
남해파는 임영을 시켜 옥관음 백봉선을 유인하게 한 것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추리한 연능운은 절로 분개해 하면서 말했다.
"세저께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낭자는 소제의 미혼처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그녀의 솜털 하나라도 상하게 한다면 이미 죽은 낙혼암의 세 마귀가 바로 그 표본이 될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물었다.
"영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한쪽에 있던 오패는 낙혼암의 세 마귀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안색이 급변했다.
아연 실색한 그는 축령고가 미처 연능운의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끼어들며 물었다.
"연소협, 본문의 존장이 누구에 의해서 상했소?"
바로 그때.
근처에 있는 숲 속에서 앙천 대소와 함께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하하하하! 정말 방자한 놈이로구나!"
이어 숲 속에서부터 괴이한 복장을 한 여덟 명의 남자가 슬며시 모습을 나타냈다.
연능운과 축령고, 그리고 오패는 아연 긴장했다.
그들은 얘기를 하다 말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몸을 돌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특히 연능운의 얼굴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연능운은 여덟 명의 남자 중에서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표묘선고 계적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은 남해의 팔괴가 틀림없었다.
오패는 남해의 팔괴와 같은 대적을 만나자 절로 당황해 했다.
반면에 축령고의 표정엔 난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연능운은 도리어 침착해졌다.
그는 태연 자약한 모습으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여러분들께서는 무슨 가르침이 있으시어 이곳 황산까지 온 것입니까?"
물론 그의 이같은 물음은 형식상인 것에 불과하다.
그건 그들이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는지 뻔하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연능운의 말이 떨어지자 황갈색의 의관에 덥석부리 수염을 기른 거대한 몸집의 노인이 앙천 대소를 터뜨리면서 말을 받아 말했다.
"네 녀석을 본문에 입문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신분을 밝혔다.
"노부는 여모수 석천민이라고 한다. 바로 본문의 장문인이지."
그의 음성은 경멸에 차 있었으며 연능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연능운은 절로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의 뜻에 순순히 따를 거라고 생각하오."
"물론."
자신에 넘친 일성이었다.
자신 있게 말을 받은 석천민은 이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따르는 자에게는 삶이 주어지고, 역행하는 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본문의 불변의 신조다. 아마 네 녀석 마음대로는 되지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연능운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음흉하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노부는 도대체 네 놈의 속셈을 모르겠다. 본문에는 천하 제일의 무예가 있고 또 너의 홍안지기까지 있거늘 네 녀석은 어째서 거역을 하는 것이냐?"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음험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더구나 노부들이 이번에 온 것은 군사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너를 돕자는 생각에서다. 우리의 이같은 호의를 또 거역하지는 않겠지?"
그는 마치 연능운이 말을 받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얘기를 뱉었다.
그러자 조용히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연능운은 선뜻 말을 받지 않았다.
할 얘기가 남았으면 계속하라는 표정으로 석천민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잠시 기다렸다가 아무 말이 없자 그제서야 냉랭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호의 고맙소. 하지만 수단이 좀 비겁하군."
차가운 말 한마디 마다 조롱이 섞여 있었다.
"뭐라고?"
연능운의 말을 받은 석천민은 대노하여 소리쳤다.
"무슨 수단이 비겁하다는 것이냐?"
연능운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흘려 보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몇 번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나를 포섭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모두가 미인계라고 생각되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살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들은 금릉의 낭자를 어디로 유괴해 갔소?"
그의 물음에 계적하가 끼어들며 냉랭히 말을 받았다.
"그저 네가 본문에 입문한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한 계적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노신이 앞장서서 영아까지도 너에게 주겠다."
그들의 수단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미인계였다.
하지만 그들의 미인계에 호락호락 넘어갈 연능운은 아니었다.
"흥."
연능운은 가소롭다는 듯이 냉랭히 코웃음을 터뜨렸다.
"나 연능운이 그따위의 협박에 넘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오."
그의 태도는 너무나 당당했으며 상대의 협박에도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다른 것은 그만두더라도 그의 이런 담량은 일반적으로선 따를 수가 없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축령고의 안색은 매우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사문과 청매 죽마인 연능운 사이에 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오패는 연능운의 당당한 기상에 내심 크게 감탄했다.
오패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자신들의 입장이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연능운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연소협, 현 정세로 보아 우리들의 입장이 매우 불리하오.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으니 우선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축령고가 재빨리 말을 받아 연능운에게 말했다.
"세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지? 가사들께서 모두가 절기를 지니신 천인들일세. 만약 어르신네들에게 절예를 전수받는다면 세제는 천하 무적의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될 수가 있네."
축령고는 여전히 남해파에 입문할 것을 연능운에게 종용했다.
하지만 연능운의 태도는 냉철했다.
그는 우선 오패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축령고을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세저께선 더 이상 강요하지 마십시오. 소제에게는 소제의 갈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즉시 장검을 뽑아 들고는 남해 팔괴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당신들은 무림 제일의 고수를 자처하는데 누가 나의 백 초을 받아 보겠소?"
그의 기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연능운이 장검을 뽑아 든 것을 본 남해 팔괴들은 아연 실색하면서 일제히 소리쳤다.
"앗, 저것은 남명이화신검이 아니냐?"
그들은 연능운이 뽑아 든 장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었다.
안색이 급변한 석천민은 경악과 의혹에 찬 표정으로 신검과 연능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냉랭한 음성으로 소리쳐 물었다.
"네 이놈! 네 놈은 도대체 어디서 본문의 신검을 훔쳤느냐?"
이제 보니 연능운의 신검은 남해 문중의 보물이었다.
바로 그때.
근처 숲 속에서 경멸에 찬 음성이 들려 왔다.
"신불 이기는 덕망이 있는 자의 것이거늘 어째서 너희들의 것이란 말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동시에 세 명의 노인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일견혼소 궐천성.
철소옹 사해도.
무정검 우담신니.
순간, 연능운의 얼굴에 절로 희색이 떠올랐다.
그들 세 사람의 출현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일견혼소 궐천성은 남해 팔괴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그래도 당세에 일등가는 고수라고 자부하는 당신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 어린 후배를 괴롭히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만약 이 소문이 전해져 나간다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닐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