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출천환용(出天幻龍)
①
쿠쿠쿠쿵--
콰-- 르-- 르--
기어이 무림의 화약고는 터지고 말았다.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
그 지옥의 핏빛 하늘이 중원을 돌 모래처럼 휩쓴 지 어언 일 년 반, 철저히 유린된 중원무림은 주검만이 남은 전장(戰場)처럼 황량하게 변모했다.
처절한 호곡성은 하늘에 메아리쳤고 대지는 혈수(血水)로 물들여졌다.
천여 년 간 중원을 향해 야망의 눈을 번뜩이던 지옥삼겁천은 마침내 제 세상을 만난 듯 중원을 짓밟은 것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피에 굶주린 이리떼들의 행진이었다.
눈물겨운 항쟁!
그러나 지옥삼겁천을 물리치기에 중원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의는 반드시 악을 제압한다는 천년 무림 정기의 기치는 땅에 떨어지고, 정문(正門)은 지리멸렬했다.
협사의 절규는 피눈물 속에 쓰러지고 열사(烈士)의 의기는 풍진 속에 볼품없이 산화되어 갔다.
아... 무림의 정기여.......
마도마저 등을 돌려버렸기에 중원 수호의 의기는 영원히 침몰된 듯했다.
그러나 태산에서부터 드디어 암흑을 몰아낼 힘이 폭발했다.
드디어 암흑을 몰아낼 힘이 폭발해 올랐다.
중원의 정통마도를 부르짖었던 측천환마전의 노도와 같은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다.
쿠쿠쿵......!
측천환마전과 지옥삼겁천, 그 최초의 격돌은 산동(山東)에서 전개되었다. 서북 무림을 초토화시키고 그들의 영토로 삼은 흑사풍은 환마전의 대대적인 기습에 수년 간 쌓아올린 중원진출의 기반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서북무림 전역에서 정통마맥일 잇는 마도고수들은 흑사풍의 고수들과 엄청난 혈전을 벌였다. 그들은 가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기세로 흑사풍을 휘몰아쳤다.
검은 죽음의 바람 흑사풍, 중토를 유린한 그들의 광오한 진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져 갔다.
무수한 패전의 급보가 흑사풍 총단으로 날아들었다.
흑사풍의 사전 계획은 측천환마전의 급습에 여지없이 궤멸되었고, 그들의 세력은 급속히 축소되어 갔다.
그것은 초초가 지옥삼겁천 곳곳에 심어둔 첩자들에 의해 수집된 정보를 다시 분석해서 그들의 기문진과 무공을 거의 파해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가능해진 것이었다.
대운은 지옥삼겁천으로 기우는 듯싶었으나 기인총의 눈부신 첩인술과 기습, 양동작전은 기대 이상의 승과를 올리며 새롭게 중원의 희망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혈란(血亂) 속의 서북무림에 태평성대의 그날은 멀기만 했다.
그러나 무림 정기 회복을 위한 동귀어진의 횃불은 이렇게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중원 무림인들의 장렬한 죽음 속에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 녹혈림(綠血林)의 출동.
중원최대의 녹림단체, 그 푸른 옷의 무인들도 깊은 숲속에서 드디어 출진했다. 그들의 모든 작전은 만지화가 맡았다.
그들은 이제 대명천지에서 그들의 위명을 떨치게 된 것이었다.
혈우전(血雨箭)과의 충돌!
녹혈림의 고수들은 그들의 출신성분 답게(?) 전문적인 야습(夜襲)을 벌이며 무서운 혼전(混戰)을 전개해 갔다.
결국 변황의 삼겁천(三劫天)은 중원인들의 공분 속에 휘말렸다.
무림대혈란(武林大血亂).
그 전무후무한 대혈전은 단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중원을 집어 삼키려는 이족(異族)의 야망과 중토를 수호하려는 중원정기와의 대격돌이었다.
마침내 파죽지세로 중원을 유린하던 지옥삼겁천의 기세는 주춤해졌다.
중원의 녹림마도의 막강한 반격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녹혈림의 반격은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그들은 대대로 범죄자, 부랑아 등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잡초 같은 집단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중원정기 회복의 대기치에 그들이 일조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용기백백했고 늘 그늘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자신들의 입지를 변화시키려는 열망도 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정 커다란 변수였다.
중원전도(中原全圖), 아니, 그것은 전도(戰圖)였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전도는 온통 수많은 표기로 겹쳐져 있었다. 당금 무림의 전세(戰勢)를 정확하고 꼼꼼하게 모두 표시해 두고 있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는 당금 무림 정세를 손바닥 안에 놓고 보듯 환히 꿰뚫어 보고 있음을 그 전도를 보는 즉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그 놀라운 전도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이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우문천릉(于文天凌).
그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째서 이제껏 잠잠했던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이 삼겁천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의 아름다운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전도 위에 표기된 밝은 부분은 그 동안 삼겁천이 장악한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국면은 위태로우리 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삼겁천의 반 이상이 전력을 상실하는 커다란 타격을 받은 것과 힘들여 얻은 중토의 영지가 실지(失地) 상태에 놓인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일고 있다. 분명히......."
우문천릉의 차가운 음성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이제까지 그들 삼겁천은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나와의 계약을 제대로 해냈다. 그러나 이제 본가가 나설 때가 된 것 같군.“
아니 대체 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지옥삼겁천은 여태 그의 조종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경악(驚愕).
실로 경천동지할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훗훗...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제왕천금신가(帝王天金神家)의 수백 년 숙원을... 이제부터 천하를 무대로 펼치는 것이다.“
그렇다. 우문학은 그의 아들 우문천릉에게 실전된 지 삼백 년이나 지난 마물 사영환의 독문무공을 알려주었다. 그는 조화풍운관에서 그의 마공을 수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옥삼겁천을 움직일 수 있는 신물을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금마불(金魔佛)이었다.
금마불.
포달랍궁의 기인으로 승적에조차 그 이름 석 자가 오르지 못할 정도로 광폭하고 괴기스런 삼안선사(森眼禪師) 교파파(巧巴巴)의 시신에서 얻은 영물(靈物)로써 변황마교와 흑도들의 조종임을 나타내는 신물이었다.
그는 조화풍운관의 제 사 연공관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마물 사영환이 자신의 후예를 위해 따로 안배해둔 세 집단, 즉 지옥삼겁천을 움직일 수 있는 신표이자 마물 사영환의 무서운 마공을 연공할 수 있는 무결이 적혀져 있는 마도 최대의 비급이기도 했다.
- 제왕천금신가(帝王天金神家).
바로 제왕오행신가(帝王五行神家)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 신비의 가문이 그의 입에서 말해진 것이 아닌가?
우문천릉은 섭선을 접으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뱉었다.
"무면자(無面子)!"
"옛!"
스스슥.......
마치 유령의 현신처럼 한 명의 중년인이 그 앞에 내려섰다.
"때가 되었다. 무혈강시군단(無血 屍軍團)의 출관일은 언제인가?“
"백일야(百日夜)!"
"계획을 수정하겠다!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의 기습 때문이다. 그 변수들을 뒤에서 사주한 세력을 조사하라!“
"옛!"
"그리고 삼겁천주에게 지시하라! 회군(回軍)을 명한다!“
"존명--!"
억양 없는 어조에 무표정한 그는 얼굴없는 인간인가?
흑의장포로 머리까지 휘감은 그는 얼굴이 칠흙같이 어두웠다.
스-- 스슥--
그는 발끝에서부터 사라져갔다. 무엇인가에 의해 지워지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면자가 신묘한 신법으로 사라지자 우문천릉은 다시 중원전도로 시선을 돌렸다. 일순 그의 소매가 가볍게 펄럭였다.
파-- 파락--
전도 뒤의 석벽까지 흙먼지를 일으키며 튀어 올랐고 잠시 후 전도 위에는 거대한 글자 하나가 새겨졌다.
금(金).
그것은 제왕천금신가(帝王天金神家)의 상징이었다. 중원천하를 천금신가의 이름으로 쟁패하겠다는 뜻일까?
그의 눈에는 무시무시한 폭광이 발출되고 있었다.
중원의 상황급변.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의 출동은 정도무림에게도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대정봉황성(大正鳳凰城).
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정의 하늘도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무황 단목신수는 마침내 중원무림을 향해 대포고령을 내렸다.
- 중원의 이름으로 고(告)하노니, 지옥삼겁천을 격멸하라!
그 한마디에 광활한 대륙에 숨죽였던 무림정기가 용트림을 시작했다.
정도고수들은 끓는 가슴을 안고 봉황성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그들은 숨죽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오직 단목신수만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단목신수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당금 무림의 무황이지 않은가?
그들은 천군만마를 지닌 것보다 더 든든했다. 그들의 앞에는 오직 쾌승의 날만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구파 십방은 흩어졌던 수하들을 모두 모았다. 지옥삼겁천에 의해 그때까지 수하들은 의기와 용기를 모두 잃고 고향으로 산속으로 숨어 있었다.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수 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막강한 전투태세가 갖춰졌다. 봉황삼왕이 직접 나서 중원전사단(中原戰士團)을 조직했다. 집결된 고수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고조됐다.
전사단은 모두 삼단으로 조직됐다. 그 하나하나를 봉황삼왕이 단주가 되어 이끌었다.
환우대전( 宇大戰).
지옥삼겁천과의 대격돌은 이렇게 다가서고 있었다.
②
신비인(神秘人)의 등장!
하나의 혜성이 중원에 출도하며 놀라운 명성을 뿌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는 신출귀몰하게 중원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초인적인 절학에 지옥삼겁천의 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짚더미가 쓰러지듯 죽어갔다.
신비인의 찬란한 광휘는 지옥삼겁천에게 있어 전율스러운 공포였다.
중원인들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와 칭호를 아끼지 않았다.
강호의 공적(共適)인 지옥삼겁천을 통쾌하게 척살하는 그의 업적은 실로 무림개사 이후 최대의 일이었다.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의 출동이 그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상상을 불허하는 무공과 초인적인 기지와 예측할 수 없는 기행(奇行)에 무림인들은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이 시대 새로운 초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천하인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명호를 지어 바쳤다.
- 출천환룡(出天幻龍).
그는 중원의 대위기 속에서 찬란히 떠오른 태양이었다. 중원인들은 그 태양이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에 대한 무림인들의 존경과 지지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제 이의 단목신수라고 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금 무림에서 그보다 더 영예스러운 호칭이 어디 있겠는가?
출천환룡, 과연 그는 누구인가?
봉황성(鳳凰城).
중원 정도의 운명이 집결되어 있는 정도제일지(正道第一地).
황산 준령은 의기투합된 정도고수들의 기세에 힘입어 더욱 힘차 보였다.
수만의 정도고수들이 운집되어 있는 봉황성. 정도 기치를 되살리려는 백도의 의지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거울처럼 맑고 청명하기만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명징한 하늘 아래 한 인영이 봉황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출천환룡,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가 삼 개월 전에 출성할 때만 해도 다시 회성(回城)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않았다. 그는 필시 강호의 혈전에 휩쓸려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다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
그 무례하고 여색잡기에 세월을 허비하며 방약하기 그지없는 반준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무림의 차기 주인으로까지 거명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돌아왔고 또한 엄청난 명성과 성공을 거둔 채 화려한 회성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엄청난 기쁨이었다.
- 출천환룡(出天幻龍).
이 시대 최고의 신성(新星) 새롭게 탄생한 중원의 등불이라는 찬사 속에 그는 돌아온 것이다.
처음 그가 전격적으로 봉황성의 제 사왕야가 되었을 때만 해도 그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던 자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에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너는... 훌륭히 해냈다. 이 노부는 네가 자랑스럽기만 하구나!“
단목신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천우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히죽 웃어보였다.
"뭘요. 다만... 조금 바빴을 뿐입니다."
"허허... 이 노부는 단목가의 피가 잘못되지 않았으리라 믿고 있었다. 너는 자랑스러운 단목가문의 후예임을 알아야 한다.“
"예, 아버님! 소자는 알고 있습니다."
천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내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단목가(檀木家)라고...? 웃기지 마시오... 철천지 원수! 너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리지 않는 것을 단지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이성을 유지했다.
원수를 아버지라 호칭한다는 것, 그것은 차라리 죽기보다 더 괴로운 고역이었다.
그는 참았다. 수백 번도 더 단목신수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 온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아니면 도저히 지닐 수 없는 자제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마왕성에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에 새삼 감탄했다.
그는 마왕성에서 인내와 극기를 배웠다. 그 누구도 참아내지 못할 것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내는 법을 배운 것이다.
단목신수는 대견스럽다는 듯이 그를 쓸어보았다.
"이제 네가 봉황성의 제 사왕야라는 지위에 불만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그에게는 사왕야란 지위는 너무나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목신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삼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목신수의 두 눈에 은은한 신광이 어렸다.
"그 아이들은 느낄 것이다. 단목가의 혈통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
"하나 이 노부는 네가 실력으로 그들을 감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천우는 그 말을 듣자 문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소자 아버님을 찾았으나 한 가지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
"가영 말입니다. 사실 이곳에 들어온 이유도 가영 때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허허헛......!"
단목신수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나 가영은 너의 이복누이다."
"알고 있습니다."
"허허... 장차 네가 원하는 모든 여인은 너의 것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천우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이제는 채화공자가 아닙니다. 소자가 출천환룡(出天幻龍)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허... 그렇군. 노부가 실수를 했구나!"
단목신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순간 너무도 흡족했다. 반준, 아니 단목준이 자신의 아들임이 자랑스러웠다.
"하하하... 아버님께서 실수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허헛......."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부자간의 대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피보라가 튀고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듯했다.
천우의 가슴 속에는 무림대의(武林大義)와 원한의 감정이 그 순간에도 수없이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절신군(三絶神君) 범고풍(凡古風).
천안(天眼), 귀검(鬼劍), 마뇌(魔腦)의 소유자.
그의 이러한 삼절(三絶)의 능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 번 본 것은 영원히 잊지 않으며, 천기(天機)를 꿰뚫어 보는 천안(天眼),귀신의 옷자락도 벤다는 귀검(鬼劍)
그리고 세상의 움직임을 앉은 자리에서 판단해 내는 무서운 마뇌(魔腦).......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며칠 째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방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고심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가 돌아왔다. 그것도 무섭게 커져서 돌아왔다."
그의 두 눈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컸다. 그랬기에 천안의 신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이한 것은... 그를 처음 알 때부터 왠지 그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에 감싸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의 눈은 바로 천안(天眼)이었다. 천하의 어떠한 역용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범고풍은 천우를 본 순간 마치 안개에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무언가 수상쩍은 냄새가 난단 말이야."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회자(回子)무늬가 고풍스럽게 장식된 둥근 창문으로 다가섰다.
밤하늘.
암청색으로 맑은 밤하늘에는 긴 꼬리를 문 유성이 흐르고 있었다. 명멸하는 별빛이 선연하게 한순간 지상을 내리비추었다. 범고풍은 명성(明星)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범고풍이 이곳 봉황성에 입문한 지도 어언 십칠 년! 그 수많은 날 동안 나는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그의 안색은 야천을 덮어오는 암운처럼 어두워졌다.
"그것은 이곳이 야망의 성(城)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 한시도 야망을 품어보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그 때문에 단 하루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체 그의 말을 누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간이 어찌 십 칠 년 동안 한 번도 잠을 자지 않고 살아올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아주 잠깐 동안의 휴식으로 기나긴 불면의 피로를 눌러두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의지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묵검(墨劍).
한 자루 서기 어린 묵검이 벽 상단에 걸려 있었다. 그의 가늘고 선명한 검미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한데 오늘... 나는 비로소 나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최소한 나 범고풍을 능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벽으로 다가서 묵검을 손으로 쥐었다.
맑은 검음을 울렸다. 범고풍을 뽑아들자 묵색 검신이 드러나며 실내에 싸늘한 예기를 발산했다. 그것은 천하의 보검이었다.
귀혼변환검(鬼魂變幻劍).
그는 묵검을 허공으로 치켜 올리며 결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도박이다! 그가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한다!"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庾世玉).
봉황성의 제 삼왕야(第三王爺).
그는 미세한 파공음도 내지 않는 절세의 부운지연(浮雲池蓮)의 신법으로 어딘가를 향해 내닫고 있었다.
어둠으로 덮여 있는 성내는 적막하기만 했다. 대전과 거각 몇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누각들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어둠 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유세옥은 침중한 안색으로 뇌까렸다.
"그는 강하다. 이제껏 나 유세옥이 두려움을 느껴본 상대는 결코 없었다. 하나 그만은 왠지... 두렵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토로했다.
당세 제일의 미장부로 평가되는 제삼왕야 유세옥, 그는 용모만이 천하제일은 아니었다. 초절한 무공 또한 단목신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적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여인처럼 섬세한 손으로 말미암아 옥수(玉手)라는 별호를 갖게 된 그는 그 고운 손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험한 일들을 모두 거뜬히 해치웠다.
봉황성의 지고한 명성이 어떻게 이룩될 수 있었던가?
그 찬연한 위명의 성세를 이룬 공적의 태반은 그가 삼절신군 범고풍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마의 무림들에게 있어 유세옥의 아름다운 옥수(玉手)는 공포와 죽음의 손(手)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그 어떤 일도 수행해 낸 그의 옥수가 이번에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 전율하고 있는 것이었다.
출천환룡이라고 불리는 불가사의한 능력의 제 사왕야.
그를 뇌리에 떠올리며 유세옥은 그 당당했던 자신감이 스르르 사라져 버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껏 천하를 주유하며 뇌성처럼 떨쳤던 그의 기백이 맥없이 무너져 내림을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심한 것이 있었다.
"그와의 싸움 이전에 나는 나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대체 그는 무엇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일까......?
그의 약점은 그가 지나치게 강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을까?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을 결코 자르지 못한다. 유극강(柔克强)라고 했다.
잠시 후 그는 한 채의 대전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출천환룡의 거처였다. 그는 무수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
한 순간 정지했던 그의 걸음이 다시 재빠르게 움직였다.
자면신군(紫面神君) 담세기.
봉황성의 제일왕야(第一王爺).
당금 정도무림의 제이인자라 할 수 있는 거목이다.
그가 유세옥의 청원을 들은 순간 놀랍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출정(出征)하겠다고? 그것도 광풍사(狂風沙)를 치겠단 말인가?“
유세옥은 그를 직시하며 결연한 어조로 청했다.
"승낙해 주십시오. 사형! 이것은 소제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결정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광풍사는 지옥삼겁천 중 가장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네. 우리는 아직 그들을 상대로 출진할 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네. 왜 그리 서두르는 것인가?“
담세기는 유세옥의 표정을 읽으며 그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유세옥은 나직하면서도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사형!"
"......!"
담세기는 무언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완고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생각하는 바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담세기는 유세옥의 생각을 알아차리자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두 사형제 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의 고충을 서로 간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담세기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제(四弟), 그 때문인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군... 자네라면 능히 그런 생각을 가질만 하지, 사실은 나도 그렇게 심기가 편하지만은 않다네. 하지만.......“
유세옥은 손을 저으며 간곡한 어조로 청했다.
"부탁합니다. 사형! 소제는 그의 명성을 부러워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할 따름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담세기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놀라운 일일세... 그 자로 하나로 인해 우리 삼왕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다니.......“
유세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제일왕야인 사형께서도......?'
담세기는 그의 표정을 통해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네."
"그렇군요."
유세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왕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갈등에 빠지기는 처음이었다.
천우가 돌아온 이후 봉황성의 모든 관심과 이목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출천환룡(出天幻龍), 그는 은연 중 봉황성의 제 이인자로까지 부상한 것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그의 광휘 뒤편에 덮인 그림자에 가려진 삼왕은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지난 이십여 년 간 고심 속에 다져온 자신들의 기반이 급속히 추락되는 것을 피부로써 느낀 것이다.
바람(風).
확실한 바람은 불고 있었다. 그것도 천지를 뒤바꿔 놓을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바람은 어떤 자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잔인한 바람일 수도 있었다.
또한 어떤 자에게는 희망을 가져다 주는 해빙(解氷)의 훈풍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람은 하나였다.
그렇건만 그 위용은 온천하를 감싸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바람은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중원을 뒤덮고 있었다. 중원은 그 회오리 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중원전사단(中原戰士團)의 출진(出進).
육중한 봉황성문의 활짝 열리며 수천 필의 준마가 봇물이 터지듯이 짓쳐나왔다. 뽀얀 흙먼지가 운무처럼 피어오른다.
선두의 인물.
그는 다름 아닌 봉황성의 제 삼왕야 옥수서생 유세옥이었다.
북천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그의 자태는 늠름하기만 했다. 희디흰 백의무복 탓인지 그의 수려한 용모가 한층 더 돋보였으며 얼굴엔 비장의 결의가 굳게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봉황성!
흙먼지 속에서도 그 장엄한 웅자는 마치 태산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다.
유세옥은 신광을 발하며 힘있게 뇌까렸다.
"다시 돌아오리라...! 내가 회성(回城)한다면... 이 유세옥은 지난날의 유세옥이 아닐 것이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말의 옆구리에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힝--
준마는 말발굽을 힘차게 놀리며 북으로 치달렸다. 흙먼지가 사방 천여 장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유세옥과 중원전사단의 위용은 가히 태산이라도 허물 듯했다.
혈겁(血劫).
바야흐로 중원과 변황의 운명을 건 한판의 승부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자원하여 선봉에 선 유세옥의 목표는 사천(四川)을 장악하고 있는 광풍사(狂風沙)였다.
지옥삼겁천 중 가장 막강하다는 광풍사의 수는 이 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 중 오천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대등한 무공수위를 지녔다고 하니 그들의 힘이 얼마나 절세적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그들은 그야말로 중원을 황폐화시키는 광란의 모래바람이었다.
과연 유세옥은 그 광풍사를 상대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는 단목준 못지않은 혁혁한 전과를 세워 봉황성으로 귀환할 수 있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