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女子들
그 날, 하늘에는 달이 떴다.
오랫동안 퍼붓던 눈발이 걷힌 후인지라 하늘은 맑았고, 구름덩어리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십오야(十五夜), 이 날은 바로 원소절(原宵節)이었다.
정월(正月) 십오야는 자고로 봄의 시작이라 했다.
이 날은 음기(陰氣)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고, 동시에 양기(陽氣)가 살아나는 날이라고 했다.
황홀히 떠오르는 달.
달을 보면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달 안에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정인(情人)이기에…….
"그는 천 가지 살인술(殺人術)을 갖고 있지. 그는 지상의 어느 장소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다!"
여인은 허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자상(刺傷) 가득한 얼굴이었다.
본래 얼굴의 윤곽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그 얼굴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가 나 있는지라 보기 흉했다.
차디찬 뇌옥(牢獄),
여인은 누비 담요도 없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한번 들어서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철혈뇌옥(鐵血牢獄).
이 안에는 마가(魔家)의 죄수들이 즐비하게 있다.
몸이 반쯤 썩은 자들, 자신이 언제 갇혔는지도 모를 정도로 꽤 오랫동안 갇혀 있는 자들.
너무도 오래 갇혔기에 미쳐 버린 자.
허기를 참다 못해 제 손가락을 뜯어 먹는 자.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온갖 해충이 오물로 덮인 바닥을 기어다니는 인간 지옥.
여인(女人), 그녀는 그래도 꽤나 나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형옥을 지키는 자는 여인의 식사에 대해 그래도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이 날도 여인의 밥그릇에는 돼지비계 두 덩이가 더 왔다.
"문주(門主), 나중 일이 잘못되어 문주가 탈옥(脫獄)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무서운 자에게 제 이름만은 말하지 마십시오!"
그는 아주 간사히 웃고 있었다.
"헤헤… 마화삼 나으리의 명만 없었더라도 이렇게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인문(忍門)을 존경해 왔습니다. 그러니, 백무엽인가 무화령인가 하는 자에게 제 이름을 말하시면 아니 되오. 물론, 문주가 이 곳을 나갈 가능성은 없을 것이나……!"
그는 간사히 웃었다.
철실(鐵室) 안, 얼굴이 흉한 여인이 있고 또 하나의 여인이 있었다. 얼굴에서 푸른 기가 떠도는 여인, 몹시 마르고 몸매가 작아 연약해 보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여인은 지극히 강한 기운을 흘렸다.
피가 발린 장도(長刀) 같은 느낌을 주는 여인, 그녀의 가슴에는 불나비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화접(花蝶).
그녀는 벌써 이 년 간 이 안에서 지냈다. 그녀는 마교대법에 영혼을 제압당해 백치(白痴)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나 잔혹하게 외쳐대는 여인은 수십 가지 지독한 제혼술(制魂術)에 당했으면서도 신지를 빼앗기지 않았다.
그녀는 이 순간도 그를 부르고 있었다.
"백무엽은 꼭 온다. 아암, 오고야 만다. 그는 나를 품은 바도 있다. 우리는 따뜻한 소주(蘇州)로 가서 살 것이다. 물론, 네놈들을 다 죽인 후에야 우리는 소주로 나들이를 갈 것이다!"
"……!"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화접, 그녀는 살인기계와 다름없었다. 명만 떨어지면 그녀는 행한다. 그녀는 명이 있기만을 기다리며 이 날도 냄새 고약한 뇌옥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벌써 이 년이다. 한 여인은 외치고, 한 여인은 백치의 눈빛만 흘리며 세월이 간 것도……!
정원(庭園), 달빛에 유혹당하고 있는 겨울의 뜨락은 아름다웠다.
넓다기보다는 아담하다고 해야 좋을 정원.
여인은 지금 단장화(斷腸花)를 보살피다 말고 눈길을 허공에 돌렸다.
선이 몹시도 가는 여인이다. 바람이 세게 불기만 해도 몸이 부서질 듯 허약한 여인의 얼굴에는 검은 반점(斑點)이 가득했다.
겨울의 여인, 여인의 눈에는 이지러진 달이 떠오른다.
달이 일그러진 이유는 눈에 물막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봄(春)을 맞기 싫다! 물론, 봄을 기다리기는 하나!"
여인은 몸을 움찔 떨었다.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은 죽어 가고 있었다. 해약이 없는 독이 여인?의 오장육부를 녹이고, 골수를 고름 덩어리로 썩이는 상태였다.
수정옥녀 단리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늘 자신만만한 여인이다.
-걱정 말아요. 십천무후(十天武侯)가 곧 오실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상냥히 웃곤 했었다. 하나, 사람들이 없는 장소에 이르면 다르다.
지금도 그녀는 슬픈 눈빛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그분은… 돌아가셨기 쉽다. 냉정히 판단한다면……!"
단리음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돌아가셨다. 십중팔구는! 살아 계시다면… 마가가 기승을 부리도록 아니 나타나시겠는가?'
단리음의 손끝은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손에 허리가 쥐어진 단장화(斷腸花)가 부르르 떨렸다.
겨울 정원에 꽃이 핀 이유는 소림철목(少林鐵木)이 신경술(神耕術)을 써서 화초를 재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인문십일좌(忍門十一座) 화명(花名) 단장화(斷腸花)!
단리음은 인문에 든 상태였다. 그녀는 몸이 쇠약해져서 정법회주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계절이 바뀔 때 나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슬프나… 운명(運命)이다."
그녀는 차가운 흙을 바라봤다.
사람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단리음은 죽음의 손길이 가까운 곳에 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기 싫다. 정말 죽고 싶지 않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단리음의 눈가에서는 영롱한 이슬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다섯 사람, 그들도 따라 울고 있었다.
벽의 그림자 안에 숨어서, 그들은 단리음이 자신들이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무엽(武葉), 천한 놈! 정말 뒈졌느냐? 아직 오지 않게?
-아아, 설향문주(雪香門主)는 피납되었고… 단리회주는 늘 울고 있고, 개봉(開封)에 간 청청(靑靑) 역시 그리움에 지친 기색이다. 무엽, 너 한 놈 때문에…….
-그 놈이 보고 싶은데, 그 놈은 정말 죽은 것인가?
-우라질 놈, 보기만 하면 죽여 버릴 테다!
-문주, 문주는 살아 계신 것이오? 아아, 우리 늙은이들은 기다리다가 지쳐 죽고 마는 것이오?
숨어 보고 있는 사람은 인문의 노고수들이었다.
이들 역시 백무엽의 노예들이었다.
개봉부 법륜사(法輪寺).
천년대찰(千年大刹)의 처마 위에는 백설이, 그 위에 풍만한 달이 뜨고 있었다.
계집의 방둥이처럼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십오야.
회의서생이 달을 본 지도 벌써 일각(一刻)이었다.
머리 위에 죽립(竹笠) 하나를 쓴 청년서생, 그는 달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십 장로 휘하 중 가장 강한 세력은 제십밀검대(第十密劍隊)이다. 안배된 바에 따른다면 제십밀검대를 얻는 순간, 천하의 삼분지일(三分之一)을 얻는다고 했다. 흠, 천하의 어떤 세력이 그리 거대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제칠마검대를 얻으면 백도의 반을 얻는다는 안배도 있지."
마무정(魔無情), 그가 어이해 개봉부의 사찰 안에 있단 말인가?
-제칠마왕검대는 개봉에 뿌리를 내리며 대총수를 기다립니다. 그들을 부르는 방법은 법륜사의 백팔고불(百八古佛)이 입을 모아 대범창(大梵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범창은 제칠장로에게 알려질 것이고, 그는 개봉관제묘(開封關帝廟)의 사자석상(獅子石像) 아래에서 기다릴 것입니다.
마무정은 제칠장로를 찾아온 셈이었다.
꽃망울이 앉은 매화나무 곁에서 그는 주지승을 기다리는 참인데, 지객승은 그의 허름한 몰골을 무시하는 듯 아직 주지에게는 기별도 하지 않아 그를 일각 넘게 사찰 후원에 서 있게 한 것이다.
마무정은 몸에서 어떠한 기운도 흘려내지 않았다.
무(無)!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배웠는지 알지 못할 신묘한 다섯 가지 구결로 인해 무공이 일신우일신되고 있었다.
"나는… 꽤나 멋진 놈이었을 것이다. 훗훗, 하여간 나는 나의 과거를 찾아 내고 말 테다. 과거를 비웃기 위해서라도……."
마무정은 주먹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한시빨리 반역자들을 찾아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뜻하는 바를 할 수 있다.'
마무정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주 미묘한 것을 느꼈다.
쩌릿하다고나 할까?
누군가 그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마무정은 이상한 감각으로 인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자가 나를 보고 있다.'
아무정에게는 영민한 감각이 있었다. 그의 눈, 코, 귀는 정말 신비한 감각을 발휘했다.
지금,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살피는 눈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풋풋한 향내도 느끼고 있었다.
석등(石燈) 아래, 흰 옷을 걸친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앞가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둔부가 몸에 잘 맞는 옷에 의해 완연히 드러난 한 명의 여인.
나이는 열일곱 정도, 풋내가 나는 동시에 꽤나 성숙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 미소녀가 이상한 표정으로 마무정을 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닮았다. 대숙(大叔)과…….'
여인의 손아귀에는 진땀이 흥건히 쥐어져 있었다.
눈이 덮인 후원, 다른 날이라면 사람들이 없을 것이나 이 날은 원소절의 밤인지라 많은 선남선녀들이 석등 주위를 돌며 자신의 크고 작은 소망을 기원하고 있는 상태였다.
백의미소녀는 그 중의 봉(鳳)이었다.
오똑한 콧날을 지닌 소녀는 마무정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마무정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신을 보자, 흠칫 놀라고 만다.
'대숙의 자세이다. 저 자세는…….'
몸을 경직시키는 여인의 뇌리로 한겨울 어느 날의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청청(靑靑)아, 대숙이 연(鳶)을 날려 주마!
쓸쓸해 보이던 청년은 볼이 사과처럼 붉은 어린 소녀를 번쩍 안아 들고 그렇게 말하며 웃었었다.
"대… 대숙!"
여인은 쥐어짜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데…….
"좋은 관상인데? 훗훗, 남복이 있겠다… 올해 안에."
마무정은 힐끔 얼굴을 들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죽립 아래로 보이는 그의 아래턱은 주름지고 싯누래졌다.
마치 칠십 세 노인의 주름진 아래턱처럼!
마무정이 고개를 가볍게 쳐드는 찰나, 아름다운 소녀는 퍽이나 실망하는 표정으로 몸을 가볍게 휘청였다.
"아… 아니군, 아니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미소녀의 뺨은 찰나적으로 창백해졌다.
그리고 마무정은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다가는 눈길을 돌려 그녀가 막 걸어 둔 괘지(卦紙) 하나를 봤다.
<대숙(大叔)의 만사여의(萬事如意)를 빌며, 그의 귀거래(歸去來)를 기원하며!
단리청청(段里靑靑)>
괘지에는 그러한 글이 초서(草書)로 적혀 있었다.
'누군지 운이 좋은 사람이군. 저리도 상냥한 낭자의 기복을 받다니……!'
마무정은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는 현재 역용해 노인 행세를 하는 상태였다.
저벅- 저벅-!
그는 한쪽 어깨를 기우뚱 일그러뜨리고 걸음을 옮겼다.
"동취 나는 물건에만 눈이 먼 중놈들! 제기랄, 옷차림이 이렇다고 노부를 얕보고 문전박대를 하다니… 제기랄, 죽은 아들 놈의 마지막 소원이 여기서 자신을 위한 대범창을 하는 것만 아니었다해도 벌써 떠나 버렸을 것이다!"
그는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단리청청은 자꾸 한숨만 내쉬었다.
"대숙, 어디 계시는 것일까? 아아, 최후의 희망을 걸고 개방주에게 대숙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맡기고 대숙을 찾아달라 부탁을 하기 위해 개봉까지 왔거늘… 대숙은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청청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이제껏 암중에 그녀를 호위하던 십여 인이 다가섰다.
정법열사(正法列士)라 불리는 사람들, 이들은 단리청청을 정법회의 부회주(富會主)로 깍듯이 섬기고 있었다.
"그만 가시지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마가무리에게 암살당하십니다. 놈들은 대격전이 있기 이전, 백도의 요인들을 이 겨울 안에 천 명 정도 암살할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벌써 사백 명 정도가 놈들에게 암살 당했습니다!"
"백도인들은 대거 봉황산에 모이는 중입니다. 그들을 접대하시는 일은 부회주의 일이시니, 어서 돌아가십시오. 나머지 일은 개방주가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음으로 말했고, 단리청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그녀는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종지뼈가 한 뼘이 넘는 완전한 성녀(成女)였다.
그리고 아직 사내를 모르는 숫처녀이고, 자신의 태탕한 미색을 단 한 명의 남자에게 보여 주고 싶어 늘 그리워하는 사랑에 눈을 뜬 여인이었다.
달(月), 그 안에는 그녀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얼굴이 찍혀 있다.
백무엽이던가? 그의 이름은……?
<은자 천 냥(兩)>
전표(錢票)에는 그런 액수가 적혀 있었다.
마무정은 그것을 품에서 꺼냈는데, 그의 품안에는 무려 백여 장의 전표 다발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대뜸 절의 주지 청량법사(淸凉法師)의 염주(念珠)가 걸린 손아귀에 쥐어 주었다.
"아, 아미타불… 시주는 활불(活佛)이오!"
청량법사의 디룩디룩 살찐 몸뚱이에서는 화끈 열기가 흘렸다.
"약소합니다, 대법창을 부탁하는 것으로는!"
"아, 아미타불… 시주는 현세극락을 맞이하실 것이오. 대저 부처를 잘 섬기는 자는 살아서 극락을 만납니다. 소승으로 말하자면 숭산(崇山)에서 칠 년, 아미산에서 구 년(年) 동안 불법을 익힌 바 있소이다. 대법창 정도는……."
청량법사의 말이 쉬지 않고 이어질 때.
"바빠서 이만……!"
마무정은 신형을 틀었고, 신형을 트는 순간 뿌연 안개로 화해 사라졌다.
청량법사는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일에 아가리를 딱 벌리고는 전표가 땀에 흥건히 젖는지도 모르고 사지만 바들바들 떨었다.
그 날 새벽, 법륜사에서는 백팔고불(百八古佛)이라 불리는 법륜사의 고승들이 함께 염불하는 예식이 벌어졌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나무사만다못다남옴도로도로지미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
"무상심심미묘법……!"
범패 소리는 담장을 넘는다. 그 소리는 깨어나는 개봉의 새벽을 들썩이게 했다.
"역시 좋아, 염불 소리는!"
곧 올 봄을 대비해 호미와 쟁기를 손질하는 늙은 농부들은 벌써 주름진 손을 합장(合掌)하고 만다.
십 리 밖까지 퍼진다는 범창 소리, 그 소리는 서방의 품에 안긴 신부의 선잠을 깨웠고 마차를 타고 천 리 먼 길을 떠나가는 이름 모를 여행자의 가슴에 아주 미묘한 파문을 던져 그가 처량한 숨결을 토하게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다 모인 대도(大都) 개봉부, 과거 한때에는 금국(金國)의 도읍 노릇을 했던 곳이다.
문물이 번성한 곳이기도 하고, 늘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아스라한 안개 속, 범창 소리는 법륜사의 담을 넘어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제기랄, 털 빠진 중놈들이 또 잠을 깨우는군!"
"오늘따라 왜 대범창이지?"
"어떤 대부(大夫)의 씨앗이라도 죽었단 말인가? 클클……!"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대범창 소리에 욕설을 해대는 일단의 무리가 있다.
머리에는 이가 수두룩,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린내 나는 거적때기와 새끼줄, 세수라고는 해 본 바 없는 걸인(乞人)들이 관제묘(關帝廟)의 뒤뜰에서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이 곳의 거지들은 다른 곳의 거지들과는 유가 달랐다.
이 곳 거지들의 눈에서는 신광(神光)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번갯불같이 폭사되는 안광은 이들이 내가고수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근 천 년에 가까운 전통을 지니고 있는 무림의 대방파 개방의 총타(總舵)가 이 곳인가?
절세고수는 드무나, 문하제자의 수에 있어서만은 천하제일이라는 개방!
개방의 중심지는 관제묘 지하 십 장 되는 곳에 있었다.
개방 이십팔노개(蓋幇二十八老蓋).
이들은 천하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팔결제자(八結弟子)의 신비이다.
타구봉(打拘棒)을 허리에 찬 이십팔 명의 노개들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예리한 턱에 침착한 눈빛을 가진 중년거지는 개방의 현임방주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소의뇌개(素衣腦蓋) 굴자강(屈自强)이라고 했다.
개방이 배출한 인물 중 가장 강하다는 사람.
그는 개방을 관장하고 있는 인물이고, 전 개방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개방의 선배고수인 풍진취개(風塵醉蓋)가 보낸 밀첩을 받고 거기에 따라 개방의 장래를 정하기 위해 장로회의를 주관하는 중이었다.
다 썩은 포단, 늘 죽엽청(竹葉淸)이 들어 있는 호로병, 이가 기어다니는 거적.
소의뇌개 굴자강 주위에 있는 그의 소지품은 다 따져봐야 그 정도에 불과했다.
이 순간, 소의뇌개 굴자강의 눈빛이 못 믿을 정도로 격동되고 있었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땀을 흘려 목덜미를 번지르르하게 만들고 있었다.
'들린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굴자강은 저도 모르게 손아귀를 강하게 거머쥐고 있었다.
'마풍(魔風)이… 드… 드디어 나타났다.'
그는 지금 아련한 범창 소리를 듣고 있었다.
범패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데, 그 내용은 지극히 희귀한 불교 경전인 유마사미진경(維摩沙彌眞經)이었다.
'아… 아니기를 빈다. 우연의 일치이기를! 으으, 백도가 흔들리는 이 때… 그, 그 무서운 악마의 절대자마저 나타난다면… 백도는 죽고 만다. 으으, 그가 나타나면 아니 된다. 마화삼 하나만도 꺾기 힘든 이 마당에…….'
그는 땀을 주르륵 흘리는데, 장로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태인지라 그가 돌연 안색이 창백해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일어난 세력 중에서 신경을 써야 할 세력은 마화성(魔花城)입니다. 그들은 한 번의 싸움도 하지 않은 상태이나, 이미 온 천하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십팔 장로는 분타(分舵)에서 알아낸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외 세력이라면 해남도(海南島)에서 일어난 옥화궁(玉花宮)인데, 그들의 정체는 아직 미궁입니다!"
"……."
"백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마화삼의 세력은 일로확대되고 있습니다만, 최근 들어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 소문은 구마존이란 자들이 암중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혈발미랑이란 마녀가 제거되었다는 것도 접수되었습니다!"
"중대한 사실은 대략 그 정도입니다. 그 모든 것을 정법회에 전하기 위한 비합전서구도 마련되었습니다, 방주!"
장로들은 한참 이야기하다가 아주 답답한 숨소리를 듣게 되었다.
"크으으……!"
소의뇌개 굴자강이 갑자기 쓰디쓴 숨소리를 토하며 상체를 휘청이고 있었다.
"어이해… 나타났는가?"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번쩍 쳐들고 있었다.
평소에는 냉정하기로 정평이 난 소의뇌개 굴자강.
그는 개봉의 명가인 굴씨세가(屈氏世家) 출신이었다. 그는 명문귀족의 모든 영화로움을 버리고 개방에 투신했다.
그의 그러한 이력 덕에 개방도들은 그를 여타의 방주보다도 훨씬 존경했다.
한데, 굴자강이 왜 돌연 이를 으드득 가는 것일까?
"방주, 어디가 불편하시오?"
벽력화개(霹靂化蓋)라는 태상장로의 화급한 물음이다.
눈이 휘둥그래진 노개들.
천풍과천개(天風過天蓋) 이하추(李何秋),
무전신창개(無敵神槍蓋) 목교(穆交),
타배화자(駝背化子) 관유성(關流星)…….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소의뇌개에게 집중되었다.
일신의 무공이 개방의 전대 제일고수인 풍진취개보다도 배가 높다는 인물.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정법회에도 인정을 받아 정법장로 중 제칠좌(第七座)를 차지하고 있는 백도의 대영웅.
그가 가는 대범창 소리에 몸을 떨다니…….
"아무것도 아니오. 잠깐 바깥 바람을 쐬면 심마(心魔)가 사라질 듯하니, 제현들은 걱정 말고 회의를 계속하시오!"
소의뇌개는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하나, 그의 표정은 무슨 일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 사문이 개방을 배반할 수는 없다. 적어도 무사(武士)라면 약자의 편이 되어야만 한다. 내 비록 마가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개방은 내가 청춘기와 장년기를 바친 터전이다. 피를 배반하는 한은 있어도 개방은 반역 못한다.'
그는 손을 품안에 넣었다. 그 곳, 그가 삼십 년 전에 죽은 가부(家父) 굴황(屈皇)에게서 전수받은 비수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천황멸살비(天皇滅殺匕)!
굴자강은 비수 자루를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사자상 아래, 꼭 한 사람이 죽으리라! 그이건, 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