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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광제선생은 1866년 7월 1일 남포군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고 1920년 55세에 대구에서 급성 복통으로 사망하였다.그는 대한제국시절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발의한 분으로 유명하다. 지역에서는 이 분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이 책도 그 일환으로 기획된 것 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읽는 것도 이 분을 선양하는 행위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넓게, 좀 더 앞을 보고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분이 진정 못 다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분의 이루고자 하는 뜻을 계승할 수 있다고 본다.
선생의 일생은 크게 유,청년기와 벼슬기, 재야시절로 나눌 수 있다. 재야시절은 상소운동시기(1905년까지)와 국채보상운동을 정점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기, 1910년 경술국치후 마산에서 활동한 출판운동시기로 나뉘어 볼 수 있다.
1. 유년기,청년기
선생은 남포에서 성장하면서 정통 유학을 공부하고,과거공부를 시작하였다. 여러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무과로 전환 후 1888년 23세에 급제하였다. 20세에 혼인을 했다.
충청도 유학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범주에 속한다. 보령지역 성리학은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을 게승한 남당학파와 최익현의 정산이주와 윤석봉의 남포이주로 발흥한 화서학파가 있다. 남당학파는 인물성이론-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을 주장하고 외세를 오랑캐로 보고 배격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화서학파는 성리학적 의리론을 중시하여 수신을 강조했다. 이러한 학통은 향후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생은 지역의 유림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러한 유학 전통을 몸에 익혔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성리학 논쟁을 소개한다.
# 소위호(湖)락(洛)논쟁: 人物性同異論논쟁 : 인성과 물성이 같고 다름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18세게 노론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
1) 충청도 중심의 노론(호론)이 인물성이론을 주장: 인간과 금수,초목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
이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입장.인성은 더욱 밝혀져야 하며,상대적으로 물성은 경시될
수 밖에 없게되고 따라서 주자학적 심성론으로 귀결하게 된다. 소위 인간중심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와
배타성을 내재하게 되는 철학이 되고 정치적으로 오랑캐와 우리는 다르다 하여 청과 서양에 배타적이
게 되었다.사상적으로 화이사상,위정척사파에 영향을 주었다.
2) 서울.경기지방 중심의 노론(낙론)이 인물성동론을 주장: 박지원,홍대용등이 대표적. 인성과 물성을
다 같이 하나의 세계로 보았다. 주자학의 초월론을 전복하여 저연을 생성과 변이의 장으로 인식하였다.
정치적으로 청과 서양문물에 우호적이였다.
# 이항로의 척사사상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지배적 관심사인 심설과 연관이 있다. 심설의 요체는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본디 선한 마음의 본질을 인식하고자하는 학문행위요,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수양론에
관한 것이다.의리와 도덕적 명분, 예송논쟁에 조선의 유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 바로 이 심설
때문이다.
# 심설에 대한 이야기는 주자학의 이기론까지 올라간다.주희의 성리학의 핵심은 이기결시이물理氣決是
二物(불상잡,不相雜,리.기를 가치론적으로 구별하여 정의),이기불가분개理氣不可分開(불상리,不相離,
현상적 실재물에 있어서는 리기가 동시동소라는 점을 말한다. 형이상학적 규정.)이란다. 앞 말은 리는
형이상의 道로서 생물의 근본이고,기는 형이하의 器로서 생물의 차림(具)라는 것이다.그래서 리가 상
이고 선이며 기가 하이며 후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뒷 말은 리는 일찌기 기를 떠나는 일은 없다.리
기는 본래 선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리와 기는 서로 나눌수 없다는 것이다.
주자 성리학의 이 애매한 이론은 조선으로 넘어와서 심도 깊은 논쟁을 겪는데,결국 앞 쪽을 중요시한
것이 영남학파의 거두 이황의 理氣互發설(이와 기는 각각 별도로 발현되어 상호 작용을 준다.)로 진화
되고 , 뒷쪽을 중요시한 것이 기호학파의 거두
다.)로 발전한다. 이를 앞쪽을 주리설,이원론이라 부르거나 뒷쪽을 주기설,일원론으로 보통 분류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양쪽이론이 결국 리의 주도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그리고 같은 학파내에
서도 서로 다른 주장들이 분화되어 나가는 것을 보면 스승의 학풍을 꼭 유지한 것은 아니다.
# 주희는 性을 이기론적으로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를 고민했지만,조선의 성리학자들은 情을 사단칠정
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인심도심설(참고1)과 심설로 발전하게 되는
데,율곡학파는 심즉기 성즉리설(참고2)을 성리학의 일반원칙으로 정립해 나가게 된다. 그러자 일부 학
자들이 성정을 포괄하는 심이 과연 기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고 심은 리라는 점을 구명하는 단계로 심
화되어 가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항로(심주리설을 주장하죠)인데 왜 그가 기호학파의 학풍을 이
어받고-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그들의 절의지개를 존중했지만- 심즉기설를 부정하게 되었을까?
심즉리설은 인간과 금수를 구별코자했던 그의 척사의식에서 연원한 것이라한다.이항로는 개항논의 이
전부터 서학의 침투를 염려했고 서양의 과학기술도 금충(禽蟲)의 偏智와 曲技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단
다.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性命을 바로 세우는 것이요, 결코 외물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항로에게 서구세력의 침입은 유교적 가치관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래서 이들을 막기 위한 正邪의 구
분이 절박했다.그가 심을 강조한 것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고 심은 만사의 벼리라는 인식을 가졌기 때
문이다. 또한 그는 인간과 금수의 구별이 중요하고,그 것에 철저해지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본디 선한 마음인 천명,즉 리를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항로에게는 심에 있어 이
기를 구별하여 그 존재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항로는 심이 기와 이가 妙合되어 있지만(이황의 논리와는 또 다르다.여기서 이항로는 심의 기특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심즉리설이 아니라 기보다는 리를 우선하고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심주
리론이라 부른다.), 리가 우선하다고 생각하고 이 리가 유교관을 대표하는 정수(진리)라 주장했다. 이
리에 따라 심이 움직이는 것이 도심의 실천이요,정학의 실천인 것이다.
척사운동은 그래서 진리를 위해 義를 행하는 정의로운 투쟁이 되게 된다. 이항로의 심주리설은 그의 척
사의식의 반영이고 척사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 참고1: 人心道心설: 인심은 사람의 형기신체와 관련된 욕구이고 도심은 인의예지에 관련된 것.도심은 천하의 공물로 지극히 중대하고 인심은 一己의 사물로 지극히
#참고2: 심즉기 성즉리心卽氣 性卽理설 : 심은 기요,성은 리다. 성은 심을 통하여 표현 된다는 것.이이의 심즉기설에 대하여 이항로는 심이 리와 기의 묘합이라는 성리학의 기 본원칙을 인정하면서도 심에 있어 리의 우선과 주도성을 강조하는 心主理說을 주창합니다. 이항로는 심주리설에서 리가 우선한다는 단서와 근거를 역易에서 찾습니다. 당시에 역은 경전의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하였다 합니다.역은 당시 心學이였다는 겁니다.
고종 17년. 1880년 이만손이 주도한 영남만인소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에 제 2차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책 <조선책략>을 받아 고종에게 전한 사실이 유림에 알려지자 척사바람이 전국에서 일어난다. 보령 지역에서도 상소가 있었고 15세 어린 선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2. 벼슬기.
188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 후 1889년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돌봐 줄 정권실세와 연이 닿지 않았다. 약 10년간의 재야시절 동안 쌓은 학문과 인적교류,사회경험이 선생을 인격적으로 성숙시켰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후 1900년 9월 정4품 동래경무관으로 임명된다. 1901년 1월에 면직된다. 소요사태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못했다는 것인데 이 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이 내려지고 동년 5월에 삼남찰리사로 다시 임명된다. 민심수습과 공직기강 확립이 임무인 찰리사는 지역관리와 토호세력의 방해로 효과적인 업무를 시행하지 못 한 것으로 나타난다.1902년 10월 정3품 직급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이 시기 1894년 갑오농민봉기가 있었고 선생은 보부상 중심의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하였다. 선생은 농민봉기를 '무뢰배에 의한 국난'으로 인식하였다. 1895년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났다. 충남에서는 홍주의병이 있었다. 홍주의병이 무산되자 청양군수 정인회가 공주를 공격했고 철마정에서 패했다. 이세영이 남포에서 기의를 했는데 이때 김광제도 참여했다. 그러나 의거가 실패하면서 서울로 숨어 들어갔다고 한다. 1896년 08월에는 개화당명부를 확보하고 박제순등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고변사건에 동참한다. 이 것이 무고로 밝혀 지면서 선생은 정100도에 2년 유배형에 처해진다.
# 참고로 당시 조선의 정세를 간략히 설명해 본다.
신정왕후인 대왕대비 조씨(조만영의 딸)는 이하응의 아들(12세)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고종이다. 1863년. 흥선군은 안동김씨의 견제와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부랑아적으로 놀았고 그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대원군은 10년 섭정을 했다. 그는 안동김씨를 제거하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탕평책등 독자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대원군의 한미한 집안인 민치록의 외동 딸을 욍비로 들였다. 고종이 궁인 이씨에서 완화군을 얻자 첫손자로 대원군은 이를 이뻐했다. 민비는 이에 미움을 갖고 외척세력을 끌어 들이고 최익현을 사주하여 대원군을 탄핵하게 하였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여흥민씨의 세도가 시작되었다. 민씨정권은 강화도조약등 문호개방정책을 펴서 유림들의 반발을 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장호원으로 피신하고 대원군이 재집권했다. 고종이 대원군에게 사태의 수습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민비의 국상을 준비했다. 민비는 청나라에게 부탁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민비는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다가 1895년에 살해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국권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으나 끝내 1910년 국권을 일본에게 찬탈당하게 된다.
# 1863년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10년 섭정. 1873년 고종 친정 시작. 당시 22세. 10년간 개화정책 추구. 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경장(변복령,단발령시행),청일전쟁,갑오농민전쟁.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1896년 2,11~1897.2.20 아관파천. 1897.10.12~ 1910.08.29 대한제국. 1902년 영일동맹. 차관통치로 일본화폐유통과 인플레이션 심화. 1905년 러일전쟁. 을사늑약체결.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고종퇴위. 1910년 경술국치.
3. 재야시절 - 상소운동 시절 1905년까지
대한제국이 1897년 선포되고 '광무개혁'이라 일컫는 일련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 운동이 전개되어 입헌군주제를 시도하려 했다. 이때의 운동으로 러시아의 간섭을 배제하고 1905년 러일전쟁때까지 외국의 간섭에 균형을 맞추는 시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 자본의 국내 시장 침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 하와이 이민를 시작으로 멕시코,쿠바 등지의 이민,만주.연해주등으로의 불법 이민이 많아졌다.
선생은 이 시기 사회 안정을 위한 호패법 제정에 호패가 아닌 호표로 하자는 상소를 하였다. 외국화폐의 유통 반대를 주도하는 공제소의 총무를 맡아 일정 역할을 하였다. 공제소활동은 집권층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지배층과 보부상 조직인 연결하여 광범위하게 운동을 전개한 의미는 있었다고 한다.
1905년 12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지배층의 외세의존적인 자세와 가렴주구에 대한 비판이 그 내용이었다. 이 일로 선생은 고군산도로 유배를 떠났다. 을사늑약이후 자결한 민영환를 기리는 <민충정공혈죽>이라는 시를 1906년 대한자강회 월보에 실었다.
4. 재야시절- 1910년까지.애국계몽운동시기
대구로 이사온 선생은 사립학교장과 대구광문사(교과서 발간.보급) 사장을 맡았다. 이 시기 선생은 애국 계몽가로 활동했다. 대구 자치제 시행을 위한 대구민의소를 조직했다. 권학과 산업육성을 위한 연설을 하였다.
러일전쟁후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차관 공세가 강화되었다. 그 차관의 쓰임새를 보면 일제의 식민수탈의 기반을 닦는데 스인 것이고 결국 일본 화폐가 유통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07년 경 국채는 1,300만원 정도. 당시 대한제국 수입재정이 1.318만원이었다. 1907년 1월 29일 김광제와 서상돈이 대구광문사 특별 모임에서 발의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김광제의 연설은 호소력이 있었다.(100쪽)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도둑과 거지등도 의연금을 낼 정도였다. 모금한 총액은 27만여원 정도, 일제의 방해 책동으로 1907년 6월 이후는 모금이 진척되지 않았다. 1908년에는 양기탁이 모금액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결과는 무죄였다. 그러나 운동은 이로 인해 상당히 위축되었다.1909년 11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만들어져 논의를 했으나 논의만 분분했지 실효가 없었다. 결국 모금액 15만원은 경술국치후 경무총감부에 빼앗겼다.
선생은 서울에서 조직된 대한 자강회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표방하였다. 이 안에서의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내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자강회는 헤이그밀사사건과군대해산등을 계기로 해산당했다. 이를 계승한 단체가 대한협회였다.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이 침체기에 빠지면서 서울로 활동을 옮겼다. 이 단체에 가입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명강연을 하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아 지회가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 근대 교육 활성화를 위한 학회활동이 전개되고 노동야학회도 활성화되는데 여기에 적극 참여를 한다. 지금의 도서관인 서적종람소도 만드는데 앞장섰다.
5. 재야시절- 경술국치이후
선생은 마산으로 정착했다. 여기에서 출판 문예활동을 열성적으로 벌였다. 식민지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자층이 형성되고 그들의 단결과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2월 16일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개최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이후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고 각 종 강연에 강행군을 하였다. 그 해 6월에는 고학생 모임인 갈돕회 고문도 맡았다. 1920년 07월 24일 급작스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고 한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향년 55세.
문제의식-
1. 정통 유학자의 위정척사 신념에서 애국계몽가,그리고 나중에 노동활동가로 변신하게 되는 내외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2. 사회 활동에서 민중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지 개혁의 동반자나 주체로 삼지 않았으며 왕권과 지배층의 시선에서 개혁을 주장한 것은 아닌가?
3. 2번의 문제의식 연장선상에서 모든 사회개혁적 활동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선생의 활동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어떤 원칙과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구한말,대한제국시기에 적절했을까?
13년 12월에 쓴 독후감입니다. <갑신년의 세 친구>를 읽고 쓴 것인데 참조하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갑신정변이 있다. 일단 년도. 1884년. 그리고 인물 김옥균. 나머지 이어지는 특이점. 3일천하, 일본의 힘에 기대, 젊은 개혁파, 주장은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 것을 지향..등등. 이 정도?
그러나 이 소설은 우리가 아는 갑신정변에 인간의 숨을 불어 넣고, 오늘의 삶으로 끌어 왔다. 그 숨은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만들고 부국강병을 꾀하려 했던 젊은 혁명가들의 그것이었다. 또한 정변을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매듭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도록 했다. 책 말미에 정리되어 있는 <참고 논문과 책>들의 제목을 보고, <작가의 말>을 읽어 보면 이 소설이 얼마나 충실하고 정성스럽게 쓰여졌는지를 알 수 가 있다.
갑신정변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시작하여 개항,그리고 친청,친러,친일로 이어지는 조선 정치의 맥락에 서 있다. 또한 조선 사대부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유림들과 근대화를 통해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젊은 개혁파들간의 대립선상에 있기도 하다. 당시 조선의 왕은 그 접점에서 왕조의 안위를 도모하려 했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10년을 끝내고 22살의 젊은 국왕이 1873년에 친정을 시작했다. 2년 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9년 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개항과 정변의 약 10년 동안 조선의 젊은 왕과 혁신세력은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고 제도를 혁신하고 인재를 육성하고자 했다. 왕은 의정부 육조와는 별도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김옥균은 근대화의 모델로 일본을 삼았다. 그는 이 시기 세번이나 일본을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으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청에 반기를 드는 것은 내심 반기었으나 조선이 자신들과 같이 근대화에 성공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또한 아직 근대 국가로의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일본에게는 그러할 여력이 없었다. 왕은 젊은 인재들에게 선진국에 나가 근대화에 필요한 영역을 배워오라고 했다. 왕이 중용한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재필,서광범,유길준,윤치호,민영익등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청나라에 기대려 하는 고관대작과 왜를 사람취급하지 않는 소중화주의에 빠져 있던 유림세력,그리고 그 와중에 조정의 안위를 유지하려는 황실세력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갔다. 결국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조정은 청의 영향력하에 들어가 버렸다. 김옥균을 중심으로하는 혁신세력은 조정일에서 배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반대세력은 역모를 꾸며 그를 제거시키려고도 하였다. 김옥균은 이러한 위험을 직감하고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정변을 도모하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일단 왕의 신변을 확보하고 주변의 청경향의 고관대작을 숙청하기로 했다. 일본공사에게 무력지원을 요청했다. 청은 일단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조선군대의 영을 장악하고 무기고의 무기로 무장을 하면 반대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정국에서의 계획부터가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왕의 신변은 확보했고 그 주변세력 일부를 처형하는데 성공했다. 각료를 발표하고 미리 준비한 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존재가 너무 약했다. 더우기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다. 일본의 무력이 작았고 청의 위안스카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왕은 그들의 뜻에 공감은 하였으나 하는 행위가 너무 미숙하고 안일한 것에 실망을 하였다. 왕의 마음도 그들에게서 떠났다. 정변은 3일 만에 끝났다.
일본은 정변이 실패하자 반정세력과 손을 떼고 남 몰라라 했다. 그러나 정변 과정에서 일본군이 희생을 당한 부분에 있어 조정에 배상금을 강요했다. 또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면 자국민 보호를 위해 자동으로 자신의 군대도 출병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규약은 10년 후 동학농민전쟁시 조정의 청군대 지원이 있자 즉시 일본군이 출병하게 된 명분이 되게 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그러했다.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혁신세력을 부추긴 것은 조정의 분란을 유발하려는 것이었고 그 와중에 빈틈을 노려 자신의 정치,군사적 개입의 기회를 옅보고자 했던 것 뿐이다.
갑신정변의 주역 세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홍영식은 임금 옆에 남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김옥균은 일본에 망명하여 자신의 꿈을 펼쳐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일본의 냉대.조선의 자객행위로 일신의 안위를 보존할 수 없는 처지로 지내게 된다. 그러다 자신의 삼국화합론을 청의 이홍장을 만나 설파해 보기로 하고 상하이에 건너 갔다가 자객 홍종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마지막 한 사람 박영효는 일본에서의 냉대를 못 견뎌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애초에 부마인 귀족출신이 그에게 미국의 사람대접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고 견디기 힘든 모멸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들어와 김옥균이 자객에 의해 죽은 지 5개월만에 조선에 환대를 받으면서 귀국하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친일 행적을 하며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78세에 자연사하였다.
갑신정변 후의 역사는 이렇게 돌아갔다. 일본은 조선에게 배상금을 강요했고 청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군대도 동시에 상륙할 수 있다는 조항을 얻어 냈다. 이것이 10년 후 발생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할 때 현실이 되었다. 이 십년 동안 일본은 힘을 차근히 쌓아 갔고 드디어 청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그리고 일본을 등에 업은 개혁파들이 갑오경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은 1895년 정치적으로 앙숙이었던 왕비를 살해했다. 고종은 일본에 대항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 1896년의 일이다. 고종은 마지막 희망을 러시아에게 기댔다. 왕은 거기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제국의 선포는 사실 갑신정변때 이루어졌어야 했다. 대한제국은 결국 러일의 각축장이 되었고 1905년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 전리품으로 조선의 외교와 군사권을 빼앗아 버렸다. 을사조약. 1905년의 일이다. 그리고 5년 후 1910년에 경술국치를 조선은 당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은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을까? 일본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본다면 일본의 1868년 메이지유신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1853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쇄국을 풀었다. 그로 부터 15년 후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갑신정변은 1875년 개항 후 9년 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성공했다. 조선은 실패했다. 그 차이는 일본의 신진세력의 폭과 깊이가 조선의 그러한 세력보다 훨씬 넓고 깊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지지도 있었고, 반대파를 무찌르는 무력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은 그들을 강력하게 간섭할 외세가 없었다. 그러한 외세를 사대할 국내세력의 정신적 물리적 토대가 약했다. 그러하기에 중국이라는 대륙의 구심에 포섭되지 않고 새롭게 대두된 서양의 원심력에 쉽게 끌려갈 수 있었다. 조선은 중국,청에 대한 구심력이 너무 강했다. 근대가 표방하는 민족과 국가의 자주적인 모습을 갖추기에는 봉건의 사대성이 너무 깊었다. 세상이 변해도 그래도 중국이라 했다. 중국이 그러하지만 왜는 내 밑의 것들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일본을 통해 김옥균은 부국강병을 꾀하려 했다. 고종도 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일본은 말 뿐 그를 도와 주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원하지 않았다. 민영익등 초기 혁신세력에 붙었던 황실지배층도 양반 상놈을 구분하지 않는 서양의 안하무인에 질려했다. 차라리 청의 보호하에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다. 갑신정변을 우리 시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석할 일이다. 메이지유신의 역사적 맥락을 지도 삼아 갑신정변이 갖는 조선의 특수성을 분석할 일이다.
책을 읽으며 슬프고 어렵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민족은 주변의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인가 하는 회한이 들었다, 미 국무장관이 청화대에 와서 하는 말이 배팅 잘 해라~!라고 했다던데 1884년 정변 때 정국이나 2013년 한반도의 정세나 다를 게 뭐가 있을가하는 우울함이 들게 한다. 동북아 평화론,중심론은 우리 시대의 사명이라 여긴다면, 그 과정에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원칙은 옳고 동의하나 각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에 벌서 우리는 미국중심의 해양세력에 붙을 것인가? 아니면 중국중심의 대륙세력에 붙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편들기를 하고 진영을 나누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 싸우고 있다. 정변때 보다 더 가관인 것은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는 것이고 이념이 채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고민하고 고민해도 나로선 어찌 해답을 내놀 수 없는 현실이다. 우울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책 속에서 건진 이 문장을 기록하고 싶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한 장면이긴 하지만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홍영식이 일본 망명을 거부하고 임금 옆에 있다가 청나라 군사의 칼을 받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다.
" 자네들 이야기가 맞네. 훗날을 위해 다들 떠나야 하네...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났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가를 알려야 하네. 비록 우리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우리 뜻만큼은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네.전하를 두고 다 떠나 버린다면 우리의 진심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나는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네."
그의 나이 29살. 1980년 광주 윤상원열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면서 역사는 발전한다. 그 발전을 믿기에 욕심과 탐욕,이기심에 헤매며 괴로워 하면서도 자유와 정의를 소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015년 10월 22일. 독서 모임을 긑내고 곰곰히 생각해서 쓰다.
- 먹고 살 만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잘 하고 예의바른 청년으로 자라나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고시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었다. 대천고 출신으로 서울대에 들어가 행정고시에 합격을 한 꼴이다. 그러나 강남 출신이 아니라 연줄이 부족해 한직으로 돌았다. 그러나 공부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그 시름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윗은 윗대로 아랫 것은 아랫것 대로 맘에 들지 않았다. 제도와 절차를 지켜 부국강병의 한 뜻으로 움직이면 되건만 그렇게 안 되는 것이 무엇때문인가? 지역의 아랫 것들이 봉기를 했다. 되먹지 않는 놈들이 망동한다고 생각하고 막아 섰다. 위에 것들이 존왕은 하지 않고 일본에 기대기에 그들을 처단하는 데 일조를 했다. 결과는? 형벌과 유배. 그리고 관료에서의 퇴출.
나이 30 중반이 되어 재야에 머물러야 했다. 생업은 집안이 어느 정도 해결을 해 주었다. 지배권력은 맘에 안 들었지만 나라를 삼켜 버리려는 친일파들을 견제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 생각했다.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었다. 믿을 것은 존왕척이사상을 근본으로하면서 문물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지식인집단과 토종 상인들인 보부상세력등등 이었다. 문제는 이 들이 존왕의 뒤에서 권력을 쥐고 흔드는 매판세력과 외국세력의 힘을 제대로 파악 못 했다는 것. 정치가 제대로 중심을 잡아 주지 못하면 지식인과 백성의 어떤 사회문화 경제활동이 성과를 내지 못 한다는 것. 그래서 정치 변혁 운동을 중심에 두고 사회활동을 병행해야 하지 않았을 까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국채보상운동이 애국적인 시민운동이지만 그 결과가 일본에 돈을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대한협횐가?대한제국시절 일진회와 일을 같이 해서 그들을 무력화 하고 정치권력을 잡고자 했다지만 너무 안일하고 관념적인 것이다. 정부가 해산을 명령하면 지체없이 해산하고 다시 이러 저러한 단체를 결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을사늑약.경술국치를 당하고 속절없이 대구로 마산으로 활동을 변경한 것은 패배의 그 것일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실천하려한 것은 높이 살 만하지만. 차라리 생업의 전선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신의 체질을 변모하려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미적지근한 노선과 항거하는 분투가 없는 말과 행동이 오히려 민족 투쟁의 전선을 흐트려 놓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민중을 중심으로 철저히 자신을 민중화시키려 하는 노력을 했다면 우리는 그를 애국지사 뿐 아니라 독립지사로 불러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료 보관 차원에서 낙서를 올려 논다. 2015년 10월 24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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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국 송나라시대에서 관물(제물)에 대한 경계로 소유의 마음을 버리고 순수한 리의 세계로 가자는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그 후 조선으로 이념이 전해진 모양인데.....만물은 기로인해 세워지고 기에 대한 설명의 부족함을 채우는 정도로 시작했던 것이 리인데...이상하게도 이것을 따지는데 너무 치중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시대건 학문의 순수성을 추구하고 유지하려할수록 이데올로기는 극대화되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생기기마련이지요 영정조 시대이후에는 모든 분야가 퇴보되는 현상이 생겼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 일인가 싶고 .....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었으니 반드시 사과해야하고 전쟁에 대한 뒷수습을 해야합니다 인간의 잔악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에 대한 개개인의 반성과 국가 전체의 반성이 이루어지기위해 끈임없이 외쳐야 하겠지요 비굴이 아닌 당당함으로 ... 우리 또한 전쟁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를 생각했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고 우리의 고유의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할때입니다 이런 생각을 지닌 분들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 요즘은 이런부분에 대한 생각으로 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