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 [上黨山城] 트레킹
□ 일 시 : 07월 03일 (넷째 토요일 / 흐림 / 23º ~ 29º)
□ 출발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 28-2(상당산성 공남문)
□ 도착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396.(성내방죽)
□ 구간 : 상당산성 [上黨山城] 일원
□ 코스 : 남문(공남문) ⇒ 서남암문 ⇒ 서장대(제승당) ⇒ 서문(미호문) ⇒
동문(진동문) ⇒ 동장대(보화정) ⇒ 성내방죽.
□ 거리/소요시간 : 약 4.77km / 2시간 20분(휴식시간 포함)
□ 난이도 : 난이도 下급
□ 대중교통 : 무궁화호 제천역(종착역)
갈때 = 대전역(12:13) → 청주역(12:56) = (경)요금 2.200원.
올때 = 청주역(18:28) → 대전역(19:10) = (경)요금 2.200원, 귀가.
버스 갈때 = 청주역 711번(승차) → 청주체육관(하차) → 862번 청주체육관(환승) = 남문(공남문)하차.
버스 올때 = 862번 종점(승차) → 청주체육관(하차) → 711번 청주체육관(환승) = 청주역(하차).
□카메라와 함께한 청마(靑馬)
□ 사진 청마(靑馬)
오늘은 잠시 장마전선이 주춤하면서 늦은 호후에 비가 다사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늦게 배낭을 챙겨 대전역으로 출발 대전역에서 12:13분 열차를 타고 청주역에 13:00 도착을 하여 역에 나가자마자 좌측으로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는데 배차간격이 35분인 711번 버스가 운 좋게 출발을 하기에 얼른 올라타고, 청주체육관에서 하차 후 20여분을 기다려서 862번으로(배차간격 25분) 환승하여 남문(공남문)에서 하차하여 오랜만에 상당산성을 거닐어본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여유 있게 사진을 담으며 걸으면 대략 2시간이면 충분하게 걸을 수 있다.
성곽길을 따라 걸어도 되지만 숲으로도 연결이 되어있는 듯 숲 속으로 난 갈림길들이 많이 볼 수 있어 편안한 숲길도 있는듯한데 나는 오로지 성곽길로만 걷는데 날씨가 좋지가 않아서 반바지까지 다 졌고 무지하게 습도가 높아 흐르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서문(미호문) 안에서 잠시 흐르는 땀을 식힐 겸 망원랜즈를 마운트 해놓은 상태로 평의자에 내려놓고 배낭을 내려놓는데 갑자기 카메라게 땅으로 떨어지고, 땀이 어느 정도 마르고 다시 카메라랜즈를 아무 생각 없이 랜즈로(24-70mm) 바꾸고 주변을 담으며 전망대에서 청주공항이 흐릿하게 보이길래 망원으로 갈아 끼우니 갑자기 따따따닥 - 따따따닥 초점을 못 맞추고 자꾸 버벅거리기에 다시 배낭에 넣고 24-70mm랜즈로 사진을 담으며 그전에 멋지게 보았던 동장대(보화장)가 가림막이 쳐 저 있고 안내문을 보니 올 8월에 개방을 한단다. 862번 종점 앞 성내방죽을 둘러보고 트랭글도 늦게 끄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한참을 기다렸다가 타고 청주체육관에서 711로 환승 청주역에서 18:28분 출발 대전역에 19:10부에 도착하여 열차여행도 마무리한다.
상당산성은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일원에 위치한 포곡식 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 전후부터 운영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충청 병영의 진수 산성으로 경영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2km이며, 시설물로 동문·서문·남문 3개소 및 문루를 비롯하여 암문 2개소, 치성 3개소 등이 남아 있다.
청주목(淸州牧)이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으로 불렸다는 점과 ‘상당기지 개석축(上黨基址 改石築)’이라는 조선 숙종 대 축성 기록으로 볼 때, 상당산성이 백제와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성 내에서 발견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 기와편 및 남문 밖에서 발견된 7세기 후반의 인화문토기편으로 볼 때, 상당산성의 초축 시기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작성된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따르면, “궁예가 축성하고, 견훤이 빼앗았다가 왕건이 다시 빼앗았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 내에서는 9~10세기경 기와편이 발견되기도 했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개축되고 정비되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 29년(1596)에 원균(元均)이 상당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이시발(李時發)과 최립(崔笠)을 시켜 성을 쌓았으나 도중에 무너져 그만두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그 후 효종 2년(1651)에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의 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짐에 따라, 상당산성은 충청 병영의 진수(鎭守) 산성으로 경영되는 한편 청주 읍성의 보조적인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숙종 대에는 상당산성에 대한 개축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숙종 46년(1720)까지 동문부터 서문에 이르는 남쪽 구역이 개수되었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영조 대에는 상당산성의 체성, 수문, 동문, 남문, 서문 등이 보수되었다고 하며, 상당산성 남문 앞 각자(刻字) 등을 통해서는 순조 대 체성, 여장, 병영 등에 대한 개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1895년 이후 체성 및 문루 등이 무너져 내리거나 없어졌는데, 1957년 6월 남문 등 체성 일부를 개축한 이래 1971년에 홍예문과 체성 등 석축 구간을 개축 · 보수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 · 서문 · 동문의 문루 등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당산성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용담동, 명암동 일원에 위치한 성곽으로, 청주시 동쪽의 해발 491.2m 고지와 계곡부를 따라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남쪽 구간을 제외하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의 서쪽으로는 청주 시내가 잘 보인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2km로, 성벽은 산의 능선으로부터 약간 밖으로 벗어나 축조되었으며, 서쪽과 북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북벽의 낮은 곳은 90cm 정도이며, 나머지 구간은 240~470cm 정도의 규모를 보인다. 고상당성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조성하고, 그 안쪽은 흙으로 쌓아 올리는 내탁 공법으로 축조되었다. 조선시대 상당산성 역시 고상당성의 석축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나, 기저부에서 기단석의 크기가 훨씬 작고 성벽 입면에서 그랭이 기법도 많이 확인된다.
『여지도서』의 충청 병영에 대한 기록을 통해 조선 후기 상당산성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총 둘레 7,275척 · 높이 9척의 규모였고, 성문은 동문 · 서문 · 남문과 동북암문 · 서남암문이 있었으며, 수문과 수구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포루는 총 15개소가 있었고, 여장(女牆)은 1,176첩(堞), 성내 연못은 모두 4개소, 우물이 15개소였다고 한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 · 서문 · 남문 3개소의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무사석으로 조영된 내외홍예문으로, 너비는 420cm, 높이 350cm의 규모이다. 동문과 서문은 무사석으로 조영된 평문 구조로, 너비는 280cm, 높이는 270cm의 규모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는 각각 암문 1개소씩 남아 있으며, 서문 밖에서는 옛 서문지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3개소의 치성이 있고, 1개소의 수문지를 비롯하여 북벽 1개소 · 서벽 2개소 등 총 3개소의 개구식 수구가 남아 있다. 다만 포루 및 여장 등의 시설은 대부분 유실되어 그 원형을 자세히 살피기 어려운 실정이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