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은 일명 대관림(大舘林), 선림(仙林)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으로 400여 종의 수목이 있어서 식물학상으로도 좋은 연구 거리가 된다. 봄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으로 예부터 유명한 곳이다.[1] 1,100여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천년의 숲"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공원 주변에 연꽃단지와 위천천의 맑은 물이 있어 년중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공원이다 .
함양상림공원은 신라 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령군(함양군의 옛명칭)의 태수로 있으면서 백성을 재난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위천강이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홍수가 빈번하였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강물을 돌리고 둑을 쌓고, 둑 옆에 나무를 싶어 가꾸었다.
처음에는 대관림이라고 불렀으나, 이후 큰 홍수가 나서 중간부분이 유실되어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림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상림은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남아 있는 부분의 이름만을 따서 상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1:10 ~ 12:50 함양 최지원길- 필봉산(233M) 탐방
1000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함양 상림숲을 끼고 도는 ‘고운 최치원 산책길’,
전 구간은 5㎞(상림 1.6㎞ 포함) 정도로 비교적 걷기에 편하고 볼거리도 많은 곳이다.
실제 산책은 함양문화회관과 향토역사박물관 뒤편에서 필봉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다. 좋은 길을 뒤로 미루고 처음 힘있을 때 산을 오르는 편이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길을 걸으면서 먼발치에서 상림을 감상한 이후에 숲속으로 가는 것이 좋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는 것보다,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보는 것이 상림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디 때문이란다.
그런데 우린 상림숲 마지막 물레방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 꺼꾸로 걷기를 하였다.
물레방아를 떠나 약간 가파른 고개에 올랐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이지 않아 우체국 집배원에게 물어보니 고갸를 넘어 대병저수지까지 가면 오른편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고 하였다.
과연! 입구에 도착하여 산길을 오르니 약간 가파른 길이었다. 오늘은 산으로 오르지 않을 것이란 예고에 방심하다 된통을 맞은 셈이다. 가파르게 올라 작은 봉우리에 도착하여 숨을 몰아쉬곤 잠시 휴식. 가지고 온 탁주에 온갖 간식을 나누고
다시 내리막길, 그런가 하면 또 오르막. 숨가쁘게 뒤따라 가기가 바쁘다. 이러기를 다섯번
마지막 고개를 내려서니 세종임금의 12번째 아들인 한남군의 묘. 신도비와 상석을 비롯한 묘석들이 잘 배치돼 있다. ‘세종왕자한남군신도비’라는 비문을 보고서야 세종임금의 아들 묘임을 알았다.
한남군은 세종대왕의 12번째 아들(혜빈 양씨의 소생)로 단종 복위에 연루돼 휴천면 남효리 새우섬에 유배됐다가 4년 만에 사망했다. 한참 후인 1557년(명종 12년)에 ‘한남군 정도공 휘어지묘’를 만들고 도 기념물 165호로 지정 관리해오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마을 이름을 한남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잠시 묘를 공부하고 아직 300M 남은 필봉으로 가지 않고 함양 산삼항노화산지유통센터로 내려가 상가를 구경하거나 향료를 구입하기도 하곤 체욱공원과 고운정을 거쳐 점심식사 장소인 늘봄가든으로 향하였다.
13:00 ~13:45, 늘봄가든에서의 오곡밥, 지금까지 외식을 한 중 괜찮은 점심식사였다.
개평한옥마을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서 8km 거리에 있는 지곡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은지 100여 년이 넘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비록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때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고난을 겪은 인물이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이곳 개평한옥마을에 일두 정여창'의 생가인 '정여창 고택' 또는 '일두 고택'이라 부르는 정여창 생가가 있다. '정여창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번 중건 되었다. 현재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적으로서의 명칭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으로 되어 있다.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은 모두 같은 곳이다.
개평한옥마을이 있는 지곡면에 들어서면 '함양일두고택'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로 '오담고택', '하동정씨고가', '노참판댁고가' 등 의 표시가 보인다. 고풍스러운 고택도 여러채 있어 비교적 마을규모가 큰 개평한옥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배형상을 띄고 있는 마을 형태 때문에 우물을 만들지 않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울길을 따라 마을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마을의 전설을 확인하게 해주는 종바위가 우물과 우울자리의 위치를 표시해주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다섯개의 우물외에는 일절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강점기때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새로 우물을 판 이후로 마을이 기울었다고 한다.
일만제곱미터의 넓다란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는 '일두고택'은 명당지로 소문나 있으며, 전형적인 경상도의 양반집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비롯하여,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 '일두고택'은 TV드라마인 '토지'에서 최참판댁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솟을대문에는 다섯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음을 알리는 5개의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걸려 있고, 솟을 대문을 지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는 '충효절의' 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는 '백세청풍'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으나 고증은 안된 상태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안채의 대청마루 뒤로 사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안채 뒷편으로 사당 외에 별당과,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 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살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가 유명하다.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골목마다 종가와 고가가 자리 하고 있다. 1880년에 지어졌다는 하동정씨고가, 1838년에 지어진 오담고택, 또, 풍천노씨 대종가 등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전통 가옥들이 보인다.
14:50 ~ 15:30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함양 남계서원(咸陽 藍溪書院)은 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함양군수동면 원평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남계서원은 조선시대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으로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의 학덕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고을 유생 개암 강익(姜翼)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선비들 공의로 1552년(명종 7) 남계(藍溪)에 건립하였다.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藍溪)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603년에 나촌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그 뒤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별사에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1868년에 별사를 훼철하였다.
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며 배향인물로 정여창, 강익, 정온, 유호인, 정홍서 등이다.
남계서원과 가까이 붙어 있는 함양 청계서원(咸陽 靑溪書院)은 경상남도함양군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6호 청계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첫댓글 푸른 숲길 잘 걸었습니다. 수고하셨소
자주 걸으니 미덥소
많이 올려 주셔서 잘 봤습니다
실제보다 사진이 더 멋져요
구름이 한몫 합니다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걸은길인데 어쩜이리도 세세하게
감동입니다
역시 선생님입니다
나하고는 보는 눈이
다릅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걷고 언제 이리도 많은 사진을 찍어셨는지 감탄연발이.니다. 시진보니 더 새롭고 확실하게 점이 찍어집니다. 감사합니다.총무가 없어서서 많이 허전했네요
눈에 선ㅡ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속의 자유인
길사랑 따봉입니다.
아쉬운 마음 가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