Србија, рансилванија-Мађарска - 세르비아, 트란실바니아-헝가리.
세르비아, 1369년.
"황제이시여, 성 안에서 사절단이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무엇인가."
"지금 당장 항복하는 대신,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달라는 요구입니다."
"함락시켜."
"예, 폐하."
이틀 후, 스플리트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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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해적국"과의 전쟁. 베네치아가 이슬람화된 직후, 파바오는 전쟁을 선포해 달마치야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몇 달 뒤 자다르를 함락시킨 파바오는 해군을 동원해 리알토로 직접 원정을 가기로 하였으나.....
당시 헝가리 군주, 베르트랑 당주의 강력한 '권고'로 뱃머리를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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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치야를 평정함으로써, 크로아티아 왕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나폴리 왕국이 당시 크로아티아의 대군주를 겸하고 있었기에, 파바오는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이미 파바오의 마음 속에 동맹이란 없었다.
파바오의 라이벌, 트란실바니아 공 마티야스가 마침 바그다드 술탄과 대치하던 상태에서
파바오에게 무례한 언사를 펼친 고로, 파바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속으로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며, 헝가리 왕국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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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1만 2천의 친위군은 일제히 헝가리의 국경을 넘어 요새들을 하나하나 격파하기 시작했다.
오합지졸의 헝가리군은 추풍낙엽처럼 격파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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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바오의 속도전 앞에 트란실바니아의 마티야스 공은 생각보다 빨리 무릎을 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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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제 1차 세르비아-헝가리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타. 페슈트 전투가 일어난다.
세르비아군은 파바오 네마냐 황제 휘하 7800명,
헝가리군은 베르트랑 당주 왕 휘하 7600명. 군세로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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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점이 있다면, 세르비아군은 중보병 중심, 헝가리군은 기병 중심이라는 것이다.
헝가리군은 우월한 기병 전력을 앞세워 돌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파바오는 파이크병을 전진배치하고 후방에 경기병대를 친히 준비하였다.
무수한 파이크의 숲 앞에 고깃덩어리가 된 헝가리 경기병들과 기사들.
또한, 본격적인 중보병들의 싸움 끝에 수적으로 우세해진 세르비아군이 헝가리군을 도나우 강으로 몰아붙인다.
이때, 헝가리군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경기병대의 측면 공격으로 세르비아군은 헝가리를 완패시켰다.
헝가리군은 포로 2000명, 전사자 4000여명을 낸 반면, 세르비아군은 사상자 1000여명에 그쳤다.
더욱이, 이 전투에서 파바오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위신도 한 층 상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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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군을 패퇴시킨 뒤, 아무도 지키지 않는 페슈트 성에 입성한 파바오 1세.
예상과는 다르게, 파바오에게는 이 정도로 충분했나 보다.
크로아티아 지방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정도로 헝가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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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씨는 남았다. 일단,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가뜩이나 왕위가 불안정해진 베르트랑 당주. 외래 앙주 왕조의 실정에다 이번 패전까지 겹쳐
마자르족 토호들의 불만은 곧 불을 뿜었고, 헝가리는 내전을 겪는다.
다음 전쟁은 예견된 것이었다.
첫댓글 크으으 기다렷어요 드디어 올라왔꾼요 헝가리 쿨망 ㅠㅠ
헝가리가 망했어 !ㅜㅜ
두샨 황제의 위엄이 다시 살아나는듯
쿨망 승리의세르비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