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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מִקֵץ 미케쯔" : 12월 둘째 주 in 5784
창41:1-44:17(To), 왕상3:15-4:1(Haft), 롬10:1-13(Brit), 눅9:1-12:59(신약)
1부 예배 유니스 목사님
하누카의 특징이 있다. 키슬레브월에서 테벳월에 걸쳐있다. 단 지파의 달이 이제 시작되었다. 비전교회 전체에 단 지파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번 한달 동안에 살펴보기로 하자. 겨울에 초를 밝히면서 완성하고 싶었던 말씀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깊은 사랑을 하나님이 불빛으로 켜셨다. 에하드의 불빛을 켰다. 이제 우리가 미케쯔로 들어왔고, 다음주는 바이가쉬이다. 벌써 하야도 마지막 포션으로 접어들고 있다
창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미케쯔는 원래 끝이란 소리이다. 한국어로는 그 표현이 안 나와있다. 바예히 미케쯔 슈나타임 야밈, 미케쯔는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주는 많은 중요한 구절 중에 제자로서 알아야 할 구절이다.
행1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미케쯔에 우리가 알아야 할 목적이 나와있다. 미케쯔에는 땅 끝까지, 케쯔에 이르러서 아들의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아들의 증인, 즉,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미케쯔에서 주님이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은 케쯔, 끝을 정하셨다. 너무 힘들면 언제까지 해야하냐고 하면서 우리는 끝을 내가 정하고, 끝내고 싶어하는데, 그러나 케쯔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결국 우리에게 케쯔까지 가라고 하신다. 그러면, 여러분의 케쯔는 무엇인가? 너랑은 끝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관계가 있으신가? 이건 끝이다,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신가?
우리는 옆 사람이 가장 가까운 것 같지만,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제일 먼 사람이 옆 사람이기도 하다. 사춘기 자녀들을 둔 분들은 문을 열어 들어가면, 그곳이 땅 끝인 것 같다. 미케쯔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실까? 마지막, 끝까지 간다는 소리를 우리는 고 아버지를 만나면서 들었다. 이스라엘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했고, 많은 끝나는 관계들을 맺어왔는데,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제일 저를 사로잡은 말씀은, 나는 끝까지 갑니다라는 것이다. 케쯔까지 가봐야 안다는 것이다
케쯔는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봐야아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끝날까봐, 실패할까봐, 사랑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압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는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 끝까지 가봐야 아는 사랑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란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히브리어로 보면 이제 아드 케쯔라고 되어있다. 케쯔까지 가겠다. 케쯔는 다른 말로 하면, 타브, 완성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는 것 자체가, 나는 끝까지 사랑한다, 너희와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뜨겁게, 끝까지 사랑하지 않는 것이 미움이라고 했다. 뜨겁게, 끝까지 사랑하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이 끝을 상정하시고, 정하셨기에, 끝까지, 케쯔까지 가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도가 바로 몸과 영혼이라는 두 구도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미케쯔로 인도하신다. 끝까지 가는 사랑의 미션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이라는 것을 주셨다
우측의 세상에는 끝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영화를 보면, 우주선에서 줄 하나 매달아서 우주에서 작업하다가 끈이 끊어져서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마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우측 세상이 바로 그런 것 같다. 우주 미아가 되어버린, 끔찍한 곳이다. 우측 세상은 사실 끔찍한 곳이다. 내가 분명히 잘못한게 없고, 의로운데, 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리면 너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해버리니, 그런 끔찍한 곳이 바로 우측이다. 영의 세계는 끝이 없이 용서하는 곳이다
주님은 끝이라는 용서를 49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반유대주의 중심에 어떤 사상이 있냐면, 이 세상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는 원래 없었다는 말이 있다. 다 유대인들, 이스라엘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생존자들이 아직도 살아있음에도 그런 말들을 한다. 그런데, 이 우측으로 들어가버리면 그것이 또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490번이라도 용서하라.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 때 아우슈비츠에서 괴롭힘을 당했지만, 하루에 490번까지는 안 당했을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아우슈비츠도 괜찮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우측으로 들어가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이 끝없는 사랑, 우리의 에고는 가장 반발하는 것이 이 우측의 세상인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의 시점에 지난 주 아보트들이 일본을 다녀왔다. 하나님의 일들은 한꺼번에 오는 것 같다. 하나님이 일본을 주시고, 이혜경 교수님을 통해서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에 대해서, 소노히, 그 열방을 그 날로 모아가고 계신다. 우리가 가장 끝내고 싶은 관계는 아마 일본과의 관계일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사태도 서로에 대해서 가장 끝내고 싶어할 것이다. 끝없는, 끝까지 가는 사랑은 너랑은 하고싶지 않다는 미케쯔의 상황이 우리 교회 안에 다 모아져있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세지가 뭔지 우리가 보기 원한다
좌 : 몸, 에서, 형제들 / 화, 판단, 미움
우 : 영, 야곱, 요셉, 신뢰
우리가 영혼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배웠다. 몸은 에서, 영혼은 야곱이 담당한다. 이것이 미케쯔에서는 요셉의 형제들과, 우측 세상은 요셉이 담당하는 구도로 가르치신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이슈가 된 주제는 신뢰였다. 이것은 끝내고 싶어도 끝이 나지 않는 사랑이다. 형제들은 계속해서 끝내고 싶어한다. 그것을 이번 달의 주제, 단들이 담당하는 주제인 화와 판단이다. 미움이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처리하기 위해, 끌어안기 위해 하는 작업 중에 신비한 작업이 있었다. 시므온을 선택해서 가두는 일이 있었다. 좌우의 통합, 형제들의 화해를 통해서 미움, 일본, 하마스를 끌어안는 놀라운 하나님의 결합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하누카의 불빛을 키셨을텐데, 우리는 총 44개의 초를 켜게 되어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나냐면, 키슬레브 25일에 일어난다. 이 키슬레브월 25일, 그때 켠 44개의 빛은 모두 미케쯔의 빛이다. 우리 한번 끝까지 사랑해보자. 너와 내가 하나인 그 사랑을 한번 끝까지 해보자는 미케쯔의 신뢰의 빛이라는 것이다
유월절도 심지어 초막절까지도 한 달에 끝나게 되어있다. 한 달의 에너지는 절기가 표현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신기하게도 하누카는 키슬레브, 베냐민의 달에 시작해서 단 지파가 끝내게 되어있다. 일본에서 일곱 번째 초를 켜고 돌아와서 여덟번째 완성을 했는데, 왜 단 지파의 달에 하나님은 하누카를 걸쳐있게 하셨는가? 바로 화, 판단, 미움을 담당하는 단 지파가 이것을 완성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됨에 대한 것을 단 지파가 완성하게 되어있다. 화를 완성한다. 화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화가 나고 패닉에 빠졌을 때, 화에 딸려가버린다. 내가 화로 화해진다. 그런데 단 지파들은 이 화를 가지고 놀 줄 아는, 다룰 줄 아는, 통치할 수 있는 데스티니를 가지고 있다
하누카의 빛은 지난 주에 설명했듯이, 그것을 통해서 따뜻함을 얻거나, 빛을 통해서 글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하누카의 빛을 켜고 바라보는 것만이 허용된다. 유대인들은 하누카의 빛을 켜고 기도문을 축성하는데, 이 하누카의 빛은 거룩합니다. 이것을 이용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이 불빛을 바라봅니다란 기도문을 낭송한다.
우리는 화가 난다. 이 빛을 이용할 수 없을 때 말이다. 이 빛을 통해서 내가 유익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화가 난다. 어떤 대상, 상황을 통해서 내가 그것을 통해서 해를 입는다고 하면 엄청나게 우리는 미움이 올라온다. 그런데 이 하누카의 불빛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치유를 준다. 우리의 집착, 미움, 판단, 고집, 지배욕을 치유하는 빛,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기 원하신다
이 테벳월의 문자는 ע 아인이다. 이 아인은 여러가지를 대표한다. 눈도 대표하고, 문자를 볼 때 어디서 처음 쓰였는가를 보면 하나님이 그 단어를 통해서 풀어내는 것을 쓸 수 있는데, 이 알은 창세기 처음에 알 프네이 테홈에 쓰인다. 이 아인의 그릇은 토후 바보후, 테홈에 있다. 깊은 어둠이다. 그것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곳에 아인을 위치지으셨다. 아인은 에서, 에싸브의 아인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단 지파는 좌측의 몸, 에서, 깊은 어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희가 일본에 갔는데 지옥 온천이라는 곳이 있었다. 저희가 벳푸라는 지역에 갔는데, 아주 특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너는 정말 특별해. 너에겐 특별한 사랑을 허락하셨다. 이게 단독자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특별함에서 제외되면 죽을 것 같다.
쿠웨이트에서는 하이힐을 조심하라고 한다. 걷다가 쑤시면 기름이 나온다고 말이다. 그런데 벳푸 지역에서는 파기만하면 온천,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왜 지옥이라고 표현헀는가가 의문이었다
지옥은 땅 지, 감옥 옥이다. 땅에 갇힌 상태를 말한다. 땅에 속한 이 몸, 이 에서, 팥죽 한 그릇, 감각, 보이는 것에 갇힌 상태가 바로 지옥이다. 땅의 것에, 물질, 시간에 갇힌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땅이 또한 일본의 벳푸인 것이다. 몸, 좌측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하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인데, 하나님은 지옥에 갇힌 우리를 풀어주시고, 자유케하기 원하신다. 끝이 없어서 두려운 그곳에 자유롭게 날아가서 그 우주를 통치하기 원하신다
지옥을 매일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서 매일매일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저희가 교회 사역을 하기 전에, 우리 목사님에게 아버지가 풀어지기 전에, 그때 다비드 선교사님일 때는 굉장한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많은 제자들이 따랐다. 사역이 워낙 radical하다보니 변화가 있을 때마다 많은 자들이 떠났다. 떠나면 쌍방간의 아픔과 상처가 있는데, 그 제자가 너무너무 상처가 컸나보다. 몇년 뒤에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무 당신께 서운해서, 천국가도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저희 목사님이 싹싹 빌었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3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가고자 하는데가 천국 맞죠? 라고 말이다.
천국이란 곳이 어디일까? 그런 예화가 있다. 천국에 가면 숟가락이 길어서 내가 먹을 순 없는데, 이것으로 너를 떠먹여줘야하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는데, 그게 천국일까? 아마도 착한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이란 곳은 마치 우주와 같아서, 한계가 없고, 끝이 없고, 분리가 없고, 너와 나 조차도 없는 곳을 천국이라고 한다
이 왼쪽 세상, 우리가 갇히는 이 세상은 개별이 있고, 몸이 있고, 케쯔가 있는 곳을 말한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참 아이러니한 나라이다. 일본의 별명은 섬나라 일본인데, 섬은 אי 이라고 한다. 나, 내가 제일 중요한 곳이다. 먹여주거나, 떠먹음받거나, 내가 먹어야 하는, 내가 먹여줘야하는,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을 땐 22%까지 올라갔는데, 지금 15%로 떨어졌다고 한다. 자신을 기독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인구수가 떨어졌는데,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의 숫자가 1%라고 한다. 일본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왜 이렇게 선교사님들이 일본은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일본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종교는 신도와 불교이다. 그런데, 참 재미난 조사가 있는데, 종교를 믿고 있다고 대답한 일본인은 26%라고 하는데,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은 72%라고 한다. 그런데 신도라는 것이 종교보다는 하나의 문화인데, 신도의 마을 축제가 있을 경우에 조상신에게 제사드리는 것에 참가한다는 것은 94%라고 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26%밖에 되지 않는데,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94%인, 무슨 아이러니일까?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에 대해서 지금까지 사과를 요청하지만, 전세계가 일본에게 사과하라고 하는데, 왜 사과를 안 하고 있을까? 일본은 살아있는 신, 천황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신들의 보호를 받고 있고, 그 최종 신이 천황이라고 이야기한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했지만, 그 패함을 어떻게 해석하냐면, 그 책임을 천황께 돌리면 신성모독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국가의 도덕의 틀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천황은 과감하게 전쟁을 끝내주었고, 전쟁에 따라 발생하는 일본과 세계의 피해를 막아주었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세계를 위해서 성스러운 결단을 내려주었다는 일종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굳은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본은 이런 나라이다. 제가 일장기를 가까이 본 것이 이번에 처음이었다. 제가 머무는 숙소에 세미나홀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치다가 앞에 큰 일장기가 있는 것이다. 얼마나 무시무시하던지, 단독자, 내가 전부라고 하는 것이 주는 아우라, 에너지가 얼마나 쎈지 모른다
일본이 이렇게 단독자의 나라임에도, 마을 신도의 행사에 94%가 참여하고 있다. 단독자인 나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체성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다. 그래서 이 일본의 사상을 화라고 한다. 단 지파들이 완성해야하는 화가 아니라, 몸과 영의 조화, 이 화이다. 화합할 화이다. 이것을 일본어로는 와라고 하는데, 이 와 문화가 발달되어있다. 서로가 모여서 제사를 집도하고, 마을 잔치에 참여함으로 일본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런 나라를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입양하라고 하신다. 이게 말이 될까? 이것은 목사님이 너 탓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 같다. 화, 와라는 주제를 이 미케쯔에서 이제 너희들의 분노, 미움을 끝내고, 내가 주고자 하는 진정한 화를 한번 이루어가보자고 말씀하고 계신다
미케쯔의 스토리는 그동안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주셔서 총리가 되어서, 형들이 와서 풍년을 이겨냈다는 스토리가 아니다. 이 화, 좌우의 통일, 결합을 위해서 형제들을 다 데리고오는 스토리, 미움을 끌어안는, 완성하는 스토리가 바로 미케쯔의 이야기이다
참 재미난 것이 이게 벼 화, 곡식 화인데, 이 벼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온다. 입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화이다
제가 엊그제 아버지, 어머니와 식사하러 가다가 일이 터져서 도저히 저의 에고, 패턴으로는 그럴 때 먹으면 안된다. 저는 신경쓰는 일이 있을 때 먹으면 체하기에 안 먹는데, 아버지가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 얼굴 보고 먹으라고 말이다. 저는 위가 스탑된 상태라 먹을 수가 없는데, 곡식이 입에 들어가면 다 잘될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괴감에 빠진다. 우리가 목회를 잘못하고 있는거 아닐까? 우리가 목양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서, 먹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서 먹지 않는데,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변한게 하나 있더라. 아버지 얼굴을 보면서 내 입에 이 벼가 들어가더라. 맛있게 먹고, 소화도 잘되고, 일도 잘 풀어지는 일들이 생겼다.
미케쯔에서 벼, 곡식을 사서 먹게 되어있다. 이것이 화를 완성하는데 참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형제들은 영혼과 화합하지 못한 몸을 상징한다. 계속해서 화가 나 있다. 우리는 눈 뜨면 화가 나 있고, 잠들 때도 화를 못 풀어서 불면증이 생기고, 매일매일 전투태세에 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화에 케쯔가 오는 것이다
화를 참는게 아니다. 화내는 사람이다가 화를 참고, 화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이런 생명으로 화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화에 갇힌 자들을 구원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화내는 자들에서, 화를 참는 자들에서, 화나지 않는 자에서 화에 있는 자를 구출하는 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왜 이렇게 끊임없이 의심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이 세상은 믿을만한 곳이 아니라고 할까? 우리 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가 있다. 당신은 완전하시고, 뭐든지 하실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당신이 문제이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라. 정말 불완전하다. 우리의 이 기초가 계속 흔들리고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들까?
일본은 지진이 많이 났는데, 땅의 기반이 흔들릴 때 서 있는 것 자체로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 우리 삶의 기초가 신뢰가 아닐 때, 기본적으로 우리의 몸, 섬 나라 일본과 같이 계속 지진 상태에 있는 우리가 서 있는 것 자체, 사는 것 자체가 너무 무겁고 힘이 든다. 인생이 왜 이렇게 무거운가? 우리의 기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괴로워할 작정, 사연 만들기로 작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한 자매가 이런 사연을 냈다. 얼마 전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놀고 싶어서 숙소를 잡았는데, 제 물건이 하나 없어졌는데, 우연히 그 친구 주머니에 그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는데, 몇주가 지난 지금까지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정말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에게 그런 일을 당하니 인생을 잘못 살았나 생각도 들고, 이해하기도 정말 어렵습니다. 어디까지 이해하고 허용해야하는지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 참 많이 당하지 않는가? 이때 이 질문이 두개 있습니다. 일을 잊어버리고 이전처럼 지내고 싶은데, 제 마음이 상처입었기에 어렵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중학교 졸업 직후 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기에 한국에 친구가 별로 없고, 깊은 마음을 가진 친구가 없을 것 같은데, 이 친구마저 없게 된다면 제겐 친구가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을 것 같다.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스승이 했던 조언이 너무너무 감격스러워서 제가 이 에피소드를 골랐다. 그 친구랑은 친구하지 마십시요. 당신들 사이는 친구가 아닙니다. 그 친구가 문제가 있어서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당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을 친구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친구인데 내 물건을 가져갈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수준의 친구이지, 진짜 친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신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이해 관계를 하고 있다. 나는 너 밖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너랑 친구를 그만하려니 내가 아쉽다. 모든 기준이 אי 이, 나에게 가 있다. 손실이 났다고 관계를 끊고, 관계를 끊을까 말까라는 기준이 나라면, 그것은 이해 관계이지, 비지니스이지, 친구가 아니다.
우리의 부부관계, 스승, 엘티지 관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비지니스를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교회에 와서도 여전히 비지니스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미케쯔에 잘 살펴봐야한다. 단 지파는 그렇게 비지니스를 잘한다. 그리고 계산을 잘 하고, 판단을 잘 하고, 화를 잘 낸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 단 지파는 반드시 우측의 사랑, 무조건적인,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사랑을 담당하고 있다
스승은 이렇게 조언했다. 그 물건보다 더 좋은 물건 다섯개를 사서 선물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당신이 선물을 했는데, 친구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없는데라는 반응을 보이면, 당신은 더 괘씸하게 느낄 것이다.
우리가 끝없이 준다는 끔찍한 일을 좋은 것처럼 포장해서 지금까지 배워왔다. 그런데 그 포장지를 이번 미케쯔에서 너의 한계가 왔다고 뜯어버리시는 것 같다. 우리는 관계의 끝을 설정하고, 그 끝이 보이면 관계를 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영혼을 몰아내고 있다. 요셉의 형제들은 끊임없이 요셉을 몰아내고 있다
조하르에 이런 말이 있다. 화는 우상숭배이다. 왜?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고, 이해되지 않는 일, 친구가 어떻게 내 물건을 훔칠 수 있을까?
우리 교회에서 이런 사건들이 있었지만, 고금이 집사님이 병원에 계신데, 지지난주에 뒤에서 트럭이 받아서, 한방병원에서 치료받고 계신다. 우리가 그냥 운전 잘하고 있는데, 뒤에서 그렇게 받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why me? 우리의 인생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그린 그림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난다. 우리가 세운 계획, 또 우리가 세운 그림대로 되어지지 않는, 내 삶이 간섭받고, 통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화가 난다.
그런데 조하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화를 내는 것이 우상숭배와 같다는 이유이다. 사람은 분노로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그것 자체가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타인, 세상에게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틀렸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참 어렵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요셉이 한번에 용서했다고 했으면서, 형제들을 이렇게 여기저기 갔다가, 줬다가 뺏었다가, 가뒀다가 다시 보냈다가,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까지 넣는 지난한 스토리를 썼을까? 그만큼 이것을 처리하는 것이 깊은 사유가 필요하고, 깊은 주님과의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뜻이 아닌 당신의 뜻을 이루십시요라는 항복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깊이 씨름한다는 것이다
요셉은 화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었다. 즉각적으로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즉각적인 화, 감각적인 화를 통치하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요셉처럼 참 사연이 많다. 요셉은 17살에 끌려갔다. 엄청난 사연의 소유자였다. 우리의 모든 상처와 트라우마는 내가 팔린 것에 있다
믿음이도 여기에 있는데, MK, PK들이 상처가 많은데, 억지로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사역자인 엄마, 아빠가 쉽게 이야기하면 나를 판 것이다. 멀쩡하게 한국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애를, 그 오지에 갖다놓고, 내 선택이 아닌데 여기서 살라고 내 영혼이 팔린 것이다. 엄마, 아빠가 나를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 엄마, 아빠가 내 커버링이 되어주지 않고, 내 영혼이 팔린 것 같은 트라우마이다
준호는 메시아 증후군,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책임져야만 했던 것이 있었다. 내 영혼이 팔린 것에 대한 트라우마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래서 모든 미움이 거기서 발생한 것이다. 미움 박스에 갇혀있다
미움 박스에 갇힌 요셉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즉각적인 분노를 스탑하는 것에 있다. 미움을 수용하고, 끌어안고, 그냥 미움을 받고 죽어버리는 것에 있다. 그래서 미움의 반대는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신뢰의 동의어는 바로 수용, 그리고 받아들임이다. 미움조차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셉의 수식어가 있다. 형통한 자 요셉이라고 수없이 나와있다. 형통하다는 말이 자나크라는 말인데,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다는 말이다. 삶의 상처, 트라우마, 미움의 박스를 훌쩍 뛰어넘다. 요셉에게 상처나 미움의 박스가 없던 것이 아닌데, 그것을 뛰어넘는 자를 형통한 자라고 한다. 우리는 미움 박스를 붙들고, 얼마나 그것에 매달려서, 뛰어넘기보다 장애물을 연구하고, 분석하려고 한다. 우리의 사례를 분석하고,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연구한다. 우리의 길이 열려있지 않고, 지옥, 땅에 갇혀있다
이 형통의 반대를 불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불통, 서로에게 불통되는 상태, 화가 나 있는 상태, 절대로 결합하지 싫고, 이해해주기 싫은 고집의 상태이다. 여기에 대해서 고 목사님이 새로운 신조어를 만드셨다. 아버지 브레이크, 아버지의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상태를 브레이크 파더, 아버지를 부수는 상태라고 했다
내가 분노에 싸여서 활활 타오르는데, 아버지가 스탑 했을 때, 브레이크가 걸리는 제자가 내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사실 이건 정말 끔찍하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요셉은 이 브레이크가 있던 사람이었다. 즉각적인 분노를 스탑하고 형제들을 계속 끌어안기로 결정한다. 그 사건의 중심에 이 사건이 있었다.
창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요셉에게 상처가 없던 것이 아니다. 요셉도 울고 슬퍼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장애물을 끌어안기로 결정했다. 그들 중에 시므온을 끌어냈다. 이 번역 자체가 우리 에고의 화가 들어있다. 우리는 시므온을 끌어내는데, 시므온을 욕으로도 쓰는데, 결박하고, 열두 지파의 이름은 욕이 아니라 신성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이카흐라는 단어를 쓰는데, 신부를 취하다는 소중하고 고귀한 언어이다. 요셉은 미움이라는 주제를 끌어안았다. 미움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것이 아니라, 미움받기로 결정하고, 아픔을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좌측과 우측을 화해시키고 통합시켰다
잠25
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우리가 원수에게 독을 먹이고 싶지 음식을 먹이고 싶을까? 우리 교회는 창립할 때부터, 목사님이 교회 비빔밥 먹으러 갔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밥을 중요시 여긴다. 원수에게 밥,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 겨울 지파가 하는 역할이다. 단 지파는 음식을 먹이는데, 아쉘은 더하다. 왕의 수라상을 차리고, 아달월, 납달리로 가면 귀한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원수로 하여금 곡식이 입에 들어가게 한다. 그래서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한다.
옛날에 제자들이 엘티지원이 변화되지 않으면 데리고 살라고 하셨다. 한솥밥을 먹어라. 그래야 변화될 수 있다. 이것을 요셉이 한 것이다. 자기를 팔아먹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므온을 취해서 고귀하게 모셔서 음식을 먹게 한다
2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원수갚는 것, 일본을 사과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 친구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 너는 그들에게 밥을 먹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끔찍한 세상, 신뢰의 세상이다
롬12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여기도 끔찍한 말씀이 나오고 있다. 이게 얼마나 우리 개별, 단독자가 하기 싫어하는 것인가? 제일 잘하는 것이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요새 제자들이 싸우면 전화해서 빨리 와보라고 한다. 신랑이 밥을 던진 자리라는 것이다. 나는 또 급히 와보라고 해서 가서 두들겨 맞고, 다 부숴졌는 줄 알았는데, 그런 제자들도 있으나, 증거를 남겨서 악을 다시 악으로 갚고자 한다. 이거 못하게하는 교회가 괜히 예수 믿어서 원수도 못 갚고, 욕도 못한다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거 못하게해서 우리가 홧병에 걸린다. 이 원수갚는 판을 세상은 만들어준다. 그래서 세상에서 살기가 훨씬 편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화를 드러내는 것이 손해라 화를 참는다. 메타버스, 초월적인 세계, 가상세계란 뜻인데, 이것이 작년에 우리를 휩쓸었다. 요새 그렇게 가상세계에 10대 아이들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10대 아이들이 코로나도 겪고, 많은 사회적인, 가정적인 미움의 세상, 화를 내야하는데, 항상 화가 나 있는데 화를 참아야 하는 세상에 살다가, 가상 세계에서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악플 정도가 아니라, 현실 세계처럼 아바타로 나를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좋은 점은 자기 닉네임, 아바타 뒤에 숨을 수 있는 것에 있다. 자기가 드러나지 않을 때,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온다. 미움의 장, 판이 깔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메타버스 안에서 성범죄, 폭력, 왕따, 이런 현상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현실에서 못 받은 사랑, 인정을 그 가상 세계에서 받으려고 하다가, 거기는 마치 사회와 똑같아서 왕따, 미움질을 하게 되는데, 그게 너무 편해진 판이 깔려있다고 한다.
미움과 미움질, 수치, 약자짓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이 판을 깔아주고 있다. 잔인한 악플을 달고, 아무 관계가 없는데 빌어먹을 세상, 화를 참지 못해서 가상 세계에 들어가서 화풀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와 전세계가 이것에 대한 규제를 하기 위해서 리더십들이 회의를 한다고 한다
지금 이런 세상이 되었다. 우리에게 미움을 끌어안는다는 메세지는, 참 제가 이 메세지를 전하면서도 여러분에게 죄송한 것이다. 이런 메세지만 꼭 전해야할까? 여러분 마음도 위로해드리고 해야하는데, 미움을 끌어안는다, 수치를 끌어안는다, 미움받기로 결정하자는 이야기를 하는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므온은 이카흐, 소중하게 취해서 먹여주었다. 그러므로 화를 완성하고 통치하는 자가 되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었다.
이번 년도에는 하누카와 크리스마스가 겹치지 않아서, 하누카를 좀 빨리 했는데, 보통은 겹쳐서 온다. 이 어둠의 절정에 한 아기가 태어나셨는데, 우리 주님이 구유에 태어나셨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짐승들이 가득 차 있는 그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끊임없이 화가 나 있고, 끊임없이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는 짐승과 같은 우리에게 오셔서, 짐승의 머리가 되셨다. 짐승의 화를 통치할 수 있는 자가 되셨다. 그런 한 아기가 지금 이 겨울에 태어나신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요셉의 형통한 자의 표현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더라.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았더라. 감옥의 간수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않았으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것 외에 우리가 더 뭘 원할까? 하나님은 좌측과 우측의 결합을 이미 보여주셨다.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셨다. 그래서 요셉에겐 감옥에 있는 것 조차 형통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떄문이다. 불가능이 없으신 그분이 미움 자체인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것, 천국이 땅에 갇힌 지옥과 함께했다는 것 이상이 있을까?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체가 미움인 것이다. 저 사람이 미운 짓을 해서, 저 친구가 나의 물건을 훔쳐서 미움을 쓴다고 하면서 내 문제를 보지 않고 나를 피해자로 만들고, 두려움이 올라오지만, 그것은 내가 미움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내가 미움 자체인 것을 인정하기 바란다. 그것을 인정할 때, 그 미움을 가지고 놀 수 있다
저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고 아버지께서 한번 미움을 가지고 노는 아버지를 본적이 있다. 아버지께 혼난 적이 있는가? 아버지가 미움을 쓰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미움인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쓸 순 없다. 내가 미움 자체이구나. 집착 자체이구나. 에서이구나라는 것을 인정한 자는 우측과 결합하고, 그것을 통치할 수 있다. 아버지가 미움이라는 카드를 쓰시자, 제 안의 미움이 드러나서, 그 미움이 청산되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났는데, 아버지의 미움의 칼이, 제 마음 속에 미움질하고, 수치떠는 모든 것이 할례되는, 그래서 아버지와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한적이 있다.
미움을 잘 쓰는 자는 미움도 사랑의 한 부분으로 쓸 수 있다. 이렇게 아버지 브레이크가 걸린 그런 아들, 미움의 또 다른 의미는 자기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역할을 못할 때 얼마나 미운가? 딸, 아버지, 아들 역할을 못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그것이 미움인 것이다. 너 미워! 그게 아니라, 내 역할을 못하고, 내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상태, 토탈 비전으로 제자삼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아들의 증거자가 되지 못할 때, 그 자체가 미움인 것이다
우리는 또 미움을 언제 쓰냐면, 집중받기 위해서 쓴다. 관종이라고도 하던데, 집중받기 위해서 미운짓을 한다. 우리의 에고 자체가 미움이란 것을 인정한다면, 요셉처럼 시므온을 소중하게 끌어안을 수 있다
화를 막 내다가 화나지 않는 생명이 되고, 이제는 하나님이 미케쯔에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하고자하시는 일은 화에 갇힌 자를 구출하는 제자가 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랍비가 있었다. 이 랍비는 fund raising을 해서 감옥에 무고하게 갇힌 자들을 구출하는 사역을 하는 랍비였다. 그래서 사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보면 소작농이 많았는데, 제때 땅값을 내지 못하면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죄가 아니라 가난과 약함으로 갇힌 자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랍비가 그 자들을 구해내는 일들을 했는데, 이 일을 하는 랍비 자신이 땅 값을 내지 못해서 감옥에 갇혀버리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 랍비는 갇힌 다음에 간수에게 뇌물을 넣어서 잠시 나를 풀어달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 같으면 왜 뇌물을 쓸까? 너무 추워서? 좀 쉬려고? 이 랍비는 매일 기도하는 시간과 미크베라고 하는 정결 의식을 해야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위해서 뇌물을 써서 간간히 그 기도 시간을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랍비가 간수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뇌물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 이 감옥에서 나갈 것이라고 한다. 어젯밤 꿈을 꿨는데, 이스라엘의 어머니 사라가 꿈에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랍비가 나는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선한 사역을 했는데, 어째서 내가 갇히게 되었습니까? 내가 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사라가 그것은 너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헌신된 사역으로 말미암아 네가 감옥에 갇힌 것이라고 했다.
이게 이해가 되시는가? 고 목사님께서 파킨슨에 걸리셨다. 많은 주의 종이 질병에 걸리면 수근댄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죄를 지었나? 그런데, 정말 수많은 위대한 우리의 영혼으로 사는 많은 영적인 아보트들은, 하영조 목사님도 그렇고, 자신 안에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구원의 사역을 베풀지만, 자신이 갇히게 되는 일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나는 하늘에서 파송된 자가 확실하다. 파킨슨도, 천식도, 관절염도 있다. 파천관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육체에 갇히고, 감옥에 갇히고, 땅의 것에 갇히게 되는 상태에 우리는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제자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결코 우리의 육은 갇히지만, 영혼은 갇히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끊임없이 죽음의 의식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아무것도 파천관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의식의 사역을 하시는 아버지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미움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화의 완성인 것이다. 형제들은 요셉의 긴 스토리를 통해서 계속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도 내가 사는 것이 주 목적인, 이기심, 불신을 처리하고 싶어도 지진이 나는 베이스가 살고 있고, 다른 존재를 탓하고 있는, 일본이 딱 그런 상황이다
일본의 일장기는 빨간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순한 나라같아서 빨강과 파랑이 조화를 이루는데, 일본은 빨강 자체이다. 에서가 에돔의 후예인데, 에돔은 빨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옥 중에 피 지옥이 있더라. 물이 빨갛다. 단독자의 전형적인 아담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갇힌 그들을 구출하라고 미케쯔에서 콜링하고 계신다. 하누카 때 우리 주님은 신약 성경에서 무엇을 보여주시는지 한번 보자
성경에 나사로가 두 명 나오는데, 그 중 한명이 여기 나온다. 병자 나사로, 육에 갇힌 자를 대표하는 나사로가 나오고 있다
요11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갇혀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사랑했고, 여기에 보면 주님이 나사로 때문에 우시는데, 그렇게 연결되고 결합된 사람이 육에 갇히게 된다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주님의 종들이 병들어있다. 혹시 여러분들도 병들어 계신가? 감옥에 갇혀 계신가?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여러분의 갇힌 상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이다. 여러분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광 받으실 것이다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지금 어둠 중의 어둠, 하누카, 이 시즌에 하나님은 나사로를 만나고 계신다. 나사로라는 뜻이 원래는 엘 에제르이다. עזר 에제르,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다. 일장기로 대표되는 에돔은 하나님이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왜 무릎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줄 아는가? 왜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줄 아는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이 필요없고, 이 세상의 것이 나를 도와줄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나사로는 철저하게 주님을 당신이 나의 도움이 되셔야만한다고 말하고 있다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들은 믿으시는가? 우리에게 이 말씀 외에는 소망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사망에 케쯔가 와야한다. 우리의 불신, 원망, 미움에 반드시 케쯔가 와야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사망의 영향력, 죽음의 의식으로부터 우리는 반드시 나와야 한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의 모든 들려오는 소식들은 죽음 뿐이다. 이스라엘 상황은 어떤 희망도 우리에게 주지 못하고, 지금 일본의 상황도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고, 지금 우리 교회의 상황 또한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 그러나 큰 소리로 주님이 부르고 계신다. 나사로야 나와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화로 가득 찬 우리에게, 이제 너는 화나지 않는 생명, 화를 구출하는 자로 거듭나라.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단독자로 살아온 우리에게, 죽은 나사로와 같은 우리에게, 그래서 주님, 당신이 필요하다고 무릎꿇지 않는 우리에게, 나사로야 나와라. 풀어놓아 다니게하라.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이 약한 마음은 절대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마음이 약자의 마음이다
우리가 반려견과 애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약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가난한 마음인 자만이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거한다고 한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무릎꿇을 때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은혜를 주실 수 있다
제가 지난 주 샤밭 때 너무 머리가 아파서 못 나왔는데, 어느새 제가 건강해졌다고 생각하고 살다보니 아픈 자들의 마음을 어느 순간 잊어버렸더라. 제가 집에 누워서 샤밭 말씀을 듣는데, 들리지도, 보이지도, 죽은 나사로의 나흘된 상태처럼 누워있었다. 그때 빛이 비춰졌다. 내가 이렇게 갇힌 것은, 갇힌 자들을 구하기 위함인데, 내가 그것을 어느새 잊어버렸구나. 정말 약한 자들을 위해서 살아야겠다. 가난한 자들, 아픈 자들을 위해서 살아야겠다.
지금 메타버스 안에서 성범죄가 일어나고, 수많은 미운짓, 수치짓을 하고 있는 판이 만들어진 세상에서 약한 마음은 수치스럽다고 다 던져버렸다. 그러나 미움은 아픔이다. 그리고 아픔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미워하지도 않는다 .
이 미케쯔에 이 모든 것을 끝내기 기도한다. 그리고 섬들이 주를 앙망하리라고 일본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사42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섬들이 토라를 앙망하리라. 엊그제 이혜경 교수님이 유대인들의 조국은 어디있가? 말씀하셨다. 단독자인 여러분, 일본의 에고에 무엇을 선포하시겠는가? 우리의 힘으로는 주님을 신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주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요. 그럴 때 주님은 토라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토라를 보게 하시고, 앙망하게 하실 것이다
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우리의 삶에 이제 새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단독자인 우리가 빨간색이었던, 피 지옥에 갇힌 우리가 토라의 빛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토라로 돌아가기 기도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죽은 나사로같은 우리를 자유케하실 것이다.
== 하나님의 그늘 아래 ==
* 기도
나사로야 나오라, 풀어놓아 자유케하라. 우리는 땅의 것, 지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부모가 나를 돌보지 않고 팔아먹었기에, 나의 삶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가득 차 화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에하드의 빛, 하누카의 빛을 완성하기 위해 말구유에 짐승의 머리로 오신 주님. 짐승성에 갇힌 우리를 토라의 빛으로 자유케하여 주시옵소서. 화로 가득 차 있는 우리를, 화나지 않는 생명, 화를 구출하는 그런 생명으로, 자유케할 수 있는 그런 제자로 우리를 기름부어 주소서.
항상 끝내고 싶었습니다. 관계도, 이 삶도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 우리도 미케쯔까지 가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은 미움의 판으로 가득 차 있고, 미움을 참고 눌렀다가 완전히 풀어버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이 미움을 끌어안고, 통치하고, 마음껏 사용할 줄 아는 주님의 진정한 하늘에서 파송된 제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생명과 죽음을 결합시킬 줄 아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일본으로 우리의 마음을 드립니다. 이 단독자를 대표하는 일본을 구원하시고, 구출해주셔서, 진정한 화를 완성하는, 하나되어 이스라엘까지 가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소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주님, 죽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신 그 음성이 내게 들립니다. 갇혀있던 우리를 살리신 주님, 부활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셔서 미움이 아픔이며, 아픔이 사랑인 것을 알게 하소서. 이 빛을 일본에, 열방에 비추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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