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21]늘 반갑게 맞아주던 세 여성 중 한 분이...
평생 나를 사랑해주셨던 할머니, 어머니, 숙모, 이 세 분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세 여인女人, 세 여자女子, 세 여성女性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어쩐지 여인과 여자는 외람된 것같아 아닌 것같고, 그나마 ‘여성’이 맞을 듯하다. 이 세 분을 잊을 수 없는 건, 나만 보면 언제 어느 때든 늘 활짝 반겨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무어라고,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나를 사랑해 준 분들이다. 이 분들 말고, 아직은 92세로 강녕하신 이모 한 분이 더 있다. 세 분은 언제나 따뜻했고, 마지막 남은 여성인 우리 이모, 지금도 따뜻하다. 참말로 고마운 분들이다.
지난 수요일 꿈에 병상에 있는 숙모가 보였는데, 웬일인지 얼굴을 안보여주셨다. 새벽에 서울에 사는 사촌동생한테 문자를 넣더니, “글안해도 위독하시다해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답장이 왔다. 그날 저녁 4남매 가족(손자까지 포함)이 모두 모여 임종실에서 예배를 드렸다한다. 다음날 문병을 가니, 이미 혼수상태로 말도 못하고 눈 뜨는 것도 힘들어 간신히 숨만 쉬셨다. 부은 팔뚝을 부여잡고 울음을 삼켰다. 토요일 오전 11시, “편히 가셨다”는 동생의 전화에 슬퍼 한참을 울었다. 향년 87세(1934년생). 그날 저녁 네 동생들과 오랜만에 얘기를 많이 나눴다. 이별이나 작별이 아닌,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못볼 ‘영별永別(영원한 이별)’은 어쨌든 언제나 슬픈 일이다. 모두 독실한 크리스찬인 동생들은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조금은 담담한 체 하지만,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링크 주소를 클릭하면 예전에 ‘자금마(작은 엄마)’라 불렀던 나의 숙모 이야기가 있다(https://cafe.daum.net/jrsix/h8dk/751).
아무튼, 손孫 귀한 집안(할아버지가 5대 독자임)인데도 유일한 친척인 사촌四寸끼리도 나이 차이도 있어 교류나 소통이 별로 없었던 셈이다. 성장한 조카들에게 ‘니가 누구 아들이냐’부터 당숙, 당숙모, 당고모 호칭을 알려줘야 하는 판이었으니. 영정사진을 보니 참으로 곱다. 참 고우시다. 젊어서는 빼어난 미인이었지만, 생활고에 많이 시달려야 했다. 도시 서민으로 4남매 대학 가르치기가 만만찮은 시절, 자금마는 생활력이 강하셨다. 좁은 집의 방을 나눠 하숙을 치고, 팔북동공단 공장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10여년 동안 메리야쓰 품질 검사작업 등을 했다. 늘 가난했지만 꿋꿋하고 떳떳했으며, 그보다도 누구보다도 일상사에 쿨하셨다. 이런 쿨은 좋은 쿨COOL이다. 농촌에서 평생 뼈빠지게 농사만 짓는 우리 어머니보다 뭔가 더 세련된 듯도 했고, 큰집 조카 일곱을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좋았다.
4년 전, 귀향한 후 전주와 임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지만, 채소(감자, 상추, 가지 등)나 좋아하는 과일(복숭아) 그리고 쌀방아를 찧으면 수시로 달려갔다. 그때마다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나한테 너무나 잘하는 조카”라며 쑥스럽게 자랑이 넘쳐났다. 이제는 갈 곳이 하나 줄었다. 보름 전, 노송동집을 찾으니 아무런 힘이 없어 암것도 드시지 못하면서도 “내 맘 좀 편하게 해달라”며 악착같이 5만원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졌던 작은 엄마. 이제는 어디에서도 다시는 만나뵐 수 없다니, 이처럼 속상한 일이 어디 있을까?
고향에 있으므로 ‘산 일(작업)’을 주선하는 건 당연히 나의 몫. 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기쁜 일이다. 아침 8시부터 포클레인(공3)이 작업을 시작, 삽질인부 2명과 숙부가 누워 계신 옆자리 땅을 팠다. 당신이 누울 곳은 돌판으로 표를 해놓았다. 그 옆엔 6년 전에 돌아가신 숙부가 지금은 육탈肉脫이 되어 계시리라. 기분이 참 묘한 게, 바로 옆 무덤엔 어머니가 누워 계신다. 이곳도 돌판 가리막이 되어 있으리라.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장비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이런 힘든 작업들을 했을까? 지금은 정말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산일’이고 농삿일이고 할 수가 없다.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가족묘지 윗대 할아버지들 봉분이 엉망이 됐다.
어머니 봉분에도 이름모를 잡초가 터를 잡았다. 오는 사월에는 사초莎草를 해드려야겠다. 하관예배를 해드리려 전주 어느 교회에서 10여분이 오셨다. 기독교 의식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관을 하고 유족들이 삽으로 흙을 떠 세 번으로 나눠 뿌려드리고, 장비가 흙을 덮기 시작하자 불과 30여분 사이에 둥그스런 봉분이 만들어졌다. 잔디를 심고 두들겨 단단히 하는 나머지 작업도 30여분. 40여명이 오수의 식당에서 불낙을 들었다. 이윽고 뿔뿔이 흩어지고, 그렇게 작은 어머니를 보내드린 새해 1월 1일. 서울은 41년만에 큰눈이 내렸다지만, 이곳은 비나 눈도 오지 않고 날씨가 좋아 정말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들려온 소식, 셋째 형의 장모님이 수원에서 돌아가셨단다. 휴우-, 내일은 어떻게든 수원에 문상을 가야 한다. 이게 연초부터 무슨 일인가. 바쁘다. 며칠 후엔 전주 이모를 찾아뵈야겠다. 언제나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시던지. 칠십이 내일모레인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모, 이제 나를 사랑해준 가장 고령의 여성이다.
“작은 엄마, 그동안 사랑해줘서 고마웠어요. 이제 만사 다 잊고 저 세상에서 영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