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루스(Palouse)에서의 도전과 응전
박 광 일
팔루스는 사진 모임에서 매년 세 네차례 출사를 가는 곳이다. 팔루스는 미국 아이다호 주 서부와 맞닿은 워싱턴주 동부에 위치한 밀밭 곡창지대이다. 구릉과 평원으로 끝없이 펼쳐진 이 곳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새싹이 돋는 봄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갓 태어난 푸른 밀들이 춤을 추고, 여름이 다가오면 노란 유채꽃들과 푸른 밀들이 축제를 벌이고, 가을엔 밀들이 베어진 대지가 마치 전라의 여인처럼 본래 대지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겨울엔 눈으로 하얗게 덮인 대지는 단순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평온을 전한다. 같은 계절 그리고 같은 시각이라도 습기에 따라 구름 형성이 다르고, 바람에 따라 흐르는 구름모양이 다르고, 또 구름 사이를 뚫고 비추는 햇살에 따라 팔루스의 모습은 같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기에 늘 새롭고, 늘 가고 싶은 곳이다.
지난 12월 30일에 3박 4일 일정으로 팔루스를 찾았다. 평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스텝토 뷰트(Steptoe Butte)에 삼각대를 세우고, 일출을 기다린다. 새벽빛이 대지로 스며드는 그 순간, 장소는 변함없지만, 예년과 같은 계절 그리고 같은 시간임에도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에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겨울임에도 싹이 돋아나 마치 봄처럼 보이지만, 겨울의 바람은 매섭기 그지 없다. 손가락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발은 마치 얼음 위에 서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광경을 또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찬 공기를 들여 마신다. 기쁨이 충만한 아침이다. 추위는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에피소드 1
12월 31일 오후에 스텝토 뷰트에 올라오다가 동행한 선생님이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 같다고 해서 보니 바퀴에 바람이 3분의 1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펑크가 난 것 같다. 아름다운 일몰 촬영을 포기하고 수리점을 가기로 했다. 아뿔싸 오늘이 12월 31일, 현재 시간이 오후 3시 30분이 아닌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근처 모든 타이어 수리점들이 벌써 영업을 종료했다고 나온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여러 군데 해보았지만, 전화를 받은 곳은 없었다. 내일은 1월 1일이라 거의 모든 수리점 뿐만 아니라 상점도 문을 닫는다. 마음이 불안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단 숙소 근처의 주유소에서 바퀴에 공기를 주입하면서, 실오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코스코가 5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나온다. 현재 시간은 3시 50분. 한 시간가량 떨어진 (약 85km)의 Clarkston 코스트코에 전화했다. 바로 출발하여 구글의 예상대로 가면 영업종료 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다. 그렇지만 5시는 모든 업무를 종료하는 시간이다. 타이어센터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슈퍼바이저에게 물어본다고 기다리라고 한다. 다행히 와도 좋다고 한다. 휴 ~~. 이렇게 감사한 일이.
펑크를 수리하는데 30분 가량 시간이 걸렸다. 코스트코에서 타이어를 장착했기 때문에 수리비를 받지 않았다. 숙소를 구글맵으로 누르고 출발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에 안개까지 심해서 시야가 30미터 정도 밖에 확보가 안된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운전을 한다. 고속도로임에도 속도를 5~60km 정도로 낮추고 천천히 주행한다. 그런데 오다가 구글맵이 좌회전을 하란다. 다른 차들은 가지 않지만, 구글맵의 지시대로 갔더니, 길도 좁고 포장이 안 된 산길이다. 금방 큰길과 연결될 줄 알았다. 2~30분 정도를 시속 20km 정도로 살살 달릴 수 밖에 없다. 돌아갈 걸 그랬다. 식은땀이 나는 운전이었다. 왜 구글맵이 좋은 길을 놔두고 엉뚱하게 안내할까?
밴쿠버에 돌아온 후 포트무디를 갈 일이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을 아는데도 구글맵을 켜고 따라갔다. 구불구불한 산길로 안내한다. 집에 도착하고 뭔가 이상하다 싶어 구글맵 세팅을 열어보았다. 연료 절감으로 세팅이 되어 있다. 아마 그 이유로 팔루스에서도 산길로 구글이 안내했던 것 같다.
에피소드 2
팔루스 일부의 농토 길은 11월부터 3월까지 출입을 제한한다. 대개는 들어갈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밀가루 같은 먼지로 된 흙길은 물기만 있으면, 미끄럽기 그지없고, 자동차 바퀴가 운전대의 조종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겨울철에 일어나면 위험할 뿐만 아니라, 구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곳곳에 경고판이 붙어있다. 홀로 있는 나무를 찍으러 가는 길은 출입 금지 경고판이 없어서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니 바퀴가 운전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기서 차를 돌릴 공간도 없었다. 그냥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돌리기로 했다. 언덕을 내려갈 때는 바퀴가 비눗물에 미끄러지듯 굴러간다. 여러 생각이 든다. 견인차를 불러야 하나, 차를 두고 가고 나중에 길이 마를 때 가지러 와야 하나, 어떻게 숙소까지 가야하나 등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구상들이 떠돈다. 일단 나무를 촬영하고,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보기로 했다. 이 길은 어느 정도 물이 빠진 상태라 별로 미끄럽지 않다. 오호, 이렇게 갈 수 있는데, 괜한 걱정을 했구나. 그런데 오 분 정도 달리다 보니, 아뿔싸 길을 막아놨다. 돌아가야 한다. 오던 언덕 길로 돌어가야 한다. 동행한 선생님이 운전하고, 내가 조수석에 앉았다. 1단 기어를 넣고 언덕을 살살 올라온다. 차가 바퀴가 헛돌며 옆으로 미끄러진다. 왼쪽으로 잘못 가면 언덕에서 떨어진다. 식은땀이 흐른다. 자동차의 엑스 모드를 켠다. 좀 더 마찰력이 생긴다. 물이 흘러간 패인 곳을 피해서 언덕 오른 쪽에 바짝 붙어 조금씩 전진한다. 다행히 바퀴가 헛도는 곳은 없었다. 드디어 가장 미끄러운 구간을 빠져 나왔다. 그나마 사륜구동이고 엑스 모드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동안 다녔던 길 중에 미세먼지가 많았던 길들은 경고판이 없더라도, 이젠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여행 둘째 날은 안개가 너무 짙어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아 촬영을 포기해야 했고, 더욱이 바퀴에 못이 박혀 모든 여행 일정을 진행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고, 구글맵의 잘못된 안내로 산길을 초긴장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야간 운전을 하고, 흙길에 들어가서 견인해야 하는가 걱정해야 했던 여행. 그런데 셋째 날은 안개가 어느 정도 걷히며 시야가 확보되고, 아침햇살이 안개를 뚫고 대지를 살포시 비추며, 처음 경험하는 특별한 사진을 찍게 되니, 겪었던 어려움들은 큰 기쁨을 위한 것이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토인비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란 말이 떠오르는 여행이었다.
첫댓글 이번 주(3/22)조선일보에 발표합니다.
비누물 -> 비눗물
예 알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