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서울 둘레길이라도 한번 나서면 짤막한 거리가 아니라 비교적 장거리 보행을 하기 때문에 걸을 때에도 대개 경등산화를 신고 걷곤 한다. 서울 둘레길 뿐 아니라 북한산 둘레길을 비롯한 여타 둘레길도 마찬가지다. 이번 서울 둘레길 가을 걷기에도 물론 그랬다. 둘레길에는 산 길도 있고 마을길도 있으며 또한 안양천이나 평창 마을길처럼 콘트리트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데, 내게는 이러한 둘레길의 여러 상황에도 잘 걸울 수 있는 특별한 “낡은 등산화”가 있다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이 등산화를 산 것은 2016년쯤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 한양 도성길과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이보다 조금 높은 산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더불어 등산화의 필요성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등산에 대해 무지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등산화는 더더욱 무지한 상황이었다. 또한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를 통한 사전 리뷰로 전략적으로 물건을 구매할 만한 정성이나 노력 조차도 하지 않는 쌩초보 시절이었다. 그때까지의 등산 구력이라고 할 만한 것은 어려서 일년에 한 두어 번, 운동화 신고 정릉 청수장에서 출발 보국문으로 올라 산성을 따라 가다가 용암문에서 하산하여 도선사 및 백운천을 따라 걷던 일이 전부였고 그리고 성인이 되어 단체로 청계산 옥녀봉이나 광교산 형제봉 정도 오른 것이 전부였다. 산 정상은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동네 뒷산 수준..
암튼 어느 이름 없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여름 둘레길 걷기에 좋을 것 같은 아쿠아 트레킹 신발을 찾다가 옆에 광고로 보이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브랜드도 별로 신통치 않은 등산화가 단지 “편할 것 같고 튼튼한 것 같아서” 구매한 것이 등산화 첫 구매였고 이 등산화가 바로 전술 했던 낡은 등산화다.
그 당시 등산화의 종류도 몰랐고, 어느 상황에서 무슨 신발을 신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군화처럼어느 산이 되었건 이 신발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 등산화 하나만을 신고 다녔다. 처음에는 무척 무겁고 불편하게 느껴져서 이런 따위의 신발을 신고 어떻게 산에 오르나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느낌은 가벼워졌고 발과 등산화의 정합도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끈을 풀고 조이고 할 필요 없는 다이얼형이어서 근본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느슨해지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 나중에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했고 또한 광청종주 산행하러 가는 이른 아침 신분당선 첫 전철 안에서 다이얼 조임이 풀리는 고장이 나서 강남역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청계산역에서 도로 집으로 “빠꾸”하여 귀가했던 일 등 – 불편함 보다는 산행 중간 휴식 시간에 빠르고 쉽게 등산화를 신고 벗을 수 있는 장점이 큰 등산화였다.
그렇지만 여차여차 저차저차한 이유로 새로운 등산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가곡 선생님 등 전문가선생님들의 말씀 덕분에 현재는 끈 타입의 등산화로 마이그레이션 중이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길이 잘 들은” 등산화의 가장 큰 장점은 지금은 실내화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길이 잘 들어서 발이 편하여 장거리 종주 산행 또는 장거리 도보가 필요한 경우에 절대 안성맞춤인데, 그 결과 거리가 조금 염려스러운 종주산행에는 여지없이 이 등산화가 소환되었다. 예를 들면 지리산 화대종주, 성중 종주 그리고 설악산 서북능선, 공룡능선 그리고 덕유산 69종주, 불수사도북 등이다.
그러다 보니, 등산화는 고연령인데 자주 소환되다 보니 가죽은 너덜너덜해져서 점점 넝마 수준이 되어 갔고 그 결과 역설적으로 등산화는 더욱 가볍고 편해졌다. 뭐랄까? 이제는 실내화를 넘어 거의 슬리퍼 느낌이랄까? 그러니 장거리가 아니더라도 더 자주 소환되었고 예를 들면 한양도성 순성길 걷기나 운예종주 그리고 이번의 서울 둘레길 완주에도 당연히 동원 아니 소환되었다.
그런데….
서울 둘레길 가을 걷기 완주를 마치고 귀가하는 전철 속에서 언뜻 등산화가 보였는데, 세상에… 양쪽 신발 모두 아웃솔이 앞 코 부분과 뒷부분만 간신히 몸체에 붙어있고 양 옆 쪽으로는 거의 다 헤벌레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만일 좀 더 걸었더라면 바닥이 몸체와 거의 분리될 지경이랄까? 산행을 하다 보면 가끔 등산화 아웃솔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는데 잘못하면 거의 그 지경까지 갈 뻔했다. 그런데 신발 한쪽만 그런 상황이면 어떻게 다시 수리해볼까? 싶은 마음도 들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등산화 양쪽이 모두 동일한 상황이어서, 이건 수명이 다 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보내 줘야 할 시간임을 직감하게 되었고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신발에 이력을 기록할 수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은 요상한 생각도 해보았다. 새로운 상품 아이디어? 암튼 짧지 않고 길지 않은 시간 고생 많았던 신발이었다.
그래서 일요일인 어제 그렇게 등산화와 이별을 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으니, 이제 다른 등산화를 이 등산화처럼 “슬리퍼” 수준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리고 오늘…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비가 왔다. 그리고 볼 일. 그래서 가방 속에 접이 우산을 넣었다. 강우량을보니 장우산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우산을 펴고 접고 하는 일을 반복했고,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에서 내려 우산을 펴는데 우산 한쪽이 푹 꺼진다. 어랏~ 뭔 일이야? 그리고 우산 속을 살펴보니 우산 살 두개가 완전히 부러져 있었다. 앗 이럴 수가..
이 우산은 몇 해전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중고 우산이다. 어느 날, 통근 버스에 승차했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하차 할 때는 차 밖으로 몹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우산을 갖고 오지 않은 날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 조금 난감해하고 있는 찰나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버스 기사님께서 남은 우산이라고 건내 주셨다. 다행이었다. 나중에 꼭 돌려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다른 우산 많다고 그냥 쓰라고 하신다. 그리고 새 우산은 아니라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름 실하고 삼단 접이식 우산이라 접으면 길이가 짧아져 가방에 쏙 넣고 다니기 좋았다 그 이후로 가방 속에 항상 넣고 다니는 우산이 되었다..
그런데 이 우산이 진짜 빛을 발한 것은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두 해전 지리산 종주 때였다. 그날은 봄철 산불예방 기간이 끝나고 지리산 종주로가 열리는 날인데 마침 비가 철철 내렸다. 평소 우중 산행은 체질이 아니라서 당연히 종주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당시 무슨 필이 돋았는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성중 종주를 “감행” 했었다. 그리고 그때 손에 들었던 우산이 바로 이 우산이었다. 비는 버스가 함양 지역에 들어설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고 성삼재에 도착했을 때에는 비가 제법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른 새벽 3시, 햠양 지리산고속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산을 펼쳐야 했고 우산은 세석대피소까지 계속 들어야했다. 세석 대피소부터는 낮아진 기온 때문에 비 대신 상고대와 눈발로 바뀌어 우산 대신 우비로 바꾸어 천왕봉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성삼재부터 세석까지 온전하게 우산을 들로 간 것은 아니었다. 토끼봉과 명선봉을 지나 연하천대피소에 근처에 도착하면 나무 계단길을 걷게 되는데, 이 데크로가 비 때문에 몹시 미끄러웠다. 그래서 연하천대피소 조금 못미친 지점에서 한번 미끈덩 했는데 이때 손에 잡고 있는 우산이 바닥과 한번 쿵 접족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만 우산 살 두개가 찌그러졌다. 그 사건 후로 이 지점을 지나게 될 때에는 항상 비오는 날 넘어진 생각이 나곤한다.
아무튼 젠장~ 이럴 수가… 나름 아끼던 우산이었는데 우산이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우산 살은 완전히 부러지지는 않고 꺽인 정도였는데, 힘을 주어 조금 반듯하게 펴니 우산을 접고 펴는데 지장도 없었고 우산의 본기능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중도에 이런 변고(!)가 생기면 걷기 힘들어질 뿐더러 심적으로도 부담을 받는데, 어쨌든 다시 우산이 살아나서 다행이었다.
결과적으로, 힘든 날씨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산 덕이었는지 종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종주도 종주이지만, 이 우산은 지리산을 다녀온 – 단순히 가방 속의 우산이 아닌 - 특별한 의미의 우산이 되었고, 이 우산 덕에 우중산행에 대한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 기억할 수 없는 여러 번의 우중 산행에 이 우산이 동행하였고 비 때문에 특별히 고생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한 우산이었다.
그랬던 우산이었는데 그 우산이 결국 오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고, 구부러졌던 두 개의 우산 살이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부러진 것이다. 그런데 전술한 등산화와 달리 우산은 고쳐야 할지 아니면 그냥 폐기 처분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일단 구청 소식지 어디에선가 우산 무료 수리 서비스 – 부품값은 유료 - 광고를 언뜻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이 정도 우산살 부러진 것 고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우산이 대체불가라면 모를까 이제는 집에 그보다 훨씬 더 작고 견고한 여분의 접이식 우산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고쳐야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관록과 전통 유지를 위한 수리 차원이락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이 스스로 궁금할 따름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비 오는 2021년 5월 1일 지리산 종주를 함께 했던 등산화와 우산이 어쩌면 이렇게 우연히 하루 차이를 두고 장렬하게 전사를 하는지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조금 섬뜩하다고나 할까? 과연 사물에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雨요일이다…………..###
[아래는 2021년 5월 1일 지리산 종주(성삼재-중산리) 영상 소환]
비오는 성삼재 도착
미끈덩하여 우산 살 두개가 부러진 지점
비도 오고 운무 속의 연하천 대피소
비에 젖은 데크 계단
세석대피소부터 보이기 사작하는 상고대
겨울 같은 느낌?
제석봉으로 향하는 길
이건 봄이 아닌 겨울 풍경
하얀 세상.... 이날 설악산에서 갑자기 낮아진 기온과 눈 때문에 동사한 산객이 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아래 중산리는 딴 세상~..
햇볕 때문에 양산을 바쳐든 산객도 있고.....
첫댓글 비내리는 아침입니다. 연이틀 아직 현관을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 먼저 등산화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의 산줄기를 걸으며 나와 함께했던 등산화는 가죽으로 된 등산화부터 모두 다섯 켤레가 K2였는데 5년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찍어 놓은 사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의 산들을 걷기 시작하면서는 트랑고를 많이 신었지요. 지금도 K2와 트랑고를 번가라가며 신고 있습니다
요즘이야 산행을 할 때 우산을 많이 이용하지만 예전 장기 종주 때는 우의가 필수품으로 늘 배낭에 들어있지요. 하루종일 8시간을 비맞으며 산줄기를 걸었던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이번 주는 걷지 못할 한 주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을 진입 장마인 듯 싶네요. 계속 비가 내리고, 파란 하늘이 잠시 보이다가도 또 비가…. 어제는 폭우도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 비가 그치면 본격적으로 가을이 올 듯 싶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더워서 난리였는데, 이제는 밤에 창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찬 바람이 붑니다. 새벽에 잠시 나갔다 왔는데 가디건을 입지 않음을 후회했을 정도입니다.
앞으로 등산화 (또는 경등산화) 살 일이 있으면 목이 좀 짧은 류를 살까 싶습니다. 둘레길 다니는데는 그렇게 거창할 필요도 없고요. 날렵하고 튼튼하기만 하면 될 듯 싶습니다.
내일이 8월의 마지막 날. 지난 달 올림픽 공원에서 뵈었었는데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