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끼리 대선에서 싸우는 것 아닌가"
서울대 법대 82학번이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성공한 인사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화제의 인물이 많아 '유난스러운 학번'이란 의미다. 이들은 법대 졸업생이 몰리는 법조계나 행정부, 정치권뿐 아니라 학계, 재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 그 사람도 법대야?"라는 말을 자주 듣는 '서울법대 82학번'은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2011년 30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였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썼다. 국내 최대의 인터넷 기업인 네이버 김상헌 대표, 나 의원, 원 지사 등과 함께 새누리당 '서울법대 82학번 트리오'로 불리는 조해진 의원(밀양·창녕), '강철서신' 저자로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북한 인권 운동가로 변신한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등도 동기다.
82학번은 대개 1963년생이다. 베이비붐 세대(55~63년생)의 막내이자 386(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세대의 맏형격이다. 이제 50줄을 넘겼으니 '586'이 됐다. 초등학교 때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고등학교 1·2학년 때 10·26과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82학번 법대 입학 정원은 364명. 지난해 나온 82학번 동기 주소록을 보면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는 역시 법조계로 183명이다. 법원에 45명, 검찰 17명, 변호사 120명, 변리사 1명 등이다. 학계는 본교 교수 5명을 포함해 33명이다. 경제계 등에는 75명이 진출했다. 이어 행정부에 11명, 언론인 8명, 정치인 4명 등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 55명 중 5명이 서울대 82학번이다. 대개 학번별로 1~2명꼴인데, 5명은 역대 학번 중 가장 많은 숫자다. 반면 84, 85, 87학번은 한 명도 없다. 로스쿨 원장도 82학번인 이원우 교수가 맡고 있다.
법조계를 보면 10대 로펌 중 하나로 꼽히는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가 82학번인 양영태 변호사다. 한승 서울고법 부장판사(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사법 개혁 논의를 주도해온 연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장을 지낸 오재성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민변 회장을 지낸 장주영 법무법인 상록 대표변호사 등도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차동언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삼성가(家) 유산 소송에서 이맹희씨 변호를 맡았으며, 박교선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담배 소송에서 KT&G 측을 대리해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준승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사시는 대개 졸업 전후 1~2년 사이 합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학창 시절 운동권이었던 동기 20여명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90년대 초반 법조계에 진출했다"고 했다.
행정부에는 청와대의 최상목 경제금융비서관, 송언석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최병환 총리실 사회조정실장, 박수영 경기도 행정1부지사 등이 있다.
서울 법대 82학번이 법조계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정원이 늘어난 데다 우수 학생들이 대거 몰린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서울대는 졸업 정원의 130%를 뽑았다. 81학번 때는 본고사 폐지와 졸업정원제라는 갑작스러운 입시제도 변경으로 서울대에 대규모 미달 사태가 발생했는데, 학교 측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82학번부터 1, 2, 3지망제를 도입했다. 당시 법대 쏠림 현상이 심해 최상위권 학생들은 대개 1지망으로 서울 법대를 지원했고, 이를 정점으로 사실상 학교·학과별 '성적 줄세우기'와 우수 학생 '싹쓸이'가 이루어졌다.
이후동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우리 학번은 학생 수가 갑자기 늘어나 각 분야에서 먼저 자리를 잡는 선점(先占) 우위 효과를 누린 측면이 있다"며 "법대생은 대개 사시 준비하는 게 관례였는데, 이때부터 관심도 다양해져 행정고시파도 늘고 일반 회사로 진출하는 동기들도 많아졌다"고 했다.
- 서울 법대 82학번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최종고 교수(왼쪽에서 여섯째)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나경원 의원(오른쪽에서 셋째)과 김난도 교수(앞줄 왼쪽)도 보인다.
◇"판검사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흔들려"
조해진 의원은 "법대생은 으레 사시 패스해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기존 패러다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강의실에 학생들을 감시하는 사복 경찰이 상주하고 데모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어느 학번보다 절실하게 던진 학번이었다"며 "열병 앓듯 어떤 가치,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법조 이외에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동기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오영상 법무법인 에이스 변호사는 "교문을 들어설 때 경찰이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가방을 뒤지고, 군사훈련을 하려고 문무대와 전방부대에 입소하는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만 하던 학생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며 "학생운동을 통한 사회 참여와 고시 준비 중 선택을 강요받는 분위기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원희룡 지사는 대학입학학력고사와 사법시험을 모두 수석 합격해 '공신(공부의 신)'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정작 대학은 학생운동으로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8년 만에 졸업했다. 그는 "교수님들이 데모하지 말라고 말리곤 했다"며 "하지만 시골(제주도)에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학에 1등으로 들어갔는데, 나에게 다가온 것은 군부 정권의 억압이었다"고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육법당(陸法黨)'이 욕을 먹었다. '육법당'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육사 출신과 서울 법대 출신 율사들을 고위 공직에 많이 임명하면서 나온 말로 이들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의 목소리였다. 법대 강의동 옆 '정의의 종' 현판에 쓰여 있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문구는 학생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김난도 교수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공부로는 법학보다 행정학이 낫겠다는 판단에 따라 행정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나중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소비자 행태를 연구하는 소비자학과 교수가 되었다"며 "박세일 교수도 법경제학이란 새로운 분야를 소개해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고 했다.
나 의원도 판사로 활동하다가 2002년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학창 시절 김재호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와 소문난 캠퍼스 커플(CC)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세심'에서 "서울대 법대생들이 재미삼아 나중에 절대로 정치할 것 같지 않은 학생을 뽑으라면 항상 내가 1등이었다"며 "그런 내가 예상을 뒤집고 정치인이 되었으니 당시 친구들이 보기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김상헌 네이버 대표는 판사 생활 3년 만에 LG그룹 회장실 상임 변호사로 자리를 옮겨 당시 33세로 LG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고 42세에 역시 최연소 부사장에 올랐다. 2008년 네이버으로 자리를 옮겨 이듬해 대표로 취임했다. 그는 "틀에 박힌 일보다 항상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양영철 경성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나 미학(김세중 서울대 미학과 강사) 분야로 진출한 사람도 있다.
◇목소리 크고 개성 강한 '똥파리'
82학번들의 캠퍼스 생활은 어땠을까. 이들은 "개성 강한 친구들이 많아 역동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며 "단결이 잘 되는 학번"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국 교수는 "82학번은 81이나 83학번보다 목소리가 크고 개성이 강했다. 82학번은 중구난방(衆口難防), 백화쟁명(百花爭鳴)이었다. 81, 83학번들은 우리를 보고 '82학번들은 왜 유독 시끄럽고 '똥파리'같이 몰려다니느냐'고 했다"고 전했다. '똥파리'는 82학번을 일컫는 별칭이다. 82라는 발음과 비슷하고 파리 같이 숫자가 많아 집회 장소, 술집 등 어디 가나 발에 챈다는 의미이다.
김난도 교수는 "1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반 60명의 주소록만 챙긴 채 차비만 들고 20여일 전국 여행을 다녀왔다"며 "부산에서는 조국 집에서, 제주도에서는 희룡이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회고했다.
이원우 로스쿨 원장은 "난도는 노래도 잘하고 쾌활한 성격의 분위기 메이커여서 과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단골로 사회를 보았다"며 "희룡이는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전에는 노트 필기를 잘해 중간·기말고사를 앞두고 노트가 돌았다"고 했다. 김상헌 네이버 대표는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서로 격려해주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것이 무슨 일을 하든 힘을 북돋우는 상승 작용을 한 것 같다"고 했다.
1982년에는 법대 입학 여학생 수가 처음으로 10명을 넘기면서 여학생회가 정식으로 발족됐다. 법대 여학생회 회장을 맡았던 이림 변호사는 "여학생실 한쪽에는 '사랑방'이라는 공동 노트를 만들어 개인의 감상문이나 시, 수필, 다른 이에게 보내는 글 등을 실어 서로의 고민도 이해하고 우정도 나누었다"고 했다.
유병태 KB부동산신탁 부장은 "고시 공부를 하건 학생운동을 하건 군사 정권에 대한 거부나 민주화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은 달라도 서로 존중해주는 분위기였다"며 "졸업 후에도 연말 모임은 물론 등산·골프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고 했다.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82학번은 어려운 시대를 같이 지낸 경험 때문인지 서로 도와주고 밀어주는 결속력이 강하고, 자신이 목표로 한 것을 이루려는 성취욕도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서울 법대의 역사를 담은 '서울법대시대'를 쓴 최종고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4~87년 법대 학생담당학장보를 맡았을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데모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학생들이 총장이 보기 싫다고 졸업식에서도 돌아앉아 버리던 때였다"며 "그렇다고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는 건 아니고, 돌이켜보면 지금 대학에서는 찾기 힘든 활력이 넘쳤던 시절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