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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대공황(大恐慌 | The Great Depression)
이 시기 미국은 Great Depression Era, 즉 대공황 시대라고 부른다.
미국 대공황 시대의 시기는 1929년 ~ 1939년이지만, 미국이 태평양 전쟁으로 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까지를 기준점으로 1929년 ~ 1941년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미국의 경우에는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와 허버트 후버 정부에 걸쳐 11년간
재무장관직을 지냈던 앤드루 맬런은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을때 “주식을 청산하고, 기업을 청산하고,
노동자를 청산하고, 농민을 청산하라”는 식으로 기업이나 서민들을 구제하기보다는 구조조정과
균형재정을 우선시하고 투자의 책임은 엄연히 개인에게 있으므로 국가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일단 경제 거품을 빼고 빚투와 영끌 열풍을 막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이후 디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농작물은 썩고 있는데 서민들은 땡전 한 푼 없어서
음식을 사지 못하는 결과만을 초래했고 그 상황이 몇 년씩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맬런은 기업인으로써는 유능했고 1920년대 재무부 장관으로 대공황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많이 오른 세금을 내리는 감세 정책 등을
시행하여 유능한 관료라는 평도 듣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거품경제로 이어졌다는 것이 문제였고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앤드류 맬런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드러내면서 빛이 바래게 된다.
허버트 후버는 뒤늦게 앤드루 맬런을 해임시키며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이미 수습하기에
때가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후버는 말년에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나의 정적들은
내가 혼자서 전 세계적인 대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환상적 지성과 경제적 위력을 지녔다고
칭송했다.'고 자학하기도 했다.
사실 대공황은 후버보다도 전임자였던 쿨리지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후버 역시 공황이 터졌음에도 뒷수습을 못한 책임은 있지만. 이처럼 미국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입혀서 대공황 이후 약 20여 년간 미국 정계는 민주당이 독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미국 내에서도 대공황의 여파에서 자유로운 지역은 있었다.
바로 플로리다다. 왜 이 지역이 왜 대공황에서 자유로웠냐면 1925년과 1926년에 걸쳐
부동산 값이 폭락하고 허리케인이 닥치면서 붕괴되어 빚투로 과대평가된 자산을 샀던
사람들이 다 망하고 정상적인 가격에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거품이 다 빠져서 대공황에도
자산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역설적으로 보면 남들 다 겪는 대공황을 1926년부터
3년이나 일찍 시작했으므로 좋은 게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이후 1932년 대선에서 당시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되고 지금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뉴딜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뉴딜 정책은 루스벨트의 집권 1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였고, 빈민층들이 루스벨트의 정책에
열렬한 호응을 나타내며그의 재선에도 도움을 준다.
다만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재선도 여유 있게 쟁취했지만 집권 2기 초반에 맞닥뜨린
불황으로 인해 아쉬운 점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학자 간에도 의견이 갈리는데 일단 상대적으로 불황이 왔다는 거지
절대치로 보면 대공황에 비할 수준은 아니라 일시적 현상 정도로 보는 견해도 있고 1938년
불황은 연방정부가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당시에도 반대가 심하던 의회 내
재정긴축론자들과 타협하면서 재정 지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폴 크루그먼의 견해도 있다.
이 논리대로면 이때의 불황은 뉴딜이 불황을 끝내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뉴딜의 후퇴가 오히려 새로운 불황을 가져왔다는 것인 셈.
그러나 뉴딜과 루즈벨트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는데 이를 완벽히 해결해 준 게 제2차 세계 대전이다.
침략 전쟁을 당하자 분노한 전국민이 정부의 정책에 찬성했으며 모든 성인 남성과 여성은 군대와
군수공장으로 가 실업률 1%를 달성했다. 또 전쟁 때문에 무기를 만들 여력이 없는 유럽
국가들은 미국 무기를 돈 되는 대로 사들였고 이는 미국이 금과 달러가 넘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경제와 다른 외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 미국은 또다시 고립주의와 간섭주의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유럽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면 결국 미국에도 악영향이 온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영국을 돕기 위해 막대한 물자를 수송해 줬으나 미 의회의 강력한 견제로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본격적으로 전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 너머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 대열에 합류한 일본이 제국주의 야망과 이로 인한
무분별한 영토 확장을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열받은
미국은 석유 수출을 끊어버리겠다고 일본을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을 한번 세게 치고 협상테이블에 불러오려고 진주만 공습을 실행하여
미국 상대로 전쟁을 걸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최대의 성공작이자, 이후 패망의 확실한
기초를 다진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크게 격분했으며, 그 분노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것임을 일본은 끝끝내 몰랐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전후 질서를 바로잡아 초강대국이 되어 전 세계가 미국의
달러와 금만 사용하게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위대한 50년대와 지금의 미국이 이뤄졌다.
대공황 이후 주류 경제학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
사상을 적용한 케인스주의가 뉴딜에 적용되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뉴딜 정책은
케인스주의와 직접적 연관은 적은 편이었다.
각자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케인스를 직접 만났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수요 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그는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겠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허나 FDR은 균형재정으론 대공황을 돌파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후 균형재정
목표를 후퇴하면서 뉴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 케인즈가 몇 차례 자문을 해 주기도 했다고.
뉴딜 정책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 비로소 현재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사회 보장 제도'가 도입되었다(1933년).
농민들의 경우는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좀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
중서부를 휩쓴 몇 년간의 가뭄이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평원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의 황무지를 특별히 더스트 볼라고 부른다) 수많은 농민이 빈민이 되어 그나마 날씨 좋은
서부 해안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 소설로 분노의 포도가 유명하다.
1차 대전의 영향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때 대공황이 터졌기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20세기 영국의 가장 크고 가장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기록되었다.
1930년대 초기 국제무역은 위축되고 중공업 생산량은 3분의 1로 떨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실업률이 70%, 실업자는 350만 명에 이르렀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의 산업 및 광업 지역이었다.
때마침 노동당과 자유당이 연합해서 집권하였으나 막상 노동당은 균형정책 유지를 기반으로 하는
구시대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며 내부갈등으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노동당과 전국노동당으로
분당되었고, 이후 보수당과 전국노동당, 자유당이 연립정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긴축정책을 유지하는 선에서 경제를 관리하려했기 때문에 경제가 빨리 회복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은 프랑스처럼 자국의 식민지를 통해 대공황을 해결하려 했고 더더욱
식민지를 탄압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하여 지속적으로 군비를 축소하였고 결국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다 자신들도 맞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를 다 포기하게 되었다. 이는 아래의 프랑스도 동일하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입은 편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면서 1920년대 내내 노동력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경제 대공황기에 들어서도 대량해고가 일어나는 일만큼은 피해서 실업률이 5% 안밖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국토가 전쟁터가 되어 경제 상황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거품이 덜 형성되어 그만큼 자산가치 폭락도 덜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미국과 독일, 소련이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가
성장할 동안 프랑스는 여전히 경제가 침체되는 형국이 되었으며 물가상승 문제는 여전하였다.
돈이 없기에 독일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하여 다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영국처럼 미국의 마셜 플랜 원조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5.4. 독일국
독일 제국은 1차 대전이 끝난 후 협상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했으며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돈을 마구 찍어내다 보니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의 수렁에서 1920년대
중후반에 간신히 빠져나온 뒤 회복하던 경제가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으로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보다 일시적으로는 실업률도 훨씬 높아지고 사회가 입은 타격도 더 컸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정치극단주의가 팽배해졌고 '전쟁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젖은 독일인들이 차츰 극단주의적으로 변하며 타국에 대한 증오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나치당이었다.
나치당은 대공황으로 이득을 무척 보았는데 대공황 이전 나치는 뮌헨 폭동 실패로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독일인들의 눈은 공산당과 나치당으로 몰렸고 1928년에 12석이었던
나치당은 1930년 104석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1932년까지 나치당은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지 못했고 히틀러의 승승장구는
정치적으로 이용해 보려는 프란츠 폰 파펜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의 바이마르 공화국
우파들과 복고주의자들이 정권을 위해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고자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부총리로 임명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나치당의 지지율은 30~40%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공산당과 사민당을 무력화시키고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활용해 수권법을 통과시켰고
나치당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공산당과 사민당을 없애 버렸다.
이후 당내 과격 좌파 세력이었던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 그리고 나치당을 계속해서 자신들의 통제권에
넣으려고 하며 사사건건 자신에 반대하던 중앙당 복고주의자들을 장검의 밤을 통해 제거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안정화시킨 후 얄마르 샤흐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했고 샤흐트는 각종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입안했다.
그 결과 실업자들은 알바라도 얻어 먹고 살 수 있게 됨에 따라 길거리에 넘쳐났던 노숙자들은 사라졌고
중산층도 회복되자 자산가치 하락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면서 경제규모도 회복되었다.
집권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에 대한 뚜렷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국민들은 점차 히틀러가
국가 기강을 다져나가고 국가계획적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를 되살리자 히틀러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이후 벌어질 참극은 예고되어 있었다.
나치 자체가 원래 호전적이었지만 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많다. 당장 아우토반 구축 등 막대한 정부 지출 대부분이 빚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뭐라도 외부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또 이 와중에 재무장을 명목으로 군비지출을 크게 늘린 결과 1930년대 후반 들어서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유 중 하나가 히틀러가 재정위기를 전쟁을 통한 약탈과
채권국들의 붕괴, 점령지들의 식민화 등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특히 침략전쟁을 하자마자 1순위로 한 것이 금고를 털어서 금을 빼앗는 것이었다.
얄마르 샤흐트는 재정난을 군비를 적정 수준에서 유지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1936년부턴
이미 히틀러와 독일 경제를 본격적으로 군사화하던 4개년 계획의 책임자인 괴링 등과 갈등을
벌였으며 결국 중앙은행 총재직에서 1939년에 잘리고 1943년 장관직에서도 해임당한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히틀러가 국가 내의 반대파들에 무자비한 보복을 할 당시
샤흐트는 체포된 후 라펜스브뤼크 강제수용소,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등을 전전하다
미군이 강제수용소를 점령하며 풀려났다.
세계 대공황의 얼마 안 되는 예외는 당시 신생 국가이자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이었다.
1928년에 이미 1차 대전 이전의 러시아 제국의 경제 규모를 따라잡은 소련은 성장을 계속했으며
1930년대에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경이적이었다.
이는 레닌과 부하린의 신경제정책을 통해 준비된 경제 구조, 스탈린의 끔찍하리만치 가혹하나 결과는
효과적이었던 5개년 계획과 더불어 20세기 초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미국-영국-프랑스 이하
연합국 세력이 국제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소련을 고립시킴으로써 소련 경제는 자력갱생의 구도가
되었고 대공황의 영향도 덜 받을 수 있었다는 평도 있다.
어쨌든 그 결과 낙후한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의 국체를 이어받았음에도 소련은 인민들의 영혼까지
끌어모아 이를 중공업에 투자하여 20여년 만에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받은 러시아 제국의
채무를 이어받은 소련이 홀로 달린 결과 불과 15년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소련의 이러한 성공은 세계 각지에서 소련을 추종하는 사회주의 혁명가와 공산주의 단체들이
등장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당시 중공업 정책 같은 것은 만주국 등이 모방하기도 했다.
물론 서민층의 삶의 질이 그만큼 빨리 향상되지는 않았고, 1933년도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벌어지면서 수백만의 농민과 유목민들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국가들이 혈전을 벌일 때 유럽에 무기를 팔면서 돈을 번 결과
중국 무역을 독점하여 나리킨(成金)이라는 벼락부자가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전 종결 후 다시 유럽 국가들이 무역 전쟁에 뛰어들면서 쌀 소동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공업화로 노동자들이 크게 늘었으나 주요 공업국들이 대전기의 폐허에서
일어나자 대전기에 크게 투자한 조선업(造船), 철강업 등 중공업이 경쟁력이 딸리게 되어 수출이
지지부진해졌고 이로 인해 노동 쟁의가 빈발함과 함께 면사 주 수출시장이던 중국이 일본의
제국주의 행보를 경계하면서 일본 상품 배척 운동으로 타격을 받았다.
농가의 주 수입이던 생사의 미국 수출도 감소하기까지 했다.
이러다 보니 1920년 3월 도쿄 증권시장의 폭락으로 본격적으로 공황에 빠져들었으며
관동대지진은 여기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후 여차저차해서 회복하나 싶었지만,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1928년엔 금해금(金解禁)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대공황이 터졌는데 당시 일본은 정부 시스템이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정책 결정 시 모든 장관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하는 등 대공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였다. 때문에 군내에서 '무력한 정부와 싸움질만 하는 정당들을 다 갈아엎고
히로히토 덴노에게 절대권력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황도파 등..
극단주의 파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소동을 벌이자 정부는 점점 군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한술 더 떠 상당수 일본 국민들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 전쟁경제로 인한
호황을 여러 번 경험했던 만큼 이번에도 징고이즘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한다는 군대의 정신 나간
주장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1931년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워
수탈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경제 대공황은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의 정권 장악에 모두 일조를 한 셈.
중화민국은 금본위제도를 채택한 미국 등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초기에는 대공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하지만 1934년 미국이 은구입법을 실시하자 중국이
수입해와야 할 은들이 모두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은 물론, 심지어 중국의 은까지 미국으로 대량
유출되면서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촉발되었고 이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은본위제도를
포기하고 법폐개혁을 실시하면서 은구입법을 실시하고 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와
중미은협정을 체결해 미국에 많은 양의 은을 판매하여 통화 가치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 가 2차 국공내전이 터지며 중화민국은 대만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공산당에게 잃어버렸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벗어났기에 어찌저찌 대공황을 넘겼다.
중공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경제상황이 극과 극을 달렸다가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나서야 안정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도 3가지 일을 할 줄 알고 3개 국어를 하는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재였다.
그런 사람이 고작 일할 곳 하나가 없어서 노숙자처럼 하염없이 팻말을 달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대공황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상기했다시피 대공황은 세계 경제와 지역 사회를 말 그대로 박살내면서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
국민들의 삶의 질 악화, 사회 갈등 등을 유발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극단주의 정치 세력이 크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경제학적으론 자유방임주의가 쇠퇴하고 공급이 과도한 불황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고
유효 수요를 창출시키면 경기가 회복된다는 소위 케인즈주의가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이 시기를 전후해 사회주의 세력도 늘어났는데 복지국가 개념도
베버리지 보고서처럼 대공황의 영향을 받았다.
일부에선 제2차 세계 대전이 글로벌 차원에선 대공황발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도 한다.
다만 이건 팩트나 선후 관계가 약간 잘못된 게 당장 당시 세계 중심 지역이었던 유럽은 2차대전으로
초토화되어 오늘내일 하는 상황까지 갔고 중국이나 일본 등도 마찬가지였다.
즉, 대공황이 2차대전의 한 요인을 불러온 건 맞지만 그 2차대전이 경제 위기를 해결해 준 게 아니라
각국 사정에 따라 대공황을 해결하던 와중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한 지역들에서 2차대전이 터지고
다 같이 망하나 했는데 그나마 추축국 세력이 패배한 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시장 회복을 유도했기에 당시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여진을 극복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단적으로 전쟁경제는 해롭다.
7. 기타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원래 1928년 선거에 출마가 가능했지만 포기했는데 덕분에
운 좋게도 대공황을 피하고 비난도 면했다. 정치는 타이밍 다만 후대 역사가들에겐
사실상 미국의 대공황을 초래한 주범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의 전 의장 벤 버냉키는 2006년 연준 의장에 지명할 때 앨런 그린스펀이 조지 워커 부시한테
대공황 전문가로 버냉키를 추천했다고 한다. 다만 조지 워커 부시와 벤 버냉키의 연준 면접 때에는
대공황 관련 언급은 따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경기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골디락스 호황)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 인사청문회 때는 당연히 대공황 관련 내용이 나오긴 했다.
벤 버냉키는 박사 논문부터 연준 의장이 되기 전까지 평생을 세계 대공황만 연구한 학자다.
연준 의장에서 퇴임한 이후 싱크탱크 기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 취직해서도 역시 천직인
대공황만 연구를 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면 '한 학기' 동안 버냉키의 논문을 가지고 대공황을 공부하는 수준이다.
그 정도로 버냉키의 대공황 연구 논문은 많다. 세계 대공황 관련 논문의 1/3 가량을 버냉키 혼자 썼다.
금 보유고 관련 문제부터 시작해서 대공황이 어떻게 무역장벽을 촉발시켰는가에 대한 행정학 논문도 있다.
이러다보니 다수의 책에도 참고문헌을 보면 대공황 부분에는 벤 버냉키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
대침체 당시 미국 연준 의장이 벤 버냉키였기 때문에 신속하게 연준이 은행(상업은행)과 투자은행, 보험사
등의 신용경색 상황을 진압하고 양적완화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운용하여 (물론 이미 터진 대형 악재긴 하지만) 그래도 금융위기가 대공황 이상으로 악화되는 것은 그나마 막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슈퍼맨은 대공황 시기에 만들어진 캐릭터로, 무기력한 현실에 고통받던 미국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간혹 대공황임에도 미트로프를 먹을수 있다니 미국은 얼마나 부유한가를 주제로 한
유머글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미트로프도 중산층 정도는 되어야 먹을 수 있었지 극빈층과 노숙자들은
스프나 도넛 몇 점을 공짜로 배급받기 위해서 몇십분씩에서 길게는 몇 시간씩 줄을 길게 서는
수고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정말 빈곤한 경우에는 길에 굴러다니는 회전초를 뜯어 요리해 먹었다고 한다.
사실 미국의 식량 생산량은 충분했지만 남는 식량을 (무료로) 풀 경우 돈주고 사먹던 이들도
돈주머니를 닫아 버릴 것을 염려해 가격방어를 위해 식량을 태우고, 파묻고, 바다에 던져 버리는
동안 바로 옆에선 영양실조와 아사가 속출했다.
다만 대한민국의 경우 1970년대 초까지 보릿고개란 말이 일상적일 정도였고 거기에 더해서
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로 꿀꿀이죽이나 부대찌개를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장노년층 사이에서 남은 것이 전해져 내려온 이유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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