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오늘 부자 청년과 관련된 복음 말씀을 들으시고 나서 고민이 큰 분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이자 전제 조건으로 모세를 통해 건네주신 십계명에 대한 준수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계명에 대한 충실한 준수 외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소유한 부를 혼자 독식하지 말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라는 권고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들 살짝 혼동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권고라기보다는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고 오랜 기간 더 챙겨야 할 여우 같은 부인과 토끼 같은 자녀들이 있는 경우, 말씀 그대로 실천하다가는 결론은 패가망신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부를 창출하고 절약하고, 재정 관리를 잘해서 가족들을 잘 챙기셔야 마땅합니다. 자선을 베풀더라도 현실을 잘 파악한 후에 적정선에서의 자선을 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큰 뜻을 품고 삶을 대대적으로 전환하고 싶은 분들, 이제 달릴 곳을 원 없이 달리시고, 인생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혹시 나는 여유로운 재물이라든지 풍족함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오늘 복음과 나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시면 큰 오산입니다.
이 세상에 나눌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물이라는 표현은 광범위하게 적용됩니다.
비록 재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할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측은지심, 기도, 희생, 미소...베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서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부자'의 의미>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말고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힘내라며 5파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 걸... 10파운드라고 할 걸...”
우상은 내가 지배를 받는 대상이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내가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하느님의 뜻이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대로 할 수 없다면 그 재산은 나를 지배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섬기는 우상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분명 양심에서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목소리가 진리이고 그게 옳은 일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소리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이 그 자신의 것이고 그래서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섬기는 대상, 즉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옳은 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되었을 때 ‘슬픔’이 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기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이집트의 노예 살이 할 때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지배를 받아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에는 하느님의 뜻 외에 어느 것도 두지 말아야합니다.
스스로 노예가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는 ‘어떤 농구 시합’이라는 소제목으로 이런 어린이들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케빈’이라는 아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어린이 농구팀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농구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케빈이 속한 농구팀은 경기에 나가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케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케빈은 계속 슛을 연습했습니다.
한 번은 공이 골대를 스쳤습니다.
케빈은 너무나도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상대는 어린이 농구팀 중에 한 번도 저 본 적이 없는 가장 강한 팀이었습니다.
예상대로 3쿼터까지 점수는 30점차 이상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4쿼터도 거의 끝나갈 무렵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한 아이가 타임을 불러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감독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지금까지 경기해 오면서 케빈은 단 한 번도 슛을 성공시킨 적이 없어요.
이번이 마지막 경기입니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도 없으니 케빈에게 한 번만이라도 슛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동료들은 케빈에게 평소에 슛 연습하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을 잡으면 케빈에게 무조건 패스를 하였습니다.
케빈은 계속 공을 던졌지만 골대를 맞추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대팀에 빼앗겨 점수 차는 점점 벌여졌습니다.
그런데 상대팀 한 아이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채고는 자신이 몰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케빈에게 공을 패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골대 밑에 있던 상대팀 선수가 공을 잡아 다시 케빈에게 패스하였습니다.
역시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양 팀 선수들은 서로 뒤섞이어
케빈을 둥그렇게 둘러싸고는 공을 계속 케빈에게만 던져주었습니다.
경기 마칠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역시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감독님은 전광판 시간을 보았는데 시간은 40초를 남겨놓고 멈추어 있었습니다.
심판들도 이 상황을 눈치 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노력한 끝에 케빈은 생애 첫 골을 성공시켰고 모든 이들은 케빈과 함께 기뻐 뛰었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던 모든 사람 중 우울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승부욕도 있었겠지만 케빈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좋은 마음에 모두가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승부의 우상에게 억눌리지 않는 자유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에게 승부의 우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른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나라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부자’라고 말씀하시고, 그 부자들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곧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걱정되고 두렵고 우울하다면 우리는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슬픈 마음으로 돌아간 부자청년처럼 되지 말고 자유롭게 그분 뜻을 따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0,17-27: 부자 청년의 이야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율법을 잘 지켰다 해서 교만해진 젊은이가 율법의 주님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행동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이는 믿음이 없이 율법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하셨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다면 ‘선하다’라는 표현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고 그는 대답하였다.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하는 그의 대답은 진실이라기보다 교만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리고 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기도하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요즘 베스트셀러인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조건 3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지식을 훔치는 힘. 둘째, 요약하는 힘. 셋째, 추진하는 힘.
사실 일등이 아니어도 괜찮고, 꼴찌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3류로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주연이길 포기하고 조연으로 사는 인생이 3류 인생일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기보다는, 남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대신해 주기를 또 남들이 나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해 주길 바랍니다. 3류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몇 등이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3류 인생은 되지 말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측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일류의 조건을 새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은 타인의 지혜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하고, 또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둘째, 요약하는 힘은 생각을 정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알아야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삶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진하는 힘입니다.
이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나 자신은 신앙인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일류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삼류 신앙인일까요?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에서 주님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까요? 두 번째 요약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삶에서 잘 실천하고 있을까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삼류가 아닌 일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일류 신앙인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다시 여쭙습니다. 여러분은 일류 신앙인입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 일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모든 기회에는 의무가, 소유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존 데이비슨 록펠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9)
믿음의 종착역은
구원이라네.
생의 기차는
구원의 역을 향해
힘차게 달려왔고
아직 남은 길을
더 가야 하지만
저 멀리
믿음의 끝자락에서
손 흔들며 웃고 계실
구원자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가난해져야 하리.
복음말씀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