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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 정신을 차리는 것부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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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정신을 차리는 것부터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해
적극적으로는 기도하라고 하시고,
소극적으로는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며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세 가지를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방탕과 만취와 근심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방탕과 만취가 기도를 방해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근심이 기도를 방해한다는 것은 설명이 좀 필요할 것입니다.
근심한다는 것은, 우리 신자들에게는 기도할 것을 근심한다는 말이지요.
근심거리를 하느님 앞에 내놓지 않고 자기 안에서 끙끙거리는 것이요.
근심거리를 기도 거리로 만들어 하느님 앞에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을 별로 하지 않는 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세 가지 가운데 제게 문제가 되는 것은 술입니다.
그러나 술도 제가 먹되 만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기에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많이 먹지 않으니 괜찮다고 합리화하고 그래서 경계심을 품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실 술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만 제가 존경하는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은 신앙적으로 아주 열심하고 매일 말술을 드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유는 그렇게 술을 드시고도
꼭 성당에 들러 잠깐이라도 조배하고 집에 가시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성당에 들러 집에 가신다는 점 때문입니다.
술 안 마시고 성당에 매일 들르는 분들보다 더 존경스러운 것이고,
술 마시는 제 입장에서는 더욱 존경스러웠지요.
그러니 술 자체가 아니라 술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경계심 없이 술을 마시고 저처럼 기도하지 않고 자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술을 마시건 마시지 않건 관건은
오늘 마지막 말씀처럼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끄지 않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가르칩니다.
그러니 썩어빠진 정신은 버리고 정신을 차리는 것,
곧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주님 오실 날이 한 달도 안 남았고,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하려는 의지와 마음이 물러지고
기도 정신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락 말락 한다면
이제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리는 것부터 당장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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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다림의 자세’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되, 무엇보다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러지다’는 것은 ‘무디어지다,’ ‘각성하지 않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물러지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은 바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심걱정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부족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둘째> 말씀은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라”함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함이요, “깨어 기도하라”함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음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함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앞에 서 있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음입니다.
결국, ‘주님 앞’에 서 있다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자신 앞’에 서 있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마음이 물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주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전히 근심걱정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가 ‘이방인의 땅 전쟁터’ 같아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님께 의탁하면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서 있음’, 곧 ‘하느님에 대한 현전의식’이요, 주님 면전에 나서 있는 대면의식입니다.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이요, 그분의 눈길, 그분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있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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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늘 깨어 기도하여라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를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둘째,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는 깨어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만남, 하는 일’이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지금 누구와의 만남을 이루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 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살아갑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후회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유혹받으셨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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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정 강의 중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만난 장소는 ‘우물’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우물은 미래의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모세와 십보라가 만났습니다. 이사악과 레베카가 만났습니다. 야곱과 라헬이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5명이나 있었다는 것은 사마리아를 지배하던 이민족의 숫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사마리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민족이 지배했던 사마리아였지만 구세주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 15)”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고,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정오’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인이 우물가에 가는 시간은 오후 늦은 시간입니다. 여인들은 우물가에서 정담을 나누기 마련입니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의 이야기,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이야기, 시댁에서 쫓겨 왔던 새댁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우물가는 사랑방이 됩니다. 우물가에서 동네의 소문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그 시간에 우물가에 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정오는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왕으로 선포된 시간이기도 합니다. 군중 앞에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선포된 시간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오십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점점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예언자’라 부르고 나중에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여인은 이제 마을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죄인을 통해서도 구원의 등불을 밝히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사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선포를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의 도구는 죄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은총이 고백성사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의 사함을 받은 우리들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참된 예배, 참된 관계는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새로운 사도로 변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영이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느님께서 거처하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처인 우리를 끝까지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거짓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한 순간도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으로 오시는 예수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시는 예수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바꿔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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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읽고 잠시 그 말씀에 머무르고 있자면 주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절하게 부탁하는 주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 중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는 그 애절함이 더 깊이 느껴집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군가 앞에 당당하게 서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내면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거짓으로 서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당당히 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당당히 설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말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드러납니다. 특히 주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실 때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보고 깨어서 기도하기를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이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영적인 잠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잠’ 즉 눈이 가려진 상태는 바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죄를 저지르는지, 어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지를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당하게 서 있으려면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 모습을 내가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 깨어있음에서 우리의 회개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쪽으로 우리의 방향은 바뀔 것입니다.
신호대기
신호등에 사람들이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들이 신호대기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키지 않으면 사고 나니까.
모두가 다 지키는 ‘사회통념’이니까
어쩌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조금만 기다리면 건널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잠시 후면 바뀐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여유 있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호등이 바뀐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신호등이 꺼지고 하늘나라 신호등이 켜질 것을.
우리는 그 하늘나라 신호등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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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150년 뒤에도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의학, 과학의 발달로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불가능함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마치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억울하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도나도 서로 먼저 받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 아이가 받는 선물과 마지막 아이가 받는 선물이 똑같은데도 말이지요. 선물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빨리 되도록 먼저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뒤에 있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계속 보았고, 그들과의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원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참 기쁨을 누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봐야 했습니다.
결국 죽음은 하나의 ‘문’이 아닐까요? 갓난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가 ‘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더 의미가 있는 또 더 큰 기쁨이 있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세상으로 치면 12월 31일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지난해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맞이할지를 궁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시기를 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마지막 날이 덫처럼 갑자기 닥치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열심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기쁨을 떠올리면서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나날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줄 압니다. 주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면서 전례력으로 새해인 대림 시기를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죽음 앞에서는 온갖 상상이 다 힘을 잃어버린다(사목헌장 1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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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의 삶
-“늘 깨어 기도하여라”-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새벽독서기도시 시편136장 26절까지 매구절마다 반복되는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후렴이 참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참 좋은 주님을 닮아갈수록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의 삶입니다. 오늘 저녁기도부터는 대망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전례주기이지만 늘 새롭습니다.
단조로운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날로 내적으로 깊어지는 반복입니다. 초겨울을 맞이한 배밭의 배나무들, 초겨울 새벽 밤하늘, 늘 반복하여 봐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배밭을 거니는 느낌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정주의 겨울 배나무들” 시는 흡사 대림을 맞이한, 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싶습니다. 사실 마음 깊이에서는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들입니다.
-“열매들
나뭇잎들
다 떠나 보내고
본질(本質)의 깊이로 남아
동안거(冬安居)에
들어 간
늘 깨어 기도하는
정주(定住)의 겨울 배나무들
희망과 기쁨
인고(忍苦)와 침묵의
겨울
긴 기다림후에
꽃피고
푸른잎
파어나는
부활(復活)의 봄, 생명(生命)의 봄이다”-2023.11.27.
궁극의 영적승리를 상징하는 부활의 봄, 생명의 봄을 기다리며 희망과 기쁨중에 늘 깨어 기도하는 겨울 정주의 배나무들 같습니다. 언젠가의 궁극적 승리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11.29일 입적한 불교계의 전 총무원장이었던 자승 스님의 죽음을 앞두고 썼다는 열반송이 생각납니다.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가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 구나”
이런 결론의 삶이라면 웬지 허망, 허탈합니다. 다 사라져도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은 영원하신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영원한 삶에 샘솟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언젠가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궁극의 승리를 앞당겨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침묵의 겨울 정주의 배나무들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언젠가 써놓은 주님과 함께 할 때의 기쁨을 노래한 시가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더운
날은
더운 날대로
추운
날은
추운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2023.10.21
오늘 말씀도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는 어제 내용의 반복이지만 천사가 다니엘에게 환시의 뜻을 풀어주는 내용으로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느님 앞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막강한 세력을 구가하던 바빌론 제국, 메디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제국, 로마제국도 사라지고 마침내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승리, 그분 나라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법정이 열리고 그는 통치권을 빼앗겨, 완전히 패망하고 멸망하리라. 나라와 통치권과, 온 천하 나라들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고,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고 복종하리라.”
이런 궁극의 승리에 희망을 두고 날마다 이런 영적승리의 삶을 앞당겨 사는 우리들입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 마지막 대목이 대림을 앞둔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바로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요 우리들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미 이 나라를 앞당겨 하루하루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승리의 삶의 비결을, 대림시기를 앞둔 우리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대림시기를 앞둔 우리 모두에게 주님 친히 주시는 다음 주님의 충고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지지 않게 하여라. 그날을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 닥칠 것이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었을 때 방황이요 혼란이요 죄와 병들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불행이 오늘이 되지 않도록, 유비무환,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스스로 조심하여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할 때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의 그날, 죽음의 날, 종말의 날이 와도 결코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대림시기 동안 늘 우리 모두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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